별빛 노트
서울 외곽, 회색 아파트가 성냥갑처럼 빼곡한 동네에 민서라는 열네 살 소녀가 살았다. 민서의 하루는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었지만,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혼자 남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텅 빈 공허함이 밀려왔다.
민서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스마트폰 속 세상이었다.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나타나는 친구들의 SNS는 눈부신 빛의 파노라마였다. 주말에 다녀온 예쁜 카페의 디저트 사진, 댄스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친구의 동영상, 새로 산 옷을 입고 완벽한 포즈를 취한 ‘인생샷’까지. 그 반짝이는 조각들 앞에서 민서는 자신의 삶이 마치 흑백사진처럼 느껴졌다.
'다들 저만치 앞서가는 것 같아. 나만 이 지루한 길 위에 멈춰 서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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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의 방 한구석, 책장 가장 높은 칸에는 낡은 노트 한 권이 잊힌 채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몇 년 전 생일에 선물해 준, 표지에 은하수처럼 은빛 별이 촘촘히 박힌 노트였다. 당시에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민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민서야, 이 노트엔 네 마음의 별빛을 담아보렴. 살다 보면 길을 잃은 것처럼 캄캄한 날이 있단다. 그럴 때 이 작은 빛들이 너를 이끌어 줄 게다.”
민서는 그 말을 그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쯤으로 여겼다.
'별빛이라니, 그게 뭔데?'
쑥스러움에 노트를 받아 들었지만,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채 책장 깊숙이 밀어 넣어 두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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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가을, 민서의 학교는 문화제 준비로 들떠 있었다. 반마다 부스를 꾸미고, 장기자랑 무대를 기획하는, 1년 중 가장 활기 넘치는 시간이었다. 민서네 반의 주제는 ‘추억의 시간여행’으로, 각자 집에서 오래된 물건을 가져와 전시하기로 했다. 민서는 시큰둥했다. 자기 삶에는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거듭된 부탁에 마지못해 방을 뒤지다가, 책장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별빛 노트를 발견했다. 민서는 잠시 망설이다, 달리 가져갈 것도 없다는 생각에 노트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문화제 날, 학교는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찼다. 민서네 반 부스도 제법 그럴듯했다. 친구들이 가져온 오래된 게임기, 빛바랜 만화책, 부모님의 앳된 얼굴이 담긴 흑백 사진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전시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서로의 물건을 구경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거 우리 아빠가 쓰던 필름카메라래. 대박 신기하지?”
“와, 이 만화책 나 어릴 때 진짜 좋아했는데!”
민서는 어색하게 서성이다 가방에서 별빛 노트를 꺼냈다. 그때,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 수지가 다가와 노트를 휙 낚아챘다.
“민서야, 이건 뭐야? 웬 노트? 으음, 좀 촌스럽다!”
수지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민서의 귓가에 가시처럼 박혔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민서는 수지의 손에서 노트를 빼앗듯 돌려받았다.
“그냥… 할머니가 주신 거야.”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민서는 노트를 다시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 마치 도망치듯 부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홀로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역시나 SNS는 축제의 열기로 폭발하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는 친구들, 예쁘게 꾸민 부스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무리들. ‘좋아요’ 숫자가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민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왜 난 저렇게 반짝이지 못할까? 내 삶엔 정말 아무것도 없어.'
그때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민서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붉게 물든 하늘 한편에 저녁별 하나가 수줍게 떠 있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 희미했지만, 그 어떤 인공의 빛보다 따뜻하고 진실하게 느껴졌다. 민서는 홀린 듯 가방에서 별빛 노트를 다시 꺼내 펼쳐보았다. 텅 빈 페이지들 사이, 노트를 선물하던 날 할머니가 적어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민서야, 네 삶의 모든 순간은 저마다의 빛을 가진 별빛이란다. 그 빛을 잊지 마라. 매일 네가 사랑하는 일을 정성껏 반복하면, 그것은 흩어진 시간을 모아 세상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너만의 의례가 된단다.>
민서는 그 말이 낯설었다.
‘의례? 세상의 처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민서는 조용히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사랑하는 일…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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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민서는 난생처음으로 자기 방 책상에 스스로 앉았다. 별빛 노트를 펼치고, 서랍 속에서 잠자던 펜을 꺼내 들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지만, 오늘 보았던 그 작은 별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첫 문장을 적었다.
<오늘 저녁, 하늘에서 별 하나를 봤다. 작았지만, 왠지 계속 쳐다보게 됐다.>
단 한 줄이었지만, 무언가 마음속 응어리가 살짝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민서는 늘 하던 대로 스마트폰을 손에 쥐는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맞은편 동의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민서는 노트에 적었다.
<아침 햇살이 따뜻했다. 창문에 비친 빛이 꼭 보석 같았다.>
그날부터 민서는 사소한 순간들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자신의 하루 속에서 작은 별빛들을 찾아 나섰다.
<점심 급식으로 나온 떡볶이가 생각보다 맛있었다. 떡이 아주 말랑했다.>
<버스를 탔는데, 창가 자리에 햇살이 딱 들어왔다. 5분 동안 아주 따뜻했다.>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에서 구수한 냄새가 났다. 두부를 많이 넣어주셨다.>
<동생이 내 숙제를 방해해서 짜증 났는데, 소파에서 잠든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속눈썹이 참 길다.>
처음엔 어색하고 유치하게 느껴졌던 일들이, 노트를 한 장 한 장 채워갈수록 점점 소중하게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노트가 두꺼워질수록 SNS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었다. 민서는 문득 깨달았다.
'내 삶에도 반짝이는 순간들이 이렇게나 많았어.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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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민서는 숙제를 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세계의 신화와 축제’라는 낡은 책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책을 펼치자,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지금처럼 앞으로만 흘러가는 직선으로 보지 않고, 주기적으로 열리는 축제를 통해 태초의 신성한 시간으로 되돌아가 세상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민서는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할머니가 노트에 적어준 ‘의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내가 매일 밤 노트에 별빛을 기록하는 것도… 어쩌면 나만의 작은 축제나 의례 같은 걸까?'
그날 이후, 민서는 별빛 노트를 쓰는 일을 더욱 소중한 의례처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민서에게 글쓰기 시간은 자신의 평범한 하루를 의미 있는 순간으로 바꾸고, 스스로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신성한 마법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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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고, 학교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종업식을 준비했다. 마지막 수업으로, 각 반이 한 해를 돌아보는 발표 시간을 갖기로 했다. 민서네 반의 주제는 ‘우리의 별빛 순간들’로, 모두가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여행 사진이나 상장을 준비하며 들떠 있었지만, 민서는 망설였다.
'고작 떡볶이가 맛있었다는 이야기가 뭐 특별하다고…'
하지만 빼곡하게 채워진 별빛 노트를 넘겨보며, 민서는 조용히 용기를 냈다.
발표 날, 민서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쥔 채 교탁 앞에 섰다.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올해 이 별빛 노트를 썼어요. 처음엔 제 삶이 너무 따분하고, 친구들의 SNS를 보면서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몇몇 아이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노트에 아주 작은 순간들을 적기 시작하면서… 제 삶도 충분히 반짝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민서는 노트를 펼쳐 몇 구절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버스를 탔는데, 창가 자리에 햇살이 딱 들어왔다. 5분 동안 아주 따뜻했다.’… ‘오늘 저녁, 하늘에서 별 하나를 봤다. 작았지만, 왠지 계속 쳐다보게 됐다.’… 이런 순간들이요. 이런 것들이 저의 별빛이었어요.”
교실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은 모두 민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가장 먼저 박수를 친 것은 문화제 때 노트를 촌스럽다고 말했던 수지였다. 수업이 끝나고, 수지가 민서에게 다가와 머뭇거리며 말했다.
“민서야, 아까 발표 정말 멋있었어. 나는 맨날 멋진 곳에 가서 사진 찍을 생각만 했지, 버스 창가에 비친 햇살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나도, 나만의 별빛을 찾아보고 싶어졌어.”
그날, 민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작은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민서의 이야기는 친구들의 마음에도 작은 별 하나를 조용히 켠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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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식이 끝나고, 민서는 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는 어느새 두툼해진 민서의 노트를 넘겨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으셨다.
“우리 민서, 이제 알았구나. 네 삶은 이미 별빛으로 가득하다는 걸.”
민서는 고개 를 끄덕이며 물었다. “할머니, 그런데 이 노트엔 정말로 무슨 마법이라도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웃으며 민서의 손을 잡아주셨다.
“마법은 노트에 있는 게 아니란다. 바로 네 마음에 있는 거지. 네가 너의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정성껏 되새길 때, 너의 평범한 시간은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되는 거란다.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커다란 축제를 열어 세상을 새롭게 했던 것처럼, 너는 이 작은 노트로 매일 너의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온 게야.”
민서는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별빛 노트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민서가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던 속된 시간을, 스스로의 의지로 반짝이는 신성한 시간으로 바꾸는 통로이자 의식이었다. 그녀는 매일 노트를 채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이 영원하고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오늘도 별이 뜬다
그 후로 민서는 변했다. 여전히 스마트폰을 보고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지만, 이제는 그 속의 화려한 삶에 휘둘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삶 속에서 단단한 별빛들을 부지런히 찾아냈다. 아침에 동생과 나누는 장난, 친구와 주고받는 시시콜콜한 메시지, 밤이 되면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치는 시간. 그 모든 순간이 민서만의 신성한 공간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는 학교에서도 일어났다. 민서의 발표에 감동받은 몇몇 친구들이 저마다의 ‘별빛 기록’을 시작한 것이다. 어떤 아이는 예쁜 일기장을 샀고, 어떤 아이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으며, 또 어떤 아이는 핸드폰 메모장에 짧은 글을 남겼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서로의 별빛을 나누며 웃었고, 잿빛 콘크리트 같던 교실은 이전보다 훨씬 따뜻하고 다정한 온기로 채워졌다.
민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밤이 되자 책상에 앉아 별빛 노트를 펼친다. 그리고 창밖을 본다. 아파트 창문 너머, 도시의 밤하늘에도 별은 뜨문뜨문 떠 있다. 민서는 노트의 빈 페이지에 오늘의 별빛을 적으며 생각한다.
‘내 삶은 결코 따분하지 않아. 매일, 매 순간이 새롭게 반짝이고 있어.’
하늘의 별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민서의 책상 위, 낡은 노트의 마지막 줄에서도 작은 별 하나가 반짝, 하고 세상을 향해 제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