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서와 투명 벽지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 한가운데 준서네 가족이 살았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 준서에게는 요즘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새로 출시된 장난감, ‘스페이스 드래곤 X’ 때문이었죠.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스페이스 드래곤 X가 번쩍이는 광선검을 휘두르며 우주의 악당들을 물리쳤습니다. 은색 크롬으로 도금된 몸체와 이글거리는 LED 눈은 준서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어요.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민준이는 벌써 생일 선물로 스페이스 드래곤 X를 가졌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민준이가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장난감을 설명할 때면, 준서는 괜히 심술이 나서 멀찍이 서 있곤 했습니다.
준서는 지난 몇 달간 받은 용돈을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았지만, 스페이스 드래곤 X의 가격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었습니다. 엄마에게 졸라보기도 했지만, 엄마는 “준서야, 곧 이사도 가야 하고, 동생 유치원비도 내야 해서 지금은 조금 어려워. 다음 생일 선물로 꼭 사줄게” 하고 미안한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준서의 생일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죠.
어느 토요일 오후, 준서는 엄마와 함께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서 있는 스페이스 드래곤 X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어요.
‘가지고 싶다. 너무너무 가지고 싶다.’
그때 준서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습니다. 장난감 상자에 매달린 도난 방지 태그가 헐겁게 달려 있는 것이 보였어요. ‘힘껏 잡아당기면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무도 안 볼 때 가방에 쏙 넣는 거야.’ 날카로운 창 같은 생각이 준서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준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쳤어요.
‘아니야, 그건 도둑질이잖아.’
준서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바로 그때, 그럴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엄마한테 달려가서 저게 마지막 하나 남은 거라고, 지금 사지 않으면 영영 못 구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 엄마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려는, 끈끈한 거미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람을 속이는 교활한 그물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습니다. 준서는 어느 쪽이 더 나쁜 생각인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습니다.
준서가 상자 쪽으로 슬쩍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꼬마야, 그거 만지면 안 돼.”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준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인 듯한 젊은 형이 무심한 표정으로 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준서를 혼내거나 다그치지 않았어요. 그저 ‘또 시작이네’ 하는 듯한 지친 눈으로 한번 쓱 쳐다보고는, 다른 곳으로 흩어진 장난감을 정리하러 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준서는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렸습니다. 도둑질을 하려다 들킨 것보다, 그 형의 실망과 무관심이 섞인 눈빛이 백 배는 더 아프고 창피하게 느껴졌습니다. 준서는 그대로 뒤돌아 엄마를 찾지도 않고 마트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준서의 엄마도 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준서는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죠. 그런 준서의 마음을 알아챈 엄마가 밤늦게 조용히 준서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엄마는 준서를 혼내지 않았어요. 대신 준서 옆에 가만히 앉아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준서야, 엄마가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배운 재미있는 놀이 하나 가르쳐줄까? ‘투명 벽지 놀이’라고 하는 건데.”
준서는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누군가가 미워지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마음속으로 커다란 투명 벽지를 꺼내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는 벽에다가 그 투명 벽지를 정성껏 붙이는 거지. 신기하게도 그 벽지를 통해서 보면, 그 사람의 방이 보이고, 그 사람의 세상이 보인단다.”
엄마의 목소리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따뜻했습니다.
“우리 한번 해볼까? 오늘 마트에서 만났던 그 알바 형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형이랑 우리 준서 사이에 투명 벽지를 붙여보는 거야. 자, 벽지를 통해 뭐가 보이니?”
준서는 마지못해 눈을 감고 아까 그 형을 떠올렸습니다. 처음에는 창피한 마음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의 따뜻한 손길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 형, 되게 피곤해 보였어요.”
“그렇구나. 또 뭐가 보일까? 벽지를 통해 그 형의 방을 한번 들여다볼까?”
준서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음… 운동화가 좀 낡았어요. 그리고 스마트폰 액정도 깨져 있었던 것 같아요. 방에는… 아마 대학교 전공 책이 잔뜩 쌓여 있을 거예요. 시험공부 하나 봐요.”
“그렇구나. 그럼 그 형은 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까?”
“…학비나 용돈을 벌려고요. 하루 종일 서 있으면 다리도 아플 거고… 떼쓰는 아이들, 화내는 어른들도 상대해야 해서 힘들 거예요.”
준서는 상상 속에서 그 형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늦은 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힘없이 버스에 오르는 모습,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는 모습, 그리고 좁은 방에 돌아와 책상에 엎드리는 모습까지 떠올랐습니다. 그 형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습니다.
거기까지 상상하자, 준서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 형은 그저 자신을 귀찮아하는 못된 알바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처럼 꿈이 있고, 자신보다 훨씬 더 힘든 하루를 보내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형 앞에서 자신이 장난감 하나 때문에 못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힘든 하루 끝에, 어떤 아이가 물건을 훔치려는 걸 봤다면 그 형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의 질문에 준서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화가 났을까? 아니, 화보다 더 힘이 쭉 빠졌을 거야. 슬펐을지도 몰라.’
준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엄마는 이번엔 다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럼 이번엔 민준이 방에다 투명 벽지를 붙여볼까? 준서가 보기엔 민준이는 어때?”
“민준이는 좋겠어요. 갖고 싶은 거 다 가지고… 스페이스 드래곤도 있고.”
준서의 목소리에 부러움이 묻어났습니다.
“벽지를 통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민준이 방에 또 뭐가 보이니?”
준서는 민준이네 집에 놀러 갔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음… 장난감은 많은데, 방이 너무 조용해요. 민준이 부모님은 항상 바쁘셔서 밤늦게 오세요. 저녁도 혼자 먹을 때가 많대요.”
“민준이는 왜 그렇게 새 장난감을 친구들에게 자랑할까?”
“…친구가 자기 집에 많이 놀러 왔으면 해서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문득, 민준이가 새 장난감이 생길 때마다 단체 채팅방에 제일 먼저 사진을 찍어 올리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건 자랑이 아니라, ‘얘들아, 나랑 같이 놀자’ 하고 보내는 초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준서는 깨달았습니다. 늘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민준이도 사실은 외로웠다는 것을요. 스페이스 드래곤은 민준이에게 우주 악당을 물리치는 용사가 아니라, 외로움을 물리쳐 줄 친구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준서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딱 한 군데만 더 붙여보자. 우리 준서 마음의 벽에. 거울 앞에 서서, 네 마음속에 투명 벽지를 붙이고 널 들여다보는 거야. 뭐가 보이니?”
준서는 가만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스페이스 드래곤을 너무나 갖고 싶어 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 아빠를 무척 사랑하고, 나쁜 짓을 하려 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창과 그물 같은 못된 생각은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날, 준서는 돼지 저금통을 깼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스페이스 드래곤 X 대신, 시원한 에너지 드링크 한 병과 작은 초코바 하나를 샀습니다. 그리고 서툰 글씨로 편지를 썼습니다.
‘마트 형에게. 어제 죄송했어요. 그리고 힘내세요. -준서가-‘
준서는 엄마와 함께 다시 마트를 찾았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어제처럼 무서운 두근거림은 아니었습니다. 준서는 장난감 코너에서 어제 그 형을 찾아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준비한 음료수와 편지를 내밀었습니다.
“저… 어제… 죄송했어요.”
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서를 보다가, 편지를 읽고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어제의 무심하던 눈빛은 어디 가고, 놀라움과 따스함이 섞인 눈으로 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준서의 눈높이에 맞추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습니다. 그것은 어제의 지친 웃음이 아닌, 정말 환하고 따뜻한 웃음이었습니다.
“고맙다, 꼬마야. 어젠 형이 너무 피곤해서 퉁명스럽게 말해서 미안해. 마음 써줘서 정말 고마워. 사실 그 스페이스 드래곤, 진짜 멋있긴 하지?”
형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준서의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스페이스 드래곤 홍보용으로 나왔던 작은 열쇠고리였습니다. 가게에서는 팔지도 않는 작은 물건이었죠.
준서는 그 작은 열쇠고리를 소중하게 받아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어제 그렇게 갖고 싶었던 진짜 스페이스 드래곤 X보다 훨씬 더 값지고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열쇠고리 너머로,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형의 진짜 마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준서는 종종 투명 벽지 놀이를 했습니다. 사사건건 다투는 동생과 나 사이에, 무뚝뚝한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나 사이에, 피곤에 지쳐 보이는 아빠와 나 사이에.
뾰족한 창처럼 남에게 상처 주는 생각이나, 끈적한 그물처럼 남을 속이는 생각은 이제 준서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투명 벽지 너머의 세상을 알게 된 이상, 누군가를 해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더 이상 불만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찬 곳이 아니었습니다.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를 품은 수많은 마음들이 모여 사는 동네처럼 보였습니다. 준서는 이제 그 이야기들을 읽어내는 가장 멋진 탐정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준서의 손에 들린 작은 열쇠고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