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로 기쁨을 짜는 소녀

by 이호창

베틀로 기쁨을 짜는 소녀


아주 먼 옛날, 푸른 강이 굽이치고 떡갈나무 숲이 노래하던 땅 다치아에 엘라라라는 소녀가 살았어요. 엘라라의 손은 요술쟁이의 손이었답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짜는 재주를 가졌지요. 엘라라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무늬는 살아있는 듯 생생했어요. 졸졸 흐르는 시냇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방울까지도요.


하지만 사람들의 칭찬이 커져갈수록, 엘라라의 작은 마음속에는 무거운 돌멩이가 하나씩 늘어만 갔어요. 엘라라는 베틀 앞에 앉아 있을 때 한 번도 웃지 않았어요. 어깨는 잔뜩 굳어 있었고, 반짝이는 눈은 늘 비어있는 베틀의 끝,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옷감의 마지막 모습을 향해 있었지요.


‘이 옷감을 다 짜면, 모두가 나를 최고라고 불러주겠지?’


‘시장에 내다 팔면, 반짝이는 은화를 얼마나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다음 축제에서는 꼭 내가 일등을 해야 해.’


엘라라의 마음은 온통 ‘그다음’에 가 있었어요. 베틀이 ‘쿵, 쿵’ 노래하는 소리도, 보드라운 양털이 손가락을 간질이는 느낌도, 알록달록한 색실들이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도 엘라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빨리 끝내야 할 일, 칭찬을 받기 위한 힘든 과정일 뿐이었죠. 훌륭한 옷감은 태어났지만, 그 옷감을 만드는 엘라라의 마음은 매일매일 조금씩 굶주려 갔어요.


그러던 어느 해, 마을에서는 가장 큰 축제가 열리게 되었어요. 축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짠 사람에게는 ‘태양의 햇살을 담은 브로치’를 상으로 준다는 소문이 퍼졌지요. 그건 그냥 브로치가 아니었어요. 새벽의 첫 햇살 한 조각을 녹여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보물이었답니다.


그날부터 엘라라는 잠도 자지 않고 베틀에 매달렸어요.


‘이번에야말로 모두를 놀라게 할 거야.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옷감을 만들 테다!’


엘라라의 머릿속은 온통 브로치 생각뿐이었어요. 친구들이 함께 놀자고 불러도 고개를 저었고, 엄마가 가져다주시는 따뜻한 수프도 식어버리기 일쑤였죠.


손은 기계처럼 빨라졌지만, 이상하게도 실은 자꾸 엉키고 끊어졌어요.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손끝은 무뎌졌고, 옷감의 무늬는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 딱딱해 보였습니다. 엘라라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실을 나르던 북(shuttle 왔다 갔다 실을 옮기는 도구)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어요.


“이까짓 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눈앞의 옷감은 마치 회색빛 실로 엮은 감옥처럼 보일 뿐이었죠. 축제는 다가오는데, 엘라라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어요.


축제를 하루 앞둔 캄캄한 밤이었어요. 결국 실이 또 ‘탁!’ 하고 끊어지자, 엘라라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지쳐버린 엘라라는 베틀에 기댄 채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답니다. 눈물 자국이 뺨 위에서 차갑게 식어갈 때였어요.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을 타고, 아주 작은 손님이 찾아왔어요. 날개가 꼭 달빛을 머금은 비단결 같은 ‘달빛누에나방’이었어요. 나방은 사뿐히 날아와 엘라라의 반쯤 짜인 옷감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곤 킁킁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엘라라의 눈물 자국이 묻은 실 한 오라기를 더듬이로 톡 건드렸어요.


엘라라가 잠결에 손을 휘저어 나방을 쫓으려 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나방이 건드린 그 실이 스르르 풀리더니, 별빛처럼 반짝이며 공중으로 떠올랐어요. 달빛누에나방은 그 빛나는 실의 한쪽 끝을 물고는, 어서 따라오라는 듯 엘라라의 주위를 빙빙 맴돌았죠.


엘라라는 꿈을 꾸는 듯 몽롱한 기분으로 나방을 따라 일어섰어요. 그러자 몸이 솜털처럼 가벼워지며, 자기가 짜던 옷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눈을 뜨자, 엘라라는 자신이 짜던 숲속 무늬 한가운데에 서 있었어요. 발밑에는 초록색 양털 실로 짠 부드러운 이끼가 폭신하게 깔려 있었고, 머리 위로는 갈색과 금색 실로 엮인 나뭇가지들이 아치를 이루고 있었죠. 파란색 비단실로 만든 시냇물에서는 정말로 졸졸 물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와….”


엘라라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어요. 늘 베틀 위에서 딱딱한 무늬로만 보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고 살아있는 세상이었다니! 달빛누에나방은 엘라라의 손을 이끌고 숲속을 날았어요. 엘라라는 처음으로 손끝이 아닌 온몸으로 자신의 작품을 느꼈어요. 노란 실로 수놓은 민들레 꽃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붉은 실로 짠 산딸기는 금방이라도 따서 입에 넣을 수 있을 것처럼 탐스러웠죠.


그때, 나방이 한 곳을 가리켰어요. 엘라라가 아주 조급하고 화가 난 마음으로 짰던 숲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곳의 실들은 빛을 잃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어요. 아름다운 꽃도, 노래하는 새도 없이 삭막하기만 했죠. 하지만 엘라라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짰던 시냇가 주변은 달랐어요. 실 하나하나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 빛나는 실들 사이사이에서 아주 작은 빛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답니다!


달빛누에나방은 빛의 꽃 한 송이에 내려앉아 날갯짓을 했어요. 그러자 꽃에서 피어난 향기가 엘라라의 마음속으로 스며들며, 무겁던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제야 엘라라는 깨달았어요.


‘아, 내가 기쁜 마음으로 실을 짤 땐, 옷감 속에서 이렇게 예쁜 꽃이 피어나는구나. 하지만 내가 화를 내고 조급해하면, 옷감도 나처럼 아프고 힘들었구나.’


나방은 엘라라를 텅 빈 공터로 데려갔어요. 그리고는 아무 실도 없는 허공에 대고 더듬이로 베틀을 짜는 시늉을 했죠. 어서 너도 해보라는 듯이요. 엘라라는 조심스럽게 허공에 손을 뻗어 실을 잣는 흉내를 냈어요. 이번에는 상을 타겠다는 생각도, 남에게 칭찬받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이 아름다운 숲속에 어울리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엘라라의 손가락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마음속에서 즐거운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손끝에서 빛나는 오색실이 흘러나와 스스로 엮이기 시작하더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의 꽃 한 송이를 피워냈어요. 그 꽃은 엘라라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그 어떤 무늬보다도 환하고 따뜻한 빛을 내뿜고 있었죠. 엘라라는 활짝 웃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슴 벅찬 기쁨이었어요.


“아침이다, 엘라라! 어서 일어나렴!”


엄마의 목소리에 엘라라는 눈을 떴어요.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고, 엘라라는 여전히 자신의 베틀 앞에 엎드려 있었죠. 꿈이었을까요? 하지만 엘라라의 옷감 위, 어젯밤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자리에, 달빛처럼 반짝이는 작은 나방의 인분(가루) 한 점이 남아 있었어요.


엘라라는 자신의 옷감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밤새 딱딱하고 생명력 없이 굳어 있던 무늬들이 보였죠. 엘라라는 망설이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 부분의 실을 풀기 시작했어요.


방에 들어온 엄마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얘야, 지금 뭘 하는 거니! 축제가 오늘인데, 다 된 옷감을 풀면 어떡하니!”


엄마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엘라라는 그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며 환하게 웃었어요. 예전의 그늘진 얼굴이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엄마. 시든 꽃을 뽑아내고, 새로 예쁜 꽃을 심으려는 거예요.”


엘라라의 맑은 눈빛과 평온한 미소에,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화를 거두었어요. 딸의 손끝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베를 짜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답니다.


엘라라는 다시 베틀 앞에 앉았어요. ‘쿵, 쿵’ 베틀의 소리가 이제는 즐거운 음악처럼 들렸어요. 엘라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살짝살짝 흔들었어요. 손가락은 마치 나비처럼 실 사이를 날아다녔죠. 더 이상 ‘태양의 브로치’는 생각나지 않았어요. 오직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색의 조화와 즐거운 리듬만이 가득했답니다.


축제 시간이 되었을 때, 엘라라의 옷감은 겨우 완성되었어요. 예전처럼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는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신기한 힘이 있었어요. 마치 옷감에서 즐거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죠.


사람들은 모두 엘라라의 옷감을 보며 감탄했어요.


“어머, 이 무늬를 보고 있으니 그냥 기분이 좋아지네.”


“꼭 따스한 햇살 아래 앉아 있는 것 같아.”


그해 축제에서 ‘태양의 브로치’는 평생 낡은 옷을 기우며 살아온 어떤 할머니께 돌아갔어요. 그 할머니께서 정성 가득한 손길로 짜신, 투박한 작은 어깨덮개가 모두의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감싸 주었기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이 할머니의 이름을 외치자, 엘라라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어요.. 그녀는 할머니의 어깨덮개에 다가가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만져보았지요. 그 안에는 수많은 날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다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요.


하지만 엘라라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어요. 엘라라는 자신의 옷감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어요. 그 안에는 어젯밤 꿈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빛의 꽃들이 가득 피어있음을, 이제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엘라라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이미 얻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은 반짝이는 브로치가 아니라, 베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실과 함께 노래하며, 자신의 손으로 기쁨을 피워내는 즐거움이었답니다.


그날 이후, 다치아 마을 사람들은 엘라라를 ‘기쁨을 짜는 소녀’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엘라라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칭찬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않았답니다. 매일매일 베틀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그 모든 순간이, 엘라라에게는 가장 눈부신 선물이자 축제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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