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프로노이아 - 보이지 않는 질서의 손길

by 이호창

제11장: 섭리 (Pronoia) - 보이지 않는 질서의 손길


1절: 우주는 이성적인가, 무작위적인가 - 스토아의 낙관론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밤하늘을 수놓은 저 별들의 운행과 우리 삶에 닥쳐오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 그 이면에는 어떤 의미나 목적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맹목적인 우연이 빚어낸 무의미한 유희에 불과한가.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 거대한 제국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헬레니즘 시대의 지성인들은 크게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다. 한쪽에는 이 우주가 원자들의 우연한 충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라고 본 에피쿠로스학파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우주가 신성한 이성에 의해 조화롭게 운행되는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본 스토아 학파가 있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위치를 찾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스토아 철학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맞서 싸웠던 에피쿠로스학파의 세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피쿠로스는 이 세계가 무한한 공간 속을 영원히 낙하하는 무한한 수의 원자(atom)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 원자들은 때때로 예측 불가능하게 살짝 경로를 이탈하는데(clinamen, 클리나멘), 바로 이 우연한 ‘빗나감’ 때문에 서로 충돌하고 얽혀서 별과 행성, 그리고 우리 자신과 같은 복잡한 존재들이 만들어진다. 이 세계관에서 신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은 인간 세상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저 멀리서 자신들의 완벽한 평온을 즐기는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이 우주에는 어떠한 신적인 계획이나 목적, 운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거대한 우주적 당구대 위에서 벌어지는 원자들의 우연한 게임과 같다. 이러한 세계관은 당시 사람들을 옭아매던 미신적인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강력한 치료제였다. 즉, 변덕스러운 신들의 분노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사후 세계의 심판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두려움, 특히 신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동요가 없는 평온한 상태(ataraxia, 아타락시아) 속에서 고통을 최소화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우연의 우주’에 맞서, 스토아 학파는 ‘이성의 우주’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이 세계가 맹목적인 원자들의 춤이 아니라, 신적인 ‘섭리(pronoia, 프로노이아)’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려진다고 믿었다. ‘프로노이아’는 ‘미리(pro-)’와 ‘생각하다(noia)’는 의미의 그리스어가 합쳐진 말로, 문자 그대로는 ‘미리 생각함’ 또는 ‘선견(先見)’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에서 이 단어는 훨씬 더 깊고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주가 단순히 맹목적인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전체의 조화를 위해 가장 이성적이고 선한 방식으로 모든 사건을 배치하고 인도하는, 살아있는 신성한 지성(知性)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 신성한 지성이 바로 우리가 앞서 탐구했던 로고스(Logos)다. 스토아 철학에서 섭리(프로노이아)는 로고스가 우주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활동 방식이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인간 세상 바깥에서 영원한 평온을 즐기는 방관자라면, 스토아의 신(로고스)은 이 우주와 분리될 수 없는 내재적인 존재다. 그는 우주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따뜻하고 이성적인 숨결, 즉 프네우마(pneuma)이며, 우주는 그의 살아있는 몸이다. 따라서 섭리는 외부의 건축가가 자신이 만든 건물에 간섭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몸의 생명력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을 이끌며, 모든 기관의 조화를 유지하려는 내재적인 지성과 같다.


이 섭리는 우리 각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개인적인 후원자가 아니다. 섭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우주라는 거대한 유기체 ‘전체’의 안녕과 완벽함이다. 이는 마치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몸 전체를 살리기 위해, 때로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감행하여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그 도려내지는 부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끔찍하고 부당한 고통이지만, 몸 전체의 건강이라는 더 큰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필요하고도 선한 행위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의 삶에 닥치는 질병, 가난, 사별과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우주 전체의 조화와 선(善)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나의 유한한 시야를 넘어,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선함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논증은 오늘날 ‘설계 논증’이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우리 주변의 자연을 보라고 말한다. 작은 씨앗 하나가 어떻게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는지, 공작의 깃털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눈이 얼마나 완벽하게 ‘보기’라는 목적에 맞게 설계되었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질서가, 원자들의 우연한 충돌이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생겨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잘 만들어진 배가 반드시 배를 만든 장인의 존재를 암시하듯이, 이토록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우주는 반드시 그것을 설계하고 만든 위대한 이성적 창조자, 즉 로고스(Logos)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스토아 철학 특유의 ‘우주적 낙관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낙관론은 ‘나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의 순진한 희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스토아의 낙관론은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善)하다’는 더 깊고 엄격한 믿음이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 끔찍한 비극이나 부조리처럼 보이는 사건조차도, 우주라는 거대한 유기체 전체의 건강과 조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수 있다는 통찰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발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만약 발에 이성이 있다면, 진흙탕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을 끔찍한 불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발이 자신이 단순히 발이 아니라, 전체 몸의 일부로서 군인의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는 더 큰 목적을 이해한다면, 기꺼이 진흙탕 속으로 발을 내디딜 것이다. 왜냐하면 발이 더러워지는 것은, 몸 전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작은 대가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개인이 겪는 고통과 불행은 바로 이 진흙탕에 빠진 발과 같다. 우리의 유한한 시야에서는 그것이 부당하고 고통스럽게 보이지만, 우주 전체라는 더 큰 시야에서 보면, 그것은 전체의 조화를 위한 필연적인 과정의 일부다.


이렇듯,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는 우리에게 두 가지 상반된 삶의 태도를 제시한다.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우주적 고아’로서의 자유를 준다. 이 무의미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신의 간섭이나 운명의 굴레 없이, 우리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평온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


반면, 스토아는 우리에게 ‘우주적 시민’으로서의 존엄을 준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신성하고 의미로 가득 찬 거대한 생명체의 소중한 일부다. 이 관점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특히 가장 어두운 고통의 순간에 깊은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스토아의 낙관론은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우주의 이성적인 질서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뢰함으로써, 결코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더 위대한 약속이다.



2절: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Demiurge) - 불완전한 창조주와 비극적 세계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이성적인 우주’라는 장엄하고도 위안을 주는 그림을 보여주었다면, 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는 그 그림을 산산조각 내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비극적이고도 매혹적인 신화가 속삭여지고 있었다. 바로 영지주의 (Gnosticism)의 창조 신화다. 만약 이 세상이 완벽하고 선한 신의 작품이 아니라, 무지하고 오만한 하위의 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실패작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끔찍하고도 도발적인 질문의 중심에 바로 ‘데미우르고스 (Demiurge)’라는 불완전한 창조주가 서 있다. 스토아의 섭리가 우주적 낙관론의 근거가 되었다면,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는 이 세계에 만연한 고통과 악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우주적 비관론’의 심장이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은 이 세상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깊은 실존적 고뇌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이 세계를 바라보며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질병과 죽음, 부조리와 폭력, 그리고 신성한 영혼이 물질이라는 감옥에 갇혀 신음하는 비극을 보았다. 그들에게 이러한 결함투성이의 세계는 결코 완전하고 선한 지고의 신이 직접 창조했을 리 없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진정한 신과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를 분리하는 대담한 신화를 창조했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진정한 신은 인간의 모든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순수한 빛과 충만의 세계인 ‘플레로마 (Pleroma)’에 거주하는 ‘알 수 없는 아버지’다. 그는 이 어두운 물질 우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완전한 타자다. 비극은 이 빛의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신적인 존재, ‘아이온 (Aeon)’ 중 하나인 ‘소피아 (Sophia, 지혜)’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과도한 열망을 품으면서 시작된다.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 고통과 공포 속에서 그녀는 플레로마 바깥의 어둠 속으로 하나의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를 유산(流産)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데미우르고스의 탄생이다. 그는 어머니인 소피아의 신적인 힘은 일부 물려받았지만, 그녀의 지혜는 전혀 물려받지 못한, 무지하고도 오만한 영적 사생아와 같다.


어둠 속에서 홀로 태어난 데미우르고스는 자신보다 더 높은 빛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 외에 다른 존재가 없음을 확인한 뒤, 교만에 빠져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야훼(Yahweh)의 목소리와 정확히 일치하며, 실제로 많은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신을 바로 이 불완전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와 동일시했다.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고 착각한 데미우르고스는 이제 자신의 왕국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 소피아에게서 훔친 힘을 사용하여, 혼돈의 물질로부터 하늘과 땅,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우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의 창조는 진정한 창조가 아니라, 그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저 위의 빛의 세계에 대한 서투른 ‘모방’에 불과하다. 그의 세계는 플레로마의 완벽한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무지와 오만을 반영하는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 감옥이다. 그가 만든 하늘의 행성들은 영혼이 상승하여 빛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감시자, 즉 ‘아르콘(Archon, 지배자)’들의 거처가 된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창조 신화는 우주를 신성한 로고스의 살아있는 몸으로 보았던 스토아의 세계관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스토아 철학에게 이 우주는 ‘가장 좋은 세계(best possible world)’다. 그 안의 모든 것은 전체의 조화를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심지어 악이나 고통조차도 이 거대한 선(善)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지주의에게 이 우주는 ‘최악의 세계(worst possible world)’다. 그것은 우주적인 실수와 무지의 산물이며, 그 안의 고통과 악은 우연한 부작용이 아니라 이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 그 자체다. 스토아가 ‘내재하는 신’을 통해 세계를 신성한 것으로 끌어올렸다면, 영지주의는 ‘초월적인 신’을 설정함으로써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버려야 할 곳으로 격하시켰다.


이 비극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로 이어진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은 우주적 질서의 소중한 일부이며, 자신의 이성을 통해 그 질서에 기꺼이 참여하는 존엄한 시민이다. 그러나 영지주의 신화에서 인간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자 ‘망명객’이다. 데미우르고스가 인간을 창조했을 때, 어머니 소피아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몰래 개입하여,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육체 안에 저 높은 빛의 세계에서 온 ‘신성의 불꽃 (divine spark)’을 불어넣는다. 이 불꽃이 바로 인간의 영적인 ‘프네우마 (pneuma)’다. 따라서 인간은 불완전한 창조주가 만든 물질의 육체(감옥)와, 진정한 신에게서 온 신성한 영혼(죄수)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요소가 비극적으로 결합된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스토아의 섭리와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신정론 (theodicy)의 문제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답변이다.


스토아는 악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을 전체적인 선의 관점에서 긍정하고 수용하려는 ‘궁극적 낙관론’의 길을 택했다. 이 길은 우리에게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깊은 평온을 주지만, 때로는 끔찍한 비극 앞에서 너무나 냉정하게 들릴 위험이 있다.


반면, 영지주의는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그 책임을 불완전한 창조주에게 돌림으로써 진정한 신의 선함은 지켜내려는 ‘궁극적 비관론’의 길을 택했다. 이 길은 고통받는 영혼에게 깊은 위안과 해방의 약속을 주지만, 동시에 이 세상과 육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경멸하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영지주의의 어둡고도 장엄한 신화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는 스토아 철학이 선택했던 ‘이성적 우주’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대담하고도 어려운 낙관론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스토아의 섭리와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라는 두 개의 상반된 우주 드라마는, 단순히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인류가 내놓은 가장 심오하고도 다른 두 개의 답변이며,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 다른 기술을 가르쳐준다.


영지주의의 신화는 그 어두운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강력한 위안과 해방의 메시지를 던진다. 만약 당신이 이 세상 속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끼고, 사회가 약속하는 성공과 쾌락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시달린다면, 영지주의는 당신에게 “그 느낌이 옳다”고 말해준다. 그 공허함은 당신 개인의 실패나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이 세상이 자신의 진정한 고향이 아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신성한 신호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 세속적인 가치들, 즉 데미우르고스의 세계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와 명예, 권력에 대해 건강한 회의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힘을 준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게임 규칙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대신,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는 ‘신성의 불꽃’, 즉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 속하지 않는 나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찾으라는 영적인 반란을 촉구한다. 그것은 당신이 느끼는 세상과의 불화가, 사실은 더 높은 진리를 향한 당신 영혼의 그리움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교훈이다. 이 ‘고귀한 불만족’이야말로, 우리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나서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반면,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세상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탈출하는 대신, 바로 이 세상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스토아의 섭리 개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삶의 모든 사건을, 특히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을 ‘재해석’하고 ‘변성’시키는 힘을 기르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닥친 시련 앞에서, 영지주의자가 “이것은 불완전한 세계의 증거다”라고 말한다면, 스토아 철학자는 “이것은 나의 덕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말한다. 스토아의 실천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하면 나의 용기, 인내, 지혜, 그리고 정의를 실천하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까?’라고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를 파괴하려 했던 외부의 장애물은 오히려 우리 내면의 힘을 드러내는 발판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행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행동을 진전시키는 것이 된다. 길을 가로막는 것이 길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고통이라는 비천한 납을, 인격의 성숙이라는 황금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다. 이 ‘이성적 긍정’은 맹목적인 낙관이 아니라, 어떤 현실 속에서도 의미를 창조해내는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능력에 대한 신뢰다.


결국 이 두 고대의 지혜는, 오늘날 혼돈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근본적인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영지주의자처럼,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직시하고 그 너머의 완벽한 고향을 향한 꺼지지 않는 갈망을 품고 살아가는 ‘영원한 구도자’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스토아 현자처럼,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대한 이성의 일부임을 신뢰하고, 주어진 모든 운명을 자신의 덕을 실현할 재료로 삼아 살아가는 ‘현실 속의 연금술사’의 길이다.


어쩌면 진정한 지혜는 이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길의 지혜를 모두 우리 삶의 도구로 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지주의는 우리에게 세상의 거짓된 가치에 안주하지 않는 비판적인 눈을 주고, 스토아 철학은 그 비판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갈 용기와 기술을 준다. 즉, 영지주의는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먼 곳의 별과 같고, 스토아 철학은 지금 발밑의 험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단단한 지팡이와 같다.



3절: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 - 의미 있는 우연의 법칙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보여준 섭리(pronoia)의 세계는,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인과의 사슬로 촘촘하게 엮여 있는 거대한 직물과 같았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신성한 이성(로고스)이라는 위대한 직공의 필연적인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만약, 이 세계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또 다른 종류의, 훨씬 더 신비롭고 예측 불가능한 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신의 탐험가였던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의 합리적인 세계관을 뒤흔드는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동시성은 스토아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우주가 결코 무의미한 장소가 아님을 말해주지만, 그 질서의 본질과 그것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동시성’은 융이 정의한 대로 ‘비인과적 연결 원리(acausal connecting principle)’다. 이 어려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옛 친구의 얼굴이 문득 마음속에 떠올랐는데, 바로 그 순간 그 친구에게서 전화벨이 울리는 경험. 혹은, 특정 상징(예를 들어, 풍뎅이)에 대한 꿈을 꾸고 난 다음 날, 창가에 바로 그 풍뎅이가 부딪히는 것을 목격하는 경험.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친구를 생각한 것이 전파를 보내 그가 전화를 걸게 만든 것이 아니며, 나의 꿈이 풍뎅이를 창가로 불러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러나 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대담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의미 있는 우연’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동시성은 바로 이처럼,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객관적인 사건과, 그것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개인의 내면적, 심리적 상태가 시간적으로 일치하면서, 그 경험자에게 강렬하고도 직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친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내가 그 친구를 간절히 생각하고 있던 그 순간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은, 나에게 마치 우주가 나의 내면의 소리에 응답하고 있다는 듯한 깊은 의미의 감각을 선사한다.


융은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선 더 깊은 차원의 정신 세계, 즉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존재를 상정했다. 집단 무의식은 인류 전체가 태고적부터 공유해 온 원초적인 경험과 기억의 저장소이며, 그 안에는 ‘원형(archetype)’이라 불리는 보편적인 이미지와 에너지의 패턴들이 잠들어 있다. 동시성은 바로 이 집단 무의식의 원형 중 하나가 개인의 삶 속에서 활성화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의 내면에서 특정한 심리적 갈등이나 과제가 떠오를 때(원형의 활성화), 그와 상응하는 의미를 지닌 사건이 외부 세계에서 마치 자석처럼 끌려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융의 동시성은 스토아의 섭리와 어떤 점에서 만나고 어떤 점에서 갈라지는가. 두 개념 모두 이 세계가 우리의 표면적인 인식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질서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통찰을 공유한다. 스토아의 ‘우주적 공감(sympatheia)’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고 보았듯이, 융의 동시성 역시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개념 모두 우리를 차가운 기계적 우주 속의 고립된 존재라는 절망에서 구출하여, 우리의 삶이 더 큰 의미의 그물망 속에 짜여있다는 위안을 준다.


그러나 두 질서의 작동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의 섭리는 철저히 ‘인과적(causal)’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도미노 게임과 같다. 우주의 시작과 함께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Logos)가 첫 번째 도미노를 밀었고, 그 이후의 모든 사건은 앞선 원인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빈틈없는 인과의 사슬(운명, Heimarmenē)을 따라 차례로 쓰러진다. 내가 오늘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에서부터 거대한 제국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이 거대한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겪는 불행이나 고통은 결코 무작위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를 위해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필연적인 도미노 조각이다. 스토아 현자의 과업은 바로 이 거대한 인과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 흐름에 저항하는 대신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반면, 융의 동시성은 명백히 ‘비인과적(acausal)’이다. 이는 도미노 게임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들이 동시에 같은 화음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바이올린 소리가 트럼펫 소리의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그 두 소리는 지휘자의 악보라는 보이지 않는 ‘의미’의 축을 중심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생각(옛 친구를 떠올림)과 외부의 사건(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옴)은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묶여있지 않다. 그 둘은 각자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함으로써, 나의 내면 상태와 외부 세계 사이에 하나의 의미 있는 다리가 놓인다. 마치 우주가 나의 내면의 질문에 외부의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응답’하는 것과 같다. 융의 동시성은 이처럼 인과의 논리를 뛰어넘어, 의미의 공명을 통해 작동하는 우주의 또 다른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그 질서를 주관하는 주체의 성격도 다르다. 스토아의 섭리는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이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최선의 상태로 이끌어가려는 신성한 지성의 의지다. 그러나 융의 집단 무의식은 이성 너머의 영역이다. 그것은 선과 악, 합리와 비합리가 뒤섞여 있는 원초적인 힘의 바다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동시성 현상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한다는 보장은 없다. 동시성은 우리에게 경고의 신호를 보낼 수도, 우리가 회피하던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두 지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질서를 경험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스토아의 섭리를 믿는 것은, 내 삶의 모든 사건이 하나의 거대한 이성적인 교향곡의 일부임을 신뢰하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해를 통한 평온’을 준다. 반면, 동시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우연들을, 내 영혼의 더 깊은 곳에서 보내오는 신호이자 길잡이로 여기고, 그것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미를 통한 성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스토아가 우리에게 우주의 ‘논리’를 가르쳐준다면, 융은 우리에게 우주의 ‘상징’을 읽는 법을 가르쳐준다. 이 두 지도를 함께 펼쳐 들 때, 우리는 이 세계가 단지 인과의 사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미의 속삭임으로 가득 찬, 훨씬 더 신비롭고 살아있는 장소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4절: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일어난다 - 관점의 전환


우리 삶에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 우리의 영혼은 거대한 갈림길 위에 서게 된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 사랑하는 이의 배신, 고통스러운 질병의 진단. 이처럼 우리의 계획을 산산조각 내는 사건들 앞에서,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있다. 하나는 넓고 익숙하지만 절망으로 이어지는 ‘희생자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좁고 낯설지만 자유로 이어지는 ‘창조자의 길’이다.


우리의 정신은 거의 본능적으로 첫 번째 길, 즉 ‘희생자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는 묻는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이 질문 속에는 세상이 불공평하고, 나는 그 부조리한 운명의 무력한 희생자라는 깊은 원망과 자기 연민이 깔려있다. 이 길의 끝에는 쓴 뿌리를 내린 분노와 끝없는 무력감의 늪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절망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훨씬 더 어렵고, 우리의 본능에 역행하는 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완전한 자유로 이끄는 ‘연금술사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꾼다. “왜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묻는 대신, “이 일이 어떻게 ‘나를 위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의 전환, 즉 ‘나에게(to me)’에서 ‘나를 위해(for me)’로의 이 미세하지만 거대한 관점의 이동이야말로,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천적인 삶의 기술이다.


이 대담한 관점의 전환은 우주가 이성적이고 선한 섭리(pronoia)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스토아의 근본적인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우주가 완벽한 전체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완전한 실수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유한한 시야에서는 그것이 파괴적인 악(惡)처럼 보일지라도,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더 큰 선(善)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일 수 있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진실을 그의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통찰로 압축했다. “행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행동을 진전시키는 것이 된다. 길을 가로막는 것이 길이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일어난다’는 태도의 핵심이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나의 길을 끝내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발을 디딜 새로운 계단이 된다.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타오르는 불의 비유를 들었다. 거대한 불길은 자신에게 던져지는 모든 것을 연료로 삼아 더 높이 타오른다. 마른 장작뿐만 아니라, 젖은 나뭇가지나 쓸모없는 쓰레기조차도 불길의 힘을 꺾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불길의 일부가 되어 빛과 열을 발산한다. 스토아 현자의 마음, 즉 그의 지배 이성(hēgemonikon)은 바로 이 불길과 같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던져지는 모든 사건, 모든 장애물, 모든 불행을 자신의 덕을 단련하고 지혜를 키우는 연료로 삼는다.


이 철학적 원리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해보자. 당신이 믿었던 친구에게 끔찍한 배신을 당했다고 가정해보자. ‘희생자의 길’ 위에서 당신은 “어떻게 그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절규하며, 인간에 대한 불신과 자기 연민의 감옥에 갇힐 것이다. 그러나 ‘연금술사의 길’ 위에서 당신은 질문을 바꾼다. “이 사건이 어떻게 ‘나를 위해’ 일어난 것일 수 있는가?” 어쩌면 이 고통스러운 사건은, 그 사람의 진정한 본질을 내게 알려주어 더 깊은 상처를 미연에 방지해 준 것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타인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 대신, 오직 나 자신의 내면적 덕에만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훈련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경험은 내가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게 하고, 다른 이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자비심을 기를 기회일 수도 있다. 이처럼 관점을 전환하는 순간, 배신이라는 끔찍한 독은 나를 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드는 약으로 변성된다.


이것은 결코 고통을 부정하거나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순진한 낙관론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자는 배신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고통은 실제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통의 ‘의미’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사건 자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지만,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 영역이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일어난다’는 말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이기적인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중심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책임의 선언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꾸준히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에 닥쳐올지 모를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나의 성장을 위한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된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쁜 일조차도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온 스승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애 (Amor Fati 아모르 파티)’의 진정한 의미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수동적인 순응이 아니라, 나의 운명과 창조적으로 협력하는 능동적인 파트너십이다. 우주는 내게 사건이라는 원재료를 던져주고, 나는 나의 이성적 판단이라는 연금술의 불꽃을 사용하여 그 모든 것을 내 영혼의 황금으로 바꾸어낸다.


결국 스토아 철학의 실천은 우리를 희생자의 서사에서 구출하여, 우리 삶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창조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운명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그 사건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온전히 우리 자신의 자유에 달려있다. 삶이 던지는 모든 질문 앞에서, 고통이라는 대답 대신 성장이라는 대답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토아적 삶의 정수다.



5절: 악(惡)의 문제 - 섭리의 세계에서 고통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스토아 철학이 그려낸 ‘이성적이고 선한 우주’라는 장엄한 그림 앞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게 선한 섭리(pronoia)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왜 이 세상에는 이토록 끔찍한 악과 부조리한 고통이 존재하는가?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번성하는가? 왜 역병과 지진은 죄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휩쓸어 가는가? 이 ‘악의 문제’, 즉 신정론(theodicy, 神正論)은 스토아의 우주적 낙관론을 향한 가장 날카로운 공격이며, 그들의 철학은 이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여러 겹의 논증을 통해 그 그림자를 걷어내려 시도했다.


그들의 첫 번째 대답은 우리의 시야를 개인의 관점에서 우주 전체의 관점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악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전체의 선(善)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부산물’이거나 ‘필요한 일부’라고 주장했다. 스토아 학파의 체계를 완성한 크리시포스 (Chrysippus)는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는 원리를 제시했다. 만약 세상에 불의(不義)가 없다면, 우리는 정의(正義)라는 덕을 알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그림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빛을 더욱 빛나게 하고, 음악에서 불협화음이 전체적인 화음의 아름다움을 심화시키듯이, 우주라는 거대한 예술 작품 속에서 악과 고통은 전체의 조화와 완벽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두 번째 대답은, 어떤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불가피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통찰이다. 이 논증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크리시포스(Chrysippus)가 그의 저서 『섭리에 관하여, On Providence』에서 제시한 비유 속에 남아있다. 그는 ‘악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인간의 머리, 즉 두개골을 예로 들었다.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신성한 섭리가 인간을 창조할 때 부여하고자 했던 최고의 선(善)은 바로 ‘이성’과 ‘지성’이었다. 이 고귀한 능력을 담기 위해서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기관, 즉 뇌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섬세한 뇌를 보호하면서도, 그것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두개골은 필연적으로 다른 동물들의 두껍고 둔한 뼈와는 달리, 얇고 상대적으로 약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간의 머리가 충격에 쉽게 다치는 것은, 섭리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성’이라는 더 위대한 선을 창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수해야만 했던 구조적인 부작용이자, 최선의 선택에 따른 불가피한 대가였다.


이 비유를 우주 전체로 확장할 때, 스토아 철학의 입장은 더욱 명확해진다. 우주는 섭리가 창조할 수 있었던 ‘가능한 최선의 시스템’이다. 이 완벽한 시스템이 조화롭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질병이나 지진, 가뭄과 같은 부정적인 사건들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섭리의 실수가 아니라, 전체의 선을 위해 부분적인 악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최고의 속도(더 큰 선)를 얻는 대신 충돌에 대한 취약성(부작용)을 감수해야 하는 설계자의 선택과도 같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의 가장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대답은 ‘악’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데 있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것들, 즉 가난, 질병, 고통, 죽음과 같은 외부적인 사건들은 사실 진정한 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것들은 모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우리의 행복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관한 것(adiaphora)’이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유일하고도 진정한 악은 오직 하나, 바로 우리의 이성을 파괴하고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악덕(vice)’뿐이다. 비겁함, 부정의, 무절제와 같은 악덕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그릇된 동의를 통해서만 생겨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악의 문제 전체를 뒤집어 놓는다. 신적인 섭리는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악, 즉 악덕을 보내지 않는다. 섭리는 우리에게 단지 질병이나 가난과 같은 ‘상황’을 보낼 뿐이다. 그 중립적인 상황 앞에서 비겁함이라는 악덕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따라서 신은 악의 창조자가 아니며, 악의 책임은 온전히 인간 자신에게 있다.


그렇다면 섭리는 왜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보내는가?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고통을 처벌이나 실수가 아닌, 우리 영혼을 위한 ‘훈련’으로 재해석하는 위대한 연금술을 보여준다. 에픽테토스는 신을 우리를 단련시키는 엄격하고도 자비로운 ‘체육 교관’에 비유했다. 교관은 유망한 선수가 더 강해지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더 힘든 훈련 과제를 내어준다. 마찬가지로, 섭리는 우리가 가진 덕, 즉 용기와 인내, 절제를 발휘하고 단련시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시련이라는 훈련 도구를 보내준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수많은 과업을 통해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했듯이, 우리 역시 삶의 시련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의 도덕적 품성을 증명하고 완성하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스토아 철학에게 ‘악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관점의 문제’다. 우리가 자신의 좁고 이기적인 관점에 갇혀 있는 한, 세상은 부조리한 고통으로 가득 찬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통해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이 진정한 선이고 악인지를 명확히 분별하며, 모든 시련을 우리 자신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받아들일 때, 악의 문제는 그 힘을 잃고 녹아내린다.


섭리의 세계는 고통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선(善)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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