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덕 (Virtus) - 유일한 선(善)

by 이호창

제10장: 덕 (Virtus) - 유일한 선(善)


1절: 가치의 위대한 전복 - 왜 덕만이 유일한 선인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좋은 삶’을 향한 긴 항해를 계속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항해의 목적지가 건강, 부, 명예, 사랑과 같은 안락하고 풍요로운 항구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건강해지기 위해 애쓰고, 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분투하며, 타인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좋음(good)’의 지도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이 지도를 과감하게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그 잿더미 위에서, 우리를 전혀 다른 목적지로 이끄는 새로운 지도를 펼쳐 보인다. 그 지도 위에 쓰인 유일한 목적지의 이름, 그것이 바로 ‘덕(virtus)’이며, 스토아 철학의 가장 급진적이고도 위대한 선언은 바로 이 ‘덕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고집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여기에는 ‘좋음(τὸ ἀγαθόν, to agathon)’의 본질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도 논리적인 정의가 깔려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좋은 것’이란, 어떤 상황에서 누가 사용하더라도 항상 유익하고 결코 해가 될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엄격한 기준의 빛 아래에서,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던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건강’을 보자. 건강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폭군이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힘을 더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해치는 데 사용할 것이다. ‘부’는 어떠한가? 부는 우리에게 안락함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오만하게 하며,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불안의 씨앗을 심는다. ‘명예’나 ‘좋은 평판’은 또 어떤가? 그것은 종종 오해나 거짓 위에 세워지기도 하며, 대중의 변덕스러운 판단에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다. 이처럼 건강, 부, 명예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다. 따라서 그것들은 스토아의 엄격한 정의에 따르면 결코 ‘절대적인 선’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기준을 통과하는 유일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탁월한 상태, 즉 덕이다. ‘지혜’를 생각해보라. 지혜가 그릇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가 그릇된 목적을 향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지혜로운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는 어떠한가? 정의로운 행위가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가? ‘용기’가, ‘절제’가 그 자체로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 이 네 가지 덕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이로움을 가져다준다. 이것이야말로 스토아 철학이 덕을 ‘유일한 선’이라고 선언한 논리적 근거다.


그렇다면 건강이나 부와 같은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스토아 철학은 이것들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즉 우리의 행복과 불행에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무관한 것(adiaphora, 아디아포라)’이라고 불렀다. 다만, 그 무관한 것들 중에서도 이왕이면 선택하는 편이 자연의 순리에 더 맞는 ‘선호할 만한 것(proēgmena, 프로에게메나)’과, 피하는 편이 더 나은 ‘선호하지 않을 것(apoproēgmena, 아포프로에게메나)’으로 구분했을 뿐이다. 스토아 현자는 건강을 선호하지만, 병에 걸렸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행복은 건강이라는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병든 상황 속에서도 용기와 인내라는 내면의 덕을 발휘하는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아 철학이 이룬 ‘가치의 위대한 전복’은, 우리 행복의 주소를 외부 세계에서 내면세계로 완전히 이전시키는 혁명적인 작업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파도의 변덕에 당신의 행복을 맡기는 표류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는 당신 자신의 인격이라는 견고한 배의 선장이 될 것인가. 덕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외부 세계의 노예에서 우리 영혼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2절: 덕은 지식인가? - 소크라테스의 그림자


우리는 스토아 철학의 네 가지 덕이 지혜, 정의, 용기, 절제라는 네 개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서양 철학 전체를 뒤흔든 하나의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스토아 철학의 위대한 스승인 소크라테스(Socrates)가 처음 던졌던 “덕은 과연 지식인가?”라는 질문이다. 스토아 학파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단호하게 대답함으로써, 그들의 윤리학 전체를 세울 가장 단단한 주춧돌을 마련했다. 이 주춧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 왜 그토록 이성적인 ‘훈련’과 ‘배움’을 강조했는지를 깨닫는 열쇠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가장 혁명적인 주장 중 하나는 “누구도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Nemo sponte malus)”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상식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매일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통찰은 그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무지(ignorance)’를 꿰뚫어 본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한다면, 그것은 그가 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재물(외부적인 것)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좋은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사악한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지에 대한 ‘지적인 오류’의 결과다. 즉, 모든 악행은 근본적으로 ‘무지’의 소산이다.


스토아 학파는 바로 이 소크라테스의 지성주의(intellectualism)를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들의 정교한 심리학과 윤리학의 핵심 원리로 삼았다. 우리가 앞서 탐구했던 격정(파토스)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사건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나쁜 것’이라는 ‘거짓된 지식(잘못된 판단)’에 우리가 동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길은 의지를 단련하는 것을 넘어, 무엇이 진정으로 좋고 나쁜지에 대한 우리의 ‘앎’을 교정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의 평정심은 올바른 지식을 가진 자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결과물이다. 스토아 현자는 단순히 ‘선한 사람’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완벽한 ‘지식(epistēmē, 에피스테메)’을 소유한 사람이다.


‘덕은 지식이다’라는 이 명제는 우리의 삶에 몇 가지 심오하고도 실천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첫째, 그것은 도덕을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만약 덕이 신비로운 천성이나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technē, 테크네)이나 지식이라면, 그것은 마치 목수가 나무 다루는 법을 배우고, 의사가 인체를 치료하는 법을 배우듯이, 꾸준한 학습과 훈련을 통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인격을 완성할 수 있다는 깊은 희망과 책임을 부여한다.


둘째,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네 가지 덕의 통일성’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만약 덕이 진정한 좋음에 대한 단일한 지식이라면, 네 가지 덕은 분리될 수 없다. 당신은 지혜롭지 않으면서 용감할 수 없고, 정의롭지 않으면서 절제할 수 없다. 진정한 좋음(지혜)에 대한 앎은, 위협적인 외부의 일들 앞에서 ‘용기’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로, 그리고 쾌락의 유혹 앞에서 ‘절제’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셋째, 이 관점은 우리 자신과 타인의 도덕적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내가 비겁하거나 부정한 행동을 했을 때, 적절한 반응은 자기혐오나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는가? 나의 어떤 무지가 이러한 행동을 낳았는가?” 또한, 타인이 내게 해를 끼쳤을 때, 적절한 반응은 증오나 복수심이 아니라, 그의 무지에 대한 일종의 연민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매일 아침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을 상상하면서도, “그들이 선과 악에 대한 무지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되뇌었던 이유다. 이러한 태도는 윤리를 처벌의 영역에서 치료와 교육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덕은 지식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그림자는 스토아 윤리학 전체를 비추고 있다. 이 오래된 명제는,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나쁜 선택을 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현대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어쩌면 우리의 도덕적 실패가 의지의 나약함이 아니라, 앎의 부족함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하지만 희망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더 나은 삶을 향한 길은, 단순히 이를 악물고 더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더 배우고, 더 질문하며,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더 깊고 정확한 앎을 추구하는 길이다. 궁극적으로, 가장 위대한 도덕적 여정은 진리를 향한 지적인 여정과 다르지 않다.



3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Mesotes) - 감정의 올바른 상태로서의 덕


스토아 철학이 덕을 ‘이성의 완벽한 상태’로 규정했다면, 그보다 한 세대 앞서 철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덕을 ‘감정의 완벽한 상태’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탐구했다. 두 철학 모두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덕을 통해 좋은 삶(에우다이모니아)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지만, 그 덕의 본질, 특히 덕과 감정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스토아 철학의 독특한 입장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대화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통찰, 즉 ‘중용(mesotes, 메소테스)’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에서, 두려움, 분노, 쾌락과 같은 감정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들은 인간 영혼의 자연스럽고도 필수적인 일부이며,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원료와도 같다. 그에게 윤리적 과제는 이 감정들을 뿌리 뽑는 것이 아니라, 마치 훌륭한 음악가가 악기의 현을 조율하듯, 감정을 ‘적절하게’ 조율하는 것이었다. 덕이란 바로 이 조율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 즉 ‘너무 많음(과잉)’과 ‘너무 적음(부족)’이라는 두 가지 악덕의 극단 사이에서 발견되는 황금 같은 중간 지점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예시인 ‘용기(andreia)’를 생각해보자.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두려움을 너무 적게 느끼는 사람은 무모한 ‘만용(rashness)’이라는 악덕에 빠진다.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무작정 돌진하여 자신과 타인을 위험에 빠뜨린다. 반대로, 두려움을 너무 많이 느끼는 사람은 비겁한 ‘소심함(cowardice)’이라는 악덕에 빠진다. 그는 마땅히 맞서야 할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압도되어 도망쳐 버린다.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바로 이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것에 대해, 적절한 방식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그 두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이처럼 덕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상황에서 올바른 정도로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올바른 중간 지점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실천적 지혜(phronēsis, 프로네시스)’를 가진 사람, 즉 현명한 사람이 이성을 통해 각 상황의 구체적인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덕은 감정과 이성이 조화롭게 협력하여 만들어내는 영혼의 아름다운 균형 상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정을 영혼의 질병으로 보았던 스토아 철학의 급진성이 드러난다. 스토아 학파에게 두려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조율해야 할 악기의 현이 아니라, 영혼에서 완전히 도려내야 할 ‘암세포(파토스)’였다. 그들에게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비이성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영혼의 질병일 뿐, 결코 덕의 재료가 될 수 없었다.


용기의 경우를 다시 보자. 스토아 철학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 ‘적절한 양의’ 두려움을 느낀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이 죽음이나 고통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진정한 악이 아니라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하고자 하는 것(신중함)은 비겁함과 같은 ‘악덕’뿐이다. 또한 분노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로는 ‘정의로운 분노’가 필요하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세네카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에게 모든 종류의 분노는 예외 없이 ‘일시적인 광기’이며 이성적인 영혼이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두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논쟁점은 감정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시각차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이 ‘감정의 올바른 상태’라면, 스토아에게 덕은 ‘격정이 없는 순수한 이성의 상태(아파테이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자는 마치 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위대한 ‘지휘자’와 같다. 그의 앞에는 분노의 트럼펫, 두려움의 팀파니, 쾌락의 바이올린 등 다양한 감정의 악기들이 놓여있다. 그의 과업은 이 악기들을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지휘봉을 사용하여 각 악기가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조화로운 소리를 내도록 이끌어 하나의 장엄한 교향곡을 완성하는 것이다.


반면, 스토아의 현자는 환자의 몸을 치료하는 냉철한 ‘외과의사’와 같다. 그의 앞에는 격정이라는 위험한 종양에 감염된 영혼이 놓여있다. 그의 과업은 종양과 타협하거나 그것을 적절한 크기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성이라는 예리한 메스를 사용하여,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모든 병든 조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제거하여, 완벽한 건강의 상태, 즉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을 탁월하게 관리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온건한 길을 제시한다. 반면 스토아 철학은 그보다 더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길, 즉 감정의 폭정 자체를 끝내고 순수한 이성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려는 대담한 길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는 스토아 철학이 추구했던 아파테이아의 경지가 얼마나 야심 차고 독특한 인간 완성의 길이었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4절: 보살(Bodhisattva)의 육바라밀(六波羅蜜) - 자비와 지혜의 실천


스토아 철학이 추구한 현자의 이상이 자기 자신의 내면 왕국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고독하고도 강인한 군주였다면, 동양의 대승불교는 그와는 전혀 다른, 눈물과 자비로 가득 찬 위대한 영웅의 길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 영웅의 이름이 바로 ‘보살(Bodhisattva, 菩薩)’이다. 스토아의 현자가 개인적 완성이라는 산의 정상에 홀로 우뚝 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보살은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될 때까지 기꺼이 산 아래의 진흙탕 세상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스토아의 덕이 이성(logos)이라는 차가운 불꽃 속에서 단련된 강철이라면, 보살의 덕은 자비(karuṇā)라는 뜨거운 눈물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다. 이 두 위대한 이상을 비교하는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덕의 지평이 개인의 완성을 넘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살, 즉 ‘보디사트바’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bodhi)’과 ‘존재(sattva)’의 합성어다. 이는 문자 그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를 의미하지만, 그 심오한 뜻은 깨달음을 통해 자기 혼자만의 열반에 드는 것을 거부하고, 이 고통의 바다(輪廻, 윤회, samsara) 속에 남아 다른 모든 존재들을 깨달음의 피안(彼岸)으로 이끌겠다고 서원한 위대한 영혼을 가리킨다. 보살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동력은 바로 ‘대자대비(大慈大悲)’, 즉 모든 중생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연민이다. 그는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기에, 그들의 무지와 고통을 마치 자신의 유일한 자식이 병든 것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 위대한 서원을 실천하기 위해,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蜜, ṣaṭpāramitā)’이라 불리는 여섯 가지 완전한 덕목을 끊임없이 수행한다. ‘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하다’는 의미로, 이 여섯 가지 실천이 우리를 고통의 이쪽 강둑에서 깨달음의 저쪽 강둑으로 건너게 해주는 거대한 배와 같음을 의미한다.


첫째는 보시(布施, dāna), 즉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넘어, 위험에 처한 이에게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無畏施 무외시), 진리의 가르침을 나누어주는(法施 법시) 것까지 포함한다. 스토아 철학 역시 코스모폴리탄 정신에 따라 타인을 돕는 의무(kathēkon)를 강조했지만, 보살의 보시는 의무를 넘어선 자발적이고도 완전한 자기희생에 가깝다. 스토아 현자에게 재산은 ‘무관한 것(adiaphora)’일 수 있지만, 보살에게 재산은 중생을 돕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자비의 도구가 된다.


둘째는 지계(持戒, śīla), 즉 ‘올바른 행동 규범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살생, 도둑질, 거짓말 등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이는 스토아 철학이 정의와 절제를 통해 이성적인 삶의 질서를 세우려는 노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두 길 모두 윤리적 자기 절제가 내면의 평화를 위한 필수적인 토대임을 알고 있었다.


셋째는 인욕(忍辱, kṣānti), 즉 ‘모욕과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는 외부의 사건에 흔들리지 않는 스토아의 부동심(아파테이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그러나 그 동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 현자가 모욕을 견디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이성을 해칠 수 없는 외부적인 일이기에, 자신의 평온을 지키기 위함이다. 반면, 보살이 모욕을 견디는 이유는 자신을 모욕하는 저 사람 역시 무지(無明)라는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가엾은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인내는 자비를 위한 적극적인 실천이다.


넷째는 정진(精進, vīrya), 즉 ‘지치지 않는 노력’이다. 이는 선한 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불굴의 에너지다. 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단련했던 ‘수련(askēsis)’의 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 두 전통 모두 덕이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의지를 통해 부단히 노력할 때만 얻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섯째는 선정(禪定, dhyāna), 즉 ‘고요한 명상’이다. 이는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내면의 평화와 깊은 통찰력을 얻는 기술이다. 스토아 철학 역시 이성적인 명상을 중요시했지만, 불교의 선정은 마음을 변혁시키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중심적인 수행법이다. 이 고요함 속에서 보살은 비로소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 볼 준비를 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이자 모든 바라밀을 완성시키는 것은 반야(般若, prajñā), 즉 ‘지혜’다. 그러나 이 지혜는 스토아의 지혜(sophia)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스토아의 지혜가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윤리적 앎’이라면, 반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존재론적 앎’, 즉 ‘공(空, śūnyatā)’에 대한 통찰이다. 보살은 이 지혜를 통해 ‘나’와 ‘너’라는 구분 자체가 본래 환상임을 깨닫는다.


바로 이 반야의 지혜가 보살의 대자대비를 완성시킨다. ‘나’와 ‘너’가 본래 둘이 아니기에, 타인을 구제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구제하는 것이 된다. 그의 자비는 더 이상 ‘내가 너를 돕는다’는 시혜적인 감정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하나의 생명임을 깨달은 자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발현이다.


결론적으로, 스토아의 현자와 대승불교의 보살은 둘 다 덕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는 위대한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는 윤리적 세계의 지도는 다르다.


스토아 현자의 세계에서 중심은 ‘나의 이성적 자아’다. 그의 모든 노력은 이 자아를 외부 세계의 혼란으로부터 지켜내고, 우주의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데 집중된다.


반면, 보살의 세계에서 중심은 ‘타인’이다. 그의 모든 노력은 ‘나’라는 중심을 해체하고, 모든 중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끌어안는 데 집중된다.


스토아의 덕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궁극의 책임’을 가르쳐준다면, 보살의 덕은 우리에게 ‘모든 존재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가르쳐준다. 이 두 위대한 이상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얼마나 높고 넓은 곳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두 개의 별과 같다.


5절: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 -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덕


우리는 스토아 철학의 덕(aretē)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동양의 가장 위대한 학자, 공자(孔子)의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스토아의 현자가 자신의 내면 왕국을 다스리는 고독한 군주라면, 공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君子)는 가족과 사회라는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조화의 중심을 잡는 따뜻한 가장(家長)과도 같다. 두 철학 모두 ‘덕’을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지만, 그 덕이 어디에서 발견되고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대한 대답은 전혀 다른 길을 가리킨다. 스토아의 덕이 우주적 이성(logos)과의 수직적 합일을 통해 완성된다면, 공자의 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공자 사상의 심장에는 ‘인(仁)’이라는 한 글자가 자리하고 있다. 인은 흔히 ‘어짊’이나 ‘사랑’으로 번역되지만, 그 본질은 인간(人)이 둘(二) 이상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발현되는 관계적 감수성, 즉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다. 이 인의 마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깝고도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싹튼다. 바로 부모에 대한 효도(孝)와 형제에 대한 우애(悌)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공경하는 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파문이, 마치 물가에 던진 조약돌처럼 점차 밖으로 퍼져나가 친구와 이웃, 그리고 마침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바로 인의 완성이다.


이는 스토아의 오이케이오시스(oikeiōsis)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시작하여 동심원을 그리며 인류 전체로 확장되는 과정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러나 그 동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의 확장이 모든 인간이 이성(로고스)이라는 신성한 불꽃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는 ‘이성적 깨달음’에 기반한다면, 공자의 확장은 부모 자식 간의 따뜻한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정서적 경험’에 그 뿌리를 둔다. 스토아가 머리의 철학이라면, 공자는 가슴의 철학에서 출발한다.


이 내면의 인(仁)이 외부 세계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통로가 바로 ‘예(禮)’다. 예는 단순히 형식적인 의례나 에티켓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의 지혜가 축적된 사회적 약속이자, 모든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문법이다.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맞는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예를 실천하는 것이다. 인이 내면의 음악이라면, 예는 그 음악을 연주하는 악보와 같다. 악보 없는 음악이 혼란스럽듯, 예 없는 인은 방향을 잃고 감상적인 동정심에 머물 위험이 있다.


이는 스토아의 ‘의무(kathēkon)’ 개념과 비교될 수 있다. 두 개념 모두 각자의 역할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스토아의 의무가 우주의 보편적인 이성에서 도출되는 반면, 공자의 예는 가족과 사회라는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 규정된다. 스토아 현자의 행동 기준이 ‘우주적 자연’이라면, 군자의 행동 기준은 ‘인간 사회의 조화’다.


‘의(義)’는 바로 이 예의 정신을 각 상황에 맞게 올바르게 적용하는 도덕적 판단력이다. 예가 일반적인 원칙이라면, 의는 그 원칙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지혜다. 예를 들어,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예의 원칙이지만, 만약 그 어른이 부당한 일을 저지른다면,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대신 그 부당함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행동이다. 이는 스토아의 정의(dikaiosynē)와 유사하지만, 스토아의 정의가 모든 인간을 동등한 ‘우주 시민’으로 대하는 보편적 원리에 가깝다면, 공자의 의는 관계의 특수성(군신, 부자 등)을 고려하는 상황적 판단력을 더 중시한다.


마지막으로 ‘지(智)’는 이 모든 것, 즉 인의 본질과 예의 형식, 그리고 의의 실천을 꿰뚫어 아는 지혜다. 공자에게 지혜는 자연 세계의 비밀을 탐구하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회의 이치를 아는 ‘성숙한 앎’이다. 누가 현명한 사람인가? 그는 바로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이는 스토아의 지혜(sophia)가 ‘좋고 나쁨’에 대한 형이상학적 앎이었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스토아의 덕과 공자의 덕은 둘 다 인간 완성을 향한 위대한 길이지만, 그 길이 놓인 땅이 다르다.


스토아의 현자는 우주라는 거대한 자연 속에 홀로 서서, 자신의 내면과 우주의 질서 사이의 조화를 추구한다. 그의 덕은 고독한 자기 수양을 통해 완성된다.


반면, 공자의 군자는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 서 있다. 그의 덕은 가족과 사회라는 인간관계의 조화 속에서 실현되고 완성된다.


스토아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흔들리지 않는 개인으로 바로 설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다면, 공자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더불어 따뜻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를 가르쳐준다.


이 두 위대한 지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홀로 서는 법과 함께 서는 법을 모두 배워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6절: 행복은 덕의 결과인가, 덕 그 자체인가


우리는 스토아 철학의 험난한 길을 따라 덕(virtus)이라는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모든 등반의 끝에는 가장 실질적인 질문이 우리를 기다린다. “왜 이 힘든 길을 올라야만 했는가?” 덕스러운 삶을 살기 위한 이 모든 노력의 끝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가? 덕은 더 큰 목표인 행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가, 아니면 덕스러운 삶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찾던 행복인가.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대답 속에,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 응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덕과 행복의 관계는 명확해 보인다. 덕, 즉 착하게 사는 것은 행복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하나의 ‘조건’ 혹은 ‘수단’이다. 정직하게 살면 사회적 신뢰를 얻고, 성실하게 일하면 물질적 부를 얻으며,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 사랑을 받는다. 이처럼 덕은 행복이라는 달콤한 과일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통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더 정교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에게 행복,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εὐδαιμονία)’는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즉, 덕은 행복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본질적인 구성 요소다. 그러나 그는 덕만으로는 완벽한 행복에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최고의 덕을 지닌 사람이라도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거나, 모든 자식을 잃은 비극 속에서 온전히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에게 행복은 내면의 덕이라는 주춧돌 위에, 어느 정도의 건강, 부, 좋은 친구와 같은 외부적인 조건들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집과 같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가장 급진적이고도 대담한 선언을 한다. 그들에게 덕은 행복의 수단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일부도 아니다. 덕은 행복 그 자체다. 덕과 에우다이모니아는 동의어다. 덕이 있는 삶이 곧 행복한 삶이며, 행복한 삶이란 다름 아닌 덕이 있는 삶이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이 ‘덕은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하는 대담한 주장은, 그들이 세운 철학의 모든 길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하나의 거대한 호수와 같다. 이 결론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행복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관점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행복을 외부적인 재료들을 모아 만들어내는 하나의 ‘요리’처럼 생각한다. ‘건강’이라는 신선한 채소, ‘부’라는 풍부한 향신료, ‘좋은 평판’이라는 아름다운 그릇이 모두 갖추어져야 비로소 ‘행복’이라는 멋진 요리가 완성된다고 믿는다. 이 관점에서, 덕(정직, 성실 등)은 요리를 망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조리법 정도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요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재료들 중 어느 하나도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건강은 언제든 나빠질 수 있고, 부는 사라질 수 있으며, 평판은 타인의 변덕에 달려있다. 우리의 행복이 이처럼 외부적인 재료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평생을 재료가 상하거나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불안한 요리사로 살아가야만 한다.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들은 행복이 외부의 재료로 만드는 요리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상태 그 자체라고 선언한다. 그들에게 행복은 ‘덕이 있는 영혼의 완벽한 기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덕만이 유일한 선’이며, 건강이나 부와 같은 외부적인 것들은 모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관한 것(adiaphora)’이라는 그들의 근본 원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만약 행복이 ‘좋은 것들로 가득 찬 삶’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유일한 ‘좋은 것’이 덕이라면, 행복한 삶은 논리적으로 오직 덕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의 행복을 외부의 날씨에 의존하는 ‘모닥불’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태양’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모닥불 같은 행복은 계속해서 외부의 땔감(칭찬, 성공, 쾌락)을 공급해주어야만 타오르며, 비바람(불운)이 불면 쉽게 꺼져버린다. 그러나 태양과 같은 행복, 즉 덕이 있는 영혼은 외부의 조건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빛과 열을 발산한다. 맑은 날(건강, 부)은 물론 기분 좋은 날이지만, 폭풍우가 치는 날(질병, 가난)이라고 해서 태양 자체가 사라지거나 그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스토아 현자는 건강과 부를 ‘선호’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없다고 해서 그의 행복, 즉 그의 덕스러운 영혼의 상태가 손상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이 급진적인 주장의 정점은, 스토아 현자는 고문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순간에도 완벽하게 행복하다는 유명한 역설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고문은 현자의 육체를 찢고 파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무관한 것’에 해를 가하는 것일 뿐이다. 고문은 결코 그의 내면, 즉 그의 이성과 판단력, 그의 덕을 파괴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자의 행복은 오직 그의 덕에만 온전히 의존하기에, 그의 행복은 외부의 어떤 물리적 폭력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야말로 외부 세계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된 ‘내면의 성채’가 지닌 궁극의 힘이다.


그렇다면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즐거움이나 만족감과 같은 감정과는 다른 것인가? 그렇다. 스토아의 에우다이모니아는 덧없는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순조로운 흐름(euroia biou, εὔροια βίου)’이라고도 불리며, 개인의 삶이 우주의 이성적인 흐름, 즉 로고스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아무런 내부적 갈등이나 막힘없이 흘러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거대한 나무의 상태와 같다. 나무의 ‘좋음’은 그것이 특정한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자연)에 따라 뿌리를 깊이 내리고, 하늘을 향해 굳건히 뻗어 있으며, 계절의 순리에 따라 무성한 잎을 피워내는 완벽한 기능 그 자체에 있다. 스토아 현자의 영혼도 이와 같다. 그의 행복은 그가 느끼는 쾌락의 양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이성이라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가 경험하는 깊고 흔들리지 않는 ‘환희(khara)’는, 이 건강한 나무가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과 같다. 그것은 나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표가 아니라, 완벽한 기능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자 징후일 뿐, 그 자체가 추구의 대상은 아니다.


‘덕은 행복의 결과인가, 덕 그 자체인가?’라는 질문에 스토아 철학은 단호하게 후자라고 답한다. 덕스러운 삶에 대한 보상은 그 길의 끝에서 주어지는 상이 아니다. 보상은 바로 그 길을 걷는 매 순간, 즉 덕스럽게 행동하는 것 그 자체다.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청중의 박수가 아니라, 훌륭하게 연주하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의 약속이자 가장 위대한 해방의 메시지다. 이 가르침은 행복의 근원이 더 이상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세계의 변덕에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대신, 행복의 진정한 주소는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완전히 이전된다. 그 내면이란 바로 우리의 인격, 우리의 판단,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다.


스토아 철학은 운이나 타인의 자비에 기대지 않는 행복, 한번 성취하면 그 누구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온전한 행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덕을 유일한 선으로 삼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값지고도 영원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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