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표상 - 세상을 인식하는 창

by 이호창

제8장: 표상 (Phantasia) - 세상을 인식하는 창


1절: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 - 인상과 판단의 분리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창(窓)과 같다.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은 빛이 되어 이 창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창은 온갖 종류의 먼지와 얼룩, 그리고 색안경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와 두려움, 욕망과 편견이라는 필터를 통해 왜곡되고 채색된 모습으로 세상을 본다. 스토아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수련은 바로 이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내는 기술, 즉 외부에서 들어오는 순수한 ‘인상’과 내가 덧붙이는 주관적인 ‘판단’을 명확하게 분리해내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연마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노예가 아닌, 우리 인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외부 세계의 사건이 우리 마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 현상을 ‘판타시아(phantasia, φαντασία)’라고 불렀다. ‘나타나다(phainesthai)’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인상’, ‘표상’,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판타시아는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정보다. 그것은 마치 사건 현장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나,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팩트(fact)를 전달하는 뉴스 속보와 같다. 예를 들어, “친구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거나 “의사가 내게 병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판타시아다.


문제는 훈련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이 이 순수한 판타시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의 즉각적으로 거기에 주관적인 ‘판단 (hupolēpsis, 휘폴렙시스 또는 dogma, 도그마)’을 덧씌워버린다는 데 있다. “친구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순수한 인상에, “그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우리의 우정은 끝났어. 나는 버림받았어”라는 파국적인 판단이 자동적으로 달라붙는다. “의사가 내게 병이 있다고 말했다”는 인상에,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나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야”라는 절망적인 판단이 결합된다. 이 순간, 중립적이었던 사건은 우리에게 끔찍한 비극이 된다. 에픽테토스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 과정을 지적한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판타시아)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은 끔찍한 것이다’라는 우리의 판단(도그마)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의 핵심적인 실천은, 이처럼 자동적으로 결합되어버리는 인상과 판단을 의식적으로 분리해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진에서 피사체와 배경을 분리해내는 것과 같은 정신적 작업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명상록』에 이 훈련을 꾸준히 실천했다고 썼다. 그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화려한 것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위해, 그것들을 가치 중립적인 언어로 해체하여 묘사하곤 했다. 예를 들어, 값비싼 포도주는 그에게 ‘발효된 포도즙’에 불과했고, 황제의 위엄을 상징하는 자줏빛 예복은 ‘조개의 피로 물들인 양털’이었으며, 성대한 연회 음식은 ‘죽은 동물의 사체’였다. 이는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덧씌워진 사회적, 문화적 가치 판단의 허물을 벗겨내고 그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치열한 훈련이었다.


이 기술은 긍정적인 유혹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사건에 대처할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나는 모욕을 당했다. 나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분노에 휩싸인다. 그러나 훈련된 스토아 철학자는 마음속으로 이 상황을 해체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성대를 진동시켜 특정한 음파를 만들어냈다. 그 음파가 나의 고막에 도달했다. 여기까지가 일어난 사실의 전부다. 그 음파가 ‘모욕’을 의미하고 나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은, 이 사실에 내가 덧붙인 나 자신의 판단이다. 나는 이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처럼 인상과 판단을 분리할 때, 우리는 감정적 반응의 스위치를 우리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놀랍게도, 이 고대의 지혜는 현대 심리학의 최전선에 있는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의 핵심 기법인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sion)’과 정확히 일치한다. 인지적 탈융합이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우리 자신이나 객관적인 현실과 동일시하는 상태(융합)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그저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정신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나는 실패자다”라는 고통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인지적 탈융합은 그 생각 앞에 “나는 지금 ‘나는 실패자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구절을 덧붙여보라고 제안한다. 이 단순한 언어적 장치만으로도, 우리는 고통스러운 생각과 나 자신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그 생각의 지배력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게 된다. 이는 정확히 스토아 철학자들이 인상과 판단을 분리하려 했던 정신적 활동과 같다.


결국,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는 단순히 세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라는 소박한 조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과정을 명료하게 자각하고, 자동적인 반응의 사슬을 끊어내는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정신적 기술이다. 이 기술을 통해 우리는 외부 세계의 사건들이나 내면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의 노예가 되기를 멈추고, 그것들을 평온하게 바라보는 관찰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의 창이 이처럼 맑고 투명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우리 내면의 이성이 뿜어내는 빛에 따라 걸어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2절: 유식(唯識) 사상 -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인상’과 ‘판단’을 분리하라는 가르침을 통해 인식의 혁명을 보여주었다면, 대승불교의 한 흐름인 유식(唯識, Yogācāra) 사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더 급진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 마음 바깥에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단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해석’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유식 사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만약 그 ‘객관적인 실재’라고 믿었던 것마저도, 사실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유식 사상의 대담한 선언이다.


이 충격적인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유식 사상은 종종 ‘꿈’의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그 꿈속의 세계를 완벽하게 실제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꿈속에는 산과 강이 있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꿈속의 ‘나’가 되어 걷고, 뛰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모든 것, 즉 장엄한 풍경과 생생한 감정, 그리고 그 꿈속의 ‘나’ 자신마저도, 오직 내 마음이 홀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환영이었음을 깨닫는다. 유식 사상은 우리가 지금 ‘깨어있다’고 믿는 이 현실 역시, 더 길고 더 안정적이며 여러 사람이 함께 꾸는 ‘공동의 꿈’일 뿐,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외부 세계라고 믿는 저 단단한 책상과 푸른 하늘은, 사실 우리 마음이라는 영사기가 상영하고 있는 한 편의 정교한 영상과도 같다.


이 지점에서 당연한 질문이 생긴다. 만약 모든 것이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면, 왜 세상은 나름의 객관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보지 않을 때에도 저 나무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가? 또한, 왜 우리는 모두 비슷한 세계를 함께 경험하는가? 이에 대해 유식 사상은 ‘아뢰야식(ālaya-vijñāna, 阿賴耶識)’이라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아뢰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저장소’나 ‘창고’를 의미하며, 따라서 아뢰야식은 ‘창고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심층에 존재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와 같다. 우리가 과거의 수많은 생을 거치며 행했던 모든 행위와 생각, 경험들은 그 흔적을 ‘종자(bīja, 비자)’라는 잠재적 에너지의 형태로 이 창고 안에 남겨둔다. 이 무수한 종자들은 아뢰야식 안에서 잠들어 있다가, 적절한 조건과 만나면 싹을 틔워 우리의 의식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그것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나타난다. 하나는 세계를 인식하는 ‘주관(見分, 견분)’으로서의 ‘나’라는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相分, 상분)’으로서의 외부 세계다. 즉,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주체와, 내가 바라보는 ‘세계’라는 객체는 사실 같은 근원, 즉 아뢰야식이라는 하나의 창고에서 나온 두 개의 투사물(projection)에 불과하다. 우리가 공동의 세계를 경험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뢰야식이 인류 공통의 업(業)의 종자들을 함께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식 사상의 관점은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스토아 철학에서 ‘판타시아(phantasia)’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가 우리의 마음에 도장을 찍듯이 남기는 ‘인상’이다. 세계는 실재하며, 인식은 그 실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그 인상에 잘못된 판단을 덧씌우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식 사상에서 ‘인상’이란 외부 세계가 남긴 흔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아뢰야식이 스스로 만들어낸 ‘영상’이다.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상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토아의 과제가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는 것’이라면, 유식의 과제는 ‘거울에 비친 상이 사실은 거울 자체가 만들어낸 환영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의 차이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한 처방의 차이로 이어진다. 스토아 철학의 길은 ‘판단을 정화하는’ 길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훈련을 통해, 실재하는 세상 속에서 덕스러운 행위자로 바로 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유식 사상의 길은 ‘의식을 변혁하는’ 길이다. 그것은 깊은 명상과 지혜를 통해,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마음이 만든 환영임을 깨닫고, 아뢰야식의 투사 활동 자체를 멈추게 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의식을 돌려 지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토아 철학과 유식 사상은 둘 다 고통의 원인을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의 마음에 돌리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리키는 마음의 역할과 깊이는 다르다. 스토아는 우리가 세상에 대한 ‘반응’을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식 사상은 우리가 세상 ‘자체’의 창조에 책임이 있다고, 더 급진적인 통찰로 우리를 이끈다. 스토아 철학이 외부의 폭풍우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기술을 우리에게 주었다면, 유식 사상은 그 폭풍우 자체가 내 마음의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였음을 깨닫게 하는 더 깊은 고요로 우리를 안내한다.



3절: 현상학과 판단중지(Epoché) - 세계를 괄호 안에 넣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인상’과 ‘판단’을 분리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창을 닦아내려 했던 노력은, 20세기에 이르러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이 창시한 현상학 (Phenomenology)이라는 철학 속에서 놀랍도록 정교하고도 급진적인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현상학의 유명한 구호는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이다. 이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선입견과 이론, 과학적 지식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오직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철학적 시도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후설이 제시한 핵심적인 방법론이 바로 ‘판단중지(epoché, 에포케)’이며, 이는 스토아의 훈련과 깊은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목적지를 향한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평소 ‘자연적 태도(natürliche Einstellung)’ 속에서 살아간다. 자연적 태도란, 우리가 지금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이 세계가 나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저기 바깥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의심 없이 믿는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다. 우리는 책상이 존재하고, 나무가 존재하며,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현상학적 ‘에포케’는 바로 이 ‘자연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에포케(ἐποχή)’는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단어로, ‘판단을 보류한다’ 혹은 ‘중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후설은 이 단어를 빌려와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다. 후설의 에포케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이 정말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두고,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연극을 보는 관객의 태도와 같다. 자연적 태도 속에서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와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들이 실존 인물인 것처럼 울고 웃는다. 그러나 에포케를 수행하는 것은, 잠시 뒤로 물러나 ‘저 배우가 연기하는 햄릿이 진짜 덴마크의 왕자인가?’라는 질문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저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 무대의 조명과 음악이 어떻게 내 안에서 비극적인 햄릿의 ‘체험’을 만들어내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바꾼다. 즉,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오직 우리의 의식에 그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현상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에포케의 방법론은 스토아 철학의 인상과 판단의 분리 훈련과 놀라운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두 실천 모두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과정에 의식적인 ‘멈춤’을 도입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스토아 철학자는 어떤 인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자동적으로 내리는 것을 멈춘다. 현상학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존재 판단을 자동적으로 내리는 것을 멈춘다. 둘 다 우리의 즉각적인 믿음의 체계에 괄호를 치고, 한 걸음 물러서서 순수한 현상 그 자체를 바라보려는 시도다. 둘 다 우리를 자연적 태도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켜, 우리 자신의 의식 활동을 명료하게 성찰하도록 이끄는 인식의 정화(淨化) 과정이다.


그러나 두 ‘멈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토아 철학의 판단중지는 철저히 ‘윤리적’이고 ‘치료적’인 목적을 가진다. 스토아 철학자는 외부적인 사건에 대한 성급한 가치 판단을 멈춤으로써, 자신을 격정(파토스)의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고, 마음의 평정(아파테이아)을 얻어 덕스러운 삶을 살고자 한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실천적인 기술이다.


반면, 현상학의 에포케는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목적을 가진다. 후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모든 가정을 괄호 안에 넣음으로써,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모든 학문의 확실한 토대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엄밀한 철학적 방법론이다.


또한, ‘괄호 안에 넣는’ 범위에서도 차이가 있다.


스토아의 괄호는 선택적이다. 그들은 오직 부, 건강, 명예와 같은 ‘무관한 것들’에 대한 가치 판단만을 괄호 안에 넣는다. 그들은 우주가 이성적인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는 실재하는 세계라는 근본적인 믿음은 결코 괄호 안에 넣지 않는다. 오히려 그 믿음이 모든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


그러나 현상학의 괄호는 전면적이다. 에포케는 우리가 당연하게 믿는 일상 세계의 존재뿐만 아니라, 과학적 법칙과 심지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까지도 남김없이 괄호 안에 넣고 판단을 중지한다.


스토아의 실천과 현상학의 에포케는 둘 다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일상적인 믿음의 감옥’에서 깨어나게 하는 강력한 도구다. 이 두 위대한 ‘멈춤’의 기술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연주회를 앞두고 극심한 무대 공포에 시달리는 한 피아니스트의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의 마음은 “수많은 관객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만약 내가 실수하면, 그들은 나를 비웃고 비난할 것이다. 이것은 끔찍한 실패이며, 나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믿음의 감옥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때 스토아 철학을 훈련한 피아니스트는 이 감옥의 벽에 금을 내기 위해 ‘판단’을 분리하는 망치를 꺼내 든다. 그의 목표는 이 상황에서 훌륭한 ‘행위자’가 되어, 자신의 역할을 덕스럽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여기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의 반응, 그들의 박수나 비난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연주 도중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사소한 실수 또한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음표를 나의 최선의 의지와 집중을 다해 연주하려는 나의 ‘선택’뿐이다.” 그는 ‘실수는 끔찍한 실패’라는 감정적 편견의 얼룩을 닦아내고, ‘실수는 그저 실수일 뿐,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이성적 판단으로 대체한다. 이 ‘멈춤’을 통해, 그는 자신을 마비시키던 두려움의 에너지를, 연주에 온전히 몰입하는 고요한 집중의 에너지로 변성시킨다. 그는 관객의 반응이라는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의 평온을 지켜내고,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더 나은 행위자’가 된다.


반면, 현상학을 훈련하는 피아니스트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망치를 꺼내 든다. 그의 목표는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 공포’라는 경험의 본질을 이해하는 ‘순수한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에포케를 수행하여, ‘저기 바깥에 정말로 관객이 존재하는가? 이 피아노는 실재하는가? 나의 두려움은 실재하는가?’라는 믿음 자체를 괄호 안에 넣고 판단을 중지한다. 이제 그의 관심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의식 내부로 향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대 공포’라는 이 현상은 나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그것은 ‘차가워지는 손의 감각’, ‘빠르게 뛰는 심장의 느낌’, ‘나를 비난하는 얼굴들의 이미지’, ‘미래에 대한 불안한 생각’과 같은 수많은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경험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실재성에 대한 믿음 자체를 닦아냄으로써,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는’ 행위자가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순수한 의식의 공간이 된다. 그는 ‘더 순수한 관찰자’가 됨으로써, 그 현상 자체의 지배력에서 벗어난다.


이 두 위대한 ‘멈춤’의 기술은 2천 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둘 다 우리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자유를 선물한다.


스토아의 실천은 우리에게 실재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도덕적, 감정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는 ‘윤리적 자유’를 준다.


반면, 현상학의 에포케는 우리 의식이 어떻게 세상을 구성하는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실재한다고 믿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인식론적 자유’를 준다.


이 두 길은 진정한 앎이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믿음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거리를 둘 수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절: 언어라는 감옥 - 우리가 쓰는 말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가


우리가 ‘인상’과 ‘판단’을 분리하는 스토아의 훈련을 더 깊이 파고들 때, 우리는 그 ‘판단’이라는 것이 대부분 ‘언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언어는 우리가 현실을 묘사하는 중립적인 도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로 세상을 재단하고 채색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우리는 우리가 말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말들이 오히려 우리를 사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의 경험을 특정한 틀 안에 가두고,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언어의 힘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경계하라고 가르쳤을 때, 그것은 곧 ‘부정확하고 가치 편향적인 언어’를 경계하라는 말과 같았다.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언어를 정밀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나는 끔찍한 불행을 당했다”고 말하지 말고, “나의 아내가 죽었다”고, 즉 일어난 사실 자체만을 말하라고 가르쳤다. ‘끔찍한 불행’이라는 표현은 사실에 대한 주관적이고 극적인 해석, 즉 판단이 덧붙여진 언어다. 반면, ‘아내가 죽었다’는 것은 그 판단이 제거된, 훨씬 더 객관적인 현실의 묘사다. 스토아의 실천은 이처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동적인 서술을 멈추고, 현실을 가장 가치 중립적으로 묘사하는 언어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일종의 ‘언어적 위생(linguistic hygiene)’ 관리와 같다.


이 고대의 통찰은 20세기에 이르러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orzybski)와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The map is not the territory)”라는 유명한 명제로 체계화되었다. 여기서 ‘영토’는 우리가 경험하는 무한히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제 현실을 의미한다. 반면, ‘지도’는 그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단어, 개념을 의미한다. ‘물’이라는 단어는 결코 젖어있지 않으며, 식당의 메뉴판은 음식 그 자체가 아니다. 지도는 영토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영토의 극히 일부만을 추상화하고 단순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잊고, 지도를 영토 그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실패’라는 단어, 즉 지도에 반응하면서, 마치 그 단어가 복잡하고 다층적인 실제 상황(영토)의 전부인 것처럼 절망한다. 어떤 사람에게 ‘게으른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때로는 부지런하고, 때로는 사려 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존재라는 실제 영토를 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닌, 우리가 만든 ‘게으르다’는 지도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언어는 이처럼 살아있는 현실을 박제하여, 우리가 스스로 만든 개념의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


더 나아가,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과 같은 현대 언어학의 이론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 자체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가설은 크게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언어 결정론’이라 불리는 강한 버전은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완전히 결정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틀을 벗어나는 생각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오늘날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언어 상대성’이라는 약한 버전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무엇에 더 쉽게 주의를 기울이고,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범주화하며, 특정 사고를 얼마나 쉽게 할 수 있는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러한 언어의 영향력은 여러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고전적인 예는 ‘색깔’에 대한 인식이다. 러시아어에는 한국어의 ‘파란색’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대신 연한 파랑(goluboy)과 진한 파랑(siniy)을 나타내는 두 개의 독립된 기본 단어가 있다. 따라서 러시아어 화자들은 두 가지 다른 색조의 파란색을 우리보다 더 빠르고 명확하게 구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그들의 눈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일상적으로 그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 또한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 한국어에서는 ‘오른쪽’, ‘왼쪽’, ‘앞’, ‘뒤’와 같이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위치를 설명하는 상대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원주민 언어(예: 구우구 이미디르어)에는 이런 상대적인 표현이 없고, 오직 ‘동쪽’, ‘서쪽’, ‘남쪽’, ‘북쪽’과 같은 절대적인 방향만을 사용한다. 그들은 “네 남쪽 발에 개미가 있어”라고 말한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몸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인지하는, 뛰어난 방향 감각을 지니게 된다.


‘시간’에 대한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영어권 문화에서 시간은 마치 돈과 같아서 ‘쓰고(spend)’, ‘절약하고(save)’, ‘낭비하고(waste)’, ‘빌리는(borrow)’ 대상이다. 이러한 언어적 비유는 시간을 측정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선형적인 자원으로 인식하게 하여, 우리를 ‘마감 시간’이라는 강박적인 불안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만약 어떤 문화권의 언어가 시간을 흐르는 강물이나 순환하는 계절과 같은 자연 현상으로만 묘사한다면, 그들에게 시간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흐름이 될 것이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현대 언어학의 통찰은 스토아 철학의 실천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일상 언어에 이미 스며들어 있는 수많은 비합리적인 가치 판단과 감정적 편견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끔찍한 재앙’, ‘참을 수 없는 모욕’, ‘엄청난 행운’과 같은 표현들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강력한 언어적 습관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죽음’을 ‘자연스러운 해체 과정’으로, ‘모욕’을 ‘타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소리’로 의식적으로 재정의하려 했던 노력은, 바로 이 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원리에 맞는 새로운 ‘언어 습관’을 만듦으로써, 고통을 유발하는 낡은 ‘사고 습관’ 자체를 바꾸고자 했다. 이는 언어 상대성 원리를 활용하여, 의식적인 언어의 재구성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대를 앞서간 심리 치료적 시도였던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스토아 철학의 실천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죽음’을 ‘끔찍한 재앙’ 대신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부르기를 훈련하고, ‘모욕’을 ‘상처’ 대신 ‘타인의 무지한 발언’이라고 재정의하려 했던 것은, 사실상 자신들을 지배하는 일상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평온과 덕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새로운 ‘철학적 언어’를 배우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언어 습관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인지적, 감정적 현실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통찰은 우리에게 삶의 고통을 다스리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의식적인 언어 사용’이다. 이것은 우리가 내면에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외부적으로 타인에게 사용하는 단어들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연금술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대신, “이것은 나에게 어려운 도전이군”이라고 언어를 바꾸어보라. ‘문제’라는 단어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벽을 연상시키지만, ‘도전’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용기와 성장을 촉구하는 계단을 연상시킨다.


또한,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대신, “나는 지금 불안이라는 감각을 느끼고 있다”고 묘사해보라. 첫 번째 문장은 ‘나’라는 영토 전체를 ‘불안’이라는 지도와 동일시하여 꼼짝 못하게 만든다. 두 번째 문장은 ‘나’라는 관찰자와 ‘불안’이라는 일시적인 현상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내가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바라볼 힘을 준다.


언어는 우리 영혼의 집을 짓는 벽돌과 같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부정확하고 극적인 단어들은 우리의 감옥을 짓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명료하고 가치 중립적인 단어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신전을 짓는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주인이 될 때 시작된다. 언어를 현실과 혼동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현실을 더 명료하게 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언어라는 감옥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올 수 있다.




5절: 마음의 창을 맑게 닦는 법 - 스토아적 명상


우리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는 문과 같다. 그 문을 통해 매 순간 세상의 온갖 인상(phantasia)들이 손님처럼 드나든다. 어떤 손님은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어떤 손님은 불안과 분노라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쳐들어온다. 스토아 철학의 실천이란, 바로 이 마음의 문을 지키는 현명하고 강인한 문지기가 되는 훈련이다. 문지기의 목표는 모든 손님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문을 통과하는 모든 인상을 주의 깊게 살피고, 오직 이롭고 진실한 것만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 ‘정신적 문지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스토아 현자들은 네 가지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첫째, 인상의 정체를 밝혀라: “너는 단지 인상일 뿐, 네가 보이는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에 들어서는 모든 손님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자, 가장 강력한 방어 주문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어떤 거친 인상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즉시 이렇게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가르쳤다. “너는 하나의 인상일 뿐, 네가 주장하는 그 실체와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당신이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려 할 때, 갑자기 심장이 뛰고 손바닥에 땀이 나는 감각과 함께 “나는 실패할 거야, 모두가 나를 비웃을 거야”라는 생각이 덮쳐온다고 해보자. 이것이 바로 ‘거친 인상’이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이 인상을 진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훈련된 문지기는 이 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정체를 밝힌다. “잠깐, 너는 ‘실패’라는 실체가 아니다. 너는 단지 나의 심장이 빨리 뛰는 감각과,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상상이 결합된 하나의 ‘인상’일 뿐이다.” 이처럼 인상에 이름표를 붙이고 그것이 객관적인 실체가 아닌,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정신적 사건’임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인상과 나 자신 사이에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이 거리가 바로 우리가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둘째, 반응을 지연시켜라: “기다려라, 내가 너를 시험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의 문을 통과하려는 인상은 종종 매우 긴급하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다그친다. 특히 분노나 두려움과 같은 격정적인 인상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스토아의 두 번째 지침은 바로 이 다급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시간을 버는 것이다. 세네카가 분노에 대한 가장 위대한 치료법은 ‘지연’이라고 말했듯이, 모든 격정은 그 첫 순간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라는 물 앞에서는 그 불길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의 첫 번째 충동은 즉시 분노에 찬 답장을 써서 보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스토아의 문지기는 이 충동을 억제하고 스스로에게 규칙을 부여한다. “나는 이 인상에 대해 최소한 한 시간, 혹은 내일 아침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 이 의도적인 지연의 시간 동안, 최초의 격렬했던 감정의 파도는 점차 잔잔해진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이성은 비로소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무엇이 가장 현명하고 덕스러운 대응인지를 판단할 여유를 되찾게 된다. 이 ‘기다림의 기술’은 우리가 인상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우리 반응의 주인이 되도록 만드는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셋째, 인상의 화장을 벗겨내라: “너의 본질을 벌거벗겨 보라.”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많은 인상들은 화려한 수사, 사회적 평판, 감정적인 드라마라는 두꺼운 화장을 하고 있다. 세 번째 지침은 이 모든 인위적인 화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감추어진 본질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기술의 대가였다. 그는 사람들이 탐하는 값비싼 요리를 ‘동물의 사체’로, 화려한 자줏빛 황제복을 ‘조개의 피로 물들인 양털’로 묘사하며, 그것들에 덧씌워진 환상을 의도적으로 깨뜨렸다.


이 기술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인상이 찾아올 때, 우리는 그것을 ‘모든 것의 끔찍한 끝’이라는 드라마틱한 언어로 생각하는 대신, 스토아 철학자처럼 그것을 벌거벗겨 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구성했던 원소들이 자연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무언가로 재결합되는 우주적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또한, 실직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가? “그것은 나의 생계 수단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편한 일이지만, 나의 이성과 덕을 파괴하는 일은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길을 모색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인상의 겉모습을 장식하는 극적인 언어를 제거하고, 그것을 가치 중립적이고 물리적인 언어로 재구성할 때, 인상은 우리를 지배하던 마법적인 힘을 잃고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하나의 평범한 사건으로 돌아온다.


넷째, 통제권을 확인하라: “너는 내게 달린 일인가, 아닌가?”


이것은 마음의 문지기가 사용하는 최종적인 검문 도구다. 문 앞에 도착한 모든 인상에 대해, 문지기는 이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는가, 아니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가?” 이 질문은 모든 혼란을 정리하는 가장 명료한 기준이 된다.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인상이 찾아온다. 문지기는 묻는다. “날씨가 내게 달린 일인가?” 대답은 ‘아니오’다. 그렇다면 이 인상에 덧붙은 ‘걱정’이라는 판단은 불필요하다. 즉시 폐기하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 즉 우산을 챙기는 일에만 집중한다. “나는 이 발표를 완벽하게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의 인상이 찾아온다. 문지기는 묻는다. “결과의 완벽함이 내게 달린 일인가?” 대답은 ‘아니오’다. 청중의 반응이나 돌발 변수는 통제 불가능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발표하는 과정’뿐이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헛된 곳에 쓰이던 정신적 에너지를 회수하여, 오직 우리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 네 가지 지침은 마음의 창을 맑게 닦아내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손걸레질과 같다. 인상의 정체를 밝히고, 반응을 지연시키며, 그 화장을 벗겨내고, 통제권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밀려드는 혼란스러운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인상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을 차분히 검토하고, 이성이라는 빛 아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며, 평온 속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내면 세계의 현명한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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