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철학자를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은 차갑고 냉정하며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돌과 같은 인간을 상상한다. ‘스토익(stoic)’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늘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는’ 태도를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스토아 철학의 가장 깊은 오해 중 하나다. 스토아 철학의 목표는 감정을 제거하여 메마른 영혼의 사막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영혼의 정원을 가꾸는 정교한 기술을 통해, 우리를 병들게 하는 독초와 같은 감정들은 제거하고,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건강한 감정들을 키워내고자 했다. 그들의 목표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영혼의 평온이었다. 이 위대한 과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토아 철학자들이 ‘나쁜 격정’과 ‘좋은 감정’ 사이에 그었던 날카롭고도 분명한 경계선을 이해해야 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파토스(pathos, πάθος)’라 불리는 감정이다. 오늘날 ‘연민’이나 ‘감동’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이 단어는,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는 ‘질병’, ‘고통’, ‘수동적 상태’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용어였다. 파토스는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영혼의 평온을 파괴하는 일종의 ‘정신적 질병’으로 간주되었다. 스토아 철학의 가장 혁신적인 통찰은, 이 질병의 원인이 우리 통제 밖의 동물적인 본능이나 외부적인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있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다. 파토스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이 아니라, 내면의 이성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발생하는 반란이다.
이 반란은 두 단계의 잘못된 판단을 거쳐 일어난다.
첫째는 ‘가치 판단의 오류’다. 우리는 돈을 잃거나,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외부의 사건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 잘못 판단한다. 이는 오직 덕만이 선이고 악덕만이 악이라는 스토아의 근본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둘째는 ‘반응에 대한 오류’다. 우리는 그 ‘나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적절하고 당연한 반응’이라고 또다시 잘못 판단한다. 이 두 번째 판단에 ‘동의(sunkatathesis)’하는 순간, 우리의 이성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파토스라는 격정의 폭풍이 영혼을 휩쓸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다가 실수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발표 실수’라는 사건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일이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속에서 “나는 바보같이 보였어. 모두가 나를 비웃을 거야. 이것은 끔찍한 실패다”라는 첫 번째 가치 판단이 일어난다. 그리고 곧이어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수치심을 느끼고 괴로워해야 마땅하다”는 두 번째 판단이 뒤따른다. 이 두 판단에 당신이 동의하는 순간, 수치심과 불안이라는 파토스가 당신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파토스를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분류했다. 현재의 악(惡)에 대한 비이성적 판단인 ‘고통(lupē, 루페)’, 미래의 악에 대한 비이성적 판단인 ‘두려움(phobos, 포보스)’, 미래의 선(善)에 대한 비이성적 판단인 ‘욕망(epithumia, 에피투미아)’, 그리고 현재의 선에 대한 비이성적 판단인 ‘쾌락(hēdonē, 헤도네)’이 그것이다. 여기서 ‘쾌락’마저 나쁜 격정으로 분류된 이유는, 그것이 외부적인 것에 대한 비이성적인 집착에서 비롯되어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토아 현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현자는 파토스가 사라진 텅 빈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파테이아이(eupatheiai, εὐπάθειαι)’라 불리는 ‘좋은 감정’의 상태에 있다. ‘좋다(eu)’와 ‘감정(pathos)’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잘못된 판단이 아닌 ‘올바른 판단’에서 비롯되는, 이성적이고 건강한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격렬한 파도가 아니라, 깊고 고요한 바다의 움직임과 같다.
좋은 감정은 나쁜 격정과 그 구조가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현자는 미래의 진정한 선, 즉 ‘덕’을 향한 합리적인 바람을 가지는데, 이것이 바로 ‘의지(boulēsis, 불레시스)’다. 이는 비이성적인 ‘욕망’을 대체한다. 또한 현자는 미래의 진정한 악, 즉 ‘악덕’을 피하려는 합리적인 조심스러움을 지니는데, 이것이 ‘신중함(eulabeia, 에울라베이아)’이다. 이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대체한다. 마지막으로, 현자는 현재 자신의 영혼에 존재하는 진정한 선, 즉 ‘덕’을 바라보며 느끼는 깊고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바로 ‘환희(khara, 카라)’다. 이는 외부적인 것에 의존하는 덧없는 ‘쾌락’을 대체한다. 흥미롭게도 ‘고통’에 상응하는 좋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자에게 진정한 악은 오직 악덕뿐이며, 현자는 악덕을 행하지 않으므로, 그의 현재에는 고통스러워할 만한 진정한 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아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는 기술이다. 파토스는 외부의 사건에 나의 행복을 저당 잡힌 노예의 감정이다. 반면 유파테이아는 오직 내면의 덕에만 의존하기에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유인의 감정이다. 이 구분은 우리에게 놀라운 희망을 준다. 우리의 감정적인 삶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통해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정원이라는 것이다. 이 정원에서 어떤 꽃을 피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2절: 불교의 번뇌(kleshas) -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앞서 스토아 철학이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진단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에게 고통은 ‘파토스(pathos)’, 즉 영혼의 질병이며, 그 원인은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잘못된 이성적 판단’에 있었다. 이는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고통스러운 증상(감정)을 보고, 그 원인이 되는 잘못된 생활 습관(판단)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명쾌하고도 강력한 진단이다. 그러나 만약, 그 잘못된 생활 습관 자체가 더 깊고 근원적인 어떤 ‘체질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습관을 교정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체질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의 영혼을 치료해온 또 다른 위대한 의학 전통, 즉 불교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불교 역시 고통의 원인이 우리 내면에 있음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원인을 의식적인 ‘판단’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잠재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오염시키는 근원적인 독소에서 찾았다. 스토아가 이성의 오작동을 문제 삼았다면, 불교는 그 이성이 작동하는 토대 자체의 오염을 문제 삼은 것이다. 불교는 이 마음의 근원적인 오염 물질을 ‘클레샤(klesha, क्लेश)’, 한역(漢譯)하여 ‘번뇌(煩惱)’라고 불렀다.
‘클레샤’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고통’, ‘괴로움’, ‘아픔’, ‘더러움’ 등을 의미하는 폭넓은 단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표면적인 감정(vedanā, 웨다나)과는 다르다. 클레샤는 그 감정들을 유발하는 더 깊은 차원의 ‘정신적 오염원’이자 ‘마음의 독소’다. 예를 들어, 끓는 물(고통스러운 감정)이 있다면, 클레샤는 그 물을 계속해서 끓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불과 같다. 불을 끄지 않는 한, 물은 계속해서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의 번뇌를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번뇌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못하고, 항상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라는 욕망과 혐오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며, 그 왜곡된 인식의 결과로 필연적인 괴로움을 겪는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수많은 종류의 번뇌를 상세하게 분석하지만, 그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되는 세 가지 가장 강력한 독소, 즉 ‘삼독(三毒, triviṣa)’을 지목한다. 이 세 가지 독은 서로를 먹이 삼아 자라나며, 우리의 삶을 고통의 수레바퀴 속에 단단히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
첫 번째 독이자 모든 번뇌의 근원은 ‘치(癡, moha, 모하 또는 avidyā, 아비드야)’, 즉 ‘어리석음’ 혹은 ‘무명(無明)’이다. 여기서의 어리석음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실상, 즉 이 우주와 ‘나’라고 부르는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근본적인 착각이자 무지다. 붓다는 우리가 이 무지의 안개 속에서 세 가지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가르쳤다. 첫째는 ‘무상(無常, anicca)’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육체와 감정, 생각,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진실이다. 둘째는 ‘무아(無我, anattā)’이다. 이 모든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라고 부를 만한 독립적이고 영원하며 고정된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진실이다. ‘나’는 그저 몸과 마음의 여러 요소들이 잠시 인연에 따라 결합하여 작동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 그 안에 영원한 주인은 없다. 셋째는 ‘고(苦, dukkha)’이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실체도 없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들에 의지하여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는 반드시 좌절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이다. 이 세 가지 존재의 근본적인 특징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 이것이 바로 모든 번뇌가 자라나는 비옥한 토양이다.
이 무지의 토양 위에서 두 번째 독인 ‘탐(貪, rāga, 라가 또는 lobha, 로바)’, 즉 ‘탐욕’ 혹은 ‘갈애’가 싹을 틔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쾌락이나 재물, 명예와 같은 즐거운 대상을 만나면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강하게 집착한다. 이것이 ‘나’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SNS의 ‘좋아요’ 개수에 집착하고, 새로운 스마트폰 모델에 열광하며,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한다. 이 모든 것이 탐욕의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무상한 세상 속에서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붙잡을 수는 없기에, 탐욕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라는 고통을 낳는다.
무지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또 다른 독초는 세 번째 독인 ‘진(瞋, dveṣa, 드웨샤 또는 doṣa, 도사)’, 즉 ‘성냄’ 혹은 ‘혐오’다. 우리는 세상이 본래 불만족스러운 것(苦)임을 모르기 때문에, 질병이나 늙음, 비난이나 실패와 같은 불쾌한 대상을 만나면 그것이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부당한 침입자라고 착각하고 강하게 밀어내려 한다. 이것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분노와 증오, 혐오감을 키운다. 우리는 교통체증에 분노하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을 미워하며,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혐오한다. 그러나 불쾌한 경험 역시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이기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우리 자신을 끝없는 투쟁과 긴장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며, 결국 우리 자신을 불태우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불교의 진단은 스토아의 그것과 어떤 점에서 만나고 어떤 점에서 갈라지는가. 두 사상 모두 고통의 원인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놀라운 통찰의 일치를 보여준다. 스토아의 파토스가 ‘잘못된 판단’이라는 이성의 오류에서 비롯되고, 불교의 번뇌는 ‘무지’라는 인식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둘 다 우리의 인지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으로 일종의 정신적 훈련과 깨달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진단의 깊이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스토아 철학에서 파토스는 주로 ‘의식적인 판단’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따라서 그것은 이성적인 논증과 의지적인 훈련을 통해 교정될 수 있다. 이는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의 잘못된 코드를 찾아내 수정하는 작업과 같다. 반면, 불교의 번뇌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수많은 생을 거치며 쌓아온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업(業, karma)’의 경향성(samskara, 삼스카라)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프로그램의 버그가 아니라, 운영체제 자체에 깊이 각인된 바이러스와 같다. 따라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설득을 넘어, 명상(vipassanā, 위빠사나)과 같은 수행을 통해 마음의 가장 깊은 층으로 내려가 존재의 실상을 직접 체험하고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스토아 철학과 불교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같은 질병에 대해 서로 다른 깊이의 처방전을 내놓는다. 스토아의 가르침은 우리의 이성적인 마음을 다스리는 탁월한 지침서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감정적 혼란에 대해, ‘판단’의 주도권을 되찾음으로써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그 판단의 주체인 ‘나’라는 생각 자체가 어떻게 고통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집착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뽑아내도록 이끈다.
스토아가 내면의 왕국을 현명하게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면, 불교는 그 왕좌마저 텅 비어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위대한 해탈자’의 길을 보여준다. 이 두 지혜는,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려는 인류에게 때로는 견고한 배가 되어주고, 때로는 헤엄치는 법 그 자체가 되어줄 것이다.
3절: 감정은 생각의 결과물이다 - 인지행동치료(CBT)의 스토아적 기원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2천 년 전, 노예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남긴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감정적 고통에 대한 가장 혁명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 외부의 사건에 의해 직접적으로 유발된다고 믿는다. “그 사람이 나를 모욕했기 때문에 나는 화가 났다”거나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이것이 하나의 인지적 착각이라고 단언한다. 사건과 감정 사이에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계, 즉 ‘판단’ 혹은 ‘생각’의 단계가 있으며, 우리의 감정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생각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20세기 중반에 등장하여 오늘날 가장 효과적인 심리 치료법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Behavioral Therapy, CBT)는 바로 이 스토아 철학의 오래된 지혜를 현대 과학의 언어로 재발견한 것이다.
인지행동치료의 창시자들인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와 아론 벡(Aaron T. Beck)은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와 같은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탐구하던 중, 환자들이 현실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특정한 ‘자동적 사고’와 ‘비합리적 신념’의 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왜곡된 생각의 틀을 교정함으로써 환자들의 감정과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엘리스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ABC 모델’이라는 매우 간단하고도 강력한 틀을 제시했다.
A는 ‘선행 사건(Activating Event)’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황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상황(A)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C는 ‘결과(Consequence)’로, 그 사건 이후에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적, 행동적 반응을 의미한다. 이 경우, 당신은 극심한 불안감과 버림받은 듯한 슬픔(C)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은 A가 직접적으로 C를 유발했다고, 즉 ‘연인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불안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지행동치료는 진짜 원인이 그 둘 사이에 숨어있는 B, 즉 우리의 ‘신념 체계(Belief System)’에 있다고 말한다. 같은 사건(A)을 겪더라도, 어떤 신념(B)을 가지고 그 사건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C)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연인이라면 내 전화를 즉시 받아야만 한다. 받지 않는 것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라는 비합리적인 신념(B)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불안과 슬픔(C)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는 지금 바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전화 한 통으로 우리의 관계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나중에 연락이 오겠지”라는 합리적인 신념(B)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약간의 궁금증은 느낄지언정 파괴적인 감정에는 휩싸이지 않고 평온(C)을 유지할 수 있다.
이 ABC 모델은 스토아 철학의 감정 이론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외부의 사건, 즉 ‘인상(phantasia)’은 CBT의 ‘선행 사건(A)’과 같다. 그 인상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판단’과 그에 대한 ‘동의(sunkatathesis)’는 ‘신념 체계(B)’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결과로 발생하는 ‘격정(pathos)’은 감정적 ‘결과(C)’와 다르지 않다. 인지행동치료의 핵심적인 과정, 즉 비합리적인 신념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고(Disputation), 더 효과적인 새로운 신념(Effective New Belief)을 세우는 과정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판단을 검토하고 이성에 따라 교정했던 ‘철학적 수련’의 현대적 버전인 셈이다.
물론 두 접근법 사이에는 그 궁극적인 목표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인지행동치료는 주로 우울증이나 불안과 같은 구체적인 심리적 증상을 완화하고 개인이 더 건강하게 기능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스토아 철학은 단순히 증상을 없애는 것을 넘어, 우주의 이성적 질서(로고스)와 조화를 이루는 ‘덕이 있는 삶’ 전체를 목표로 하는 포괄적인 삶의 철학이다. CBT가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의술이라면, 스토아 철학은 평생에 걸쳐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생활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위대한 지혜의 흐름이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 외부에서 오는 불가항력적인 파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물결이라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부여한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감정의 희생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을 현명하게 다스림으로써 내면의 평온이라는 바다를 스스로 창조해나갈 수 있는 주체임을 알려준다. 2천 년 전 아테네의 주랑 현관에서 울려 퍼졌던 철학자의 목소리는, 오늘날 상담실의 안락의자 위에서 과학의 언어로 다시 한번 우리 영혼의 치유를 위한 가장 강력한 진실을 속삭이고 있다.
4절: 격정의 해부 - 분노, 두려움, 욕망의 뿌리 탐색
우리는 스토아 철학이 격정(파토스, pathos)을,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영혼의 질병’으로 진단했음을 확인했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이자 영혼의 외과의사가 되어, 우리를 가장 격렬하게 뒤흔들고 가장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세 가지 대표적인 격정, 즉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욕망의 내면을 해부해 보아야 한다. 이성의 날카로운 메스를 사용하여 이 격정들의 해부학적 구조를 드러내고, 그것들이 어떤 잘못된 신경과 뼈대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명확히 밝혀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삶에서 도려낼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작업은 단순한 지적 분석이 아니라, 우리를 고통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수술 과정이다.
첫 번째 해부 대상은 가장 뜨겁고 파괴적인 격정인 ‘분노’다. 분노는 종종 우리에게 정당하고도 필요한 감정처럼 느껴진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며, 분노는 불의에 맞서 싸울 힘을 준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그의 저서 『분노에 관하여, De Ira』에서 분노를 ‘일시적인 광기’라고 단언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백해무익한 가장 위험한 격정이라고 경고한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잘못된 판단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첫째, “나는 부당하고 심각한 해(害)를 입었다”는 판단이다. 누군가 나를 모욕하거나 내게 손해를 입혔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나의 존엄성이나 행복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 ‘나쁜 일’이라고 즉각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의 근본 원리에 따르면, 유일하게 나쁜 것은 ‘악덕’뿐이며, 타인의 행동이나 재산의 손실과 같은 외부적인 일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관한 것(아디아포라, adiaphora)’이다. 따라서 타인의 무례한 행동이 나의 내면적 덕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나에게 진정한 ‘해’가 될 수 없다. 분노는 외부의 사건이 나의 핵심적인 자아를 해칠 수 있다는 이 첫 번째 착각에서 싹튼다.
둘째, “상대방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해를 입혔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행동을 최악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나를 공격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상기시켰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은 무엇이 진정으로 좋고 나쁜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게 행동할 뿐이다. 상대방의 행동을 악의가 아닌 무지의 결과로 재해석할 때, 분노의 불길은 그 연료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셋째, “복수는 정당하고도 필요한 대응이다”라는 판단이다. 우리는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세네카는 복수가 결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 자신을 분노라는 감옥에 더 깊이 가두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한다. 분노에 휩싸여 행동할 때, 우리는 이성을 잃고 우리 자신마저 상대방과 똑같이 비이성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최고의 복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너의 적과 같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분노는 외부의 사건에 대한 일련의 왜곡된 해석과 비합리적인 판단들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착각의 성채다.
두 번째 해부 대상은 현대인들을 가장 널리 잠식하고 있는 격정인 ‘두려움’과 그 만성적인 형태인 ‘불안’이다. 스토아 철학은 이를 ‘포보스(phobos, φόβος)’라고 불렀다. 두려움 역시 하나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며, 만약 그 일이 일어나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판단이다.
이 판단의 첫 번째 부분, 즉 “미래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는 통제권의 이분법을 망각한 것이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영역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현재라는 유일한 시간을 낭비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다. 또한, 설령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해도(예를 들어, 직업을 잃거나 병에 걸리는 것), 그것이 정말로 ‘나쁜 일’인가? 스토아 철학자에게 그것은 악이 아니라, 자신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지혜라는 덕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
판단의 두 번째 부분인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는 우리 자신의 내면적 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여기며, 미래의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러나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주(혹은 신)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결코 주지 않는다. 어떤 시련이 닥치든, 우리 안에는 그것에 맞설 수 있는 이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이미 주어져 있다. 두려움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내면의 힘을 불신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결과다. 이 두려움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 바로 ‘악의 예행연습(praemeditatio malorum)’이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대처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봄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구체적인 대응 계획으로 바꿀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미지의 공포는 힘을 잃게 된다.
마지막 해부 대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달리게 만드는 격정인 ‘욕망’이다. 스토아 철학은 이를 ‘에피투미아 (epithumia, ἐπιθυμία)’라고 불렀다. 욕망의 뿌리에 있는 잘못된 판단은 “나는 저 외부적인 것을 소유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대상(재물, 명예, 타인의 사랑)에 저당 잡히게 만든다.
이 판단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을 얻기 전까지는 결핍감과 조바심에 시달리고, 그것을 얻은 후에는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하나의 욕망이 채워지면, 우리의 마음은 곧바로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쾌락의 쳇바퀴’에 올라타게 된다. 스토아 철학은 이 헛된 경주를 멈추라고 말한다. 진정한 행복,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외부적인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줄임으로써 얻어진다.
이 욕망에 대한 처방은 ‘자족(autarkeia, 아우타르케이아)’의 미덕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태도다. 세네카가 제안했듯이, 의도적으로 며칠간 가난을 실천해보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얼마나 적은 것이 필요한지를 몸으로 깨닫게 해주는 강력한 훈련이다.
에픽테토스는 행복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이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가진 것만을 원하는 것이다(이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욕망은 결국,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의 가치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영혼의 질병이다.
결국,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분노와 두려움, 욕망은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거대한 군대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잘못된 판단’이라는 반역자에 의해 일어난 내란이다. 이 내란을 진압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성’이다.
스토아 철학의 실천은, 이 이성이라는 왕이 자신의 왕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판단들을 면밀히 감시하고, 반역의 낌새가 보일 때마다 즉시 그것을 논박하여 동의를 거부하는, 깨어있는 통치술이다. 이 내면의 통치권을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격정의 폭군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영혼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5절: 격정을 지혜로 변성시키는 연금술
우리는 지금까지 스토아의 격정(pathos)과 불교의 번뇌 (klesha)라는, 인간 영혼을 병들게 하는 두 가지 깊은 질병의 원인을 탐구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술은 정확한 진단에서 멈추지 않고, 그 질병을 치유하고 심지어 독을 약으로 바꾸어내는 구체적인 처방전을 제시하는 데 있다. 고대의 연금술사들이 값싼 납을 위대한 금으로 바꾸는 ‘위대한 과업(Great Work)’을 꿈꾸었듯이, 고대의 철학자들은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격정의 비천한 에너지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지혜의 순수한 황금으로 변성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을 실천했다. 격정은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니라, 변성시켜야 할 원료다. 이 변성의 비밀이야말로, 모든 철학적, 심리적 수련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진 핵심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한 연금술의 도구는 바로 ‘이성의 불꽃’이다. 그들에게 연금술이 일어나는 실험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 즉 ‘지배 이성(hēgemonikon, 헤게모니콘)’이다. 실험의 첫 단계는 ‘분리(separatio)’다. 외부로부터 어떤 사건의 인상(phantasia)이 마음에 들어올 때, 연금술사는 즉시 그것을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 하나는 ‘객관적인 사건’이라는 원석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은 끔찍하다’ 혹은 ‘이것은 반드시 필요하다’와 같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라는 불순물이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이 둘을 하나의 덩어리로 착각하고 통째로 삼켜버리지만, 훈련된 스토아 철학자는 이 둘을 날카롭게 분리하여, 불순물인 가치 판단에 대한 ‘동의’를 보류한다.
다음 단계는 ‘정화(calcinatio)’다. 분리해낸 가치 판단이라는 불순물을 이성이라는 강력한 불꽃 위에 올려놓고 그것이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리는 과정이다. 연금술사는 스스로에게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정말로 나쁜 일인가? 나의 덕을 해치지 않는 외부의 사건이 어떻게 진정으로 나쁠 수 있는가? 이 상황에서 이성적인 존재가 취해야 할 가장 현명한 반응은 무엇인가?” 이 이성의 불꽃 속에서, ‘끔찍한 재앙’으로 보였던 사건은 ‘나의 덕을 시험하고 단련할 기회’라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분노는 한 줌의 재로 변한다.
마지막 단계는 ‘재결합(coagulatio)’이다. 이제 불순물이 모두 제거된 순수한 사건에, 새롭고 이성적인 판단을 결합시켜 단단하게 굳히는 과정이다. “상사의 비판은 나를 모욕하려는 공격이 아니라, 내 작업을 개선할 기회를 주는 정보다. 나는 이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새로운 판단에 동의할 때, 처음에 느꼈던 분노와 수치심의 격렬한 에너지는 파괴적으로 폭발하는 대신, 자신을 개선하려는 차분하고도 건설적인 의지의 에너지로 변성된다. 격정이라는 값싼 납이, 지혜와 평온이라는 고귀한 황금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불교의 현자들이 사용한 연금술의 도구는 불이 아니라 ‘마음챙김의 물’이다. 그들의 실험실 역시 우리 자신의 마음이지만, 그들은 격정이라는 원료를 불로 태워 없애는 대신, 순수한 관찰의 물속에 담가 부드럽게 용해시킨다. 이 연금술의 첫 단계는 ‘용해(solutio)’다. 마음속에 분노나 욕망과 같은 번뇌(klesha)가 끓어오를 때, 연금술사는 그것과 싸우거나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 감정을 그저 조용히, 그리고 자비롭게 바라본다. “아, 지금 내 마음속에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 가슴이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지며,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는구나.”
다음 단계는 ‘해체(deconstruction)’다. 이 지속적이고도 부드러운 관찰 속에서, 분노는 ‘나의 분노’라는 단단한 실체로서의 모습을 잃고, 그저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정신적, 신체적 현상들의 덧없는 흐름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이다. ‘나’라는 주인은 본래 없으며, 분노는 그저 조건에 따라 잠시 찾아온 손님일 뿐임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 즉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에 대한 통찰 속에서, 번뇌는 더 이상 달라붙을 주인을 찾지 못하고 그 힘을 잃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승화(sublimatio)’다.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그저 하나의 에너지 현상으로 관찰된 분노는 저절로 그 기세를 잃고, 본래의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하늘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에너지는 파괴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던 집착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스토아의 연금술이 납을 금으로 ‘바꾸는’ 기술이라면, 불교의 연금술은 그 납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금이라고 착각했던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기술이다.
이 고대의 연금술들은 오늘날 인지행동치료라는 현대적인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다시 나타났다. 우리의 ‘자동적 사고’와 ‘비합리적 신념’(납)을 찾아내고, 그것을 ‘논박’하여(정화), 더 ‘합리적이고 적응적인 생각’(금)으로 대체하는 과정은 스토아의 연금술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지닌다. 또한, 감정을 판단 없이 관찰하고 수용하는 것을 강조하는 마음챙김 기반 심리치료들은 불교의 연금술과 그 뿌리를 같이 한다.
이 모든 지혜는 우리에게 하나의 공통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분노, 두려움, 슬픔과 같은 격정들은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저주나 형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 내면의 가장 위대한 변성을 위한 원재료이며, 우리를 더 깊은 지혜와 평온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 이 영혼의 연금술은 소수의 선택된 현자들만을 위한 비밀스러운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 실험실에서, 매일의 꾸준한 자기 관찰과 용기 있는 실천을 통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에 닥쳐오는 모든 고통을,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는 황금으로 바꾸어내는 위대한 연금술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