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철학의 모든 길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흐른다. 그것은 바로 ‘자연에 따라 사는 삶(vivere secundum naturam)’이라는,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윤리적 명령이다.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에서부터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한 문장을 그들 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로 삼았다. 하지만 이 명령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자연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문명을 등지고 숲으로 들어가 원시인처럼 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를 넘어, 훨씬 더 깊고 중층적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미는 ‘우주적 본성(Universal Nature)’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탐구했던 로고스(Logos)와 프네우마(pneuma)가 지배하는, 우주 전체의 질서와 법칙을 가리킨다. 스토아 학파에게 우주는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신성한 이성에 의해 완벽하게 운행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다. 계절이 어김없이 순환하고, 별들이 정해진 궤도를 돌며, 씨앗이 나무로 자라나는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우주적 본성의 드러남이다. 이 우주적 본성에 따라 사는 삶이란, 먼저 이 거대한 질서가 존재함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즉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일들(질병, 재난, 타인의 죽음, 심지어 나 자신의 죽음까지)이 결국 이 완벽한 우주적 드라마의 한 장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운명 앞에 무기력하게 체념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명한 뱃사람의 지혜와 같다. 뱃사람은 결코 바람이나 파도를 통제할 수 없다. 어리석은 뱃사람은 바람에 맞서 싸우려다 난파되지만, 현명한 뱃사람은 바람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돛을 바람의 방향에 맞게 조절하여, 바로 그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지로 나아간다. 우주적 본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내 삶의 바다에 부는 피할 수 없는 바람을 받아들이고 나의 이성이라는 돛을 현명하게 조종하는 기술이다.
두 번째 의미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Human Nature)’이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각자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사자의 본성은 용맹함에 있고, 새의 본성은 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모든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가장 핵심적인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성(reason)’이다. 인간은 단지 본능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성찰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이해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로고스의 불꽃이 우리 안에 깃든 증거다. 따라서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이성이라는 우리의 최고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동물적인 충동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삶이다. 이성적인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지혜, 정의, 용기, 절제라는 네 가지 덕(德)의 실천이다. 덕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가장 인간다운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삶이다.
스토아 철학의 위대함은 이 두 가지 의미의 ‘자연’이 결국 하나로 만난다는 통찰에 있다. 인간의 고유한 본성인 ‘이성’은 다름 아닌 ‘우주적 본성’인 로고스의 작은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이성을 갈고 닦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우주의 거대한 이성과 조율하는 과정과 같다.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덕스럽게 행동할 때, 나는 단순히 개인적인 도덕률을 지키는 것을 넘어,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교향곡에 나의 선율을 더하는 것이 된다.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하나의 명령은 이처럼 “너 자신의 가장 고귀한 본성인 이성에 따라 살라. 그러면 너는 곧 우주 전체의 본성과도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스토아의 가르침은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도가(道家)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더욱 선명해진다. 두 사상 모두 인간의 인위적인 욕망을 넘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최고의 경지로 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연’의 성격은 다르다. 스토아의 ‘자연’은 본질적으로 ‘이성적(rational)’이다. 자연을 따른다는 것은 더욱 이성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도가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spontaneous)’을 의미하며, 인위적인 이성의 분별심마저 내려놓은 더 근원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스토아의 길은 이성을 통해 충동을 제어하는 적극적인 훈련의 길이지만, 도가의 길은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부드러운 이완의 길이다.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은 스토아 철학의 모든 가르침이 응축된 실천적인 지혜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깊은 이해(자연학)와 명료한 판단력(논리학)을 바탕으로, 우리가 매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윤리학)을 제시한다. 개인적인 불행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결국에는 어떤 운명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나의 본성과 우주의 본성이 하나가 되는 조화로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2절: 무위자연(無爲自然) - 인위(人爲)를 버리고 자연의 흐름에 맡기다
스토아 철학이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을 최고의 윤리적 목표로 제시했다면, 동양의 도가(道家) 사상 역시 ‘무위자연 (無爲自然)’이라는 말로 그들만의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이야기했다. 두 사상 모두 인간의 인위적인 욕망과 계획이 고통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더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깊은 공명을 이룬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연’의 의미와 그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킨다. 이 차이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동서양의 지혜가 인간의 행복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얼마나 다른 지도를 그려냈는지를 보여준다.
도가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自然)’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여기서의 자연은 산과 강 같은 풍경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글자 그대로 ‘스스로 (自) 그러하다 (然)’는 존재의 근원적인 방식을 뜻한다. 그것은 어떤 외부의 목적이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강제되지 않은, 만물이 지닌 본래의 순수한 모습이자 자발적인 흐름이다. 스토아의 자연이 이성(로고스)이라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운행되는 합리적인 체계라면, 도가의 자연은 그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고, 살아있으며, 계획되지 않은 즉흥적인 춤과 같다.
‘무위(無爲)’는 바로 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흐름과 하나가 되기 위한 실천 방법론이다. ‘무위’는 흔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수동적인 게으름으로 오해받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에 가깝다. 그것은 ‘억지로 행하지 않는다’ 또는 ‘자연의 결에 거스르는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매우 적극적이고도 세련된 행동 방식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비유는 파도를 타는 서퍼의 모습이다. 서퍼는 결코 파도를 만들어내거나 그 방향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떠 있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는 파도의 힘과 속도, 모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자신의 움직임을 그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에 완벽하게 일치시킨다. 그의 모든 행동은 힘을 빼고 있지만 지극히 정교하며, 파도와 싸우는 대신 파도와 함께 춤을 춘다. 바로 이 모습이 무위의 본질이다. 억지로 밀고 당기는 행위(유위, 有爲)를 멈추고, 상황의 자연스러운 흐름(도, 道)에 올라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지혜다.
이러한 무위의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라는 의식, 즉 끊임없이 계획하고, 계산하며, 통제하려는 인간의 에고다. 도가의 성인은 바로 이 에고의 힘을 빼는 훈련을 한다. 그들은 지식과 도덕률 같은 인위적인 기준들을 쌓기보다, 오히려 그것들을 ‘잊어버리는’ 연습을 통해 어린아이와 같은, 혹은 아직 아무것도 조각되지 않은 ‘통나무(樸, 박)’와 같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머리로 분석하는 대신, 온몸으로 세상의 흐름을 느끼고 직관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도덕경』이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고 말했을 때, 이는 바로 이러한 무위의 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도가의 길은 스토아 철학의 실천 방식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스토아의 ‘자연에 따른 삶’은 ‘이성’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해 성취된다. 스토아 철학자는 자신의 감정과 충동을 이성이라는 고삐로 단단히 붙잡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훈련(prosochē 프로소케)을 통해 덕을 함양해야 한다. 이는 내면의 비이성적인 부분과 벌이는 치열한 전투이자, 이성적 의지력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반면, 도가의 무위는 오히려 그 이성적 의지력마저 내려놓을 것을 요청한다. 그들은 이성적인 분별과 계획이 오히려 우리를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서 있는 직관과 자발성이다.
사회에 대한 태도에서도 둘은 다른 방향을 향한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이성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이끈다. 그들은 훌륭한 시민, 부모, 친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중요한 덕의 실천으로 보았다. 그러나 도가 사상가들에게 정치나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일들은 종종 인위적이고 번잡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복잡한 사회를 떠나 자연 속에 은거하며, 이름 없이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기도 했다.
스토아 철학과 도가 사상은 모두 인간의 작은 자아를 넘어선 거대한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평온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 순응의 방법이 다르다. 스토아는 이성이라는 돛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우주라는 바다의 합리적인 항로를 따라가는 ‘현명한 항해사’의 길을 제시한다. 반면 도가는 인위적인 돛과 노를 모두 버리고, 바람과 물의 흐름 자체인 도와 하나가 되어 표류하듯 자유로워지는 ‘능숙한 춤꾼’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이성적 훈련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 훈련마저 내려놓음으로써 조화에 이른다. 이 두 길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세계와 조화롭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인류가 내놓은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두 개의 서로 다른 답변이다.
3절: 현대 생태 철학 - 자연과의 공존을 다시 묻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한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명령은, 2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하고 구체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기후 변화, 대규모 멸종, 환경 오염과 같은 전 지구적 위기는 단순히 기술이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지난 수백 년간 서구 문명을 지배해 온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즉 근본적인 철학의 실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기 앞에서,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현대 생태 철학의 다양한 시도들은 놀랍게도 스토아의 고대 지혜가 이미 도달했던 통찰과 깊이 공명하고 있다.
현대 생태 철학이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비판하는 근대적 자연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같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들은,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을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연은 그 신성함을 박탈당하고, 인간이 이용하고 정복해야 할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전락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정신(res cogitans)을 가진 인간과, 정신없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물질(res extensa)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놓았다. 이 구분에 따라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은 영혼 없는 정교한 자동기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베이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선언하며, 과학의 목적이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 그것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도구적 자연관은 인류에게 엄청난 물질적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해도 된다는 위험한 오만을 심어주었다.
현대 생태 철학은 바로 이 오만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중 가장 급진적인 흐름인 ‘심층 생태주의(Deep Ecology)’는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Næss)에 의해 주창되었다. 심층 생태주의의 핵심은, 자연의 모든 존재가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넘어, 그 자체로 살아갈 권리를 지닌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지니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아마존의 열대우림은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하고 목재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수억 년간 진화해 온 생명의 공동체이기에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더 나아가 심층 생태주의는 우리의 ‘자아’ 개념을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피부라는 경계 안에 갇힌 고립된 에고가 아니라, 내가 숨 쉬는 공기, 내가 마시는 물, 나를 둘러싼 모든 생명과 연결된 ‘생태적 자기(Ecological Self)’라는 것이다. 따라서 강을 오염시키는 것은 곧 나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이며, 숲을 파괴하는 것은 나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보았던 스토아의 ‘우주적 공감(sympatheia)’ 개념의 현대적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상 모두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거대한 전체의 일부로서 자신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스토아 철학이 이성(로고스)을 가진 인간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는 반면, 심층 생태주의는 모든 생명체가 동등한 생존권을 갖는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제시한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다. 이 가설은 지구의 대기, 해양, 암석, 그리고 모든 생물권이 각기 분리된 시스템이 아니라, 서로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지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자기조절 시스템, 즉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거대한 유기체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 신화의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ia)’다. 가이아는 마치 우리 몸이 외부 온도가 변해도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려 노력하듯(항상성, homeostasis), 스스로 대기의 구성 성분이나 온도를 조절하여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수십억 년간 유지해왔다.
이 가이아 가설은 스토아 학파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동물(zoon, 조온)로 보고, 프네우마가 그 생명체의 생리 작용을 조절하는 ‘세계영혼’이라고 보았던 고대의 직관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일치한다. 러브록이 과학의 언어로 발견한 ‘가이아’는, 스토아 학파가 철학의 언어로 불렀던 ‘살아있는 자연’ 혹은 ‘내재하는 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다만, 스토아의 로고스가 뚜렷한 이성과 목적, 섭리를 가진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반면, 가이아는 과학적 모델로서 반드시 의식이나 목적을 상정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현대 생태 철학은 인류가 초래한 생태적 위기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잊고 지냈던 더 오래되고 근원적인 지혜를 다시 발견하고 있다.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오히려 인류 역사의 짧은 예외 현상이었을지 모른다는 자각이다.
세계를 살아있는 전체로 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올바른 위치를 찾으려는 스토아 철학의 근본 태도는 이제 단순한 고대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절박한 생존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되고 있다.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스토아의 명령은, 이제 우리에게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우주적 공동체의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살아갈 것을 요청하는 단호하고도 엄숙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4절: 문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 루소와 세네카의 대화
인류는 문명이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끝없이 전진해왔다. 우리는 예술과 과학의 돛을 올리고, 기술이라는 강력한 노를 저으며 미지의 바다를 향해 나아왔다. 그러나 눈부신 항해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문득 뱃멀미와도 같은 깊은 불안에 휩싸인다. 과연 이 배는 우리를 행복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화려한 돛대에 스스로를 묶은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명은 과연 인간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들었는가?’ 이 근원적인 질문은 18세기 제네바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의해 가장 날카롭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대답은 이미 1,700년 전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사상 속에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두 거인의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통해,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이 문명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가장 깊은 속살을 마주하게 된다.
루소의 주장은 하나의 충격적인 고발장에서 시작한다. 그는 그의 대표작 『학문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에서, 우리가 진보라고 믿어왔던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사실은 우리의 영혼을 옭아매는 ‘화환으로 장식된 쇠사슬’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이 주장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상상했던 ‘자연 상태(state of nature)’ 속의 인간을 먼저 만나야 한다. 루소가 그린 자연인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숲속을 홀로 거니는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다. 그는 배고프면 열매를 따 먹고 목마르면 샘물을 마시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기에 시기나 질투, 허영심을 모른다. 그의 욕구는 단순하고, 그 욕구를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를 움직이는 두 가지 원리는 오직 자기 보존 본능(amour de soi, 아모르 드 수아)과 타인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연민(pitié, 피티에)뿐이다. 이 자연인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고독 속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근본적으로 행복하다.
루소에게 비극은 인간이 숲을 떠나 모여 살고, 사유 재산을 만들며, 사회를 형성하면서 시작된다. 농업과 야금술의 발달은 땅을 나누게 했고, 누군가는 더 많이 갖고 누군가는 덜 갖게 되는 불평등을 낳았다. 이 불평등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새로운 종류의 자기애, 즉 허영심(amour-propre, 아모르 프로프르)을 탄생시켰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 만족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부유하고 더 명예로워 보임으로써 행복을 느끼려 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인공적인 욕망을 주입하고, 우리는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서로를 속이고 경쟁한다. 문명, 법, 국가는 이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정당화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결국 루소에게 문명화의 과정은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잃고, 스스로 만든 사회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타락의 역사다. 그가 말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은, 바로 이 문명의 쇠사슬을 끊고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회복하라는 절박한 호소다.
이러한 루소의 통렬한 문명 비판에 대해, 로마 제국의 가장 화려한 문명 속에서 살았던 세네카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세네카 역시 인간이 욕망과 비이성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고 있음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의 근원은 문명이나 사회 제도 그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잘못된 판단’에 있다. 여기서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도구 중 하나인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개념을 꺼내 든다. 아디아포라는 그리스어 ‘아(a-, 아니다)’와 ‘디아포론(diaphoron, 다른)’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는 ‘다르지 않은 것’, 즉 ‘차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이 말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오직 덕(德)만이 유일한 ‘선(good)’이고, 오직 악덕(vice)만이 유일한 ‘악(bad)’이다. 그 외에 부, 명예, 건강, 사회적 지위, 심지어 생명과 죽음 그 자체까지도, 우리의 도덕적 가치나 영혼의 평온에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무관한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아디아포라다.
이 아디아포라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유 재산 제도가 아니라, 재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이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은 타인의 비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비난이 끔찍한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세네카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문명을 버리고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문명, 어떤 외부적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내면의 성채, 즉 ‘이성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은 루소처럼 원시의 자연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인 이성(logos)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루소가 사회 구조의 개혁을 통해 인간 해방을 꿈꿨다면, 세네카는 개인의 내면 혁명을 통해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두 거인의 대화는 악의 기원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드러낸다. 루소에게 악은 사회 구조에서 비롯되어 개인을 오염시킨다. 따라서 해결책은 사회적이다. 세네카에게 악은 개인의 비이성적인 영혼에서 비롯되어 사회를 병들게 한다. 따라서 해결책은 개인적이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이 우리의 순수했던 과거, 즉 잃어버린 낙원이라면, 세네카가 말하는 ‘자연’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합리적 질서이자,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실현해야 할 내면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은 서로를 비판하면서도 결국에는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두 철학자 모두 당대의 사람들이 부와 명예, 타인의 시선과 같은 피상적인 가치들을 좇으며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인지를 다시 물으며, 더 진실하고 본질적인 삶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 루소의 질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불편한 거울이 된다. 그리고 세네카의 대답은 그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평온과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도 현실적인 무기를 제공한다. 현대인인 우리는 루소가 고발한 문명의 병을 깊이 앓고 있으면서, 동시에 세네카가 처방한 내면의 약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5절: 카르마(Karma)의 법칙 -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는 길
스토아 철학이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을 통해 우주의 합리적 질서에 순응하는 길을 제시했다면, 인도의 지혜는 ‘카르마(Karma, 업, कर्म)’라는 또 다른 거대한 법칙을 통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는 길을 보여준다. ‘카르마’는 오늘날 서구 사회에까지 널리 알려진 단어지만, 종종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식의 단순한 권선징악의 개념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본래 카르마의 법칙은 신이 상벌을 내리는 도덕적 재판이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비인격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이 냉철한 우주적 법칙을 스토아의 운명론과 나란히 놓고 비교할 때, 우리는 동서양의 지혜가 어떻게 인간의 책임과 자유라는 문제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비추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는 본래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카르마의 법칙이란 ‘행위의 법칙’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 즉 몸으로 짓는 행위(身業), 입으로 짓는 행위(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생각(意業)까지도 하나의 원인(cause)이 되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effect)를 낳는다는 우주의 근본 원리다. 이는 마치 농부가 밭에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농부가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흙이 농부를 심판하여 상이나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심어진 씨앗의 본성에 따라 정직하게 열매를 맺어줄 뿐이다. 카르마의 법칙 역시 이와 같다. 그것은 도덕적 무게를 지닌 자연법칙이며, 우주는 우리의 모든 행위라는 씨앗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 그 열매를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준다.
이 법칙이 지닌 진정한 무게는 ‘윤회(Samsara, संसार)’라는 시간적 배경 속에서 드러난다. 카르마의 인과응보는 단 한 번의 생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생을 거치며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조건들, 즉 내가 태어난 환경, 나의 건강, 나의 재능이나 내가 겪는 고난들은 모두 과거의 어느 생에선가 내가 직접 심었던 행위의 씨앗들이 그 열매를 맺은 결과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말, 행동은 미래의 어느 생에선가 내가 거두어들일 새로운 열매의 씨앗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결코 운명의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를 매 순간 창조하고 있는 적극적인 행위자다.
이러한 카르마의 세계관은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과 깊은 유사성을 지닌다. 두 사상 모두 이 세계가 무의미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빈틈없는 인과의 사슬로 엮여 있다고 본다.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현재의 모든 상황은 과거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스토아 학파에게 그 인과의 사슬은 신성한 로고스가 펼쳐내는 합리적인 계획이었고, 인도의 현자들에게 그것은 우주적인 도덕 법칙의 표현이었다. 두 사상 모두 우리에게 삶의 사건들을 단편적으로 보지 말고, 거대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문제가 놓이는 지점에서 두 사상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스토아 철학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내면, 즉 판단과 동의뿐이다.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외부의 사건들, 즉 운명의 사슬은 우리가 결코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스토아적인 자유는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는 헛된 노력 대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의 자유’에 있다.
반면, 카르마의 법칙 속에서 자유는 우리의 ‘현재의 행위’에 놓여 있다. 나의 현재 조건이 과거 카르마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그 조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새로운 행위를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이 새로운 카르마를 통해 나는 나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스토아의 길이 정해진 각본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길이라면, 카르마의 길은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다음 장면의 각본을 스스로 써 내려가는 작가의 길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가 제시하는 윤리적 실천에서도 드러난다.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다르마(Dharma, 법, धर्म)’에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르마는 우주적 질서, 사회적 의무,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도덕적 책무를 의미한다. 선한 행위(다르마)를 쌓음으로써 우리는 긍정적인 카르마를 만들어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고, 궁극적으로는 카르마와 윤회의 사슬 자체를 벗어나는 해탈(Moksha, 목샤)을 지향한다. 이는 스토아 철학이 ‘덕(virtue)’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그 동기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어떤 경우, 다르마의 실천은 더 나은 내생을 보장받기 위한 일종의 영적인 투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에서 덕은 그 자체로 완벽한 보상이다. 스토아 현자는 더 나은 운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스러운 삶이 지금 여기서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선(善)이기 때문에 덕을 실천한다.
스토아의 운명론과 인도의 카르마 법칙은 모두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거대한 우주적 질서의 일부로 바라보게 하는 깊은 혜안을 제공한다. 두 지혜 모두 우리를 고립된 개인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보이지 않는 인과의 그물 속에서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스토아는 그 질서 앞에서 이성적인 수용과 내면의 자유를 통해 평온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반면, 카르마의 법칙은 그 질서를 이해하고 활용하여,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궁극적인 자유를 성취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는 주어진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다른 하나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