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로고스 -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

by 이호창

제2장: 로고스 (Logos) - 우주를 관통하는 신성한 이성


1절: 창조의 불꽃, 스토아의 신(神)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스토아 철학의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는 이제 그 가장 깊은 성소(聖所)로 나아갈 시간이다. 그곳에는 스토아 사상의 심장이자 우주 전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동력, 로고스 (Logos)가 있다.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은 곧 스토아의 신(神)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들의 신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많은 신들의 모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늘 위 어딘가에 앉아 인간의 삶을 지켜보며 상과 벌을 내리는 인격적인 존재를 떠올린다. 그는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 세상의 바깥에 머무는 초월적인 건축가와 같다. 그러나 스토아의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스토아의 신은 자신이 만든 우주 바깥에 서 있는 방관자가 아니라, 우주 그 자체이며 우주 안에 내재하는 생명의 원리이다. 이들의 신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숨결 속에, 창밖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속에,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움직이는 법칙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신과 우주가 하나라고 보는 고대의 지혜, 범신론 (pantheism, 汎神論)의 핵심이다.


스토아 학파는 이 신성한 실체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장 정제되고 순수한 형태의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을 ‘창조하는 불꽃 (pyr tekhnikon, πῦρ τεχνικόν)’이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불꽃은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파괴의 불이 아니다. 그것은 씨앗을 품어 싹을 틔우고, 생명을 조직하며, 성장을 이끄는 부드럽고 지적인 온기다. 마치 빵 반죽 전체에 퍼져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모(yeast)처럼, 이 창조의 불꽃은 우주의 가장 작은 먼지에서부터 가장 거대한 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 속에 스며들어 그것을 형성하고 이끌어간다. 효모와 빵을 분리할 수 없듯, 신과 우주는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이 창조의 불꽃은 맹목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완벽한 이성 그 자체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다. 따라서 스토아의 우주는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의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펼쳐지는 거대한 드라마다. 이처럼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이성(로고스)은 곧 자연 (Nature)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이 이 법칙을 따라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은 또한 운명 (Heimarmenē, εἱμαρμένη)이라고도 불린다. 신, 로고스, 자연, 운명. 이 네 가지는 결국 하나의 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깊은 울림을 준다. 만약 우주가 신성한 이성의 표현이고 우리 안의 이성이 그 신성한 불꽃의 한 조각이라면, 우리는 결코 신에게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신을 섬기는 것은 이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이성을 최대한 발현하며 우주의 큰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실천이 된다. 내 안의 작은 이성과 우주의 거대한 이성이 공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온과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신은 이처럼 우리 바깥의 숭배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발견하고 일치되어야 할 내면의 나침반이다.



2절: 노자의 도(道), 동양의 길과 서양의 로고스


우리가 스토아 철학의 심장인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의 문을 열고 그 깊이를 들여다볼 때, 우리는 놀랍게도 그 장엄한 울림이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즉 고대 중국의 안개 낀 계곡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 사이에서 이미 울려 퍼지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에서 제논이 난파선의 잔해 속에서 인간 이성의 존엄과 우주의 합리성을 사유하고 있을 무렵, 동양에서는 이미 한 현인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위대한 원리가 어떻게 만물을 낳고 기르는지를 조용히 노래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노자(老子)이며, 그가 인간의 언어로 겨우 가리키려 했던 저 궁극의 실체가 바로 도(道)이다. 아테네의 번잡한 아고라에서 태어난 이성의 철학과, 중원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태어난 자연의 철학은 서로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자랐지만, 마치 오래전 헤어졌던 쌍둥이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인간 영혼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놀라운 동질성을 보여준다.


로고스(Logos)와 도(道), 이 두 개념은 각기 다른 문명의 토양에서 피어난 꽃이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둘 다 우리의 감각으로 파악되는 변화무쌍한 현상 세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이자 법칙을 가리킨다. 스토아 학파가 로고스를 통해 우주가 맹목적인 힘의 충돌이 아니라, 신성한 이성의 질서정연한 표현이라고 보았듯이, 노자 역시 도가 있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지키고 사계절이 어김없이 순환하며 만물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로고스가 우주라는 거대한 문장을 지배하는 신의 문법이라면, 도는 그 문장이 쓰이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무한한 침묵의 여백과도 같다.


스토아의 현자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을 때, 그 자연은 바로 로고스가 펼쳐낸 합리적 질서였다. 도가의 성인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이야기했을 때, 그 자연 역시 도의 흐름 그대로의 모습을 의미했다. 이처럼 두 지혜는 모두 인간의 작은 자아를 넘어선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는 것을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산맥에서 발원한 두 개의 강줄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흐름의 모습과 성질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우리는 두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동서양 지혜의 정수를 함께 맛보는 열쇠가 된다.


로고스는 ‘창조하는 불꽃(pyr tekhnikon)’이라는 스토아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스스로를 조직하는 이성의 힘이다. 그것은 마치 위대한 건축가가 자신의 완벽한 청사진에 따라 우주라는 신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어가는 창조적 에너지에 가깝다. 로고스는 자신을 만물 속에 불어넣어 질서를 부여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목표, 즉 우주적 조화를 향해 이끌어간다.


반면, 노자의 도는 그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수용적이며, 비어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무(無)’의 성격을 띤다. 노자는 도를 끊임없이 물에 비유했다. 물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늘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하고 가장 단단한 바위마저 부드럽게 무너뜨린다. 또한 그는 도를 ‘텅 빈 그릇(虛器 허기)’이나 ‘골짜기(谷 곡)’에 비유했다. 그릇은 비어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골짜기는 낮기에 모든 물줄기가 모여든다. 도는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텅 빈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내어주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이 근본적인 성격의 차이는 우리가 삶의 지혜를 구하고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 전혀 다른 두 개의 길을 제시한다.


스토아 철학의 길은 우리 안에 깃든 로고스의 작은 불꽃, 즉 이성을 끊임없이 단련하여 거대한 우주의 이성과 합일하는 ‘적극적인 훈련’의 길이다. 그것은 마치 내면의 전사가 되어, 비합리적인 격정(pathe)이라는 적들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외부의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이성의 성채를 쌓아 올리는 과정과 같다.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의 『명상록, Meditations』에서 매일 아침 자신에게 닥쳐올 수많은 부조리와 악의에 찬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훈련을 했던 것이 바로 이 길의 전형이다.


반면, 도가의 길은 그러한 의도적인 노력이나 투쟁마저 내려놓고, 거대한 도의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항복의 지혜’에 가깝다. 그것은 격류 속에서 억지로 헤엄치려 애쓰는 대신, 물의 흐름 자체인 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자연스럽게 떠내려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스토아 현자가 어떤 풍파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바위라면, 도가의 성인은 어떤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그저 함께 춤을 추는 부드러운 갈대와 같다.


결국 로고스와 도는 지중해의 태양과 황허의 달빛 아래에서, 인류가 우주와 인간의 관계라는 가장 심오한 질문에 내놓은 위대한 두 개의 답변이다. 하나는 이성의 불꽃으로, 다른 하나는 침묵의 물길로 그 궁극의 길을 제시한다. 이 두 길은 출발점의 풍경과 여정의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인간의 작은 의지와 계획을 넘어선 거대한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진정한 평온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하나의 드넓은 바다에서 만난다.


서양의 현관에서 시작된 우리의 여정이 동양의 오래된 길 위에서 그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지혜가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갇히지 않는 보편적인 인간 영혼의 언어임을 깨닫게 된다. 스토아의 이성적 훈련이 지치고 버거울 때, 우리는 도의 비어있음에 기댈 수 있으며, 도의 막막함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우리는 로고스라는 내면의 별을 보고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 두 지혜를 함께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라는 항해를 위한 더 완전한 지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3절: 『천부경(天符經)』의 일(一), 하나에서 비롯된 우주의 노래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Logos)와 노자의 도(道) 개념이 우주의 근원적 질서를 설명하려는 시도였다면, 한반도의 고대 경전인 『천부경, 天符經』은 이 주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81자의 한자로 구성된 이 문헌은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면서, 그 중심에 ‘일(一)’, 즉 ‘하나’라는 개념을 둔다.


『천부경』의 첫 구절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은 이 철학의 전체적인 틀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의미는 ‘존재계의 모든 현상은 하나(一)에서 시작되지만(始), 그 근원이 되는 하나 자체는 시작이 없다(無始)’는 것이다. 이는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선후 관계’와 존재의 근거가 되는 ‘논리적 관계’를 구분하는 중요한 철학적 통찰이다. 예를 들어, 현대 우주론이 말하는 빅뱅은 시간과 공간이 시작된 ‘현상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천부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 빅뱅이라는 사건 자체를 가능하게 한 근원적 원리, 즉 ‘하나’는 그 시간적 시작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시간적 시작에 앞서는 ‘존재론적 근원’이다. 이 지점에서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와의 첫 번째 유사성이 드러난다. 스토아 학파에게 로고스는 우주 만물을 낳고 지배하는 신성한 이성이지만, 그 로고스 자체의 원인은 묻지 않는다. 로고스는 모든 원인들의 첫 번째 원인이자, 스스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一)’과 로고스는 모두 현상 세계의 모든 변화와 생성의 배후에 있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근원이라는 속성을 공유한다.


다음으로, 이 근원적인 ‘하나’가 어떻게 다양한 세계를 생성하는지에 대해 『천부경』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하나가 세 가지 궁극적인 것(三極)으로 나뉘어 작용하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의미다. 여기서 ‘나뉜다(析)’는 것은 물리적인 분할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전개’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부경』의 전통적인 해석에서 삼극(三極)은 하늘(天), 땅(地), 인간(人)을 의미한다. 즉, 근원인 ‘하나’가 하늘이라는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원리, 땅이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원리,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고 조화시키는 의식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삼원론적 구조는 세계를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으로 파악하는 일부 서양 철학의 흐름과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천부경』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우연히 존재하는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가 그 자신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세 번째 축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의 이성을 신성한 로고스의 ‘불꽃 조각’으로 보고,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본 관점과 비교될 수 있다. 두 사상 모두 우주와 인간의 유기적 연결성을 강조하며, 인간에게 우주적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일(一)’과 로고스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성격에 대한 묘사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스토아 철학은 로고스를 ‘창조하는 불꽃’, ‘이성적 정자(logos spermatikos)’, ‘신’과 같이 능동적이고 의지를 가진, 살아있는 힘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로고스는 목적을 가지고 우주를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창조주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천부경』의 ‘일(一)’은 그러한 의지나 목적을 가진 인격적 실체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를 지배하는 비인격적이고 수학적인 원리에 가깝다. 『천부경』의 언어는 ‘일(一)’이 ‘묘연(妙衍)’하게, 즉 오묘하게 펼쳐져 ‘만왕만래(萬往萬來)’, 즉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가게 한다는 식으로 그 작용을 설명한다. 이는 의지적 창조라기보다는, 하나의 공리(axiom)로부터 수많은 정리(theorem)가 필연적으로 파생되어 나오는 과정과 유사하다.


스토아의 로고스가 우주라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가는 예술가라면, 『천부경』의 ‘일(一)’은 그 예술 작품이 따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조화와 비례의 법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 철학이 제시하는 실천적인 길에도 영향을 미친다. 로고스를 능동적 이성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은, 개인이 자신의 이성을 단련하고 덕을 함양하여 우주적 이성과 의지적으로 합일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내면의 비이성적 요소들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투쟁의 측면을 포함한다.


반면, 『천부경』의 가르침은 개인의 의지적 노력보다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하나’의 법칙을 깊이 깨닫고, 그 질서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삶을 지향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즉 ‘쓰임은 변하더라도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구절은, 변화무쌍한 현상 세계 속에서도 변치 않는 근본 원리가 있음을 직시하고 그곳에 마음의 중심을 두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천부경』의 ‘일(一)’과 스토아의 로고스는 모두 현상 세계 너머의 단일한 궁극적 실체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깊은 유사성을 지닌다. 두 사상 모두 우주가 혼돈이 아닌, 내재적 질서에 의해 운행된다고 보며 인간이 그 질서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궁극적 실체의 성격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스토아 철학은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힘’으로, 『천부경』은 ‘수학적이고 근원적인 원리’로 접근하며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 두 관점을 비교하는 것은, 인류가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다채로운 경로를 탐색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각기 다른 철학적 언어가 어떻게 하나의 진리를 향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빛을 비추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4절: 헤르메스의 말씀 -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에 나타난 로고스


스토아 철학이 지중해 세계의 지적 토양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면, 같은 시대 같은 토양에서는 전혀 다른 향기를 지닌 또 하나의 신비로운 꽃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의 지혜와 그리스의 철학이 만나 탄생한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라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의 중심에는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Hermes)와 이집트의 지혜의 신 토트(Thoth, 제후티)가 합일된 전설적인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 즉 ‘세 번 위대한 헤르메스’가 있다. 그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전해지는 문헌 모음집이 바로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Corpus Hermeticum』이며, 이 문헌들은 스토아 철학과 마찬가지로 ‘로고스’라는 개념을 우주론의 핵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로고스는 스토아의 그것과는 다른 역할과 위상을 지닌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의 첫 번째 문헌이자 가장 유명한 ‘포이만드레스(Poimandres)’의 창조 신화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제자가 명상 중에 만난 신성한 존재, ‘인간의 목자’를 의미하는 포이만드레스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포이만드레스는 제자에게 우주의 기원을 환상(vision)으로 보여준다. 태초에 있었던 것은 오직 무한하고 눈부신 빛(Light)뿐이었다. 이 빛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인 최초의 신이며, 헤르메스주의에서는 이를 ‘누스(Nous)’, 즉 ‘신성한 지성’이라고 부른다. 이 빛의 상태는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가 그러하듯,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이 최초의 빛, 즉 누스로부터 거룩한 ‘말씀(Logos)’이 분리되어 나온다. 헤르메스주의에서 로고스는 최초의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발출(emanation)된 ‘신의 아들’과 같은 존재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와 신이 동일한 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었던 것과는 달리, 헤르메스주의의 우주론은 뚜렷한 위계 구조를 보여준다. 최초의 근원인 누스(빛)가 있고, 그로부터 창조의 힘을 지닌 로고스(말씀)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 로고스는 빛으로부터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하위의 원소들을 분리시키는 창조적 행위를 담당한다.


창조의 과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말씀, 즉 로고스로부터 또 다른 지성체, 즉 세상을 직접 만드는 장인으로서의 누스가 나타난다. 그는 ‘데미우르고스(Demiurge, 조물주)’라고도 불리며, 일곱 행성의 천체와 우리가 속한 물질세계를 건설하는 역할을 맡는다. 즉, 헤르메스주의의 창조 과정은 ‘최초의 신(빛/누스) → 창조적 말씀(로고스) → 세상의 제작자(데미우르고스/누스)’라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진다. 이는 로고스가 곧 신이며 자연이고 운명이라는 스토아의 일원론적(monistic) 세계관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헤르메스주의의 세계는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 유출되어 나온, 보다 복잡하고 계층적인 구조를 지닌다.


이러한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매우 특별하고 비극적이다. 데미우르고스가 물질세계를 창조한 후, 최초의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완전한 ‘원형 인간(Anthropos)’을 창조한다. 이 원형 인간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그는 아래의 물질 자연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과 사랑에 빠져 스스로 아래로 추락한다. 그 결과, 신성한 본질을 지닌 인간의 영혼은 물질이라는 어두운 육체 안에 갇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헤르메스주의는 영혼을 신성한 것으로,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나 그림자로 보는 강한 이원론적(dualistic) 경향을 드러낸다. 이는 물질 우주 전체를 신성한 로고스의 몸으로 보았던 스토아 철학의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물질관과는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다. 비록 육체에 갇혀 있지만,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최초의 신인 누스의 본질과 창조적 말씀인 로고스의 힘이 ‘신성의 불꽃’으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르메스주의에서 구원의 길은 스토아처럼 덕을 쌓고 이성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안의 신성을 깨닫는 특별한 ‘인식(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깨닫고, 육체와 행성천들의 속박을 벗어나 마침내 빛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는 영적 상승을 목표로 한다.


스토아 철학과 헤르메스주의는 모두 ‘로고스’를 우주 질서의 핵심 원리로 보았다는 점에서 헬레니즘 시대라는 공통의 지적 유산을 공유한다. 두 사상 모두 인간의 내면과 우주적 원리 사이에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연결을 회복하는 것을 구원으로 가는 길로 제시했다. 그러나 로고스의 위상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스토아의 로고스는 우주와 동일시되는 내재적이고 일원론적인 신이며, 구원의 길은 이성적 덕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헤르메스주의의 로고스는 초월적 신으로부터 유출된 하위의 창조 원리이며, 세계는 이원론적으로 파악되고 구원의 길은 신비적 인식, 즉 그노시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헤르메스주의의 로고스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스토아의 로고스가 지닌 고유한 특징, 즉 급진적인 내재성과 합리적 실천 윤리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또 하나의 귀중한 창이 된다.



5절: 신화에서 이성으로 - 인류 의식의 위대한 전환


우리는 지금까지 스토아의 로고스를 비롯하여 동양의 도(道)와 『천부경』의 일(一), 그리고 이집트의 지혜가 녹아든 헤르메스주의의 누스(Nous)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넘어선 다양한 지혜들이 어떻게 하나의 궁극적 실체를 탐구했는지 살펴보았다. 이 모든 사유의 등장은 인류 의식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근본적인 전환, 즉 신화적 사유(mythos)에서 이성적 사유(logos)로의 위대한 전환을 증명한다. 이 전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 지닌 진정한 혁신성을 파악하는 열쇠다.


신화적 사유, 즉 미토스(mythos)의 세계는 세상을 인격적인 ‘너(Thou)’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이 세계관에서 우주의 모든 현상은 신과 정령, 영웅들의 의지와 감정이 빚어내는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다. 천둥이 치는 것은 제우스 신이 분노하여 번개를 던지는 것이고, 풍년이 드는 것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누가?’라는 인격적 주체를 통해 주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원시적인 미신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고 그와 감정적으로 교감하며 의미를 찾으려 했던 인류의 보편적인 의식 단계다. 어린아이가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을 공기의 압력 차이로 분석하는 대신 침대 밑에 무서운 괴물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다. 아이에게 세상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말을 걸고 달래야 하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무대다.


이러한 신화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연 것이 바로 로고스(logos)의 등장이다. 로고스는 세상을 더 이상 인격적인 ‘너’가 아닌, 보편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객관적인 ‘그것(It)’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인식의 혁명이다. 이제 천둥은 제우스의 분노가 아니라, 대기 중의 전하(電荷)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 된다. 풍년은 여신의 은총이 아니라, 토양의 질과 강수량, 햇빛의 양이라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누가?’가 아니라, ‘어떤 원리에 따라?’라는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법칙을 통해 주어진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침대 밑의 괴물은 자신의 상상이었음을 깨닫고, 그 소리가 낡은 보일러의 배관이 수축하며 내는 소리임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과 같다.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세상이 이제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탐구의 대상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 위대한 전환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바로 이 전환의 문턱에 서 있던 인물들이다. 탈레스(Thales)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세상의 기원을 신들의 드라마가 아닌 ‘물’이라는 단일한 물질적 원리에서 찾으려 했다. 이는 미토스에서 로고스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그 변화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와 법칙이 있다고 보았고, 그것을 ‘로고스’라고 불렀다.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로고스 사유의 정점에 서 있다. 그들은 우주가 비인격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이성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신화적 세계관이 주었던 ‘의미’와 ‘목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스토아 학파는 이 차가운 우주적 법칙인 로고스에 ‘신’, ‘섭리’, ‘운명’이라는 따뜻한 이름을 다시 부여했다.


그들의 로고스는 단순히 자연법칙의 총합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이끌어가는 신성하고 지적인 의지이며, 인간을 보살피는 이성적인 섭리다. 이는 마치 어른이 되어 보일러 소리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 괴물을 상상하며 느꼈던 그 경이로움과 세계의 살아있음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도 같다. 스토아 철학은 이처럼 이성의 명료함과 의미의 충만함을 통합하려는 가장 성숙한 시도 중 하나였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다른 지혜의 전통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이 전환을 겪었다. 노자의 도는 고대 중국의 수많은 인격신과 정령들의 세계를 넘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인격적이고 근원적인 길(道)을 사유했다. 『천부경』은 모든 신화적 서사를 벗겨내고 오직 숫자와 원리의 뼈대만으로 우주를 설명하며 로고스적 사유의 극단을 보여준다. 반면, 헤르메스주의는 로고스와 누스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신들의 유출과 인간 영혼의 추락, 그리고 구원이라는 극적인 신화의 틀 안에 담아냄으로써 미토스와 로고스가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가 된다.


결국 신화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은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연을 분석하고 기술을 발전시킬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세상의 의미를 앗아가고 인간을 차가운 우주 속에 홀로 남겨두는 실존적 불안을 낳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이라는 로고스의 힘이 극대화된 시대를 살아가지만, 여전히 정치적 영웅이나 연예인에게서 신화적 의미를 찾고, 거대한 음모론이라는 현대적 신화에 매료되기도 한다. 이는 로고스만으로는 인간 영혼의 모든 갈증을 채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성과 의미, 법칙과 목적을 하나로 묶어내려 했던 스토아 철학의 장대한 시도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과 영감을 던지고 있다.

keyword
이전 02화제1장: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삶과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