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스토아 (Στοά) - 지혜가 시작된 채색 현관

by 이호창

서문: 스토아 (Στοά) - 지혜가 시작된 채색 현관



1절: 왜 지금 다시 스토아인가? -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법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영혼의 그림자 속을 헤매고 있다. 정보의 홍수는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소셜 미디어의 스크린은 타인의 이상화된 삶을 비추며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속삭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무엇 하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연결은 넘쳐나지만 진정한 유대는 희미해지고, 선택지는 무한하지만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별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불안의 시대가 가진 맨얼굴이다.


이 깊은 허기와 불안 속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구원을 찾는다. 성공을 향한 자기계발서의 구호에 귀를 기울이고, 긍정 심리학의 주문을 외워보지만, 마음의 소란은 쉬이 잦아들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와 찰나의 쾌락은 갈증을 잠시 잊게 할 뿐,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수많은 해결책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소유, 더 나은 평판, 더 자극적인 경험을 통해 내면의 공허를 채우려 하지만, 외부의 것들은 본질적으로 변덕스럽고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2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잊혀진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발견한다. 그 목소리는 화려한 신전이 아닌, 아테네의 소란스러운 시장 한구석에 있던 ‘채색된 현관’, 즉 스토아 (Στοά)에서 울려 퍼졌다. 스토아 철학은 제국의 흥망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던 혼란의 시대에 태어났다. 우리 시대의 불안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는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도 표류하지 않을 내면의 닻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 다시 스토아 철학을 호명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위로나 긍정의 말을 건네는 것을 넘어, 우리 영혼을 위한 견고한 운영체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세계의 일들에 대한 기대를 과감히 거두어들이고, 오직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 영역, 즉 우리의 판단과 의지, 그리고 태도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우리 스스로 행복과 평온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면에 존재함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그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내면의 성채를 쌓아 올리는 가장 능동적이고 용감한 저항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리가 탐구할 스토아의 가르침은 박물관의 유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불안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나침반이자 지도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소음이 거세질수록, 우리는 안으로 더 깊이 침잠하여 변치 않는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여정은 당신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당신 자신으로 바로 서게 할 것이다. 이제, 지혜가 시작된 저 채색 현관으로 함께 들어갈 시간이다.



2절: 제논의 난파선, 모든 것을 잃고 진리를 발견하다


모든 위대한 철학의 시작에는 하나의 질문이 아닌, 하나의 운명적인 사건이 자리한다. 스토아 철학의 씨앗은 학자의 서재가 아닌,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에게해의 한복판에서 잉태되었다. 그 중심에는 키티온 출신의 부유한 상인, 제논(Zeno of Citium)이 있었다. 페니키아에서 귀한 보라색 염료를 싣고 아테네로 향하던 그의 배는 거대한 폭풍우를 만나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그의 막대한 재산은 포세이돈의 변덕 속으로 사라졌고, 그는 간신히 몸만 건져 아테네의 해안에 밀려왔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완벽한 파산이자 재앙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종종 파괴의 모습으로 선물을 건넨다. 훗날 제논은 자신의 난파를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회고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을 찾아 나설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아테네에 도착한 제논은 우연히 한 서점에 들른다. 그곳에서 그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인물을 만난다. 그 책은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려진 역사가이자 군인 크세노폰(Xenophon)이 쓴 것이었다.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제논이 읽은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메모라빌리아, Memorabilia』, 즉 ‘소크라테스 회상록’이다. 책장을 넘기던 그는 세상의 부나 명예가 아닌, 오직 덕(德)과 지혜를 추구하며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삶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서점 주인에게 물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지금 어디서 만날 수 있소?” 서점 주인은 마침 지나가던 견유학파 철학자 크라테스 (Krates, Κράτης)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날 이후 제논은 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철학의 길로 들어선다. 난파선이 그의 육체를 아테네로 이끌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그의 영혼을 진리의 항구로 인도한 등대였다.


제논이 철학의 길에 들어선 시대는 한 개인의 불행이 곧 시대 전체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불과 몇 해 전, 세상을 정복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확실한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거대한 제국은 주인을 잃었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알렉산더의 최고위 장군들이자 스스로를 ‘후계자들’이라 칭한 디아도코이(Diadochoi)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시작했다. 이 기나긴 ‘디아도코이 전쟁’은 하나의 세계를 여러 개의 왕국으로 조각냈고, 안정된 질서였던 폴리스(도시국가)를 무너뜨렸다. 개인은 이제 거대한 역사의 파도 앞에 내던져진 난파선의 선원과 같았다. 제논이 잃은 것은 한 척의 배와 재물이었지만,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삶의 기반이 되는 안정된 세계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철학은 더 이상 한가로운 지적 유희가 아니라, 당장 발 딛고 설 땅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삶을 지탱해 줄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어야만 했다.


자신만의 철학을 세운 제논은 플라톤의 아카데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처럼 특정 장소를 소유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테네의 심장부인 아고라(광장)의 한쪽 편에 있는 공공 건축물, ‘스토아 포이킬레(Στοά Ποικίλη)’, 즉 ‘채색된 현관’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곳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적인 장면들이 그려진 벽화로 유명했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철학이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아니라, 시장의 상인부터 군인,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스토아 학파의 정신은 바로 이 장소의 선택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난다.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이 ‘현관’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스토아 철학은 한 개인의 극적인 실패와 시대의 거대한 혼란이 만나 피어난 꽃이다. 그것은 안전한 항구에서 만들어진 이론이 아니라, 난파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실천적 지혜다. 모든 외부적인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은 제논은, 결코 외부의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는 내면의 항구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가 체계화한 지혜는 크게 세 가지 기둥, 즉 논리학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명료하게 인식하고(논리학), 그 안의 질서를 이해하며(자연학), 궁극적으로 그 안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길(윤리학)을 제시하는 완전한 삶의 설계도와 같다.



3절: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 스토아 사상의 세 기둥


제논이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지혜는 흩어진 잠언의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혼돈의 세상에 맞서 개인의 삶을 세울 수 있는 견고하고 통일된 체계였다. 스토아 학파는 자신들의 철학이 세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쳤다. 그 기둥은 바로 논리학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분리된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지혜를 이루는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서 서로를 지지하고 완성한다. 그들은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종종 과수원이라는 생생한 비유를 사용했다.


이 비유에서 논리학 (logikē, 로기케)은 과수원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단단한 울타리와 같다. 울타리가 없다면 과일은 익기도 전에 짐승들에게 짓밟히고 도둑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명료한 논리의 기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그릇된 믿음, 거짓된 인상, 비합리적인 생각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침범당한다. 논리학은 우리의 이성을 단련시키는 훈련이다. 그것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돕는 도구다. 이 견고한 울타리가 있어야만 우리는 내면의 땅을 안전하게 가꿀 준비를 할 수 있다.


과수원의 울타리 안에는 열매를 맺게 할 나무와 그것을 자라게 하는 토양이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학 (physikē, 피시케)이다. 자연학은 우주 그 자체의 본질, 즉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스토아 학파에게 우주는 무작위적인 원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신성한 이성인 로고스 (Logos)가 관통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였다. 자연학을 공부하는 것은 곧 신의 섭리와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내가 누구이며,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성질을 알고, 그 땅에 뿌리내린 나무의 생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달콤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 열매가 스토아 철학의 정수인 윤리학 (ēthikē, 에티케)이다. 윤리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그것은 논리학이라는 울타리의 보호를 받으며, 자연학을 통해 이해한 우주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기술이다. 열매가 나무와 흙, 그리고 햇빛의 모든 노력이 집약된 결과물이듯, 윤리적인 삶, 즉 덕이 있는 삶은 명료한 판단력과 우주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합쳐졌을 때 비로소 피어나는 결과물이다. 스토아 학파에게 좋은 삶이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내면의 평온을 유지하는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나무가 맺는 가장 귀한 열매다.


따라서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은 서로를 전제하고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논리학이 없는 윤리학은 맹목적인 신념에 빠지기 쉽고, 자연학이 없는 윤리학은 자신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법칙을 알지 못해 길을 잃는다. 반대로 윤리학이라는 목적이 없다면 논리학과 자연학은 공허한 지적 유희에 머물고 만다. 스토아 학파가 제시한 이 세 개의 기둥은 단순히 지식을 분류하는 학문적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세워나가는 과정 전체를 보여주는 완전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4절: 스토아 현자(賢者) - 우리가 도달해야 할 내면의 이상


스토아 철학의 세 기둥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논리학으로 이성을 벼리고 자연학으로 우주의 질서를 꿰뚫어 본 영혼이 마침내 도달하는 경지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하나의 인간상, 즉 스토아 현자(賢者)라는 내면의 이상 속에서 빛나고 있다. 스토아 현자는 그리스어로 소포스 (sophos, σοφός)라 불리며, 이는 단순히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완벽한 지혜를 체화한 인간, 철학의 모든 가르침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증명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스토아 현자는 외부 세계의 어떤 사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왕국을 완전히 이룩한 사람이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스토아 철학의 가장 독특한 개념 중 하나인 '비도덕적 무관심 (adiaphora, ἀδιάφορα)'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세상의 일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으로 나누는 스토아의 독특한 시선이다. 여기서 좋은 것은 오직 덕(德)과 덕을 따르는 행동뿐이며, 나쁜 것은 오직 악(惡)과 악을 따르는 행동뿐이다. 그렇다면 부, 명예, 건강, 심지어 생명과 죽음 그 자체는 어디에 속하는가? 스토아는 이 모든 것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즉 비도덕적 무관심의 영역에 놓는다.


이것은 결코 부와 건강을 경멸하거나 죽음을 무모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그것들이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깊은 통찰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 당신이 직장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모두의 칭찬과 함께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고 상상해보자. 반대로, 예기치 못한 실수로 프로젝트를 망치고 상사에게 혹독한 질책을 들었다고 상상해보자. 보통의 우리는 전자의 상황에서 환호하고 후자의 상황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스토아 현자는 이 두 사건을 다르게 본다. 칭찬과 보너스, 질책과 손실은 모두 내 통제 밖에 있는 외부의 일이다. 그것들은 그저 삶이라는 무대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배경과 소품에 불과하다.


현자는 이러한 외부의 소품이 자신의 가치나 행복을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재산을 잃어도 자신의 인격이 손상되지 않았기에 절망하지 않으며, 뜻밖의 명성을 얻어도 그것이 자신의 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교만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의 행복, 즉 완전한 평온의 상태를 의미하는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 εὐδαιμονία)는 오직 그의 덕, 즉 모든 상황에서 이성적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재산이다. 그는 격렬한 분노, 끝없는 욕망, 근거 없는 두려움과 같은 모든 격정 (pathe, πάθη)에서 자유롭다. 그 대신 그의 마음은 맑고 고요한 호수와 같은 평정심, 즉 아파테이아 (apatheia, ἀπάθεια)의 상태에 머문다. 바람이 불어 호수 표면에 잠시 잔물결이 일 수는 있지만(외부 사건에 대한 첫인상), 그 깊은 곳은 어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스토아 현자의 모습은 다른 지혜의 전통에서도 그 메아리를 찾을 수 있다. 불교에서 모든 번뇌를 끊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 성자인 아라한 (Arhat, 阿羅漢)의 모습은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현자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아라한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불길을 완전히 끈 열반(Nirvana, 涅槃)의 경지에 이르렀듯이, 스토아 현자 역시 비이성적인 감정의 소란을 잠재우고 우주의 이성과 완벽히 하나가 된 상태에 도달한다. 또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을 완전히 실현하여 하늘의 뜻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킨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성인 (聖人) 역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스토아 현자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들 자신도 이 현자의 경지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세네카(Seneca)와 같은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조차 스스로를 현자가 아닌, 현자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하는 자(prokopton, προκόπτων)’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현자는 인간 세상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는, 마치 불사조와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 이상은 좌절을 위한 허상에 불과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스토아 현자의 진정한 가치는 그 실존 여부가 아니라, 그가 우리의 여정을 이끄는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선원은 북극성에 도달할 수 없지만, 북극성을 바라보며 망망대해에서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다.


결국 스토아 현자는 우리 밖에 존재하는 타인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이자, 동시에 모든 걸음을 내딛게 하는 출발점이다. 비록 우리가 일생 동안 완벽한 현자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현자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을 더 지혜롭고, 더 평온하며, 더 가치 있게 만든다. 철학의 여정은 완벽의 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이상을 가슴에 품는 순간, 우리의 모든 일상은 철학적 수련의 장으로 변모한다.



5절: 철학의 비의(祕儀) - 스토아 가르침 속 비밀스러운 기르침들의 첫 단서들


우리는 지금까지 스토아 철학을 견고한 이성의 철학으로 만나보았다. 그것은 명료한 논리의 울타리를 치고, 감정의 소란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며, 오직 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강인한 철학이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어떤 이들은 스토아 철학이 차갑고 건조하며, 영적인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단한 껍질만 보고 그 안에 담긴 풍부한 과즙을 맛보지 못한 것과 같다. 스토아 철학의 합리적인 표면 아래에는, 동서고금의 여러 지혜들과 깊은 강으로 연결된 비밀스러운 가르침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이 첫 장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앞으로 탐험하게 될 그 신비로운 가르침의 첫 단서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단서는 스토아 철학의 심장과도 같은 개념, 로고스 (Logos, λόγος)에 숨어있다. 우리는 흔히 로고스를 ‘이성’이나 ‘논리’로만 번역하지만, 스토아 학파에게 로고스는 그보다 훨씬 거대하고 신성한 의미였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관통하며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신의 숨결이자, 살아있는 우주적 법칙 그 자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지 않고 저마다의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모습, 한 송이 눈꽃이 완벽한 대칭의 결정을 이루는 모습, 이 모든 것 뒤에는 로고스의 지성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교향곡을 들을 때, 단순히 음표의 나열이 아닌 작곡가의 심오한 의도와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같다. 로고스는 우주라는 악보에 쓰인 신의 생각이다.


두 번째 단서는 쉼파테이아 (sympatheia, συμπάθεια), 즉 ‘우주적 공감’이라는 개념이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며, 그 안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진실이다. 낯선 사람의 진심 어린 미소 하나가 굳어 있던 내 마음을 녹이고, 그날 하루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던 경험을 떠올려보라. 슬픈 영화 속 주인공의 눈물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던 순간을 기억해보라. 이것이 바로 쉼파테이아다. 나의 감정과 행동은 결코 나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물결처럼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반대로 온 세상의 기쁨과 슬픔 역시 나에게 흘러 들어온다. 우리는 저마다 홀로 서 있는 나무처럼 보일지라도, 땅 밑에서는 서로의 생명을 주고받는 거대한 숲의 일부인 것이다.


마지막 단서는 프네우마 (pneuma, πνεῦμα)라는 개념에 있다. 프네우마는 ‘숨’ 또는 ‘영혼’을 의미하는 단어로, 스토아 학파는 이것이 만물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는 신성한 기운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사람과 방금 숨을 거둔 시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는 거의 그대로지만,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던 프네우마가 떠나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명상을 하며 자신의 호흡에 집중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들숨과 날숨은 단순히 산소를 교환하는 생리 작용을 넘어, 우주의 생명력과 나의 생명이 만나는 신성한 통로다. 우리 안의 이 작은 숨결(프네우마)은 우주 전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거대한 숨결의 일부다.


로고스, 쉼파테이아, 프네우마. 이 세 가지 단서는 스토아 철학이 단순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나는 누구이며, 이 우주는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려는 장엄한 시도였다. 이성의 철학이라는 현관을 지나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스토아 철학이 품고 있던 고대 지혜의 따뜻한 심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다음 장부터 우리는 이 단서들을 길잡이 삼아, 스토아 철학이라는 강이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지혜들과 어떻게 만나 하나의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지 탐험하는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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