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삶과 저술

by 이호창

제1장: 현관의 목소리들 -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삶과 저술


1절: 초기 스토아 - 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스토아 철학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발원지는 세 명의 위대한 철학자가 파놓은 깊은 샘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각각 철학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마침내 무성한 나무로 길러내어 후대의 사상가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그늘을 만들었다. 이들이 바로 초기 스토아(Early Stoa)를 이끈 제논, 클레안테스, 그리고 크리시포스다.


서문에서 이야기했듯, 스토아 학파의 시작에는 키프로스 섬 출신의 페니키아 상인, 제논(Zeno of Citium, 기원전 334-262)이 있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싣고 아테네로 향하던 중 난파를 당해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아테네 땅을 밟게 된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운명을 철학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서점에서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에 관한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당대의 여러 철학자들, 특히 사회적 관습을 경멸하고 오직 덕에 따른 소박한 삶을 강조했던 견유학파의 크라테스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하지만 제논은 어떤 학파에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아테네의 아고라에 있는 ‘채색된 주랑 현관(Stoa Poikilē, 스토아 포이킬레)’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을 논리학(울타리), 자연학(나무), 윤리학(열매)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 세계의 이성적 질서(로고스)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역설했다. 그의 가르침은 혼란스러운 헬레니즘 시대를 살아가던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제논의 뒤를 이어 스토아 학파의 두 번째 수장이 된 인물은 클레안테스(Cleanthes of Assos, 기원전 330-232)다. 그의 삶은 스토아 철학이 추구하는 인내와 극기의 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서사와도 같았다. 본래 권투선수였던 그는 너무나 가난하여, 밤에는 정원에 물을 길어주는 막노동으로 돈을 벌고 낮에는 그 돈으로 제논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우직함과 성실함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철학적으로 그는 제논의 가르침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특히 신과 우주에 대한 신학적 측면을 깊이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의 정수는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유일한 초기 스토아 문헌, 『제우스 찬가, Hymn to Zeus』에 담겨있다. 이 찬가에서 제우스는 올림포스 산의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이자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로 그려진다. 클레안테스는 노래한다. “오, 가장 영광스러운 불멸자여,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언제나 전능한 단 한 분, 우주의 왕 제우스여… 당신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계의 어떤 일도 당신의 뜻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신성한 섭리 아래 있음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운명에 협력하는 것이 인간의 올바른 길임을 보여주는 스토아적 신앙의 장엄한 고백이다.


만약 제논이 스토아 철학의 씨앗을 뿌리고 클레안테스가 그 싹을 지켜냈다면, 이 철학을 거대한 체계로 완성한 인물은 단연 크리시포스(Chrysippus of Soli, 기원전 280-206)다. 후대 사람들이 “크리시포스가 없었다면 스토아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제2의 창시자’로 불리며, 평생 70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전해지는 경이적인 지성의 소유자였다. 비록 그의 저술 역시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지만, 후대 작가들의 인용과 요약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사상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논리학자로서, 명제 논리를 포함한 스토아 논리학을 매우 정교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운명과 자유의지의 관계, 우주의 순환과 영원회귀, 감정의 본질과 그것을 다스리는 법 등 스토아 철학의 거의 모든 난제에 대해 상세하고 체계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그의 작업 덕분에 스토아 철학은 다른 학파들의 거센 비판과 공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논리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수백 년간 지중해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초기 스토아의 세 거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철학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들이 남긴 방대한 저술들은 역사의 풍파 속에서 거의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키케로나 플루타르코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같은 후대의 작가들이 남긴 인용문이나 비판적인 요약, 그리고 잡다한 정보를 모아놓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과 같은 문헌들을 통해서다. 따라서 초기 스토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마치 거대한 신전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깨어진 조각들을 맞추어 본래의 웅장한 모습을 상상하는 고고학자의 작업과도 같다. 그리고 이 잃어버린 유산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에게 완전한 형태로 남겨진 후대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자들의 저술이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2절: 중기 스토아와 로마로의 전파


초기 스토아의 세 거인이 구축한 철학의 성채는 그 자체로 견고하고 논리적이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라는 특정 문화권의 언어와 사유 방식에 갇혀 있었다. 이 철학이 아테네의 아고라를 넘어 세계 제국 로마의 심장부로 흘러 들어가, 훗날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인물들의 영혼을 적시는 거대한 강물이 되기까지는, 두 명의 위대한 문화적 번역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이 바로 중기 스토아(Middle Stoa)를 이끈 파나이티우스와 그의 제자 포시도니우스다.


기원전 2세기, 로마는 군사적으로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그리스의 깊고 세련된 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지도층 인사들은 그리스의 철학을 배우고자 했으나, 에피쿠로스주의의 쾌락 추구나 견유학파의 급진적인 반문명적 태도는 로마인의 실용적이고 공적인 삶의 의무를 중시하는 정신과는 잘 맞지 않았다. 바로 이 시기에, 로마의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그룹, ‘스키피오 써클(Scipionic Circle)’에 한 명의 그리스 철학자가 초대된다. 그가 바로 로마에 스토아 철학의 씨앗을 본격적으로 심은 파나이티우스(Panaetius of Rhodes, 기원전 185-110)다.


파나이티우스는 로마의 정신을 깊이 이해한 뛰어난 철학 외교관이었다. 그는 초기 스토아 철학의 엄격하고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가르침들을 로마의 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훨씬 더 유연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각색했다. 첫째, 그는 ‘현자(Sage)가 아니면 모두가 어리석다’는 식의 극단적인 이분법을 완화했다. 완벽한 현자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일상 속에서 덕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진보하는 자’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완벽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중시하는 로마인들의 기질에 더 잘 부합했다.


둘째, 그는 스토아 윤리학의 핵심을 추상적인 ‘덕(virtue)’의 추구에서, 구체적인 ‘의무(officium)’의 이행으로 옮겨왔다. 그는 스토아의 개념인 ‘카테콘(kathēkon, 적절한 행위)’을 로마의 사회적 의무 개념과 연결시켰다. 한 사람의 시민, 가장, 공직자로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공적인 삶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나 장군들에게 스토아 철학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 줄 실질적인 지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그는 부와 건강, 명예와 같은 외적인 것들에 대한 태도를 훨씬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초기 스토아는 이런 것들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비도덕적 무관심(adiaphora)’의 영역에 두었지만, 파나이티우스는 그것들이 도덕적인 선(善)은 아닐지라도, 자연의 순리에 맞는 ‘선호할 만한 것(proēgmena)’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즉, 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부와 건강, 좋은 평판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유연성 덕분에, 스토아 철학은 더 이상 세속적 성공을 포기해야만 하는 철학이 아니라, 성공적인 공적인 삶과 내면의 평화를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매력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후대의 위대한 연설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Cicero)가 자신의 대표적인 윤리학 저서인 『의무론, De Officiis』을 대부분 파나이티우스의 저술에 기대어 썼다는 사실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파나이티우스의 뒤를 이은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of Apamea, 기원전 135-51)는 중기 스토아의 또 다른 거인이자, 당대 최고의 박식가였다. 그는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천문, 민족지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정통한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유창한 강의는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로마의 저명인사들을 매료시켰고, 스토아 철학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철학적으로 포시도니우스는 파나이티우스가 실용적으로 다듬어 놓은 스토아 철학에, 플라톤적인 요소와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다시 불어넣었다. 그는 우주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적 공감(sympatheia)’의 개념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천체의 운행이 지상의 사건과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으며,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영혼을 순수한 이성적 부분과 비이성적인 감정적 부분 사이의 투쟁의 장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초기 스토아의 순수한 이성 중심주의보다 플라톤의 영혼론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경향은, 이성적인 설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로마인들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며 스토아 철학의 지평을 더욱 넓혔다.


결국 파나이티우스와 포시도니우스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그리스의 포도주를 로마라는 새로운 잔에 담아낸 위대한 소믈리에와 같았다. 그들은 원액의 깊은 맛은 유지하면서도, 로마인들이 마시기에 너무 쓰거나 독했던 부분은 부드럽게 만들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향을 더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의 여러 철학 학파 중 하나에서 벗어나, 세계 제국의 지배 계급을 위한 보편 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닦아놓은 단단한 길 위에서, 비로소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로마 스토아 철학의 가장 빛나는 별들이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3절: 세네카 (Seneca)


중기 스토아 철학이 로마의 정신에 맞게 다듬어놓은 길 위로, 로마 제정기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는 첫 번째 거인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기원후 65년)이며,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도 비극적인 철학적 질문이다. 그는 부와 명예를 초월하라고 가르치면서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고, 분노를 다스리라고 설파하면서 폭군 네로의 스승이자 정치적 조력자였으며, 평온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평생을 정치적 암투와 추방, 그리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 후대의 비판가들은 이를 위선이라고 공격했지만, 오히려 그의 철학이 오늘날까지도 생생한 힘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 극심한 모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상아탑 속에서 쓰인 평온한 이론이 아니라, 권력의 폭풍 한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한 인간의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세네카는 일찍이 로마로 건너와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재능은 칼리굴라 황제의 질투를 샀고,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간통 누명을 쓰고 코르시카 섬으로 8년간의 긴 유배를 떠나게 된다. 유배에서 돌아온 그의 운명은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인 아그리피나에 의해, 그녀의 아들이자 훗날 황제가 될 어린 네로의 스승으로 발탁된다. 이후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세네카는 제국의 막후 실력자로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하지만 광기로 치닫는 네로를 제어하려는 그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된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집필에 몰두하다 마침내 네로로부터 자결을 명령받는다.


이러한 그의 극단적인 삶의 궤적은 그의 저술 곳곳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대화, Dialogi』는 사실상 특정 주제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 모음집이다. 예를 들어 『분노에 관하여, De Ira』에서 그는 분노를 ‘일시적인 광기’라고 정의하며, 그것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그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늦추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직시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등의 실용적인 처방을 제시한다. 또한 『행복한 삶에 관하여, De Vita Beata』에서는 자신의 막대한 부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는 행복이 오직 덕에만 있다는 스토아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부와 건강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선호할 만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를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부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의 철학적 정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단연 말년에 친구에게 보낸 124편의 편지를 묶은 『도덕에 관한 서한,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이다. 이 편지들에서 세네카는 스승이자 영혼의 의사로서, 친구 루킬리우스가 스토아 철학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그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산인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며,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연습(memento mori)을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달으라고 조언한다. 또한 며칠간 일부러 가난하게 살아보며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연습이나,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불행을 미리 상상해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악의 예행연습(praemeditatio malorum)’과 같은 구체적인 수련법을 제안한다.


세네카의 스토아 철학은 초기 스토아의 엄격함과는 다른, 인간적인 따뜻함과 심리학적 통찰이 돋보인다. 그는 완벽한 현자의 이상보다는, 매일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덕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하는 자’의 고투에 더 깊은 공감을 보낸다. 그의 철학은 영혼을 위한 치료법(therapeia)으로서,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같은 인간의 구체적인 고통에 실질적인 위안과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삶은 네로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손목 혈관을 끊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친구들 앞에서 의연하게 죽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죽음마저 마지막 철학 강의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삶과 죽음은 그가 평생 탐구했던 철학적 주제들을 극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세네카의 목소리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그가 결점 없는 성인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모순과 유혹 속에서 고뇌했던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내면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피로 쓰인 진솔한 증언이다.



4절: 에픽테토스 (Epictetus)


세네카가 권력의 정점에서 스토아 철학을 논했다면, 로마 스토아의 두 번째 거인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 즉 쇠사슬에 묶인 노예의 신분에서 철학의 진정한 자유를 외쳤다. 그의 이름은 에픽테토스(Epictetus, 기원후 50-135)이며, 그의 삶 자체가 스토아 철학이 인간에게 약속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완벽한 증거다. 그는 부유한 귀족도, 유창한 문장가도 아니었다. 그는 로마의 권력자이자 네로 황제의 비서였던 에파프로디투스(Epaphroditus) 소유의 그리스인 노예였으며, 평생 다리를 저는 장애를 안고 살았다. 그의 다리에 얽힌 유명한 일화는 그의 철학을 어떤 설명보다도 더 강력하게 요약해준다. 주인이 장난삼아 그의 다리를 심하게 비틀자, 에픽테토스는 고통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부러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부러질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일화는 에픽테토스 철학의 심장, 즉 ‘통제권의 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불행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내면 세계, 즉 우리의 판단(hupolēpsis), 욕구(orexis), 회피(ekklisis), 그리고 어떤 일에 나아가려는 충동(hormē)뿐이다. 간단히 말해, 나의 생각과 태도, 의지만이 온전히 나의 것이다.


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그 외의 모든 것이다. 나의 육체(건강하게 태어날지, 병들지, 다칠지), 나의 재산(그것을 얻거나 잃는 것), 나의 평판(다른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여기에 속한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모든 불안과 좌절, 분노와 슬픔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 애쓰거나, 그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들의 변덕스러운 판단에 일희일비하는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건강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질병이라는 자연스러운 현상 앞에서 평온을 유지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외적인 것들을 내 뜻대로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들에 대한 나의 내면적 태도를 바꾸는 데 있다.


에픽테토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직접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강력하고 직설적인 가르침은 그를 깊이 존경했던 제자, 역사가 아리아누스(Arrianus)에 의해 충실히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그의 주된 가르침은 『담화록(Diatribai)』이라는 방대한 강의록에 담겨있다. 이 책은 그가 노예에서 해방된 후, 로마에서 추방되어 그리스의 니코폴리스에 세운 학교에서 제자들과 나눈 문답과 강의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담화록』 속 에픽테토스의 목소리는 세네카의 세련된 문체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종종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로 제자들의 안일함과 자기기만을 꾸짖고, 생생한 비유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진리를 깨닫도록 몰아붙인다. 그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제자들의 영혼을 단련시키는 엄격한 교관과도 같았다.


아리아누스는 이 방대한 『담화록』의 핵심만을 추려내어, 일상생활 속에서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짧은 실천 지침서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안내서(Enchiridion)』, 즉 ‘손안에 쥘 수 있는 단검’이라는 뜻의 책이다. 이 책은 스토아 철학의 핵심 원리들을 짧은 경구 형태로 제시하여, 군인이나 상인, 정치가들이 언제 어디서든 펼쳐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첫 구절은 그의 사상 전체를 압축한다. “세상의 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우리에게 달린 것과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것…”


에픽테토스가 제시하는 길은 내면의 자유를 향한 가장 급진적인 길이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설령 당신이 쇠사슬에 묶인 노예라 할지라도, 당신의 의지와 판단만큼은 제우스 신조차도 빼앗아갈 수 없다. 외부의 어떤 독재자도 당신의 내면 왕국을 침범할 수 없다. 진정한 노예는 몸이 묶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에 묶여 외부의 것들에 끌려다니는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오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만을 원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일 때 얻어진다. 세네카가 부와 권력 속에서도 어떻게 철학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에픽테토스는 부와 권력은 물론, 건강과 신체의 자유마저 모두 빼앗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인간이 완벽한 존엄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의 가르침은 후대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서는 인지행동치료(CBT)와 같은 현대 심리치료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한때 이름 없는 노예였던 그의 지혜는, 시대를 넘어 고통과 역경에 직면한 수많은 이들에게 내면의 힘을 되찾아주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위대함이 그가 처한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에 반응하는 그의 정신에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철학자다.



5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스토아 철학이라는 거대한 강의 여정은 마침내 가장 넓고 깊은 바다에 이르러 그 대미를 장식한다. 그 바다는 바로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이자, ‘철인 황제’라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기원후 121-180)의 고독한 영혼이다. 만약 세네카가 권력의 중심에서, 그리고 에픽테토스가 예속의 밑바닥에서 철학을 사유했다면, 마르쿠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무거운 책임의 갑옷을 입고, 문명의 경계선이 무너져 내리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철학을 살아내야만 했다. 그의 삶과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은, 스토아 철학이 인간의 정신을 얼마나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숭고하고도 감동적인 증언이다.


마르쿠스는 본래 황제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조용하고 사색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철학을 깊이 사랑했으며, 평화로운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눈에 띄어, 당시 황제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일찌감치 차기 황제로 정해졌다. 그는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배의 선장이 되어야 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그가 다스려야 했던 시대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가 저물어가던 거친 폭풍의 시대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동쪽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이 침략해왔고, 북쪽의 다뉴브 강 전선에서는 게르만족의 대규모 침공이 수십 년간 이어졌다. 그는 인생의 오랜 시간을 로마의 안락한 궁전이 아닌, 차가운 북방의 전쟁터 막사에서 보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 전역에는 ‘안토니누스 역병’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한 그는 사랑하는 아내 파우스티나의 부정한 소문과 수많은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비극까지 감내해야 했다. 마르쿠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가장 거대한 고통과 책임을 짊어진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가 남긴 『명상록, Meditationes』은 바로 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 태어났다. 이 책의 원래 그리스어 제목은 ‘타 에이스 헤아우톤(Tà eis heautón)’, 즉 ‘자기 자신에게’이다. 이 제목이야말로 이 책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명상록』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쓴 철학서나 회고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거운 짐을 진 한 인간이, 매일 밤 추운 막사의 등불 아래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 써 내려간 지극히 사적인 철학 일기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스승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스토아 철학의 원리들을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적용하며, 무너지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위대한 황제의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고뇌하고 분투하는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독백을 엿듣는 것과 같다.


『명상록』의 페이지마다 그는 같은 주제들을 반복해서 자신에게 상기시킨다. 첫째는 모든 것의 덧없음과 변화의 필연성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한다. 위대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그의 노새를 끌던 마부도 결국에는 똑같이 죽어 흙으로 돌아갔다고. 화려한 궁전도, 영광스러운 승리도, 심지어 이 로마 제국조차도 시간의 강물 속에서는 한순간의 파도에 불과하다고. 이러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은 그가 겪는 고통과 불안을 우주적인 시각 속에서 바라보게 하여,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돕는 강력한 심리적 훈련이었다.


둘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는 추운 아침, 따뜻한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자신을 꾸짖으며 말한다. “너는 인간의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지, 따뜻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에게 황제라는 역할은 권력이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 즉 ‘인간의 벌집’을 위해 봉사해야 할 신성한 의무(kathēkon)였다. 그의 철학은 결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혼란스러운 세상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역할을 올곧게 수행하기 위한 무기였다.


셋째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 즉 판단에 대한 통제다. 그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다짐한다. “오늘 나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기만적인 자, 질투심 많은 자, 비사교적인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그들의 악행이 나의 내면을 더럽히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행동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오직 그것에 대한 나의 판단과 반응만을 통제하고자 했다. “최고의 복수는 너의 적과 같이 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이 원칙의 정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완벽한 스토아 현자가 아니었다. 『명상록』 곳곳에서 그는 자신의 나약함에 좌절하고, 쉽게 화를 내는 자신을 꾸짖으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그를 가장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중 하나로 만든다. 그는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철학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처절하게 분투했던 가장 진솔한 실천가였다. 그는 스토아 철학의 이론들이 인간의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의 고독한 목소리는 황제의 황금 갑옷을 뚫고 나와, 오늘날 고통과 책임의 무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 직접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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