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철학의 여정은 하나의 날카로운 ‘자름(cut)’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세상 전체를 단 두 개의 범주로 명확하게 나누는, 단호하고도 근본적인 정신의 수술이다. 이 위대한 나눔의 기술이야말로, 노예였던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우리에게 물려준 가장 귀중한 유산이며,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내면의 왕국을 건설하는 첫 번째 초석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나눔을 ‘디코토미(dichotomy)’라고 불렀으며, 이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이다.
‘디코토미’는 ‘둘(in two)’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디카(dicha, δίχα)’와 ‘자르다(to cut)’를 의미하는 ‘템네인(temnein, τέμνειν)’이 합쳐진 단어다. 그 문자적 의미는 ‘둘로 자르기’이며, 이는 어중간한 중간 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분리를 뜻한다. 에픽테토스는 그의 실천 지침서인 『안내서, Enchiridion』의 첫 문장에서 이 장엄한 분리를 선언한다. “세상의 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우리에게 달린 것(eph’hēmin, ἐφ' ἡμῖν)과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것(ouk eph’hēmin, οὐκ ἐφ' ἡμῖν).” 이 짧은 문장 속에, 스토아 철학의 모든 실천적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먼저, ‘우리에게 달린 것’, 즉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무엇인가.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이 영역은 놀라울 정도로 좁고 명확하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내면 세계에만 국한된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판단’과 ‘의견’,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구’와 ‘충동’, 그리고 어떤 것을 피하려는 ‘혐오’와 ‘기피’가 여기에 속한다.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나의 생각, 나의 가치판단, 나의 선택, 나의 의지, 나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왕국이다. 외부의 그 어떤 힘도 나의 동의 없이는 이 왕국을 침범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져 중요한 약속에 늦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비가 오는 현상 자체는 명백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일이다. 하지만 그 현상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정말 최악의 하루야, 모든 게 엉망이 됐어!”라고 판단하며 분노와 좌절에 빠지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반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차 안에서 좋은 음악이나 듣자”라고 판단하며 평온을 유지하는 것 또한 나의 선택이다. 비는 나의 통제 밖에 있지만, 나의 내면적 반응은 나의 통제 안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말한 내면의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다. 나의 육체(나는 건강해지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병에 걸릴지 아닐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나의 재산(나는 부를 얻으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경제 위기나 사기를 막을 수는 없다), 나의 평판(나는 친절하게 행동할 수는 있지만,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 사회적 지위, 날씨, 과거, 그리고 미래의 최종적인 결과 모두가 이 영역에 속한다. 스토아 철학은 이것들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심리적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이 두 영역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것들(타인의 인정, 재산, 건강)을 통제하려 애쓰며 평생을 불안과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 반면, 우리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판단과 태도는 방치해둔 채, 외부의 사건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노예의 삶을 산다.
명궁(名弓)의 비유는 이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활을 쏘는 궁수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자세를 바로잡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위를 당기는 힘을 조절하고, 가장 완벽한 순간에 화살을 놓는 과정뿐이다. 일단 화살이 활시위를 떠난 후에는,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이나 과녁의 상태, 화살 자체의 미세한 결함 등은 더 이상 그의 영역이 아니다. 현명한 궁수는 화살을 놓는 그 순간까지의 과정에만 온전히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고, 그 이후의 결과는 우주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디코토미의 실천은 우리 삶의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리고, 오직 내가 바꿀 수 있는 것, 즉 나의 내면의 품성과 선택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쏟으라는 요청이다. 이것은 결코 세상을 포기하는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필요한 곳에 낭비되던 정신적 에너지를 회수하여, 가장 중요한 전투, 즉 나 자신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전투에 집중하는 가장 능동적이고도 현명한 전략이다. 이 명료한 ‘자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외부 세계의 노예에서 내면 왕국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2절: 불교의 무분별(無分別) 지혜 -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
에픽테토스가 제시한 디코토미(dichotomy)의 실천이 우리 영혼을 위한 날카로운 검(劍)이라면, 동양의 지혜는 그 검마저 녹여버리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길을 보여준다. 스토아 철학이 세상을 ‘내게 달린 것’과 ‘내게 달린 것이 아닌 것’으로 명확히 ‘나누는’ 훈련을 통해 평온을 얻고자 했다면, 인도의 깨달은 자, 붓다는 그 모든 ‘나눔’ 자체가 고통의 뿌리임을 직시하고, 그 경계를 허무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무분별(無分別, avikalpa)’의 지혜이며, 이는 집착이라는 불을 끄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수행이다. 이 두 위대한 길을 나란히 놓고 걸어갈 때, 우리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같은 문제 앞에서 인류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왔는지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스토아의 디코토미는 근본적으로 ‘분별(分別)’의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logos)을 사용하여 무엇이 나의 진정한 선(善)이고 무엇이 무관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분별하고, 그 분별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단련하는 과정이다. 이는 마치 유능한 정원사가 정원에 자라는 식물들을 보며, 어떤 것이 내가 가꾸어야 할 유익한 과일나무(내면의 덕)이고 어떤 것이 뽑아내야 할 잡초(잘못된 판단)이며, 어떤 것이 그저 배경이 되는 들풀(외부의 사건)인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스토아의 길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내면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적극적인 실천이다.
반면, 불교의 무분별지는 이 모든 분별의 행위 이전에 있는 더 근원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무분별이란 ‘분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이는 멍청하거나 무지한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좋다/싫다’, ‘옳다/그르다’, ‘나/너’ 와 같은 이분법적 개념으로 나누기 이전의 순수한 앎의 상태, 즉 반야(般若, prajñā)의 지혜를 뜻한다. 불교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고통(苦, duḥkha)은 근본적인 무지(無明, avidyā)에서 비롯된다. 이 무지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無常, anitya), 독립적인 실체가 없으며(無我, anātman), 서로에게 의지하여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연기(緣起)의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무지 때문에 우리는 덧없는 것들에 ‘이것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집착하고, 실체 없는 것들에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이다’라고 고집하며, 그 집착이 좌절될 때 괴로움을 겪는다.
예를 들어, 내가 아끼던 찻잔이 깨졌을 때를 생각해보자. 스토아 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찻잔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닌’ 외부의 사물이다. 그것은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깨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나의 평온은 찻잔의 온전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니 슬퍼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판단이다.” 이는 찻잔과 나의 평온을 ‘분리’함으로써 고통을 막는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불교의 현자는 이 상황을 다르게 본다. 그는 말할 것이다. “고통은 찻잔이 깨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찻잔’이라는 생각, 즉 찻잔과 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분별’과, 그 찻잔이 영원히 나의 소유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나’라는 고정된 실체도 없고 ‘찻잔’이라는 영원한 실체도 없다. 모든 것은 그저 인연에 따라 잠시 모였다가 흩어질 뿐,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다.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집착은 저절로 사라지고 고통 또한 머물 자리가 없게 된다.” 이는 찻잔과 나를 분리하는 대신,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물론, ‘나’와 ‘찻잔’이라는 개념 자체의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봄으로써 고통의 뿌리를 뽑는 방식이다.
스토아 철학이 내면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이성적 존재)’를 명확히 정의하고 그 성벽을 튼튼히 쌓는 길이라면, 불교는 그 성벽과 성주, 그리고 침략자라는 모든 분별 자체가 환상임을 깨닫고 성벽을 허물어 버리는 길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자아’는 훈련하고 완성해야 할 주체다. 그러나 불교에서 ‘자아(我相, ātman-saṃjñā)’는 모든 집착과 고통을 낳는 가장 근원적인 착각이며, 궁극적으로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스토아의 목표가 외부의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바위’가 되는 것이라면, 불교의 목표는 그 바위마저 녹여버리는 거대한 ‘바다’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두 길은 결국 우리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만난다. 그러나 그 과정과 목표는 다르다.
스토아의 디코토미는 우리에게 이 세상 속에서 더 강하고 현명한 전사가 되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현실적인 고통에 대처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용적인 심리적 기술이다.
반면, 불교의 무분별지는 우리에게 그 전쟁 자체가 환상임을 깨닫게 하여, 싸움의 장을 완전히 떠나도록 이끈다. 그것은 고통의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통찰이다.
하나는 폭풍우를 견디는 법을, 다른 하나는 내가 곧 폭풍우였음을 깨닫는 법을 알려준다.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훌륭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을 제공한다면, 불교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기술’ 그 자체를 제공하는 셈이다. 오늘 당장 닥친 괴로움에 맞서 싸울 무기가 필요할 때 우리는 에픽테토스의 검을 쥘 수 있을 것이고, 그 싸움 자체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우리는 붓다의 고요한 미소 아래 쉴 수 있을 것이다.
3절: 운명애(Amor Fati) - 니체의 영원회귀와 스토아의 운명 수용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대담한 한 걸음을 내디딜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운명을 체념적으로 감수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마저도 필연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 궁극적인 삶의 긍정의 태도는 훗날 19세기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의해 ‘운명애(Amor Fati,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렬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스토아의 운명 수용과 니체의 운명애, 이 두 위대한 사상은 17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스토아 철학에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Logos)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우주는 완벽한 섭리에 따라 운행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기에,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이 거대한 전체의 조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전염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전쟁으로 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우주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있어야 할 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도려내지는 부위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끔찍한 파괴지만, 몸 전체의 건강이라는 더 큰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필요하고도 선한 행위다. 스토아 철학자는 이처럼 자신의 좁은 시야를 넘어 우주 전체의 시야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도록 훈련받는다.
에픽테토스는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구하지 말고,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너의 삶은 평온할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이는 소극적인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작은 의지를 우주의 거대한 의지에 일치시키는 가장 능동적인 정신적 행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에게 닥쳐온 모든 불행에 대해 이렇게 되뇌었다. “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이것을 고귀하게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행운이다.” 그에게 운명을 수용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성적 본성을 실현하고 덕을 발휘할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 스토아의 운명 수용은 이처럼 이성적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평온을 찾는 길이다.
반면, 니체의 운명애는 신도, 이성적인 우주의 섭리도 믿지 않았던 한 철학자가 던지는 훨씬 더 급진적이고 실존적인 도전이다. 그의 운명애 개념의 심장에는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라는 무서운 사상 실험이 자리하고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느 날 밤, 악마가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또다시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 모든 생각과 한숨, 네 삶의 모든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것들이 똑같은 순서와 차례로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너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외치며 이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는가.
니체에게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최고 형태는, 바로 이 영원한 반복의 운명 앞에서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예스!”라고 외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다. 그것은 단지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나는 그것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고 말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스토아와는 달리, 니체의 세계에는 우리를 보살피는 신적인 섭리나 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저 맹목적인 힘들의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놀이일 뿐이다. 따라서 니체의 운명애는 이성적 이해에서 비롯되는 평온이 아니라,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긍정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내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최고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상은 어떻게 다른가.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왜’ 운명을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에 있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그 이유는 우주가 본질적으로 ‘선하고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신의 뜻에 순응하는 경건한 행위다. 그러나 니체에게 그 이유는 우주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무의미함에 맞서, 자신의 의지로 삶을 긍정하는 영웅적인 행위다.
추구하는 목표 또한 다르다. 스토아 철학의 목표는 아파테이아(apatheia), 즉 외부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이다. 고통을 피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 니체의 목표는 평정이 아니라 ‘성장’과 ‘극복’이다. 그는 고통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더 강한 존재, 즉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극이자 조건으로 본다. 그에게 아모르 파티는 고통을 끌어안고 그것을 자신의 힘을 키우는 동력으로 삼는, 비극적이면서도 환희에 찬 긍정이다.
스토아의 운명 수용과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인간이 고통과 운명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태도라는 점에서 하나의 산 정상을 향하는 두 개의 다른 등산로와 같다. 스토아는 이성적인 신뢰라는 안전한 로프를 잡고 오르는 길을, 니체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자신의 의지만을 믿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길을 제시한다.
스토아의 철학은 우리에게 우주적 질서 안에서의 깊은 ‘평온’을 약속하고, 니체의 사유는 실존적 고독 속에서의 장엄한 ‘자기 극복’을 약속한다. 삶의 모든 순간, 심지어 가장 어두운 절망의 순간까지도 나의 운명으로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스토아의 현자와 니체의 초인이라는, 인류가 그려낸 가장 위대한 두 개의 인간상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4절: 심리적 면역 시스템 - 현대 심리학이 발견한 스토아의 지혜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2천 년 전에 닦아놓은 내면의 길은, 놀랍게도 오늘날 가장 첨단을 걷는 현대 심리학의 연구실 안에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현대 심리학은 수많은 실험과 데이터를 통해,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 외부의 충격과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행복을 합성해내는 놀라운 능력이 내재해 있음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 (Daniel Gilbert)와 같은 학자들이 ‘심리적 면역 시스템 (psychological immune system)’이라고 명명한 이 능력은, 사실상 스토아 철학자들이 수백 년간 갈고 닦아온 정신적 훈련의 과학적 재발견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몸에 외부의 바이러스나 세균이 침투했을 때, 백혈구가 활성화되어 우리를 지키는 생물학적 면역 시스템이 있듯이, 우리의 정신에도 예상치 못한 불행이나 좌절을 겪었을 때, 그 충격을 완화하고 다시 일상의 평온을 되찾도록 돕는 자동적인 방어 기제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승진에서 탈락하면 영원히 불행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괜찮아진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는 실연의 고통이 평생 갈 것이라 믿지만, 어느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심리적 면역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실패의 의미를 재해석하고(‘어차피 그 자리는 나랑 맞지 않았어’),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며(‘덕분에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됐지’), 고통을 합리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한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적인 가르침, 즉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심리적 면역 시스템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훈련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불행한 사건 그 자체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 특히 인지행동치료(Cognitive-Behavioral Therapy, CBT)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나 아론 벡(Aaron T. Beck)에 의해 체계화된 CBT는, 우리의 감정적 고통(C: Consequence)이 어떤 활성화 사건(A: Activating event)에 의해 직접적으로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비합리적인 신념(B: Belief)을 통해 매개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발표 실패’(A)라는 사건이 ‘나는 무능력해’라는 비합리적 신념(B)을 거치면 ‘우울감’(C)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CBT의 목표는 바로 이 비합리적인 신념(B)을 찾아내 그것에 도전하고,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신념으로 대체함으로써 감정적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에픽테토스가 2천 년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다. 스토아 철학의 실천은 곧 자신의 자동적인 생각과 판단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그것이 이성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며, 비이성적인 판단이 마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거부하는 훈련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사물 자체는 너의 영혼에 닿지 못한다”고 되뇌었던 것은, 사건(A)과 감정(C) 사이에 우리 자신의 신념과 판단(B)이라는 안전한 공간이 있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인지 치료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스토아 철학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우울증과 불안 장애에서 구해내고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 치료법의 원형을 이미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과 현대 심리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현대 심리학의 목표는 대부분 ‘정상적인 기능의 회복’이나 ‘주관적 안녕감(well-being)’의 증진에 있다. 즉, 심리적 면역 시스템을 통해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행복감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행복감이 아니라, ‘덕(virtue)’의 실현과 ‘부동심(apatheia)’이라는 더 높은 경지에 있다. 그들에게 심리적 평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질서에 따라 덕스럽게 살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또한, 현대 심리학은 대부분의 경우 그 철학적,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거한 채 오직 기술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 반면, 스토아 철학의 실천은 언제나 로고스라는 거대한 우주론적 신념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스토아 철학자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교정하는 것은 단순히 기분이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주의 이성적인 질서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의 심리적 훈련은 언제나 더 거대한 우주적, 도덕적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현대 심리학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삶의 기술(ars vivendi)로서 실천해왔던 지혜가 결코 낡은 관념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에 대한 놀랍도록 정확한 통찰이었음을 과학의 언어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강력한 면역 시스템이 이미 존재하며, 2천 년 전 스토아의 현자들이 남긴 가르침은 그 시스템을 활성화하고 단련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사용 설명서다. 과학이 우리의 뇌와 마음의 지도를 점점 더 정밀하게 그려낼수록, 우리는 그 지도 위에 이미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고대 철학의 오래된 길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5절: 외부의 폭풍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기술
우리는 스토아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 즉 세상이 ‘우리에게 달린 것’과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것’으로 나뉜다는 디코토미(dichotomy)의 진실을 마주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삶의 실제 폭풍우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론은 항해술 책과 같고, 삶은 예측 불가능한 바다와 같다. 스토아 철학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신적 기술’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단순한 위로나 긍정의 말이 아니라, 매일의 연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단련시키고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화를 구축하는 구체적인 수련법의 체계다.
이 모든 기술의 바탕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행복은 종종 외부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쾌적하고 즐거운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문제가 없고, 갈등이 없으며,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행복은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 외부의 조건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이 추구하는 내면의 평화, 즉 ‘아파테이아(apatheia, 부동심)’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좋은 감정의 지속이 아니라, 나쁜 감정의 ‘부재(absence)’를 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격정(pathe)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스토아의 평화는 고요한 온실 속에서 자라는 연약한 꽃이 아니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절벽 위에서도 굳건히 뿌리내린 소나무와 같다. 그것은 폭풍우를 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견뎌내고 심지어 그것을 자신을 단련시키는 힘으로 삼음으로써 얻어지는 강인한 평온이다.
이 강인한 평온을 얻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동의의 훈련(Discipline of Assent)’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세 단계로 나누어, 그 과정에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인상(phantasia, 판타시아)’이다. 외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의 감각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한 이미지나 생각이 마음에 떠오른다. 예를 들어, 상사가 나의 보고서를 보고 “이건 완전히 잘못됐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때 ‘상사가 내 보고서를 비판했다’는 객관적인 사실과 함께, ‘나는 무능력하다, 나의 평판이 손상되었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라는 자동적인 가치판단이 하나의 ‘인상’ 덩어리로 내 마음에 떠오른다.
두 번째 단계는 ‘동의(sunkatathesis, 숭카타테시스)’다. 바로 이 단계에 인간의 자유가 놓여있다. 우리는 방금 떠오른 그 인상에, 특히 그 안에 포함된 가치판단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를 보류’할 수도 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이 과정을 거의 자동적으로 수행한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라는 가치판단에 즉각적으로 “그렇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라고 동의해버린다.
세 번째 단계는 ‘감정과 행동(pathos/hormē)’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가치판단에 ‘동의’하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감정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라는 판단에 동의했으므로, 우리는 수치심, 불안, 분노와 같은 격정(pathe)에 휩싸이게 되고, 그 감정에 따라 방어적으로 변명하거나 상사를 원망하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스토아의 기술은 바로 첫 번째 ‘인상’과 두 번째 ‘동의’ 사이에 의식적인 ‘틈’을 만드는 것이다. 상사의 비판이라는 인상이 마음에 떠올랐을 때, 자동적으로 동의하는 대신 잠시 멈추어 그 인상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다. “잠깐, 여기서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상사가 특정 단어들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끔찍하다’거나 ‘내가 무능력하다’는 것은 그 사실에 내가 덧붙인 나의 판단일 뿐이다. 이 판단은 진실인가? 이 판단에 동의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한가? 나는 이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처럼 인상에 포함된 가치판단을 분리해내고 그것에 대한 동의를 보류할 때, 우리는 파괴적인 감정의 연쇄 반응을 그 근원에서부터 차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운영체제다.
이 운영체제를 효과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스토아 철학자들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인 수련법들을 개발했다.
첫째는 ‘아침의 준비 명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매일 아침을 이렇게 시작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기만적인 자, 질투심 많은 자, 비사교적인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같은 이성의 일부이며, 그들의 악의는 나의 내면을 더럽힐 수 없다.” 이는 단순히 하루를 비관적으로 시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악의 예행연습(praemeditatio malorum)’이라 불리는 매우 효과적인 심리적 예방접종이다. 하루 동안 겪게 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과 불쾌한 상황들을 미리 상상해봄으로써, 실제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충격을 받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예상했던 일이다. 이것은 나의 덕을 시험할 기회다’라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 마음이 얘기치 않은 사건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하는 것을 막아주는 강력한 방패다.
둘째는 ‘위에서 내려다보기’라는 관점 전환 훈련이다. 스트레스나 불안에 휩싸일 때,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이 방 안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을 상승시켜, 내가 있는 집, 도시, 나라를 내려다본다. 계속해서 의식을 높여, 푸른 구슬처럼 떠 있는 지구 전체를, 그리고 태양계와 은하수를, 마침내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광대함과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조망한다. 이 우주적인 관점 속에서, 방금 전까지 나의 세상 전부를 차지하고 있던 그 문제, 즉 상사의 비판이나 연인과의 다툼, 금전적인 걱정은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이 되는가. 이 훈련은 우리의 이기적인 관점을 우주적인 관점으로 확장시켜, 개인적인 고통을 더 큰 질서의 일부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 무게를 극적으로 덜어준다.
셋째는 ‘저녁의 성찰 일기’다. 세네카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을 따라,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 습관을 가졌다. “오늘 나는 어떤 나쁜 습관을 고쳤는가? 어떤 유혹에 맞서 싸웠으며, 어떤 점에서 더 나아졌는가?” 이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스토아 철학의 기준에 비추어 검토하는 엄격한 자기 평가의 시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비이성적인 판단에 동의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다음 날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이는 삶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더 나은 인간으로 조각해나가는 장인의 태도다.
넷째는 ‘고난의 의도적 실천’이다. 세네카는 우리에게 며칠에 한 번씩은 일부러 불편함을 감수해보라고 조언한다. 가장 값싼 음식을 먹고, 낡은 옷을 입으며,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것이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인가?” 이 훈련은 가난이나 실패와 같은 잠재적인 불행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종의 노출 치료다. 우리는 이러한 자발적인 고난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외부적인 편안함이나 소유물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깨닫게 된다. 이는 우리를 훨씬 더 강하고 회복력 있는 존재로 만들며, 운명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든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이 모든 기술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룬다. 아침의 명상은 하루의 전투를 위한 무장을 갖추게 하고, 동의의 훈련은 전투 중에 적의 공격(잘못된 인상)을 막아내는 핵심 기술이며, 위에서 내려다보기는 언제든 전장의 안개 속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지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이고, 저녁의 성찰은 그날의 전투를 복기하며 다음 날을 위한 전략을 세우는 시간이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운동선수가 매일 근육을 단련하고, 음악가가 매일 악기를 연습하듯, 평생에 걸친 꾸준하고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노력의 끝에서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문제없는 삶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삶, 외부의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그 중심에서 고요히 서 있을 수 있는 내면의 평화라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숭고한 보상이다. 이 기술들은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꾸는 기술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존엄과 자유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