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철학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오르는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논리학이라는 단단한 지팡이를 짚고, 자연학이라는 지도를 보며, 윤리학이라는 가파른 길을 걸어온 영혼이 마침내 도달하는 정상의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 스토아 철학은 그 정상의 이름을 ‘아파테이아(apatheia, ἀπάθεια)’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단어는 스토아 철학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깊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오늘날 영어 단어 ‘apathy(무관심, 냉담)’의 어원이 된 이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스토아의 이상을 모든 감정이 제거된, 마치 차가운 돌이나 감정 없는 로봇과 같은 비인간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파테이아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아파테이아는 감정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가장 완벽하고 건강한 상태, 즉 어떤 외부의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고 고요한 평정심을 의미했다. 그것은 비어있는 공허가 아니라, 가득 찬 충만이다.
아파테이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의 뿌리로 다시 한번 돌아가야 한다. ‘아파테이아’는 ‘없다(a-)’는 부정 접두사와 '격정'이나 '열망' 등에 의해 생긴 ‘고통’ 혹은 ‘질병’을 의미하는 ‘파토스(pathos)’의 합성어다. 따라서 그 문자적 의미는 ‘파토스가 없는 상태’다. 우리가 앞서 깊이 탐구했듯이, 스토아 철학에서 ‘파토스’는 모든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격정만을 가리켰다. 분노, 두려움, 탐욕, 그리고 외부적인 것에 의존하는 덧없는 쾌락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아파테이아는 이성과 영혼의 평온을 파괴하는 ‘질병’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할 뿐, 모든 감정이 사라진 무감각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몸에서 암세포(파토스)를 완전히 제거한 상태와 같다. 암세포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몸이 모든 생명 활동을 멈추고 시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암세포라는 질병이 사라짐으로써, 몸은 비로소 본래의 건강하고 조화로운 생명 활동(좋은 감정, eupatheiai)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파테이아는 분노의 열병, 두려움의 오한, 욕망의 갈증이 모두 사라진, 영혼의 가장 완벽한 건강 상태다. 이 건강한 영혼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훨씬 더 명료하고 깊이 있게 느낀다. 다만 그 느낌이 더 이상 이기적인 집착이나 비이성적인 동요에 의해 왜곡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아파테이아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깊고 푸른 바다의 모습이다. 바다의 표면에는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파도가 일고 물결이 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경험과 같다. 외부 세계로부터 수많은 인상들이 들어오고, 우리의 마음은 그것들에 반응한다. 스토아 현자 역시 바보가 아니기에, 갑작스러운 위험 앞에서는 놀라움을 느끼고, 칭찬을 들으면 기분 좋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이 표면의 파도에 온통 뒤흔들려, 작은 바람에도 배가 뒤집히듯 감정의 노예가 된다.
반면,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도달한 현자의 마음은 그 표면의 잔물결에도 불구하고, 그 깊은 심연은 어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고요와 평온을 유지한다. 표면의 반응(propatheia, 프로파테이아)은 있을지언정, 그 반응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격정(파토스)으로 발전하도록 결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 현자의 마음이 분노나 두려움과 같은 파괴적인 격정(파토스)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해서, 그 마음이 텅 빈 회색빛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초가 제거된 정원에서 건강한 식물들이 더욱 잘 자라나듯이, 현자의 마음은 ‘유파테이아이(eupatheiai)’라 불리는, 맑고 건강하며 이성적인 감정들로 채워진다. 이 좋은 감정들은 외부의 사건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내면의 힘에서 솟아나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첫째, 현자는 비이성적인 ‘욕망(epithumia)’ 대신 합리적인 ‘의지(boulēsis, 불레시스)’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승진을 강박적으로 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마음은 ‘승진을 해야만 내 가치가 증명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바로 욕망이다. 그는 결과에 집착하여 초조해하고, 동료를 질투하며, 만약 승진에 실패하면 깊은 절망에 빠질 것이다. 반면, 현자는 승진이라는 외부적인 결과 대신, 그 과정에서 ‘유능하고 성실한 동료가 되는 것’이라는 내면의 덕을 추구한다. 그는 매일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인 의지다. 이 의지는 결과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도 꾸준한 동기 부여를 제공한다.
둘째, 현자는 비이성적인 ‘두려움(phobos)’ 대신 합리적인 ‘신중함(eulabeia, 에울라베이아)’을 가진다. 중요한 발표를 앞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마음이 ‘실수하면 모두가 나를 비웃을 것이고,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라는 잘못된 판단에 사로잡히면 그는 발표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그는 청중의 반응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로 인해 정작 중요한 발표 준비에 집중하지 못한다. 반면, 현자는 청중의 반응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발표하지 못하는 것’, 즉 자신의 악덕을 피하고자 한다. 그는 청중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내용을 더 명확하고 정직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고 준비한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인 신중함이다. 이 신중함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대신,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현명한 안내자가 된다.
셋째, 현자는 비이성적인 ‘쾌락(hēdonē)’ 대신 합리적인 ‘환희(khara, 카라)’를 경험한다. 쾌락은 값비싼 음식을 먹거나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처럼, 외부적인 것에서 오는 짜릿하고 일시적인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은 원인이 사라지면 곧바로 사라지며, 종종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중독으로 이어진다. 반면, 환희는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깊고 지속적인 기쁨이다. 예를 들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구를 진심으로 돕고 난 뒤에 느끼는 뿌듯함을 생각해보자. 이 기쁨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어떤 대가가 없어도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덕, 즉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앎에서 비롯되는 환희다. 이 환희는 그 어떤 외부의 사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혼의 고요한 미소와 같다.
아파테이아의 상태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담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과 가장 깊고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식이다. 현자는 욕망과 두려움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벗어 던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본다. 그리고 그 명료한 인식 위에서, 그는 더 꾸준한 의지를 가지고, 더 현명한 신중함을 발휘하며, 더 깊은 환희를 느끼며 살아간다. 그의 평온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자의 공허한 평온이 아니라,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충만한 평온이다.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가 다른 철학적, 종교적 이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할 때, 그 특징은 더욱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상태는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였다. 아타락시아는 고통과 불안을 피하고, 친구들과의 소박하고 즐거운 삶 속에서 평온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훌륭한 목표지만, 그 바탕에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 반면 스토아의 아파테이아는 쾌락이나 고통 자체에 무관심하며, 오직 덕을 실현하는 데에만 그 목적을 둔다는 점에서 훨씬 더 엄격하고 도덕적이다.
또한,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인 ‘열반(Nirvana, 涅槃)’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파테이아가 격정의 불길을 잠재운 상태라는 점에서 깊은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열반은 종종 이 세상의 고통스러운 순환 자체를 벗어나는 ‘출세간적(出世間的)’인 해탈을 지향한다. 반면 아파테이아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시민이자 부모, 친구로서 자신의 모든 사회적 의무를 다하면서 동시에 내면의 평온을 유지하려는 ‘세간적(世間的)’인 이상에 가깝다. 스토아 현자는 세상을 떠나지 않고, 바로 그 세상 속에서 신의 이성을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는다.
아파테이아는 결코 인간적인 감정을 거세한 냉혹한 무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완전하고 풍요로운 인간성의 실현이다. 그것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비이성적인 격정의 사슬을 끊고, 오직 이성과 덕에만 의존하는 진정한 자유인의 감정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는 우리가 외부의 사건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건들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스토아 철학의 가장 빛나는 깃발이다. 이 깃발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파도에 휩쓸려 다니는 부서진 널빤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자신의 항로를 지키는 견고한 배의 선장이 될 것인가. 아파테이아는 바로 그 선장의 마음에 깃든, 고요하고도 강력한 평화의 이름이다.
2절: 열반(Nirvana)의 고요 -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
스토아 철학이 추구한 궁극의 경지, 아파테이아(apatheia)가 내면의 모든 반란이 진압된 평화로운 왕국의 고요함이라면, 인도의 지혜는 그 왕국마저 불태우던 거대한 불길 자체가 완전히 꺼져버린, 더 깊고 근원적인 고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고요의 이름이 바로 ‘열반(Nirvana, निर्वाण)’이다. 아파테이아와 열반은 둘 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고통 없는 평온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인류 정신사의 가장 위대한 두 개의 등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등대가 비추는 빛의 색깔과 그 빛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열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단어의 어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니르바나(Nirvana)’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불어서 끈다(to blow out)’는 뜻을 지닌다. 이는 마치 등잔의 심지에 타오르던 불꽃을 입김으로 불어 끄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무엇을 끈다는 것인가? 불교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꺼지지 않는 세 가지 불길, 즉 ‘삼독(三毒)’의 불길에 휩싸여 밤낮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탐욕(貪, rāga)’의 불, ‘성냄(瞋, dveṣa)’의 불, 그리고 이 모든 불의 근원이 되는 ‘어리석음(癡, moha)’의 불이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아서, 우리는 그 안에서 쾌락을 더 얻으려는 욕망의 열기에 시달리고, 불쾌함을 피하려는 증오의 연기에 질식하며, 이 모든 것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는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열반은 바로 이 세 가지 고통의 불길이 그 연료인 번뇌(kleshas)가 모두 소진되어, 마침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열반이 불타던 집 자체가 사라져 잿더미가 되는 ‘허무(annihilation)’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이 꺼진 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기와 연기가 모두 사라진, 맑고 고요하며 시원한 본래의 공간을 되찾는다. 마찬가지로, 열반은 ‘나’라는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던 탐욕과 성냄, 그리고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어리석은 착각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다.
이러한 열반의 상태는 스토아의 아파테이아와 어떤 점에서 만나고 어떤 점에서 갈라지는가? 아파테이아는 비이성적인 격정(파토스)이 이성의 힘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마음의 평정 상태다. 이 상태에서 ‘나’라는 이성적 자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강하고 건강하게 단련된다. 아파테이아는 잘 훈련된 군대의 지휘를 받는,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내면의 왕국과 같다. 현명한 왕(이성)이 굳건히 왕좌를 지키고 있기에, 어떠한 외부의 침략이나 내부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평화의 상태다.
반면, 열반은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를 의미한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핵심적인 조건은 바로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본래 없다는 ‘무아(無我, anattā)’의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순간, ‘나의 왕국’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지켜야 할 ‘나’도 없고, 막아야 할 ‘외부’도 본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반은 왕이 왕국을 완벽하게 통치하는 상태가 아니라, 왕과 왕국, 그리고 국경이라는 모든 구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것에 가깝다. 이는 마치 바다 위를 떠다니던 하나의 얼음덩어리(개별적 자아)가 녹아, 본래 자신이 일부였던 거대한 바다(우주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얼음덩어리는 사라졌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전체와 합일된 것이다. 이처럼 아파테이아가 ‘강해진 자아’의 평화라면, 열반은 ‘자아의 소멸’을 통해 얻어지는 평화다.
이러한 목표의 차이는 그곳에 이르는 길의 차이로 이어진다. 아파테이아에 이르는 길은 주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판단을 끊임없이 검토하고, 이성적인 논증을 통해 잘못된 신념을 교정하며, 덕을 쌓아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개인의 의지적 노력보다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깊이 깨닫고, 그 질서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삶을 지향한다.
불교의 핵심적인 수행법은 바로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이다. 이는 고대 인도어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수행자는 특정한 생각을 하거나 무언가를 분석하는 대신, 그저 고요히 앉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 없이 지켜본다. 가려운 느낌, 스쳐 지나가는 생각, 피어오르는 감정 등, 그 어떤 것이든 막거나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 지속적이고 정직한 관찰을 통해, 수행자는 모든 현상들이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며(무상, 無常),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주인이 없다는(무아, 無我) 진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직접 체득하게 된다. 또한 모든 집착의 대상은 결국 만족을 줄 수 없다는(고, 苦) 진실을 깨닫는다. 이처럼 ‘생각’의 내용과 싸우는 대신, 생각의 흐름 자체를 관조함으로써 생각의 뿌리인 ‘나’라는 집착을 해체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길이다. 따라서 스토아의 길은 ‘생각을 바꾸는’ 길이며, 불교의 길은 ‘생각의 주인마저 사라지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경지에 도달한 현자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또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스토아 현자는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황제, 노예, 교사로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는 이 세상이 신성한 로고스가 펼쳐낸 합리적이고 좋은 곳이라고 믿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 속에서 덕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Arhat, 아라한)은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苦海)이자 윤회의 감옥으로 본다. 그는 세상 속에 머물러 다른 이들을 돕기도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시선은 이 고통의 순환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에 있다. 그는 이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조건이 남은 열반)’의 상태에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모든 윤회의 고리가 끊어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조건이 남지 않은 열반)’이라는 완전한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아파테이아와 열반은 둘 다 인간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평화의 상태를 약속하지만, 그 평화의 성격은 다르다. 아파테이아는 질서정연하게 잘 다스려지는 왕국의 고요함이다. 그것은 ‘나’라는 견고한 성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세상 속에서의 완벽한 심리적 평정이다. 반면, 열반은 모든 경계가 사라진 무한한 바다의 고요함이다. 그것은 ‘나’라는 성채 자체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모든 분별과 집착의 불길이 꺼진 형이상학적 평화다. 스토아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불교는 우리에게 그 폭풍우와 내가 본래 둘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두 위대한 가르침은, 고통받는 인류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똑같이 자비로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3절: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 능동적 감정으로 나아가는 길
스토아 철학이 비이성적 격정(파토스)을 제거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평온(apatheia)’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면, 17세기의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의 미로를 벗어나는 길을 탐색했다. 스토아 철학의 깊은 영향을 받았던 스피노자는, 감정을 제거하는 대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감정의 수동적인 노예에서 능동적인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평온을 넘어, 이해에서 비롯되는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기쁨’을 향한 길을 열어준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스토아와 마찬가지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장엄한 범신론적 세계관 위에서 출발한다.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무한한 실체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신이자 자연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하나의 실체가 지닌 본성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는 모든 것이 인과의 사슬로 엮여 있다는 스토아의 운명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 결정론적인 세계 속에서, 스피노자는 모든 개별 존재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불렀다.
코나투스는 라틴어로 ‘노력’ 혹은 ‘지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길가의 돌멩이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새, 그리고 인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코나투스, 즉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자신의 힘을 확장하려는 내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작은 식물이 햇빛을 향해 싹을 틔우는 것은 바로 이 코나투스의 표현이다. 인간의 경우, 이 코나투스는 의식적인 ‘욕망(cupiditas)’으로 나타난다. 스피노자에게 선(善)과 악(惡)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선’이란 나의 코나투스, 즉 나의 존재를 지속하고 행위하는 힘을 증대시키는 모든 것이며, ‘악’이란 나의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는 모든 것이다.
이 코나투스의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 즉 ‘정념(affectus)’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수동적 정념(affectus passiones)’이고, 다른 하나는 ‘능동적 정념(actiones)’이다. 수동적 정념이란, 라틴어 ‘passio’가 ‘수난’이나 ‘고통’을 의미하듯, 우리가 외부의 원인에 의해 ‘휘둘리는’ 감정이다. 외부의 어떤 대상이 나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키면 우리는 ‘기쁨(laetitia)’이라는 수동적 정념을 느끼고, 반대로 나의 코나투스를 감소시키면 ‘슬픔(tristitia)’이라는 수동적 정념을 느낀다. 예를 들어, 타인의 칭찬에 우쭐해지는 것은 나의 힘이 외부의 원인(칭찬)에 의해 증가했기 때문에 느끼는 수동적 기쁨이다. 반대로, 타인의 비난에 위축되는 것은 나의 힘이 외부의 원인(비난)에 의해 감소했기 때문에 느끼는 수동적 슬픔이다. 이처럼 수동적 정념에 지배당하는 한,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세계의 변덕에 달려있게 된다. 이는 스토아 철학의 파토스가 잘못된 판단을 통해 외부의 것에 휘둘리는 상태라고 본 것과 매우 유사하다.
스토아 철학의 해결책이 이 파토스를 이성으로 제거하여 아파테이아에 이르는 것이었다면, 스피노자의 해결책은 이 수동적 정념을 ‘능동적 정념’으로 변성시키는 것이다. 능동적 정념이란, 외부가 아닌 오직 우리 자신의 본성, 즉 ‘이성’의 힘만으로 발생하는 감정이다. 우리가 어떤 감정의 원인을 외부의 대상이 아닌, 신 즉 자연이라는 전체적인 인과의 질서 속에서 명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감정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능동적인 주인이 된다.
예를 들어, 나를 비난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자. 수동적인 상태에서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내 힘이 감소했다고 느끼며 슬픔과 증오에 빠진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사유하여, 그 사람의 비난 역시 그의 과거와 환경이라는 무수한 인과의 결과물이며, 이 모든 것이 신 즉 자연의 필연적인 질서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대신,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나의 힘, 즉 코나투스가 증대되었음을 느끼며, 외부의 원인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능동적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감정은 더 강한 반대 감정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슬픔이라는 수동적 정념은 ‘슬퍼하지 말라’는 이성적 명령만으로는 사라지지 않으며, 오직 그것을 압도하는 더 강력한 능동적 기쁨, 즉 ‘이해의 기쁨’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결국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자유의 길은 감정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수동적 정념’의 비중을 최대한 줄이고, 우리를 주인으로 만드는 ‘능동적 정념’의 비중을 최대한 늘려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마치 혼탁한 흙탕물을 맑은 샘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과 같다. 이 위대한 변성(變性)의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amor intellectualis Dei)’이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왜 ‘수동적’ 정념의 노예가 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외부의 사건 때문에 슬픔이나 불안, 변덕스러운 기쁨에 휩싸이는 이유는, 그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이 내 감정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를 모욕했을 때, 나는 ‘저 사람의 악의’가 내 고통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부분적이고 혼란스러운 ‘부적합한 관념(inadequate idea)’이다. 이 부적합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외부의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꼭두각시일 수밖에 없다.
자유로워지는 길은 바로 이 ‘부적합한 관념’을, 전체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적합한 관념(adequate idea)’으로 바꾸는 데 있다. 이성의 눈을 통해, 나를 모욕한 저 사람의 행동 역시 그의 타고난 기질과 성장 환경, 그가 처한 현재의 상황 등 무한한 원인들의 사슬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행동과 나의 만남, 그리고 그로 인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동까지도,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거대한 우주적 질서 안에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한 장면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의 진정한 원인이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필연적인 질서임을 명확하게 이해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나를 향했던 개인적인 분노와 슬픔은 그 대상을 잃고 힘이 빠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 나 자신의 힘, 즉 코나투스(conatus)가 증대되는 것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이 솟아난다. 이 기쁨은 더 이상 외부의 칭찬이나 선물에 의존하는 ‘수동적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이해하는 힘, 즉 이성의 활동에서 비롯된 ‘능동적 기쁨’이다. 스피노자에게 이것이 바로 수동적 정념을 능동적 정념으로 변성시키는 연금술의 핵심 과정이다.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은 바로 이 과정이 극치에 달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우주 전체가,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필연적으로 흘러나온다는 장엄한 진실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완전한 질서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경지다.
이것은 결코 맹목적인 믿음이나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인(intellectualis)’ 사랑이다. 즉, 가장 명철한 이성을 통해 세계의 완벽한 논리적 필연성을 깨달았을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깊은 환희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내 삶의 기쁨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슬픔과 고통까지도, 우주라는 완벽한 기하학적 증명 과정에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한 줄이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긍정하고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을 슬퍼하는 것만큼이나 비이성적인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이처럼 필연적인 진리를 이해할 때, 우리는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상(sub specie aeternitatis)’ 아래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우리의 유한한 정신은 신의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의 일부가 되어,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무한한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인간 해방의 최종적인 모습이며, 고통과 불안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 신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가장 완전한 자유의 상태다.
스토아의 아파테이아와 스피노자의 능동적 정념은 둘 다 결정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인간의 평온을 찾으려는 위대한 시도다. 그러나 그 평온의 색깔은 다르다. 아파테이아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견고한 성채의 평화라면, 스피노자의 능동적 기쁨은 우주 전체의 필연적인 흐름과 하나 되어 춤추는 자유로운 영혼의 환희다. 스토아 철학이 우리에게 고통의 부재, 즉 ‘평정심’을 약속한다면,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고통의 변성, 즉 이해에서 비롯되는 ‘기쁨’을 약속한다. 그는 스토아의 현자가 도달한 평온의 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땅 위에서 어떻게 기쁨의 춤을 출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철학자다.
4절: 트라우마와 회복탄력성 - 고통을 이겨내는 정신의 힘
스토아 철학이 추구한 아파테이아(apatheia)라는 고요한 평정심의 경지는, 결코 고통 없는 삶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스토아의 현자들은 전쟁과 역병, 추방과 사별이라는 삶의 가장 혹독한 시련들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단련시켰다. 그들의 평온은 고통을 알지 못하는 순진함이 아니라, 고통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낸 강인함의 증거다. 놀랍게도, 이 고대의 지혜는 오늘날 현대 심리학이 ‘트라우마(trauma)’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언어로 탐구하고 있는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치유 과정과 그 원리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트라우마, 즉 ‘정신적 외상’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압도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극적인 사건일 수도 있고, 지속적인 학대나 예기치 못한 상실과 같은 개인적인 경험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건이 한 개인의 대처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세상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곳’이라는 근본적인 믿음을 파괴했다는 데 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의 시간은 종종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 멈추어 버린다. 과거는 더 이상 지나간 일이 아니며, 끔찍한 기억과 감각은 끊임없이 현재를 침범하여 삶을 공포와 불안의 감옥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의 고통이다.
이처럼 이성이 마비되고 영혼이 산산조각 난 듯한 상태에, 스토아 철학은 과연 어떤 말을 건넬 수 있는가? 스토아 철학은 결코 트라우마의 끔찍한 고통을 부정하거나 얕보지 않는다.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충격이 주는 최초의 정신적, 신체적 반응(propatheia, 프로파테이아)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최초의 충격이 지속적인 고통, 즉 트라우마로 발전하는 과정에 우리 자신의 ‘판단’과 ‘믿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트라우마는 사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위험하고 사악한 곳이다”, “그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나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파국적인 판단과 믿음들이 바로 우리의 영혼을 과거의 감옥에 가두는 쇠사슬이다. 스토아 철학의 실천은 바로 이 쇠사슬을 끊어내고, 고통의 서사를 새로운 의미의 서사로 다시 써 내려가는 ‘인지적 재구성’의 작업이다.
스토아 철학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끔찍한 사건이 나의 육체를 상하게 하고 나의 재산을 앗아갔을지라도, 그것이 나의 이성, 나의 선택하는 능력, 나의 덕을 파괴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이 폐허 속에서 나는 용기, 인내, 지혜, 그리고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이라는 새로운 덕을 피워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고통을 성장의 원료로 삼는 스토아적 연금술이다.
놀랍게도, 현대 심리학의 연구는 스토아의 이러한 통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끔찍한 역경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하고 성숙해지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를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불렀다. 회복탄력성은 시련 앞에서 상처 입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유연한 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지면서,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넘어, 트라우마를 계기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리학자 리처드 테데스키(Richard Tedeschi)와 로렌스 칼훈(Lawrence Calhoun)은 이 현상을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에 따르면, 외상 후 성장은 주로 다섯 가지 영역에서 나타난다.
첫째, 삶에 대한 감사와 우선순위의 변화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은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둘째, 타인과의 관계 심화다. 자신의 취약성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며, 진실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셋째,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다. 최악의 상황을 이겨냈다는 사실은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힘을 발견하게 하고,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할 용기를 준다.
넷째, 개인적 강점의 인식이다.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임을 깨닫고 깊은 자신감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영적, 실존적 변화다.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더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되며, 이전보다 더 깊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성장이 결코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상 후 성장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그 고통스러운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 전체의 이야기 속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의식적이고 힘겨운 ‘인지적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나타난다. 즉,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이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스토아 철학자들이 2천 년 전에 실천했던, 자신의 경험에 이성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과 일치한다.
결국 스토아 철학은 일종의 선제적인 ‘회복탄력성 훈련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예행연습’과 같은 수련을 통해 아직 닥치지 않은 불행에 대한 심리적 예방접종을 하고, 디코토미의 실천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면적 통제권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며, 우주 전체가 이성적인 로고스의 표현이라는 철학적 틀을 통해 어떤 비극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라는 경지는 트라우마의 최초 충격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 충격이 남기는 2차적인 감염, 즉 자기연민과 분노, 절망이라는 파괴적인 판단의 감염으로부터 영혼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궁극의 심리적 면역 상태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삶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과거의 상처가 지배하는 영원한 피해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상처를 딛고 더 깊고 넓은 인간으로 성장할 것인가?
스토아 철학과 현대 심리학은 똑같이 후자의 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고통의 의미를 용감하게 묻고, 폐허 속에서 새로운 삶의 서사를 써 내려가려는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열린다. 스토아 현자는 가장 깊은 상처가 가장 위대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5절: 평정심에 이르는 세 가지 훈련
스토아 철학이 약속하는 궁극의 경지, 아파테이아(apatheia)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신비로운 깨달음이나 타고난 기질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나 운동선수가 수만 시간의 반복된 훈련을 통해 자신의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하듯이, 매일의 삶 속에서 꾸준하고 의식적인 훈련(askēsis, 아스케시스)을 통해 얻어지는 영혼의 탁월함이다. 스토아 철학은 막연한 마음공부를 넘어, 평정심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매우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후대의 학자들이 정리한 이 프로그램은, 우리 영혼의 세 가지 핵심 기능을 단련시키는 ‘세 가지 훈련(topoi, 토포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훈련은 서로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과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때 내면의 평화라는 신전은 온전히 세워질 수 없다.
첫 번째 훈련은 ‘욕망과 회피의 훈련(Discipline of Desire and Aversion)’이다. 이 훈련의 목표는 단 하나, 우리가 진정으로 원해야 할 것만을 원하고, 진정으로 피해야 할 것만을 피하도록 우리의 의지를 재정비하는 것이다. 이는 스토아의 자연학(Physics), 즉 우주가 신성한 이성(로고스)에 의해 완벽하게 운행된다는 믿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 훈련에 따르면, 우리가 유일하게 욕망해야 할 대상은 ‘덕(virtue)’뿐이다. 왜냐하면 덕만이 우리에게 온전히 달려있으며,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선(善)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되고자 하는 바람, 정의롭게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이 바로 현자가 지닌 합리적인 ‘의지(boulēsis)’다.
반대로, 우리가 유일하게 회피해야 할 대상은 ‘악덕(vice)’뿐이다. 비겁함, 부정의, 무절제와 같이 우리의 이성적 본성을 해치는 것만이 유일한 진정한 악(惡)이기 때문이다. 현자는 바로 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합리적인 ‘신중함(eulabeia)’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건강, 부, 명예, 혹은 질병, 가난, 죽음과 같은 나머지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훈련은 우리에게 이 모든 외부적인 것들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관한 것(adiaphora)’임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것들을 선호하거나 선호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이 훈련의 핵심은 결국, 나의 개인적인 욕망과 희망 사항을 우주 전체의 거대한 흐름, 즉 운명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기’와 같은 명상 훈련은 바로 이 훈련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법이다. 나의 작은 욕망과 두려움을 광대한 우주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 그것들은 그 힘을 잃고 우리는 비로소 우주의 의지에 우리의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훈련은 ‘행동의 훈련(Discipline of Action)’이다. 욕망의 훈련이 우주와 ‘나’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면, 행동의 훈련은 타인과 ‘나’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 훈련의 목표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올바르게, 그리고 덕스럽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스토아의 윤리학(Ethics)에 해당하며,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인간은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한 부분이다.
이 훈련은 우리에게 매 순간 “지금 여기서 나의 의무(kathēkon, 카테콘)는 무엇인가?”라고 묻게 한다. 나는 한 사람의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동료로서, 그리고 인류 공동체의 한 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의’와 ‘인애(仁愛)’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덕에서 나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이 단순히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불꽃을 나누어 가진 존엄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의 심리적 뿌리가 바로 ‘오이케이오시스(oikeiōsis)’의 원리다. 이는 ‘자기에게 속한 것’, ‘친숙한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모든 생명체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에게 속한 것을 아끼려는 타고난 본능적 충동을 가리킨다. 갓난아이가 자신의 몸을 본능적으로 아끼듯이, 우리의 애착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이성은 이 자연스러운 자기애(自己愛)가 이기심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물가의 파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밖으로 확장되도록 이끈다. 나 자신을 아끼는 마음은 나의 부모와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더 나아가 친구와 이웃, 동료 시민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류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끌어안는 사랑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 오이케이오시스의 자연스러운 확장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경지가 바로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다. 이는 ‘우주(cosmos)’와 ‘시민(polites)’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우주의 시민’이라는 뜻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아테네나 로마의 시민이기에 앞서, 우리 모두가 신성한 이성(로고스)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존재로서, 이 우주 전체라는 단 하나의 거대한 도시 국가(cosmopolis)의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국적, 인종, 사회적 지위와 같은 인위적인 경계들은 이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 앞에서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우리 모두가 ‘우주의 시민’이라는 위대한 자각이다.
2세기의 스토아 철학자 히에로클레스 (Hierocles)는 오이케이오시스가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확장되는 이 장엄한 과정을,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도록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 즉 ‘동심원’ 모델을 제시했다. 이 그림의 가장 중심에는 우리 자신의 정신이 있다. 바로 바깥의 첫 번째 원은 우리의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와 같은 직계 가족을 포함한다. 다음 원은 삼촌, 사촌과 같은 조금 더 먼 친척들을, 그 다음 원은 이웃과 동료 시민들을, 그리고 가장 바깥의 원은 인류 전체를 품에 안는다.
히에로클레스에 따르면, 철학적 수련의 핵심 과업은 바로 이 바깥쪽 원들을 의식적인 노력으로 계속해서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먼 친척을 ‘형제’라 부르고, 나이 든 낯선 이를 ‘아버지’나 ‘할아버지’라 마음속으로 부르며 심리적 거리를 좁히라고 제안했다. 이는 단순히 호칭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고, 가장 먼 이방인마저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처럼 여기려는 치열한 윤리적 훈련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는 이기심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공동체에 봉사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다.
세 번째 훈련은 앞선 두 훈련의 기초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훈련으로, 바로 ‘동의의 훈련(Discipline of Assent)’이다. 욕망과 행동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이끄는 우리의 ‘판단’이 먼저 올바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훈련의 목표는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수많은 인상(phantasiai)들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거짓된 가치 판단에 섣불리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스토아의 논리학(Logic)에 해당하며, 내면 왕국의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과 같다.
우리의 마음에는 매 순간 수많은 생각과 이미지가 떠오른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어”, “이 일에 실패하면 내 인생은 끝이야”, “새로운 차를 사면 행복해질 거야.” 동의의 훈련은 이러한 자동적인 생각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이다. 이 훈련의 핵심은 우리가 앞서 탐구했던 디코토미, 즉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실시간으로 구분해내는 것이다. 이 인상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판단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에 관한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고 그저 ‘일어난 일’로만 받아들인다. 이 훈련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세네카가 실천했던 ‘저녁의 성찰’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 있었던 일들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복기해보는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잘못된 판단에 동의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었는가? 어떤 상황에서 더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을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 습관을 파악하고 점진적으로 교정해나갈 수 있다.
이 세 가지 훈련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하나의 통합된 삶의 방식을 구성한다. 욕망의 훈련은 우리의 목표를 우주의 흐름에 맞추고, 행동의 훈련은 우리의 관계를 인류 공동체에 맞추며, 동의의 훈련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맑고 흔들림 없는 정신 상태를 유지시켜 준다.
아파테이아라는 고요한 평정심은 이처럼 막연한 기다림의 끝에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자신의 욕망을 점검하고, 낮 동안 타인에게 정의롭게 행동하며, 저녁에는 자신의 판단을 성찰하는, 정신의 운동선수가 흘리는 땀방울 속에서 서서히 빚어지는 값진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