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자극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 사이에는, 아주 짧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공간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자극에 대해 거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칭찬에 우쭐하고 비난에 움츠러들며,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린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찰나의 공간을 의식적으로 확보하고, 그 안에서 신중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자유이자 힘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공간을 확보하는 구체적인 기술이 바로 ‘동의의 유보(epoché, 에포케)’, 즉 섣부른 판단을 멈추는 힘이다.
우리의 마음은 매 순간 외부 세계로부터 날아드는 수많은 ‘인상(phantasia)’에 노출된다. 이때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그 인상에 담긴 가치 판단, 예를 들어 “이것은 끔찍하다”거나 “저것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식의 평가에 즉각적으로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도장을 찍어버린다. 스토아 철학에서 이 정신적 승인 행위를 ‘동의(sunkatathesis, 숭카타테시스)’라고 부른다. ‘함께(sun-)’ ‘내려놓는다(katathesis)’는 의미의 이 단어는, 어떤 인상을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우리 내면의 최종적인 결재와도 같다. 문제는 우리가 이 결재 도장을 너무나 성급하고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 감정적인 편견, 사회가 주입한 가치관에 너무나 쉽게 ‘동의’하며, 그 결과로 불필요한 격정(파토스)의 혼란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동의의 유보’는 바로 이 자동적인 결재 과정에 강력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에포케(epoché, ἐποχή)’는 본래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단어로, ‘판단을 중지한다’는 의미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회의주의자들의 무기를 빌려와, 자신들의 철학적 체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 기술로 변모시켰다. 스토아의 에포케는 세상에 대한 모든 판단을 영원히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상이 이성의 엄격한 검토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동의’를 일시적으로 보류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낯선 방문객(인상)을 즉시 들여보내지 않고, 문 앞에 잠시 세워두고 그의 신원과 목적을 면밀히 심문하는 것과 같다.
이 심문의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첫째, 문지기는 방문객의 정체를 밝힌다. 즉, 마음에 떠오른 강력한 인상을 향해 “너는 단지 인상일 뿐, 네가 보이는 그 실체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이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인상과 나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을 힘을 얻는다. 둘째, 문지기는 방문객의 겉모습(언어)을 해체한다. 인상에 덧씌워진 극적인 수식어나 가치 판단의 옷을 벗겨내고, “그래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은 정확히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여 사건의 알몸을 드러낸다. 셋째, 문지기는 방문객이 내가 책임져야 할 영역의 사람인지를 확인한다. 즉, “이 인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에 관한 것인가, 아닌가?”라는 디코토미의 잣대를 들이댄다. 넷째, 이 모든 심문 과정을 통과한 후에야, 문지기는 비로소 이 방문객을 성 안으로 들여보낼지(동의), 돌려보낼지(거부), 아니면 더 지켜볼지(판단 유보 지속)를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이처럼 동의를 유보하는 힘은 결코 우유부단함이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용감한 정신 활동이다. 우리가 왜 이토록 신중하게 동의를 내려야 하는가? 스토아 철학의 목표는 단순히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을 넘어, ‘진실’에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많은 거짓되고 흐릿한 인상들 속에서도, 마치 안개 속에서 빛나는 등대처럼 명확하고 확실하게 진리를 드러내는 특별한 인상이 있다고 믿었다. 이를 ‘파악 가능한 인상(kataleptikē phantasia, 카탈렙티케 판타시아)’이라고 불렀다. 동의를 유보하는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 파악 가능한 인상, 즉 이성의 모든 검토를 통과한 명백한 진리에만 우리의 동의를 내어주기 위함이다.
동의의 유보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주춧돌이다. 이 훈련 없이는 디코토미의 실천도, 격정의 극복도, 자연에 따른 삶도 불가능하다. 외부의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의 그 짧은 공간에 ‘멈춤’이라는 쉼표를 찍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인간을 자동기계의 삶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엄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힘이다. 이 멈춤의 힘을 연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영혼의 진정한 왕이 될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다.
2절: 크리슈나무르티의 '선택 없는 자각' - 판단 이전에 깨어있기
스토아 철학이 ‘동의의 유보’라는 강력한 정신적 제동장치를 통해 우리를 섣부른 판단의 폭주로부터 구하고자 했다면,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도 급진적인 영적 스승이었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의 뿌리를 탐색하며 우리를 전혀 다른 종류의 자유로 초대한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에는 ‘선택 없는 자각(choiceless awareness)’이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하나의 길이 있다. 이 길은 스토아의 훈련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전혀 다른 풍경을 거쳐 예상치 못한 목적지로 우리를 이끈다.
크리슈나무르티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내면적 갈등과 고통은 ‘분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둘로 나눈다. 즉, 경험하는 ‘관찰자(the observer)’와 경험되는 ‘대상(the observed)’으로 나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날 때, ‘나(관찰자)’는 ‘나의 분노(관찰 대상)’를 바라보며 그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통제하려 애쓴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 화를 내는 것은 나쁜 일이야. 이 감정을 억눌러야 해.” 이 순간, ‘나’와 ‘나의 분노’ 사이에는 투쟁이 시작된다. 관찰자는 분노를 없애려 하고, 분노는 사라지지 않으려 저항하며, 이 내면의 전쟁이 바로 우리의 심리적 고통이다.
‘선택 없는 자각’은 바로 이 분열된 상태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 감각들을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는 어떤 판단이나 선택, 비교, 비난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어보는 순수한 관찰의 행위다. 마음속에 분노가 피어오를 때, 그것을 없애려 하거나 분석하려 하지 않고, 그저 ‘아, 지금 분노가 있구나’라고 조용히 자각하는 것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 얼굴이 붉어지는 감각, 공격적인 생각의 흐름 전체를, 마치 하늘이 구름을 판단 없이 바라보듯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관찰 속에서 놀라운 변형이 일어난다. 우리가 분노와 싸우기를 멈추고 그것을 온전히 바라볼 때, 우리는 ‘나’와 ‘나의 분노’가 사실은 분리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관찰자가 바로 관찰 대상이었던 것이다. ‘나’라고 불리는 관찰자는 사실 분노, 질투, 두려움과 같은 수많은 생각과 감정의 다발에 불과했다. 이 분열이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내면의 전쟁은 저절로 멈춘다. 통제하려는 주체도 없고, 통제받아야 할 대상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저항과 갈등이라는 연료를 공급받지 못한 분노의 불길은, 마치 허공에 던져진 불꽃처럼 스스로의 에너지를 다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러한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스토아의 ‘동의의 유보’와 어떤 점에서 만나는가. 두 길의 출발점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두 가르침 모두 외부의 자극과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 사이에 의식적인 ‘멈춤’과 ‘관찰’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자는 어떤 인상(phantasia)이 떠올랐을 때, 그것에 섣불리 동의하지 않고 멈추어서 그 인상을 면밀히 검토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역시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떠올랐을 때,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멈추어서 그 현상을 조용히 자각한다. 둘 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이고 조건화된 반응임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깊은 통찰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멈춤’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서 두 길은 완전히 갈라진다. 스토아의 멈춤은 우리 내면의 현명한 ‘재판관’, 즉 지배 이성(hēgemonikon)이 활동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이 재판관은 로고스(logos)라는 보편적인 이성의 법전을 기준으로, 지금 떠오른 인상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신중하게 ‘판단’하고, 그에 따라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내린다. 스토아의 목표는 더 나은 판단, 더 현명한 선택을 통해 내면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즉, 재판관의 능력을 최고로 연마하는 것이다.
반면, 크리슈나무르티의 멈춤은 바로 그 ‘재판관’ 자체가 모든 문제의 근원임을 깨닫기 위함이다. 그에게 판단하고, 비교하고,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마음의 분열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를 완전히 멈추고, 그 이전의 순수한 ‘봄(seeing)’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우리 안의 왕(이성)을 훈련시켜 왕국을 완벽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길이라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왕이라는 개념 자체가 환상이며, 진정한 평화는 왕이 사라졌을 때 찾아온다고 말하는 셈이다.
스토아 철학과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자유를 제시한다.
스토아는 우리에게 이성의 힘을 통해 감정의 폭군으로부터 벗어나는 ‘주체로서의 자유’를 가르친다. 그것은 생각과 판단의 주인이 되어, 세상 속에서 덕스럽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강력한 기술이다.
반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에게 생각과 판단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존재론적 자유’를 가르친다. 그것은 ‘나’라는 생각의 감옥 자체를 허물고, 매 순간의 순수한 자각 속에서 살아가는 길이다. 스토아가 우리에게 더 좋은 안경을 만들어주는 법을 알려준다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에게 안경 없이도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위대한 가르침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가장 깊고도 진솔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여정이다.
3절: 가짜 뉴스와 확증 편향 -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
스토아 철학자들이 살았던 고대의 아고라는 소문과 웅변, 그리고 대면 대화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향한 길 위에서 마주했던 장애물들은,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마주하는 디지털 시대의 장애물들과 그 본질에서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 스토아 철학의 ‘동의의 훈련’은 바로 이 혼란스러운 정보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 영혼의 닻을 내리고, 진실의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항해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현대의 정보 환경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개의 유령은 ‘가짜 뉴스(fake news)’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가짜 뉴스는 단순히 오보를 넘어,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대중의 감정을 선동하고 이성을 마비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즉 분노와 두려움을 겨냥한다. 충격적인 제목과 자극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강력한 ‘인상(phantasia)’을 남기고, 우리가 그것을 이성적으로 검토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를 빼앗아버린다.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 버튼을 누르는 그 짧은 순간, 스스로가 진실의 전달자가 아니라 거짓의 확성기가 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가짜 뉴스와 같은 외부의 거짓 정보가 이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그 거짓을 기꺼이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교활한 내부의 배신자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확증 편향이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가치관을 확인시켜주는 정보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맞이하여 적극적으로 찾아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정보는 불편한 불청객처럼 무시하거나 애써 폄하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경향이다. 우리의 이성은 진실을 탐구하는 공정한 탐정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려놓은 피고(자기 자신)를 변호하기 위해 고용된 유능하지만 편파적인 변호사에 가깝다.
이 교활한 변호사가 일상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보자. 당신이 A사의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기로 마음먹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순간부터, 당신의 눈에는 온통 A사 스마트폰의 장점을 칭찬하는 기사와 사용자 후기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반면, B사의 스마트폰이 더 뛰어나다는 기사나 A사 제품의 단점을 지적하는 글은 무의식적으로 건너뛰거나, “저건 경쟁사가 퍼뜨린 소문일 거야”라며 애써 그 가치를 깎아내린다. 당신은 이제 ‘최고의 스마트폰’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 최고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는 데 따르는 어려운 정신적 노력을 피하고, 기존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서 오는 안락함과 안정감을 선호하도록 진화해왔다.
문제는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이 바로 이 우리의 정신적 취약점을 먹고 자라며, 그것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증폭시킨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와 검색 엔진의 알고리즘은 바로 이 확증 편향을 이용하여 우리를 붙잡아 둔다. 이 과정에서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반향실(echo chamber)’이라는 두 종류의 보이지 않는 정보 감옥이 만들어진다.
‘필터 버블’은 알고리즘이 개인을 위해 맞춤 제작한 투명한 정보의 거품이다. 당신이 특정 정치적 관점을 담은 영상 하나를 시청하면, 유튜브 알고리즘은 당신이 그 관점을 좋아한다고 학습하고, 다음 날 당신의 추천 목록을 온통 비슷한 영상들로 채워 넣는다. 당신의 과거 검색 기록과 ‘좋아요’는 당신이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되어, 당신의 세계관과 다른 관점의 정보들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걸러진다. 이 거품 안에서, 세상은 마치 나의 생각과 똑같은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반향실’은 필터 버블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적이고 능동적인 감옥이다. 이는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특정 뉴스 사이트의 댓글창과 같은 공간에 모여, 서로의 의견을 끊임없이 지지하고 강화하며 외부의 반대 의견을 집단적으로 배척하는 현상이다. 이 방 안에서는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며, 그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메아리(echo)치면서 점점 더 커지고 절대적인 진실처럼 느껴진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내부의 적’으로 몰려 쫓겨난다.
이 두 개의 감옥 안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나의 생각이 항상 지지받고 한 번도 진지한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유연한 신념이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독단으로 굳어간다.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더 이상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동료 시민으로 보지 않고, 상식과 이성이 결여된 이해 불가능한 ‘적’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우리는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면서도 서로의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 그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오해와 불신, 그리고 혐오로 채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위기는, 사실 스토아 철학자들이 2천 년 전에 이미 진단하고 처방을 내렸던 문제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 스토아의 관점에서 볼 때, 가짜 뉴스는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수많은 ‘거짓된 인상(pseudos phantasia)’ 중 가장 교묘하고 악의적인 형태다. 스토아 철학의 첫 번째 훈련이 모든 인상을 향해 “너는 네가 보이는 그것이 정말 맞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었듯이, 디지털 시대의 스토아적 실천은 모든 자극적인 정보 앞에서 “이것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 글을 쓴 사람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것이 나의 이성을 마비시키려는 감정적 선동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는 태생적으로 훌륭한 ‘사실 확인자(fact-checker)’일 수밖에 없다.
또한, 확증 편향은 스토아 철학이 그토록 경계했던 ‘성급한 동의(propeteia)’의 가장 완벽한 예시다. 자신의 기존 신념과 일치하는 인상이 나타났을 때, 어떤 검토나 의심도 없이 즉각적으로 “그렇다,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정신적 태만이 바로 확증 편향의 본질이다. 스토아 철학의 ‘동의의 유보(epoché)’는 바로 이 자동적인 반응의 사슬을 끊기 위해 고안된 강력한 제동 장치다. 내가 강렬하게 동의하고 싶은 정보일수록,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내가 단지 이것을 믿고 싶기 때문에 믿으려는 것은 아닌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용기, 이것이 바로 스토아적 지혜다.
결국 스토아 철학은 이 디지털 정보의 시대에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제공한다.
첫째, ‘멈춤’을 연습하라. 자극적인 뉴스를 보고 즉각적으로 분노하거나 공유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하라. 이 짧은 멈춤의 시간이 이성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둘째, 사실과 판단을 분리하라. 뉴스 기사에서 감정적인 수식어와 극적인 해석을 모두 걷어내고, 오직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라. “A가 B라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가 아니라, “A가 B라는 행동을 했다”고, 마음속에서 언어를 정화하라.
셋째, 의식적으로 반대 증거를 찾아보라. 나의 확증 편향을 깨뜨리기 위해, 일부러 나의 관점과 반대되는 건전한 주장을 담은 글을 찾아 읽어보라. 이는 나의 믿음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얼마나 단단한 근거 위에 서 있는지를 시험하고,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측면을 이해함으로써 더 온전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가짜 뉴스와 확증 편향의 시대는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스토아적 철학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외부의 정보 환경이 아무리 오염되더라도, 내 마음의 문을 지키는 최종적인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리는 완벽하게 객관적인 뉴스 채널을 찾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이성이라는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는 데서 발견된다. 외부의 진실이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 영혼의 진실성을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4절: 내면의 재판관 - 이성은 어떻게 진위를 가려내는가
‘동의를 유보’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성문 앞에서 낯선 방문객(인상)을 멈추어 세우는 경비병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 멈춤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신성한 공간, 즉 ‘지배 이성(hēgemonikon, 헤게모니콘)’이라는 옥좌에 앉아있는 현명한 재판관이 활동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경비병이 방문객을 붙잡아 두면, 이제 재판관은 그가 과연 진실을 말하는 자인지, 아니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거짓의 사기꾼인지를 판결해야 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이성은 바로 이 엄격하고도 공정한 내면의 재판관이며, 그의 판결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평온을 얻을 수도,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모든 재판관에게는 판결을 내리기 위한 명확한 법률, 즉 ‘기준(kriterion, 크리테리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스토아의 내면 재판관은 어떤 기준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가?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파악 가능한 인상(kataleptikē phantasia, 카탈렙티케 판타시아)’이다. 이는 ‘붙잡을 수 있는(graspable)’ 혹은 ‘인지적인’ 인상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진실을 명확하고도 확실하게 드러내주는 특별한 종류의 인상을 가리킨다.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이 파악 가능한 인상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것은 ‘실재하는 대상으로부터’ 와야 한다. 즉, 꿈이나 환각처럼 허공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둘째, 그것은 그 대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각인되어야 한다. 이는 마치 뜨거운 밀랍 위에 도장을 찍을 때, 도장의 모든 문양이 하나도 빠짐없이 선명하게 찍히는 것과 같다. 희미하거나 왜곡된 인상은 진실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셋째, 그것은 ‘다른 어떤 대상으로부터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을 지녀야 한다. 즉, 너무나 명백하고 독특하여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할 수 없는 인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맑은 대낮에 내 눈앞에 서 있는 오랜 친구의 얼굴을 보는 것은 파악 가능한 인상에 가깝다. 그것은 실재하는 대상(친구)으로부터 왔고, 그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며, 다른 누구와도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명확하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멀리서 다가오는 흐릿한 형체를 보는 것은 파악 가능한 인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대상이지만, 그 모습이 불분명하여 내 친구일 수도,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재판관이 평생에 걸쳐 수행하는 훈련은, 바로 이처럼 명확하고 확실한 인상과, 흐릿하고 의심스러운 인상을 구분해내는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 분별력을 바탕으로, 내면 재판관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심문 과정을 진행한다.
첫째, 그는 인상을 ‘교차 심문’한다. 그는 떠오른 인상을 향해 묻는다. “너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명백한 진실들과 모순되지 않는가? 너는 우주의 이성적인 질서(자연학)에 부합하는가? 너에게 동의했을 때, 나의 영혼은 평온과 덕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격정으로 빠져드는가(윤리학)?”
둘째, 내면 재판관은 인상의 ‘출처를 조사’한다. “이 인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의 감각에서 직접 비롯되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믿을 만한 인물인가? 그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말을 전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정보의 출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셋째, 내면 재판관은 인상 속에 숨어있는 ‘논리적 모순을 확인’한다. “이 주장은 그 자체로 논리적인가? 혹시 성급한 일반화나 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처럼 스토아의 재판관은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이라는 세 가지 법전을 모두 동원하여, 하나의 인상을 다각도에서 철저하게 검증한다.
이 모든 엄격한 심문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내면의 재판관은 비로소 최종 판결을 내린다. 판결의 종류는 세 가지다. 첫째는 ‘동의(sunkatathesis)’다. 인상이 모든 검증을 통과하여 ‘파악 가능한 인상’임이 명백해졌을 때, 재판관은 비로소 “그렇다,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확고한 동의를 통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지식(epistēmē)’에 도달한다. 둘째는 ‘거부’다. 인상이 명백히 거짓되거나 비이성적일 때, 재판관은 “아니오, 이것은 거짓이다”라고 단호하게 기각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고도 빈번하게 내려지는 판결은 바로 ‘판단 유보(epoché 에포케)’다. 인상이 불분명하거나, 증거가 불충분하여 그 진위를 명확히 가릴 수 없을 때, 현명한 재판관은 섣불리 판결을 내리지 않고 “아직은 알 수 없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이 상태가 바로 불확실한 ‘억견(doxa 독사)’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스토아적 지혜의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진실에 이르는 스토아의 길은 수동적으로 계시를 기다리는 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법정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치열하고도 능동적인 재판 과정이다. 스토아 철학자는 맹목적인 신앙인도, 모든 것을 의심하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진리가 이성적인 탐구를 통해 도달 가능하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비판적 현실주의자’다.
이 내면의 법정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책임이자, 우리 자유의 최종적인 보루다. 우리는 외부 세계의 재판관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만큼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진 최고 재판관이다. 이 내면의 법정을 지혜와 명료함, 그리고 용기로 다스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스토아적 삶의 정수다.
5절: 진리에 대한 동의, 덕(德)으로 나아가는 문
우리는 지금까지 ‘동의의 유보’라는 방패를 통해 성급한 판단의 화살을 막아내고, ‘내면의 재판관’이라는 지혜를 통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법을 탐구했다. 그러나 이 모든 정신적 훈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더 위대한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자,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와 같다. 그 문의 이름이 바로 ‘덕(aretē, 아레테)’이며, 그 문을 여는 행위가 바로 ‘진리에 대한 온전한 동의(sunkatathesis)’다. 스토아 철학에서, 올바른 앎과 올바른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진실을 명확히 보고, 그 진실에 온 영혼으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선(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둘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토아 철학이 인간의 마음, 즉 ‘지배 이성(hēgemonikon)’을 어떻게 보았는지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은 각기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지배 이성이라는 단일한 중심에서 비롯되는 활동의 서로 다른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진실한 명제에 ‘동의’할 때,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지적인 수긍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동의는 즉시 우리의 의지에 ‘행동하려는 충동(hormē, 호르메)’을 일으키고, 이 충동은 우리의 몸을 움직여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는 마치 현명한 왕이 어떤 법령에 옥새를 찍는 것과 같다. 왕이 “이것이 옳고 정의로운 법이다”라고 인정하고 옥새를 찍는 행위(동의)는, 그 즉시 왕국의 모든 행정 체계(의지와 신체)를 움직여 그 법령을 현실 속에서 집행하게 만드는 강력한 명령이 된다. 우리의 삶과 인격은 결국 우리가 평생에 걸쳐 어떤 종류의 인상과 명제에 옥새를 찍어왔는가의 총합이다. 덕이 있는 인격이란, 다른 무엇도 아닌, 진실하고 이성적이며 선한 명제에만 일관되게 동의하는 ‘정신적 습관’의 결과물이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네 가지 핵심적인 덕목, 즉 지혜, 정의, 용기, 절제는 모두 이러한 올바른 동의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첫째, ‘지혜(sophia, 소피아)’는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올바르게 동의하는 능력 그 자체다. 스토아 철학에서 지혜는 ‘인간사와 신적인 일에 대한 지식’으로 정의되며, 더 구체적으로는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것’(덕)이고, 무엇이 진정으로 ‘나쁜 것’(악덕)이며, 무엇이 그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아디아포라)’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앎이다. 이 지혜로운 앎에 온전히 동의할 때, 나머지 모든 덕들은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내면의 덕만이 유일한 선이고, 오직 영혼을 해치는 악덕만이 유일한 악임을 알기에, 재산을 잃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타인의 칭찬을 행복의 근원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이 지혜는 우리 내면의 왕국을 다스리는 현명한 왕과 같아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인상들을 엄격하게 심문하고 오직 진실한 것에만 동의를 내어준다.
둘째, ‘정의(dikaiosynē, 디카이오쉬네)’는 지혜가 우리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이성(로고스)을 나누어 가진 형제이며, 우리는 우주라는 하나의 공동체(코스모폴리탄)에 속해있다”는 진실에 대한 동의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이 명제에 진심으로 동의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타인을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는 모든 인간을 존엄한 동료 시민으로 대하며,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공정하게 나누어주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보다 앞세운다. 이처럼 타인을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려는 행동의 충동은 그 동의의 필연적인 결과다. 정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오이케이오시스) 인류 전체의 조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셋째, ‘용기(andreia, 안드레이아)’는 지혜가 고통과 역경 앞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것은 “고통, 질병, 죽음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은 결코 진정한 악이 아니다”라는 진실에 대한 동의에서 싹튼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지식’이다. 당신이 ‘유일한 악은 나의 영혼을 해치는 악덕뿐이다’라는 사실에 온전히 동의한다면, 외부의 위협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phobos)은 그 설 자리를 잃는다. 용기 있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조국을 배신하는 비겁함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는 부당함에 맞서 목소리를 낼 때, 권력자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용기를 낸다.
넷째, ‘절제(sōphrosynē, 소프로쉬네)’는 지혜가 우리의 욕망과 쾌락 앞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것은 “부, 쾌락, 명예와 같은 외부적인 것들은 결코 진정한 선이 아니다”라는 진실에 대한 동의의 열매다. 이것은 모든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무엇을 원해야 하고 얼마나 원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아는 ‘지식’이다. 당신이 ‘유일한 선은 내면의 덕이다’라는 사실에 온전히 동의한다면, 외부적인 것들을 향한 비이성적인 갈망(epithumia)은 그 뿌리부터 잘려나간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언제든 그것들을 잃더라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절제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외부 세계의 변덕스러운 행운과 불운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내면의 힘이다.
이 네 가지 덕은 스토아 철학의 심장 박동을 이루는 네 개의 판막과 같다. 지혜는 올바른 피(판단)를 받아들이고, 정의는 그 피를 온몸의 세포(타인)에게 공평하게 보내며, 용기는 외부의 압력에도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버티게 하고, 절제는 너무 과도한 피가 몰려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절한다. 이 네 가지가 조화롭게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덕이라는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스토아 철학에서 앎은 곧 행동의 시작이다. 진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확고한 동의는, 우리를 필연적으로 덕스러운 삶으로 이끈다. 이는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려는 현대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길이다. 스토아 학파에게 ‘우주가 이성적 질서(로고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is)에 대한 앎은, ‘우리는 그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ought)’는 가치(value)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진실이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동의’라는 작고 조용한 행위는, 사실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창조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과 운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갈림길이다. 매 순간 어떤 생각에 “그렇다”고 말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곧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스토아 철학의 길은 바로 이 내면의 투표권을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책임감 있게 행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덕으로 나아가는 문은 세상의 어떤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문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진실한 인상을 향해 당신이 내리는 조용하고도 확고한 ‘동의’의 손길에 의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