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신화 속에는 유독 슬프고도 장엄한 운명을 겪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권능을 누리는 대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그 몸은 갈가리 찢기며, 마침내 기적적으로 다시 부활하여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이처럼 ‘죽고 부활하는 신 (Dying-and-Rising God)’의 이야기는, 고대인들이 자연 속에서 발견한 위대한 순환의 법칙, 즉 겨울의 죽음 없이는 봄의 부활이 올 수 없다는 진리를 신화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 숭고한 희생과 풍요의 원형을 가장 완전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나일 강 유역의 검은 땅이 낳은 위대한 신, 오시리스 (Osiris)입니다.
오시리스의 이야기는 혼돈이 아닌, 질서와 문명의 황금시대에서 시작됩니다. 태초에, 그는 이집트의 왕으로서 미개한 인간들에게 법과 질서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리와 밀을 경작하는 법을 알려주어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고, 포도를 재배하여 와인을 빚는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신들을 경배하는 종교 의례를 제정하여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이집트는 풍요롭고 평화로웠으며, 그는 모든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자비로운 문명의 왕이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바로 이집트의 생명선인 나일 강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신성한 질서, 즉 마아트 (Ma'at)의 현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입니다. 그의 동생 세트 (Set)는 형의 위대함을 시기했습니다. 세트는 비옥한 검은 땅의 신인 오시리스와는 정반대로, 모든 생명을 말살하는 붉고 메마른 사막의 신이었습니다. 그는 형이 다스리는 풍요와 질서를 파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어두운 야망을 품었습니다. 마침내 세트는 72명의 공모자들과 함께 끔찍한 계략을 꾸밉니다. 그는 아름다운 나무로 호화로운 궤 (櫃)를 하나 만들고, 성대한 연회를 열어 오시리스를 초대합니다.
연회가 무르익자, 세트는 이 아름다운 궤를 모두의 앞에 내어 보이며, 이 궤에 몸이 딱 맞는 자에게 이것을 선물로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여러 신들이 차례로 궤 안에 누워보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오직 오시리스의 몸에만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아무런 의심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궤 안에 눕는 순간, 공모자들이 달려들어 뚜껑을 닫고 육중한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신을 가둔 관을 나일 강에 던져버렸고, 오시리스의 관은 강의 물결을 따라 흘러 지중해를 건너, 머나먼 땅 비블로스 (Byblos)의 해안에 닿았습니다. 그곳에서 관은 거대한 에리카 나무에 감싸여 신성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왕 오시리스의 죽음은, 곧 질서의 죽음이자 풍요의 추방이었습니다.
오시리스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오시리스의 아내이자 누이인 이시스 (Isis)의 슬픔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마법의 여신이자 헌신적인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온 이집트 땅을 헤매는 길고 긴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고난 끝에 마침내 비블로스에서 남편의 관을 찾아낸 그녀는, 그것을 비밀리에 이집트로 다시 가져와 갈대밭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밤에 멧돼지로 변신하여 사냥을 하던 세트는, 우연히 형의 관을 발견하고 맙니다.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는 오시리스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어 갈가리 찢어, 그 조각을 열네 개로 나누어 이집트 전역의 강과 사막에 흩뿌려 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신 훼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시리스라는 존재의 완전한 해체 (dismemberment)이자, 질서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왕의 몸이 찢기자, 이집트의 땅 또한 분열과 혼돈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이시스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남편의 흩어진 몸 조각을 찾아 나서는, 더욱 처절하고도 숭고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동생 네프티스 (Nephthys)의 도움을 받아 파피루스 배를 타고 나일 강 구석구석을 수색했습니다. 마침내 강의 신이 먹어버린 남근 (phallus)을 제외한 열세 개의 조각을 모두 찾아낸 그녀는, 위대한 지혜의 신 토트 (Thoth)와 장례의 신 아누비스 (Anubis)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시스가 흩어진 남편의 몸을 하나로 모으는 이 행위는, 죽음과 혼돈에 맞서는 사랑의 가장 위대한 투쟁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행위이자, 분열된 공동체를 다시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이며, 깨어진 질서를 복원하려는 신성한 의지입니다. 아누비스는 오시리스의 몸을 깨끗한 아마포 붕대로 감쌌고, 이로써 인류 최초의 미라 (mummy)가 탄생했습니다. 장례 의식은 이처럼, 죽음이 야기한 존재의 해체를 막고, 그 형상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사랑의 마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침내 완전한 형상을 되찾은 오시리스의 몸 위로, 이시스는 솔개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날갯짓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신성한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닌, 생명의 숨결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 남편의 몸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고, 기적적으로 부활한 오시리스와 잠시 합일하여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호루스 (Horus)를 잉태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신화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된 것입니다. 낡은 왕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젊은 왕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시리스는 다시 이 지상의 왕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통과한 그는 이제 산 자들의 세계가 아닌, 죽은 자들의 세계, 즉 두아트 (Duat)를 다스리는 영원한 왕이자 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활은 이집트인들에게, 육체적 죽음이 결코 영혼의 끝이 아니며, 올바른 삶을 살고 정해진 의례를 따른다면 누구나 오시리스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위대한 희망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한편, 지상에서는 그의 아들 호루스가 자라나 숙부 세트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이집트의 정당한 왕이 되어 아버지의 질서를 다시 세웠습니다.
결국 오시리스의 이야기는, 나일 강 유역의 자연이 보여주는 위대한 순환의 드라마를 신화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나일 강이 메마르는 건기 (乾期)를, 그의 흩어진 몸 조각은 땅에 뿌려진 씨앗을, 그리고 이시스의 눈물은 다시 차오르는 강의 물결을 상징합니다. 마침내 그가 부활하여 호루스를 잉태하는 것은, 강물이 범람하여 대지를 비옥하게 하고, 그 땅에서 새로운 곡식이 싹트는 풍요의 기적을 의미합니다. 오시리스의 신화는, 모든 생명이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 대한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찬가인 것입니다.
제2절: 수메르의 두무지(Dumuzi)
나일 강이 약속했던 영원한 생명의 희망과는 달리, 두 강 사이의 땅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가는, 어둡고 절망적인 추방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상상했던 명계 이르칼라 (Irkalla)는 먼지와 망각만이 존재하는 그림자의 왕국이었습니다. 바로 이처럼 척박하고 비정한 세계관 속에서, 죽음의 법칙을 거슬러 잠시나마 지상으로 돌아오는 한 신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절실하고도 애틋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의 이름은 두무지 (Dumuzi), 수메르의 목동이자 왕이었으며, 위대한 여신 인안나 (Inanna)의 사랑을 받았으나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져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두무지의 이야기는 생명의 가장 눈부신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들판의 푸른 풀과, 양 떼의 풍요로움, 그리고 대지의 모든 생명력을 상징하는 젊은 목동 신이었습니다. 그의 매력은 하늘의 여왕이자 사랑과 전쟁, 풍요의 여신인 인안나의 마음마저 사로잡았습니다. 수메르의 신화는 두 연인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아름다운 노래로 찬미합니다. 인안나는 자신을 찾아온 목동 왕 두무지를 위해 문을 열고, 그들은 신성한 혼인 (hieros gamos, 히에로스 가모스)을 통해 하나가 됩니다.
이 결합은 단순히 두 신의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인안나)과 땅(두무지)이 만나 세상의 모든 풍요를 낳는, 우주적인 창조의 의례였습니다. 왕과 여신이 동침하는 밤, 대지는 비옥해지고, 가축들은 새끼를 낳았으며, 곡식은 풍성하게 자라났습니다. 두무지는 인안나의 남편이 됨으로써, 단순한 목동에서 도시 국가 우루크 (Uruk)를 다스리는 신성한 왕으로 격상되었고, 그의 존재는 곧 메소포타미아 땅의 번영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생명의 축제는, 우리가 앞서 인안나의 명계 하강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전환됩니다. 자신의 권능을 시험하기 위해, 혹은 언니인 명계의 여왕 에레쉬키갈 (Ereshkigal)을 만나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갔던 인안나는, 그곳의 법칙에 따라 죽음을 맞이했다가 지혜의 신 엔키 (Enki)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부활합니다. 그러나 ‘돌아올 수 없는 땅’의 법칙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한 영혼이 그곳을 빠져나온다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만 했습니다.
분노한 명계의 악마들, 갈라 (galla)가 그녀를 대동하고 지상으로 올라와, 그녀를 대신할 희생양을 요구합니다. 인안나는 자신을 위해 슬피 울며 재를 뒤집어쓰고 있던 충실한 시녀 닌슈부르 (Ninshubur)나 다른 도시의 신들은 차마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의 도시 우루크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목격한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자 왕인 두무지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높은 옥좌에 앉아 자신의 권력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에 휩싸인 인안나는, 그 순간, 그 어떤 연민도 없이 차가운 심판관이 됩니다. 그녀는 두무지를 향해 ‘죽음의 눈’을 고정시키고, 그를 뒤따라온 갈라 악마들에게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자다. 이 자를 데려가라.” 사랑의 여신이 내린 이 서늘한 판결과 함께, 풍요의 왕 두무지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악마들이 그를 덮치자, 두무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태양신 우투 (Utu)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는 뱀으로, 혹은 영양으로 변신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결국 악마들에게 붙잡혀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마침내 그의 양 우리가 있던 신성한 목초지에서 죽임을 당해 명계로 끌려갑니다. 목동 왕의 죽음과 함께, 들판의 풀은 마르고, 양 우리는 텅 비었으며, 세상의 모든 풍요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메마르고 타들어가는 메소포타미아의 혹독한 여름의 도래를 상징하는, 우주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두무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단 한 사람, 바로 그의 충실한 누이인 게쉬틴안나 (Geshtinanna, ‘하늘의 포도넝쿨’이라는 뜻)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너무나도 깊어, 하늘과 땅을 울렸습니다. 그녀는 오빠를 대신하여 자신이 명계로 가겠다고 간청했고, 이 헌신적인 사랑은 마침내 인안나의 마음마저 움직였습니다. 마침내 두무지가 일 년의 절반을, 게쉬틴안나가 나머지 절반을 명계에서 보내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두무지 신화의 핵심입니다. 그는 오시리스처럼 완전한 부활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지만, 사랑과 희생을 통해 일 년의 절반 동안은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주기적인 부활’을 얻게 된 것입니다.
두무지가 명계에 있는 동안, 지상의 모든 것은 시들고 메마릅니다. 이것은 생명이 사라진 혹독한 건기 (乾期)입니다. 그러나 게쉬틴안나가 그를 대신하여 명계로 내려가고 두무지가 지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대지는 다시 생명력을 되찾고, 곡식은 자라나며, 새로운 풍요의 계절이 시작됩니다. 두무지는 단순한 신이 아니라, 계절의 순환 속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곡물과 대추야자의 정령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비극과 부활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우주적인 드라마가 된 것입니다.
오시리스의 이야기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노래했다면, 두무지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순환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즉, 생명이란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며, 풍요는 언제나 상실의 고통을 겪은 뒤에야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고요하고도 필연적인 휴식이며, 그의 귀환은 자연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가장 위대한 위안입니다. 이처럼 두무지의 신화는, 인류가 자연의 슬픈 죽음 속에서 희망의 부활을 읽어냈던 가장 오래되고도 아름다운 시도라 하겠습니다.
제3절: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Dionysus-Zagreus)
그리스의 판테온 속에서, 디오니소스 (Dionysus)만큼 이중적인 얼굴을 한 신은 없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포도주와 황홀경, 축제의 광기를 주관하는 대중적인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해방과 도취, 이성의 족쇄를 끊고 원초적인 본능의 춤을 추는 모든 생명력의 폭발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의 밝고 소란스러운 축제의 이면에는, 훨씬 더 어둡고, 비밀스러우며, 심오한 비극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신비주의 종교, 특히 오르페우스교 (Orphism)의 입문자들에게만 비밀리에 전수되었던 또 다른 디오니소스의 얼굴입니다. 그의 이름은 자그레우스 (Zagreus)이며,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연의 순환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비극과 그 안에 숨겨진 신성한 불꽃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깊은 실존적 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자그레우스의 탄생은 처음부터 비밀과 금기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 (Zeus)와, 제우스가 뱀의 형상으로 변신하여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 (Persephone)와 결합하여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지하 세계의 어둠과 하늘 세계의 빛이 만나 태어난 이 신성한 아이는, 제우스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제우스는 어린 자그레우스를 옥좌에 앉히고, 자신의 번개 창을 포함한 우주의 통치권을 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성한 계승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 (Hera)의 끔찍한 질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헤라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다른 여신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대지의 가장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힘을 상징하는 거인족, 티탄 (Titan)들을 선동하여 어린 신을 제거하라는 비밀스러운 명령을 내립니다. 티탄들은 자신들의 흉측한 얼굴을 하얀 석고로 위장하고, 어린 자그레우스가 혼자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몰래 접근했습니다. 그들은 아이의 주의를 끌기 위해 거울을 포함한 몇 가지 장난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어린 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잠시 경계를 풀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티탄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위협을 느낀 자그레우스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자신의 신적인 변신 능력을 사용하여 사자, 말, 뱀 등 온갖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했지만, 결국 황소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 티탄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티탄들은 황소의 몸을 붙잡고, 살아있는 신의 육체를 잔인하게 일곱 조각으로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성한 살점을 거대한 솥에 넣고 삶은 뒤, 남김없이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에 대한 가장 끔찍한 신성모독이자, 질서가 혼돈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우주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 (Athena)가 이 끔찍한 현장에 도착하여, 티탄들이 미처 먹지 못한 단 하나의 조각, 바로 여전히 뛰고 있는 자그레우스의 심장을 구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녀는 이 심장을 제우스에게 가져갔고, 제우스는 아들의 유일한 정수가 담긴 이 심장을 갈아서 테베의 공주 세멜레 (Semele)가 마시는 음료에 몰래 섞어 넣었습니다. 세멜레는 이 신성한 심장을 마시고 새로운 아이를 잉태했으니, 그가 바로 우리가 아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이처럼 디오니소스는 두 번 태어난 신 (twice-born)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페르세포네의 몸에서, 그리고 한번은 세멜레의 몸에서. 그의 부활은 오시리스처럼 흩어진 몸이 다시 합쳐지는 방식이 아니라, 파괴되지 않은 심장, 즉 존재의 순수한 본질을 통해 새로운 육신으로 재탄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편, 아들의 죽음에 격노한 제우스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번개를 던져, 신의 살점을 포식한 티탄들을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습니다. 티탄들은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버렸고, 바로 이 그을린 재 (soot)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인류 (humanity)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르페우스교가 전하는 인간 기원의 가장 핵심적인 비밀입니다. 인간은 순수하게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두 가지의 상반된 본성을 하나의 몸 안에 지닌, 비극적이고도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필멸의 운명, 그리고 신에게 저항하려는 오만한 본성은 티탄적인 (Titanic) 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티탄의 재로만 만들어졌다면, 우리는 그저 오만한 흙덩이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티탄들이 먹어치웠던 신, 즉 자그레우스의 신성한 살점이 그 재 속에 섞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는, 갈가리 찢겼던 신의 조각, 즉 디오니소스적인 (Dionysian) 신성의 불꽃이 희미하게나마 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그레우스의 신화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로 ‘고통받는 신의 무덤’이라는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의 육체는 신을 살해한 티탄의 감옥이지만, 바로 그 감옥 안에 우리는 신성한 죄수, 즉 디오니소스의 일부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이 내면의 두 본성, 즉 흙으로 돌아가려는 티탄적인 충동과,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되찾으려는 디오니소스적인 갈망 사이의 영원한 투쟁입니다.
오르페우스교의 입문자들에게, 구원이란 바로 이 내면의 디오니소스적인 신성을 자각하고, 수행과 정화를 통해 티탄적인 요소를 씻어내어, 마침내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란적인 춤과 음악, 그리고 포도주를 통한 황홀경 (ecstasis)은, 이성의 족쇄를 풀고 잠시나마 내면의 신과 합일하려는 의례적인 시도였습니다.
이처럼 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의 죽음과 부활의 신화는, 오시리스나 두무지처럼 계절의 순환이라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비극과 신성, 고통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도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제4절: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의 황금가지,
죽음과 재생의 패턴
우리는 지금까지 이집트의 나일 강변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뜨거운 평원에서, 그리고 그리스의 비밀스러운 숲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과 얼굴을 한 채 죽고 부활하기를 반복했던 신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목격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들은 서로 다른 문화가 낳은 고유한 신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실은 인류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하나의 거대한 원형 (archetype)이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면 어떨까요? 20세기 초, 스코틀랜드 출신의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 경은 바로 이 대담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류의 모든 신화와 주술, 종교를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의 결과물이 바로, 인류 정신사에 지워지지 않을 거대한 족적을 남긴 12권의 대작,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입니다.
프레이저의 여정은 로마 근처 네미 (Nemi) 호숫가의 신비로운 숲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에는 ‘숲의 왕 (Rex Nemorensis)’이라 불리는 기이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칼을 든 채 숲속의 신성한 나무를 지키고 있었는데, 누구든 그 나무의 황금가지를 꺾고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새로운 ‘숲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왕 또한, 언젠가 자신에게 도전할 또 다른 도망자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습니다. 프레이저는 이 기이하고 잔혹한 계승 의식 속에,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는 전 세계의 민담과 신화, 원시 부족의 의례들을 수집하고 비교 분석하는 거대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방대한 연구를 통해, 프레이저는 마침내 하나의 보편적인 패턴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바로 고대 농경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믿음이, 자연의 순환과 풍요를 관장하는 ‘식물신 (vegetation spirit)’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드라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앞서 살펴본 오시리스, 두무지, 디오니소스는 모두 이 위대한 식물신의 서로 다른 이름들이었습니다.
프레이저의 통찰에 따르면, 이 신들의 운명은 농경 사회의 생존과 직결된 계절의 순환을 완벽하게 신화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신의 비극적인 죽음은, 곡식이 베어지고 땅이 메마르며 모든 생명이 움츠러드는 가을과 겨울, 혹은 혹독한 건기를 상징합니다. 그의 몸이 갈가리 찢겨 땅에 흩뿌려지는 것은, 추수가 끝난 뒤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여신이나 남겨진 이들의 애도 기간은, 생명이 사라진 채 다음 해를 기다리는 대지의 침묵과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이 기적적으로 부활하는 것은,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신의 부활과 함께 대지는 다시 풍요로워지고, 공동체는 또 한 해의 생존을 약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프레이저는 이 패턴이 단지 몇몇 주요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시리아의 여신 아스타르테 (Astarte)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청년 아도니스 (Adonis)는 멧돼지에게 받혀 죽고, 그가 흘린 핏방울에서는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납니다. 프리기아의 대지모신 키벨레 (Cybele)가 사랑했던 목동 아티스 (Attis)는 스스로를 거세하고 소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피에서는 제비꽃이 피어나고 그의 영혼은 다시 부활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신성한 존재의 희생적인 죽음이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프레이저는 이 신화가 단순히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주술적 의례 (magical ritual)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재현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을 낳는다는 ‘유사 주술 (sympathetic magic)’의 원리에 깊이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신의 죽음과 부활을 의례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자연 속에서도 똑같은 현상, 즉 겨울의 죽음과 봄의 부활이 일어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네미 숲의 ‘숲의 왕’이 살해당해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풍요를 책임지는 살아있는 식물신의 화신이었기에, 그의 힘이 노쇠하기 전에 더 젊고 강한 후계자에게 살해당하고 교체되어야만, 자연의 생명력 또한 쇠퇴하지 않고 영원히 순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황금가지』가 제시한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초 지성계에 거대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예수 이야기마저도,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던 ‘죽고 부활하는 신’의 보편적인 패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도발적인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프레이저가 제시한 증거들의 일부가 과장되었거나, 모든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가 인류의 정신사에 남긴 위대한 공헌은 결코 퇴색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져 있던 전 세계의 신화와 의례들 속에서, 인류가 죽음과 재생의 문제를 얼마나 보편적이고도 절실하게 고민해왔는지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개별 신화의 숲을 넘어, 그 모든 숲을 관통하는 거대한 산맥, 즉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희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길어 올리려는 인류의 영원한 갈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의 『황금가지』는, 죽음과 부활의 신화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자연의 순환과 함께 영원히 노래하고 있는 원형의 노래임을 일깨워주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지도라 하겠습니다.
제5절: 신의 희생, 공동체의 죄를 씻고 새로운 질서를 열다
제임스 프레이저가 밝혔듯이, 죽고 부활하는 신들의 이야기는 혹독한 겨울과 풍요로운 봄이 교차하는 자연의 순환을 반영하는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이 신성한 희생의 의미는, 단지 굶주린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농경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의 죽음은 때로, 병들고 타락한 공동체의 영혼을 정화하고, 낡은 질서를 무너뜨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사회적 연금술’의 역할을 합니다.
고대의 많은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겪는 불행, 즉 가뭄이나 질병, 전쟁과 같은 재앙의 원인이 공동체 안에 쌓인 눈에 보이지 않는 ‘죄’나 ‘오염’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체 안에 축적된 갈등과 죄악, 그리고 도덕적 타락은 우주의 조화를 깨뜨리고, 그 결과 신들의 분노나 우주적 불균형을 초래하여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죄의 무게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평범한 제물로는 부족한, 지극히 신성하고도 강력한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신 자신, 혹은 신의 대리인이 되는 왕의 희생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는 신은 대지의 풍요를 위한 제물이자 동시에, 공동체의 모든 죄와 불행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위대한 ‘희생양 (scapegoat)’이 됩니다. 그의 죽음은 공동체가 지은 모든 부정함을 깨끗이 씻어내는 거대한 정화 의식입니다. 신의 피가 대지를 적실 때, 그것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더러워진 영혼 또한 정결하게 씻어내는 신성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러한 창조적 희생의 원형은 세계의 수많은 창세 신화 속에서 발견됩니다.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에서, 영웅 신 마르둑 (Marduk)은 혼돈의 여신 티아마트 (Tiamat)를 죽이고, 그녀의 거대한 시신을 둘로 나누어 하늘과 땅을 창조합니다. 여기서 혼돈의 신 티아마트의 죽음은, 무질서한 원시 상태가 파괴되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비로소 질서정연한 우주가 탄생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북유럽 신화에서도, 최초의 신 오딘 (Odin)과 그의 형제들은 태초의 거인 이미르 (Ymir)를 죽이고, 그의 몸으로 세상을 만듭니다. 이미르의 살은 땅이 되고, 뼈는 산이 되며, 피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원초적 존재의 희생적인 죽음은,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 됩니다.
이러한 희생을 통한 질서의 창조는, 단순히 우주적인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도덕적, 사회적 질서를 재건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신의 죽음은 종종, 세상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낡은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혼란의 시기에 일어납니다. 그의 죽음은 이 낡고 부패한 시대를 종결짓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가 부활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따라야 할 새로운 법과 질서, 즉 ‘새로운 계약 (new covenant)’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공동체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도덕적 기틀 위에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의 희생이 공동체의 죄를 씻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위대한 원형은, 훗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을 이루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그 가장 심오하고도 영향력 있는 형태로 발현됩니다. 예수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인류 전체의 원죄를 대속 (代贖)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의 죽음은 낡은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사랑과 은총이라는 새로운 계약의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더 깊이 탐험하게 될 주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죽고 부활하는 신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생의 창조적인 힘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한 소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지에 풍요를 가져오고, 혼돈을 질서로 바꾸며, 공동체의 죄를 씻어내고, 마침내 낡은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가장 숭고하고도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신의 무덤은 생명의 종착역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정화된 공동체와 새로운 질서가 잉태되는, 가장 신성한 자궁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6절: 순환의 신화, 다음 단계의 배움을 위한 우주적 휴식
우리는 오시리스의 분해된 육신에서 이집트의 영원한 풍요를, 두무지의 주기적인 죽음에서 메소포타미아의 계절적 순환을, 그리고 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의 비극적인 희생에서 인간 영혼의 이중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제임스 프레이저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인류가 자연 속에서 발견한 보편적인 죽음과 재생의 패턴을 반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모든 신화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바로 우주를 관통하는 거대한 ‘순환의 신화 (myth of eternal return)’입니다.
이 순환의 신화는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며, 모든 소멸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임을 가르칩니다. 겨울의 혹독한 침묵 없이는 봄의 생명력이 돋아날 수 없고, 밤의 깊은 어둠 없이는 새벽의 찬란한 빛이 찾아올 수 없는 것처럼, 신의 죽음 또한 우주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낡은 것이 사라져야만 새로운 것이 들어설 공간이 생기고, 한 시대의 종말은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됩니다.
그러나 이 순환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장하는 나선형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신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한 원점 회귀가 아니라, 매번 공동체에게 새로운 교훈과 지혜를 안겨주는 ‘다음 단계의 배움’을 위한 기회입니다. 오시리스의 죽음 이후 이집트는 호루스의 통치 아래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했고, 디오니소스-자그레우스의 희생은 인간에게 내면의 신성을 자각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신들의 죽음은 공동체가 과거의 오류를 성찰하고, 낡은 도덕률을 재정비하며, 더 높은 차원의 존재 양식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우주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화 속에서, 신의 죽음은 때로는 파괴적인 혼돈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주적 휴식 (cosmic rest)’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모든 것이 멈추고 정지하는 소극적인 휴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생명력이 응축되고, 낡은 형태가 해체되어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되기 위한, 깊고 고요하며 필수적인 '재창조의 침묵'입니다. 겨울잠을 자는 씨앗이 에너지를 모으듯, 죽음의 상태에 있는 신은 다음 부활을 위한 힘을 축적하고, 동시에 공동체는 그 침묵의 시간 동안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순환의 신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의 삶 또한 이 거대한 우주적 순환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탄생과 성장, 노쇠와 죽음은 결코 고립된 개별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 그리고 신들의 운명과 깊이 연결된, 거대한 생명의 리듬 속에서 움직이는 한 조각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소멸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 속에 새로운 지층을 형성하고, 후대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순환적 사고는 죽음의 공포를 상대화하고,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삶의 적대적인 끝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삶의 일부이자,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전환점, 그리고 다음 단계의 배움을 위한 고요한 우주적 휴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죽어야만 싹을 틔우듯, 우리의 존재 또한 죽음이라는 심오한 과정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의미와 생명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죽고 부활하는 신들의 이야기는 인류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찾아낸 가장 위대한 해답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침묵 속에 영원히 갇히는 절망 대신, 반복되는 희생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과 질서를 길어 올리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 순환의 신화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삶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단계의 배움과 존재의 확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우주적 휴식'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우리가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 가장 강력하고도 영원한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