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베다와 우파니샤드, 지혜의 숲

by DrLeeHC

제1권: 힌두 사상, 그 기원과 전개


제1-1장: 베다와 우파니샤드, 지혜의 숲



1-1.1. 리그베다의 찬가와 신들



베다(Veda): 신성한 지혜의 네 강줄기


힌두 사상의 가장 깊고 오래된 원천을 찾아가는 여정은 반드시 ‘베다 (Veda)’라는 거대한 강과 마주하게 됩니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 또는 ‘지혜’를 의미하며, 단순히 인간이 저술한 책이 아니라, 태초의 위대한 현자 (ṛṣi)들이 깊은 명상 속에서 우주적 진리의 소리를 직접 ‘듣고’ 기록한 ‘슈루티 (śruti, 들은 것)’로 여겨집니다. 이 때문에 베다는 인간의 손을 탄 적이 없는,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되며, 이후 전개될 모든 힌두 사상과 종교의 가장 신성한 뿌리이자 최종적인 권위가 됩니다.


이 거대한 베다 문헌은 그 내용과 형식에 따라 보통 네 가지의 주요 경전으로 나뉩니다. 이 네 개의 강줄기는 각각 고유한 목적과 성격을 가지며, 함께 어우러져 고대 인도 아리아인들의 완전한 종교적 삶을 구성했습니다.


1. 리그베다 (Ṛgveda): 찬가의 베다


네 개의 베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경전입니다. ‘리그’는 ‘찬가’ 또는 ‘운문’을 의미하며, 『리그베다』는 자연의 다양한 힘들을 신격화한 신들을 향한 총 1,028개의 장엄한 찬가 모음집입니다. 이 찬가들은 폭풍우의 신 인드라, 불의 신 아그니, 태양의 신 수리야 등 다양한 신들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그들에게 현실적인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정교한 철학 체계와는 달리, 고대인들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꼈던 생생한 경이와 두려움, 그리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한 기원이 담긴 살아있는 목소리의 기록입니다. 다른 세 베다의 많은 내용이 『리그베다』에서 파생되었을 만큼, 이것은 모든 베다 지혜의 원천이자 근간입니다.


2. 야주르베다 (Yajurveda): 제사의 베다


‘야주르’는 ‘제사 의례’를 의미하며, 『야주르베다』는 말 그대로 제사를 집전하기 위한 실용적인 안내서입니다. 이 경전은 제단을 쌓고, 불을 피우며, 제물을 바치는 등 제사의 각 단계에서 사제가 읊조려야 할 산문 형태의 짧은 제의 공식 (yajus)들을 담고 있습니다. 『리그베다』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면, 『야주르베다』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서입니다. 이를 통해 신들을 향한 추상적인 경배는 우주의 질서(리타)를 유지하는, 실제적이고도 정밀한 행위로 구체화되었습니다.


3. 사마베다 (Sāmaveda): 노래의 베다


‘사마’는 ‘선율’ 또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사마베다』는 『리그베다』의 찬가들 중에서 제사 의례 때 특별한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선별된 찬가들의 모음집입니다. 고대인들은 소리의 힘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올바른 음률로 노래를 부를 때 그 기원이 신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사마베다』는 제사에 음악적인 장엄함과 신성한 힘을 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리그베다』가 가사집이라면, 『사마베다』는 그 가사에 곡을 붙인 악보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4. 아타르바베다 (Atharvaveda): 주술의 베다


가장 마지막에 베다의 일부로 인정된 이 경전은 앞의 세 베다와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아타르바베다』는 주로 개인적인 삶의 문제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병을 치료하고, 악령을 물리치며, 적을 저주하고, 사랑을 얻거나, 가정의 평화와 장수를 기원하는 등, 보다 현실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의 주문과 기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의 세 베다가 주로 공동체적인 제사 의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아타르바베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희로애락과 불안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네 가지 베다는 함께 어우러져, 고대 인도인들의 우주관과 신앙, 그리고 삶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형성했습니다. 이후 우리가 탐험하게 될 모든 심오한 철학적 사유는 바로 이 네 개의 강줄기가 흘러들어 만들어낸 거대한 바다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리그베다, Rig Veda』의 신들


인도 사상의 가장 깊고 오래된 원천을 찾아가면 우리는 『리그베다, Rig Veda』의 장엄한 찬가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후대에 등장하는 정교한 철학 체계와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합니다. 『리그베다』는 철학자의 서재에서 탄생한 논리적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약 3,500년 전 고대 인도-아리아인들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꼈던 생생한 경이와 두려움, 그리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한 기원이 담긴 살아있는 목소리의 기록입니다. 그들의 사유는 추상적인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구체적인 세계, 즉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의 여신 우샤스 (Uṣas)의 아름다움, 대지를 뒤흔드는 폭풍우의 신 인드라 (Indra)의 막강한 힘, 그리고 인간의 삶 가장 가까이에서 온기와 빛을 주며 제물을 신에게 실어 나르는 불의 신 아그니 (Agni)의 신비로운 현존에서 출발했습니다.


고대 베다인들에게 자연은 오늘날 우리처럼 분석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생명체이자,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강력한 의지들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강과 바람, 해와 달은 모두 그 자체로 신성한 힘, 즉 데바 (Deva, 신)였습니다. 따라서 『리그베다』의 세계관은 다신론 (Polytheism)적 성격을 띱니다. 수많은 신이 존재하며, 각자는 고유한 영역과 힘을 지니고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합니다.


그러나 베다의 다신론은 서양의 고대 신화처럼 신들의 계보나 역할이 명확하게 고정된 체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우 유동적이고 실용적인 특징을 보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교체신론 (交替神論, Kathenotheism)' 혹은 '일신숭배적 다신론 (Henothe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여러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특정 신에게 찬가를 바치는 그 순간만큼은 바로 그 신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신앙 형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아그니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아그니가 천지를 창조하고 모든 신을 능가하는 최고의 존재로 찬양받지만, 다음 순간 인드라에게 기원할 때는 인드라가 우주의 왕이자 가장 위대한 신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신들의 서열을 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기원을 들어줄 가장 강력하고 적합한 신에게 모든 찬사와 영광을 집중하려는 실용적 태도의 발현입니다.


인드라 (Indra)


『리그베다』의 하늘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신들의 목소리 속에서, 단연 가장 우렁차고 강력한 존재는 폭풍우와 전쟁의 신, 인드라입니다. 그는 베다의 판테온이 거느린 가장 위대한 슈퍼스타이자, 고대 아리아인들의 삶과 열망을 가장 생생하게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1,028개에 달하는 『리그베다』의 찬가 중 거의 4분의 1이 오직 그 한 명에게 바쳐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당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차지했던 압도적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연 현상을 의인화한 신을 넘어, 신들의 왕이자 아리아인 부족의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혼돈의 세력에 맞서 우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가장 현실적인 구원자였습니다.


인드라는 무엇보다도 이상적인 전사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몸을 가졌으며, 두 마리의 신성한 말이 이끄는 눈부신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그의 손에는 신들의 장인 트바슈트리 (Tvashtri)가 벼려낸 궁극의 무기, 산을 꿰뚫고 성채를 무너뜨리는 번개 ‘금강저 (Vajra)’가 들려 있습니다. 그의 힘의 원천은 바로 신성한 음료 ‘소마 (Soma)’입니다. 그는 소마를 통째로 들이켜고, 그 신성한 취기 속에서 우주적인 힘을 얻어 적들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의 성격은 불같고, 때로는 교만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를 즐기는 호탕한 영웅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찬양하고 소마를 바치는 헌신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여, 가축과 재물,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낌없이 안겨주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인드라의 가장 위대하고도 본질적인 업적은, 온 세상을 가뭄과 혼돈 속에 가두었던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악마, 브리트라 (Vṛtra)를 무찌른 신화 속에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브리트라는 ‘가로막는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산처럼 거대한 몸으로 세상의 모든 강과 비구름을 가두어 버린 우주적인 장애물이었습니다. 그의 힘 앞에 다른 모든 신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쳤고, 세상은 메마른 죽음의 땅으로 변해갔습니다. 바로 그때, 인간과 신들의 간절한 기원과 그들이 바친 소마의 힘으로 충만해진 인드라가 홀로 나섭니다. 그의 포효에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그는 자신의 금강저를 휘둘러 브리트라의 아흔아홉 개 요새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그 거대한 뱀의 머리를 꿰뚫어 버립니다. 브리트라가 쓰러지는 순간, 그의 몸속에 갇혀 있던 생명의 물줄기들이 마치 경주를 시작한 말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터져 나와,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다시 한번 세상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 신화는 단순히 건기가 끝나고 생명을 주는 몬순의 비가 내리는 자연 현상을 신격화한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혼돈 (Anrita)에 대한 질서 (Ṛta)의 승리이며,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이고,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상징하는 우주적인 드라마입니다. 브리트라는 생명의 흐름을 막는 모든 종류의 우주적, 심리적 장애물이며, 인드라는 바로 그 장애물을 부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힘 그 자체입니다. 아리아인들에게 인드라는 이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풍요를 가져다주고, 현실의 적들을 격파하며,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가장 역동적이고도 믿음직한 구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베다 시대가 저물고 푸라나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의 호탕하고 인간적인 성격은 종종 교만하고 여색을 밝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며, 우주의 더 근본적인 질서를 관장하는 비슈누나 시바와 같은 새로운 주신들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베다』의 찬가들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드라의 힘찬 목소리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용기와 희망을 갈망했던 고대인들의 뜨거운 심장박동을 우리에게 영원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그니 (Agni), 신과 인간을 잇는 불멸의 사제


폭풍의 신 인드라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우주적인 힘을 과시하는 왕이라면, 인간의 삶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우리 집의 화로와 제단의 중심에서 조용하지만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그니이며, 그는 산스크리트어로 ‘불’ 그 자체입니다. 그는 인드라 다음으로 『리그베다』에서 가장 많은 찬가를 받은 위대한 신이지만, 그의 힘은 파괴와 정복이 아니라 연결과 변형, 그리고 정화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따뜻한 빛이며,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주는 친구이고, 무엇보다도 유한한 인간의 목소리를 불멸하는 신들의 귀에 전달하는 유일하고도 신성한 매개자입니다.


아그니의 탄생은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는 그의 신비로운 본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하늘의 번개 속에서 태어나고, 물속 깊은 곳에서도 태어나며, 가장 경이롭게는 제단 위에서 두 개의 비비는 나뭇가지 (araṇi) 사이의 마찰을 통해, 마치 기적처럼 매번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처럼 그는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이라는 우주의 세 영역 모두에 존재하며, 동시에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자리에도 현현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이면서도 가장 내재적인 신입니다.


그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인간의 삶을 감쌉니다.


첫째, 그는 ‘가정의 불 (gārhapatya)’로서, 모든 가정의 중심에 자리한 현실적인 보호자입니다. 그는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맹수와 악령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며, 차가운 겨울밤에 온기를 제공합니다. 그는 음식을 익혀 인간이 문명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최초의 동반자이며, 한 가문의 대를 이어 영원히 타오르는 불멸의 생명력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둘째, 아그니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제사의 불 (āhavanīya)’로서의 신학적 역할에서 드러납니다. 고대 베다인들에게, 유한한 인간의 세계와 무한한 신들의 세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있었습니다. 아그니는 바로 그 간극을 잇는 유일한 다리이자, 신성한 전령이며, 신들의 입 (口)입니다. 인간이 신들에게 바치는 모든 정성 어린 제물—향기로운 버터기름 (ghee), 곡식, 그리고 신성한 소마—는 아그니의 불꽃 속에서 정화되고, 그의 연기를 통해 하늘에 있는 신들에게 안전하게 전달됩니다. 그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어떤 기원도 신에게 닿을 수 없으며, 신들이 베푸는 어떤 축복과 은총도 지상으로 내려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그는 단순한 불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제 (Hotṛ)’ 그 자체입니다. 그는 인간 사제보다 먼저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을 제단으로 초대하며, 인간을 대신하여 신들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그는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가장 충실한 종이며,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들의 가장 친밀한 친구입니다. 이처럼 땅과 하늘, 인간과 신이라는 모든 이원적 대립이 그의 불꽃 속에서 하나로 녹아내립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028개의 장엄한 찬가로 이루어진 『리그베다』의 여정은, 다른 어떤 위대한 신이 아닌 바로 이 아그니를 향한 찬미로 그 첫 장을 여는 것입니다. “오, 아그니여! 제사의 선두에 선 신성한 사제이시며, 계절 따라 제물을 바치는 신이시여, 영웅들을 가장 많이 품고 계신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이는 모든 신성한 행위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아그니의 빛나는 현존이 있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바루나 (Varuṇa), 우주적 질서와 도덕의 수호신


『리그베다』의 신들 중에서, 인드라가 지상의 전투와 현실적인 풍요를 책임지는 역동적인 영웅이라면, 바루나는 저 멀리 고요한 밤하늘에서 온 세상을 굽어보며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와 도덕을 관장하는 장엄하고도 준엄한 주권자입니다. 인드라가 힘과 행위의 신이라면, 바루나는 존재와 질서의 신입니다. 그의 이름은 ‘뒤덮는 자’ 혹은 ‘묶는 자’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했으며, 그의 권능은 밤하늘처럼 온 우주를 감싸고, 그의 법칙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신성한 굴레입니다. 그는 다른 신들처럼 인간의 제물에 의존하거나 변덕을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하고 불변하는 우주적 질서, 즉 리타 (Ṛta) 그 자체의 수호자이자 화신입니다.


리타는 단순히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계절이 순환하는 물리적인 법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도덕적 규범, 진실 (Satya), 그리고 정의의 원리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우주적 법칙입니다. 바루나는 바로 이 리타가 올바르게 실현되는지를 감시하는 우주의 눈입니다. 그는 황금 궁전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으며, 하늘의 별들은 바로 그의 천 개의 눈이자, 세상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감시하는 그의 ‘스파이 (spśa)’들입니다. 낮에는 태양신 수리야가 그의 눈이 되어 지상을 살피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은밀하게 속삭여도, 세 번째인 바루나는 언제나 그곳에 함께하며 모든 것을 듣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 앞에서는 그 어떤 거짓과 불의도 숨겨질 수 없습니다.


바루나는 리타의 길을 벗어나 ‘안리타 (anṛta)’, 즉 무질서와 거짓의 죄를 지은 자를 자신의 보이지 않는 ‘밧줄 (pāśa)’로 가차 없이 묶어 벌을 내립니다. 그의 밧줄은 죄인의 양심을 옥죄는 죄의식이며, 그가 내리는 벌은 종종 수종 (水腫) 병과 같은 끔찍한 질병이나 불행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그의 심판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기에, 바루나에게 바치는 찬가들은 다른 신들에게처럼 부와 번영을 구하는 기원보다는, 깊은 윤리적 성찰과 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 바루나여,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당신의 법을 어겼더라도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제가 진흙으로 빚은 집에 들어가야 합니까? 오, 바루나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러한 절절한 참회의 기도 속에는, 힌두 사상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고도로 발달된 윤리 의식과, 인간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우주적 법칙에 의해 평가받는다는 깊은 책임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준엄한 심판관의 모습 이면에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얼굴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마야 (māyā)’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힘을 사용하여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이 ‘마야’는 후대에 ‘환영’이라는 의미로 변질되기 이전에, 본래 ‘불가사의한 창조의 힘’ 또는 ‘지혜’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 힘으로 땅의 크기를 재고, 태양이 하늘을 여행할 길을 만들었으며, 강물이 영원히 흘러도 바다가 넘치지 않게 하는 신비로운 질서를 세웠습니다.


비록 『리그베다』 후기로 갈수록, 아리아인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쟁의 신 인드라의 인기에 밀려 그의 위상이 다소 약화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바루나가 확립한 ‘리타’라는 보편적 질서의 개념과, 인간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후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인 ‘다르마 (Dharma)’와 ‘카르마 (Karma)’ 사상으로 그 생명을 이어가며, 인도 철학이라는 장대한 강의 가장 깊고도 먼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최고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힌두교의 양심 가장 깊은 곳에 영원한 옥좌를 마련한, 가장 위엄 있는 철학의 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마 (Soma), 불멸의 감로수이자 달의 신


『리그베다』의 세계에서, 신과 인간의 교감은 제단 위에서 타오르는 아그니의 불꽃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교감을 황홀경의 절정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신비로운 음료, 소마입니다. 소마는 단순히 제사에 쓰이는 식물이나 음료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신이며, 신들의 왕 인드라마저도 그의 힘에 의지해야만 하는 우주적인 힘의 근원입니다. 『리그베다』의 아홉 번째 만달라 전체가 오직 소마 신에게만 헌정되었을 만큼, 그는 베다 종교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비밀스러운 중심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소마의 정체는 오늘날까지도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이 특정 환각 버섯이나 등반 식물의 일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베다의 찬가들이 묘사하는 소마는 단순히 지상의 식물을 넘어섭니다. 그는 산에서 자라나는 식물이자,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신성한 꿀이며, 모든 강물의 왕이고, 무엇보다도 밤하늘을 비추는 달 (Chandra) 그 자체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는 땅과 하늘, 식물계와 천상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우주적인 존재입니다.


제사 의례에서 소마의 준비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연극이었습니다. 사제들은 산에서 채취해 온 소마 식물의 줄기를 두 개의 돌판 사이에 놓고, 신성한 주문을 외우며 힘껏 찧습니다. 이 과정은 마치 인드라가 금강저로 악마 브리트라를 무찌르는 행위를 재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으깨진 줄기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즙은 양털로 만든 체에 조심스럽게 걸러져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 이후 우유나 꿀, 보릿가루 등과 섞여 마침내 신과 인간을 위한 신성한 음료로 완성됩니다.


이 소마를 마셨을 때 일어나는 효과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신들에게 소마는 ‘암리타 (amṛta)’, 즉 ‘죽지 않음’의 감로수였습니다. 특히 위대한 전사 인드라는 소마를 마심으로써 온 우주를 채울 만큼 거대해지고, 그 어떤 악마도 대적할 수 없는 무한한 힘을 얻었습니다. 그가 브리트라를 무찌르고 세상의 물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소마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인간, 즉 제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에게 소마는 신과의 합일로 이끄는 가장 직접적인 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마를 마시고, 모든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는 황홀경 속에서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음을 노래했습니다. 그들의 의식은 확장되었고, 시적인 영감이 샘솟았으며, 베다의 장엄한 찬가들은 바로 이 소마가 주는 신성한 취기 속에서 태어났다고 믿어졌습니다. 소마는 단순히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뜨게 하여 신들의 세계를 직접 엿보게 하는 지혜의 음료였습니다. 이처럼 소마는 신에게는 힘을, 인간에게는 영감을 주는, 땅과 하늘을 잇는 가장 신비로운 생명의 정수이자, 베다 제사 의례의 심장이었습니다.


『리그베다』의 시인들이 인드라의 막강한 힘과 아그니의 신성한 역할에 그토록 많은 찬가를 바쳤지만, 그들의 세계는 결코 소수의 위대한 신들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고대 아리아인들의 삶은 자연의 가장 섬세하고 다채로운 숨결과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동쪽 하늘을 물들이는 여명의 황홀한 아름다움 속에서, 대지를 가로지르는 바람의 거친 포효 속에서, 그리고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말없이 비추는 태양의 장엄한 운행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신성 (神性)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가장 빛나고 장엄한 존재는 단연 태양신 수리야 (Sūrya)입니다. 그는 단순히 하늘에 떠 있는 뜨거운 불덩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아는, 우주의 거대한 눈 (cakṣus)이었습니다. 하늘의 위대한 수호자인 미트라 (Mitra)와 바루나 (Varuṇa)의 눈이 되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행하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남김없이 지켜보는 정의의 감시자였습니다. 어둠 속에 숨겨진 그 어떤 비밀도 수리야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빛은 물리적인 어둠뿐만 아니라, 무지와 죄악이라는 내면의 어둠까지도 몰아내는 신성한 힘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수리야를 향해 병을 치유해 주고, 악몽을 물리쳐 주며,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질서와 생명의 수호자, 태양신 수리야


『리그베다』의 시인들은 수리야의 장엄한 운행을 묘사하기 위해 온갖 아름다운 비유를 동원했습니다. 그는 하늘이라는 광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눈부신 새였으며, 일곱 마리의 붉은 말이 이끄는 황금 전차를 타고 어김없이 자신의 길을 달리는 위대한 전차몰이꾼이었습니다. 이 일곱 마리의 말은 때로는 무지개의 일곱 빛깔로, 때로는 일주일의 칠일 (七日)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그의 누이이자 연인인 새벽의 여신 우샤스가 그의 길을 정성껏 닦아놓으면, 수리야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며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 그 위용을 드러냅니다. 그의 등장은 단순한 해돋이가 아니라, 혼돈에 대한 질서의 승리이자,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매일 아침 재확인하는 우주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는 밤 동안 숨어 있던 모든 악령과 공포를 소멸시키고, 잠들어 있던 모든 생명체를 일깨워 각자의 활동을 시작하게 하는 위대한 각성자, 사비트리 (Savitṛ)이기도 했습니다. 저 유명한 가야트리 만트라 (Gāyatrī mantra)는 바로 이 생명의 고무자로서의 태양신을 향한 명상과 기도의 노래입니다. 이처럼 수리야는 단순히 빛과 온기의 원천을 넘어, 우주적 질서 (리타)와 도덕, 그리고 생명의 순환을 관장하는 가장 위대하고도 눈부신 신이었습니다.


새벽의 여신 우샤스


만약 수리야가 장엄하고 압도적인 남성적 신이라면, 그의 길을 예비하는 새벽의 여신 우샤스 (Uṣas)는 『리그베다』의 찬가들 속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되는 여성적 신입니다. 그녀는 신들 중 가장 시적인 사랑을 받은 존재였으며, 그녀에게 바쳐진 찬가들은 인도 고대 문학의 정수라 할 만큼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우샤스는 매일 아침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새벽의 여명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어둠이라는 검은 장막을 부드럽게 걷어내고 세상을 드러내는, 눈부신 옷을 입은 아름다운 무희와도 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늘의 딸이자 밤의 자매이며, 태양신 수리야가 나아갈 길을 정성껏 마련하는 자애로운 여인입니다. 그녀의 등장은 결코 폭력적이거나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내는 수줍은 처녀처럼,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여인처럼 우아하고 고요하게 다가와 잠든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깨웁니다.


우샤스는 단순히 빛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생명과 부 (富),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녀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새들은 둥지에서 날아오르고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 각자의 생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제사를 지내는 사제들에게는 기도의 시간을 알리고, 가장에게는 부와 행운을 가져다주며, 세상을 새로운 날의 활기로 가득 채웁니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젊음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아름다움과 찬사 뒤에는 깊은 철학적 성찰이 숨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떠오르는 저 영원히 젊은 여신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시간의 흐름과 늙음, 그리고 죽음의 필연성을 냉정하게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리그베다』의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과거의 수많은 날들처럼 떠오르며, 그녀는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이처럼 우샤스를 향한 찬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경탄과 동시에, 그 아름다움 앞에서 유한한 존재의 슬픔을 느끼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함께 담고 있는, 지극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고백이었습니다.


바람의 신 바유


만약 수리야와 우샤스가 눈에 보이는 빛의 신들이라면, 바람의 신 바유 (Vāyu) 또는 바타 (Vāta)는 보이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신입니다. 그는 신들의 숨결이자 우주의 호흡 (prāṇa)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행차는 결코 조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수백, 수천 마리의 말이 이끄는 거대한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그의 전차가 지나갈 때면 온 대지가 먼지를 일으키고 숲의 나무들은 두려움에 엎드립니다. 그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뒤흔드는 파괴적인 힘을 가졌지만, 결코 악한 신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폭풍우의 신 인드라의 충실한 동료로서, 함께 전차를 타고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용맹한 전사였습니다.


동시에 바유는 생명을 주는 자비로운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있는 물을 움직여 대지에 비를 내리게 하고, 더위를 식혀주며, 세상의 모든 불결한 것들을 쓸어버리는 정화의 힘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숨’의 원형이었습니다. 그의 움직임이 멈추면 우주의 모든 생명 활동 또한 멈추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바유는 파괴와 창조, 폭력과 자비라는 양면적인 모습을 동시에 지닌,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며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바유의 신격은, 훗날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우주적 생명 에너지인 ‘프라나 (Prāṇa)’에 대한 심오한 사유로 발전하는 중요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베다의 시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자연 현상 속에서 살아있는 신들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들과의 교감을 통해 삶의 의미와 우주의 비밀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신과의 거래, 야즈나 (Yajña)


이처럼 『리그베다』의 세계는 신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역동적인 관계의 중심에는 바로 야즈나 (Yajña)라고 불리는 제사 의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사는 단순히 신들에게 감사와 경배를 표현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넘어, 우주의 거대한 순환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체적인 기술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들의 힘을 강화하고 그 대가로 지상에서의 풍요와 안녕을 보장받는, 하나의 신성한 계약이자 공생 관계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본질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세계관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신들조차도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 에너지의 근원은 바로 인간이 제단의 불꽃을 통해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정성껏 바치는 버터기름 (ghee)과 신성한 음료 소마 (Soma)는, 신들에게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음식이자 혼돈의 세력과 싸울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제물을 통해 기운을 얻은 신들은, 그 보답으로 세상에 비를 내리고, 가축을 번성하게 하며, 인간에게 건강한 자손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내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야즈나는 신과 인간이 서로를 먹이고 살리는, 거대한 우주적 신진대사의 핵심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직 내면의 깨달음이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영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부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생존하고 번영해야만 했던 고대 아리아인들의 절박한 삶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들에게 야즈나는 추상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가뭄을 끝내고, 적을 물리치며,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가장 실제적이고도 강력한 생존의 기술이었습니다.


신화에서 철학으로, 위대한 도약


그러나 이 소박하고 현실적인 기원들 속에서도 인류 정신사의 위대한 도약을 예고하는 철학적 사유의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찬가들을 짓던 시인, 즉 리쉬 (ṛṣi)들은 점차 신들에 대한 찬양을 넘어, 세계의 근원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리그베다』의 후기 찬가 중 하나인 「나사디야 수크타, Nāsadīya Sūkta, 창조의 노래」입니다. 이 찬가는 "태초에 존재 (Sat)도 없었고 비존재 (Asat)도 없었다"는 충격적인 선언으로 시작하여, "그때에는 죽음도 불멸도 없었고, 밤과 낮의 구분조차 없었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 세계가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 그 누가 진정으로 알겠는가? 저 높은 하늘에 있는 감독관조차 아마 모르실 것이다"라며, 인간 인식의 한계를 고백하는 장엄한 회의 (懷疑)에 도달합니다. 이는 신화적 설명을 넘어선 최초의 형이상학적 탐구이며, 인도 철학의 깊이를 예고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또한, 수많은 신들을 찬양하던 그들의 사유는 점차 이 모든 다양성 뒤에 숨어 있는 어떤 단일한 근원적 실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찬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재는 오직 하나이거늘, 현자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Ekam sad viprā bahudhā vadanti)." 인드라, 아그니, 바루나 등 다양한 신들의 모습은 결국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통찰입니다. 이 생각은 훗날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브라만 (Brahman)'이라는 절대적 실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리그베다』의 찬가와 신들은 단순한 고대의 신화 모음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처음으로 세계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새벽의 기록입니다. 경이로운 자연 현상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제사라는 의례를 통해 그 신들과 관계를 맺으며 삶의 안정을 구했던 그들의 노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우주적 질서 (리타)에 대한 사유로, 그리고 마침내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질문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따라서 『리그베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이후 전개될 장대한 인도 철학의 여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1-1.2. 베다의 창조 신화: 푸루샤 숙타와 나사디야 숙타



「푸루샤 숙타, Purusha Sukta」



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과 사회의 질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리그베다』의 후기 찬가들은 더 이상 자연 현상 속의 개별 신들을 찬양하는 것을 넘어, 이 모든 존재의 기원이라는 거대한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장엄하고도 영향력 있는 신화적 대답이 바로 「푸루샤 숙타, Purusha Sukta」, 즉 ‘원인 (原人)의 노래’입니다. 이 찬가는 우주의 창조를 하나의 거대한 희생 제사 (Yajña)로 묘사하며, 그 제물의 주인공은 바로 천 개의 머리와 천 개의 눈, 그리고 천 개의 발을 가진 거인, 푸루샤 (Puruṣa)입니다. 그는 온 대지를 감싸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 그 자체입니다. 이 찬가는 단순한 창조 신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대우주)와 인간 사회 (소우주)가 하나의 신성한 질서 아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힌두교의 근본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위대한 헌장과도 같습니다.


찬가는 태초에 신 (Deva)들이 이 거대한 푸루샤를 제물로 삼아 희생 제사를 거행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제단을 차리고, 신성한 불을 피우며, 버터기름을 붓고 성스러운 주문을 외웁니다. 그러나 이 제사의 제물은 평범한 동물이나 곡식이 아니라, 우주적 존재 그 자체인 푸루샤였습니다. 그의 몸이 해체되면서, 그 몸의 각 부분으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됩니다. 그의 입에서는 제사를 집전하는 브라만 (brāhmaṇa) 계급이, 그의 두 팔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야 (kṣatriya)가, 그의 두 넓적다리에서는 생산과 상업을 담당하는 바이샤 (vaiśya) 계급이, 그리고 그의 두 발에서는 이 모든 계급을 섬기는 노동자 계급인 수드라 (śūdra)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힌두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네 가지 계급, 즉 바르나 (varṇa) 제도의 신화적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논쟁적인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사회적 분업이 단순히 인간의 약속이 아니라, 우주 창조의 신성한 행위 속에 이미 내재된 신적인 질서임을 선언합니다. 사회의 각 부분은 푸루샤의 몸의 각 부분처럼 고유한 역할과 기능이 있으며, 그 모든 부분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사회라는 유기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푸루샤의 몸에서는 사회 질서뿐만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모든 요소들이 흘러나옵니다. 그의 마음 (manas)에서는 달 (candra)이 태어났고, 그의 눈에서는 태양 (sūrya)이, 그의 입에서는 불의 신 아그니 (Agni)와 폭풍의 신 인드라 (Indra)가, 그리고 그의 숨결 (prāṇa)에서는 바람의 신 바유 (Vāyu)가 생겨났습니다. 그의 배꼽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공간 (antarikṣa)이, 그의 머리에서는 하늘 (dyau)이, 그의 두 발에서는 대지 (bhūmi)가, 그리고 그의 귀에서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 (diś)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처럼 푸루샤의 희생을 통해, 분화되지 않았던 혼돈의 상태는 비로소 질서정연한 우주로 재탄생합니다. 또한, 이 제사를 통해 동물들—하늘을 나는 것, 숲에 사는 것, 그리고 마을에서 기르는 것—이 생겨났으며,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와 같은 신성한 찬가들과 제사의 형식 자체도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푸루샤 숙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사회적 질서, 자연 현상, 동물과 인간, 그리고 종교적 의례까지도 예외 없이 단 하나의 거대한 희생 제사라는 신성한 행위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장엄하게 노래합니다. 이 찬가는 이후 브라마나 (Brāhmaṇa) 문헌에서 제사 의례의 우주적 의미를 강조하는 사상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상캬 (Sāṃkhya) 철학에서 ‘푸루샤’가 순수한 의식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씨앗이 됩니다.


「나사디야 숙타, Nāsadīya Sūkta」


그러나 『리그베다』의 사유는 이처럼 질서정연하고 긍정적인 신화적 설명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동일한 시대의 시인들은, 존재의 근원을 향해 훨씬 더 깊고, 더 근본적이며, 심지어는 두려울 정도로 정직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위대한 철학적 고뇌의 기록이 바로 「나사디야 숙타, Nāsadīya Sūkta」, 즉 ‘창조 이전의 노래’입니다. 이 짧은 찬가는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경계까지 나아가, 모든 신화적 설명을 넘어서 있는 태초의 신비를 노래합니다. 그것은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심오한 형이상학적 탐구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이후 전개될 우파니샤드 철학의 모든 위대한 통찰을 이미 그 안에 씨앗처럼 품고 있습니다.


「나사디야 숙타」는 충격적인 부정의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는 비존재 (asat)도 없었고, 존재 (sat)도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원론적인 사유의 틀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있거나’ 혹은 ‘없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태초의 상태는 그 이분법이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찬가는 계속해서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중간 공간도 없었고, 그 너머의 하늘도 없었다. 무엇이 덮여 있었는가? 어디에, 누구의 보호 아래에 있었는가? 깊고 심오한 물이 있었는가?” 이 질문들은 푸루샤 숙타가 명쾌하게 답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립니다. 하늘도, 땅도, 공간도 없었던 그 상태, 모든 것이 미분화된 혼돈 속에 잠겨 있던 그 상태를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죽음 (mṛtyu)도 없었고, 불멸 (amṛta)도 없었다. 밤과 낮을 구별하는 어떤 징표도 없었다.” 죽음과 삶, 밤과 낮이라는 모든 이원적 대립이 생겨나기 이전의 절대적인 통일성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신화 너머, 최초의 철학적 사유


그렇다면 그 절대적인 무와 혼돈 속에서, 과연 무엇이 존재했습니까? 찬가는 마침내 하나의 희미한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직 ‘그것 하나’ (Tad Ekam)만이, 자신의 내재적 힘 (svadhā)에 의해, 바람 한 점 없이 숨 쉬고 있었다. 그것 외에는 정녕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한 도약의 순간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인격신들이나 거인 푸루샤 이전에, 모든 것의 근원에는 이름도 속성도 없는 단 하나의 비인격적인 실재, ‘그것 하나’만이 있었다는 통찰입니다. 이 ‘그것 하나’는 이후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 (Brahman)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될 최초의 철학적 씨앗입니다.


찬가는 이 ‘그것 하나’로부터 어떻게 이 세계가 생겨났는지를 계속해서 탐구합니다. “태초에 어둠이 어둠에 의해 덮여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구별할 수 없는 물 (salila)이었다. 텅 빔 (ābhū)에 의해 덮여 있던 그것 하나가, 타파스 (Tapas), 즉 ‘열기’의 위대한 힘에 의해 마침내 태어났다.” 여기서 타파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열이 아니라, 고행이나 명상에서 발생하는 내면의 열기, 즉 ‘스스로를 사유하는 의지의 열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순수한 존재가 최초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창조를 향해 스스로를 불태우기 시작하는 내면의 거대한 각성이었습니다.


이 최초의 열망으로부터 ‘욕망’ (Kāma)이 생겨났습니다. 찬가는 노래합니다. “욕망이 태초에 그 위에 임했으니, 그것이 마음 (manas)의 최초의 씨앗이었다.” 이 욕망은 결코 개인적인 정념이나 결핍에서 비롯된 갈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가 ‘여럿’이 되려는 우주적인 창조의 충동이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로 펼쳐내려는 거대한 의지입니다. 현자들은 깊은 사색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존재’의 세계가 사실은 저 ‘비존재’의 심연과 깊은 친족 관계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장엄한 창조의 드라마를 묘사하던 시인은, 마침내 인간 인식의 궁극적인 한계 앞에서 멈추어 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듯이 설명하는 대신, 깊고도 겸허한 회의 (懷疑)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누가 진실로 아는가? 누가 여기서 그것을 선언할 수 있는가? 이 창조는 어디로부터 생겨났으며,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신들은 이 세계의 창조 이후에 나타났으니, 대체 누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겠는가?”


이 질문들은 힌두 사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정직하고도 용감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화적 독단과 종교적 확신을 거부하고, 인간의 앎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위대한 지성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찬가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엄한 마지막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이 창조가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 그분이 그것을 만드셨는지 아니면 만들지 않으셨는지, 저 가장 높은 하늘에서 이 모든 것을 감독하시는 그분만이 아실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분조차도 모르실 것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불가지론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가 우리의 모든 긍정과 부정, 앎과 모름의 범주를 초월해 있다는 가장 심오한 암시입니다.


이처럼 「푸루샤 숙타」가 우리에게 사회적, 우주적 질서라는 위안을 주는 청사진을 제공했다면, 「나사디야 숙타」는 그 모든 질서의 이면에 있는 불가해한 신비를 향해 우리의 지성을 열어놓은, 영원한 철학의 초대장입니다.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는 함께 어우러져, 이후 수천 년간 이어질 힌두 사상의 장대한 교향곡, 즉 질서에 대한 탐구와 신비에 대한 경외라는 두 개의 위대한 주제의 첫 번째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1-1.3. 리타 (Ṛta), 우주적 질서와 도덕


고대 베다인들은 인드라의 힘에 경탄하고 아그니의 신비에 경배했지만, 그들의 사유는 단순히 강력한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과 예측 불가능한 신들의 변덕 너머에,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근본적인 원리, 즉 거역할 수 없는 질서가 존재함을 직감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어김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계절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순환하며, 밤과 낮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리를 교체합니다. 강물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흐르고, 불꽃은 하늘을 향해 타오릅니다. 이 모든 장엄하고 흔들림 없는 규칙성 속에서, 베다의 현자들은 우주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 '리타 (Ṛta)'를 발견했습니다.


'리타'는 산스크리트어 어원상 '올바르게 움직이다', '적합하게 흐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고정된 법칙이나 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각자의 본성에 맞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흐름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폭풍우의 신 인드라조차도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근본적인 경로이자, 모든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 따라야만 하는 위대한 길이었습니다. 리타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내재된 본질적인 질서였습니다.


첫째, 리타는 우주의 물리적 질서 (Cosmic Order)로 드러납니다. 베다인들에게 우주는 혼돈스러운 힘들의 각축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주는 리타에 의해 정밀하게 운행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였습니다. 새벽의 여신 우샤스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어둠을 몰아내며 태양의 길을 예비하고, 태양신 수리야는 그 길을 따라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이러한 천체의 운행이야말로 리타의 가장 명백하고도 경이로운 증거였습니다. 『리그베다』의 찬가들은 "리타의 멍에에 묶인 말처럼" 움직이는 태양을 노래하고, "리타의 길을 따라" 흐르는 강물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리타는 천체의 운행, 계절의 순환,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모든 자연 현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보편적인 원리였습니다.


신들조차 이 질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신들의 위대함은 리타를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가장 완벽하게 수호하고 실행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리타의 수호자 (ṛtasya gopa)' 혹은 '리타 안에서 태어난 자 (ṛtajatā)'로 불렸습니다. 신들의 힘은 리타와 조화를 이룰 때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이 우주적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리타는 신들의 권능조차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더 높은 차원의 원리였던 셈입니다.


둘째, 리타는 제사 의례의 질서 (Ritual Order)를 통해 인간 세계와 연결됩니다. 고대 베다인들에게 야즈나 (Yajña)라 불리는 제사 의례는 단순히 신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물리적 질서인 리타를 지상의 인간 세계에 그대로 재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우주의 질서 유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제사 의례의 모든 절차는 리타의 원리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발음으로 만트라를 읊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마치 태양과 달이 정해진 궤도를 운행하는 것처럼 신성하고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제들이 제단을 세우고 불을 피우는 행위는 세상이 창조될 때의 우주적 질서를 재현하는 것이었고, 제물이 불 속에서 타올라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인간의 기원이 신에게 전달되는 리타의 경로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제사 의례가 리타의 원리에 따라 완벽하게 수행된다면, 그 힘은 신들을 감동시켜 인간이 원하는 바 (풍요, 건강, 승리)를 이루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의 질서 자체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인간은 제사를 통해 우주의 운행에 동참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가 잘못되면 가뭄이 들거나 재앙이 닥칠 수 있고, 제사가 올바르게 수행되면 비가 내리고 세상이 풍요로워진다는 믿음 속에는, 인간의 행위가 우주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심오한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셋째, 리타는 인간 사회의 도덕적 질서 (Moral Order)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리타 개념이 지닌 가장 위대한 철학적 도약입니다. 우주와 제단을 관통하는 이 거대한 질서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규범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리타는 자연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따라야 할 진실 (Satya), 정의 (Dharma), 올바름 (Yathātha) 그 자체였습니다. 리타의 길을 걷는 것은 진실을 말하고, 약속을 지키며, 정직하게 행동하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이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안리타 (Anṛta)'라고 불렸습니다. 안리타는 거짓, 무질서, 불의, 죄악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며,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과오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근본적인 조화를 깨뜨리고, 신성한 질서에 흠집을 내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안리타를 행한 자는 사회적 비난뿐만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응보를 피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도덕적 질서의 최고 수호자는 바로 하늘의 신 바루나 (Varuṇa)였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처럼 힘을 과시하는 전사가 아니라, 고요한 위엄으로 온 세상을 굽어보며 리타가 올바르게 실현되는지를 감시하는 우주의 주권자였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의 별이 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그의 '스파이'들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도 남김없이 보고했습니다. 바루나는 리타의 길을 벗어나 안리타의 죄를 지은 자를 자신의 보이지 않는 밧줄 (pāśa)로 묶어 벌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리는 벌은 종종 질병이나 불행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인간은 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루나에게 바치는 찬가들은 부와 명예를 구하는 다른 찬가들과는 달리, 깊은 윤리적 성찰과 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 바루나여,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당신의 법을 어겼더라도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라는 기도 속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도덕적 책임감과 절대적인 규범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인도 사상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고도로 발달된 윤리 의식의 표현이며, 인간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우주적 법칙에 의해 평가받고 심판받는다는 생각의 기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리타는 베다 시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현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불변의 질서를 향한 인류 최초의 지적 탐구였습니다. 자연의 운행에서 시작된 리타의 개념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사 의례의 원리로 구체화되었고, 마침내 인간의 양심과 사회를 규율하는 도덕적 규범으로까지 승화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리타의 개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후대 인도 사상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인 '다르마 (Dharma)'와 '카르마 (Karma)' 사상으로 그 생명을 이어갑니다.


다르마는 리타의 도덕적, 사회적 측면을 계승하여 각 개인이 마땅히 따라야 할 의무와 법, 종교적 규범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카르마는 리타의 '질서'와 안리타의 '무질서'가 각각 필연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원리를 더욱 정교화하여, 모든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질서를 사유했던 베다 현자들의 통찰은, 인도 철학이라는 장대한 강의 가장 깊고도 먼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1-1.4. 브라마나, 행위와 우주의 교감


『리그베다』의 시인들이 경이로운 자연 현상 속에서 신들을 발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우주적 질서 ‘리타 (Ṛta)’를 직감했다면, 베다 시대의 사유는 이제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바로 ‘야즈나 (Yajña)’, 즉 제사 의례의 힘을 통해 우주와 직접적으로 교감하고, 나아가 그 질서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전면에 등장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기의 사상적 특징은 베다 문헌의 두 번째 층인 『브라마나, Brāhmaṇa』 문헌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브라마나』는 『리그베다』와 같은 시적인 찬가가 아니라, 제사 의례의 구체적인 절차와 그 상징적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산문 형태의 문헌들입니다. 이 문헌들을 통해 우리는 인도 사상의 중심축이 ‘신에 대한 경배’에서 ‘제의 행위 그 자체의 힘’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전환을 목격하게 됩니다.


『브라마나』 시대의 사상가들, 즉 브라만 사제들에게 제사는 더 이상 신의 은총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기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하나의 정밀한 ‘우주적 기술 (cosmic technology)’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 행위 (Karman)가 올바르게 수행되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신들조차 이 제의의 힘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신이 제물을 받고 기뻐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집행된 제사 자체가 신들로 하여금 특정 결과를 내놓도록 강제하는 힘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들의 의지보다 제사라는 ‘행위’의 법칙성이 더 상위의 원리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유의 핵심에는 ‘반두 (Bandhu)’라는 독특한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두’는 ‘연결’, ‘상응’,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끈들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연결하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브라만 사제들은 제사 공간이라는 소우주 (Microcosm)와 광대한 자연이라는 대우주 (Macrocosm)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반두를 발견하고, 이를 체계화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단에 쌓는 벽돌의 개수는 일 년의 날수 (日數)와 상응하고, 제사에 사용되는 특정 찬가의 음절 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중간 공간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태양이 떠오르는 행위와 동일시되며, 제사 때 부르는 노래의 리듬은 계절의 순환 리듬과 조응합니다.


이러한 상응 관계를 통해, 제단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우주 전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인 힘을 갖게 됩니다. 제단에 불을 피우는 것은 혼돈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의 재현이며, 제물을 바쳐 신들을 부르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브라만 사제는 더 이상 신과 인간 사이의 소극적인 중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전문가로서, 제사라는 정교한 메커니즘을 조작하여 우주의 힘을 이끌어내고 원하는 결과를 창출하는 우주의 기술자이자 설계자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제사 의례를 극도로 복잡하고 전문적인 영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실수, 예를 들어 만트라의 억양 하나를 잘못 발음하거나 제물을 놓는 순서를 어기는 것만으로도 제사 전체가 실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주의 질서를 교란시켜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사를 정확하게 집전할 수 있는 브라만 계급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왕이나 부유한 후원자들은 브라만 사제들에게 막대한 부를 제공하며 자신들을 위한 제사를 의뢰했고, 브라만들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신비로운 지식을 통해 사회적, 종교적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브라마나』 문헌들은 제사 의례의 기원과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재해석하고 창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프라자파티 (Prajāpati)’의 창조 신화입니다. 프라자파티는 ‘만물의 주(主)’라는 의미로, 『리그베다』 시대의 여러 신들을 압도하며 『브라마나』 시대 최고의 창조신으로 부상한 존재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주의 탄생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자기희생의 드라마였음을 보여줍니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는 오직 프라자파티만이 홀로 존재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형태도 없는 광대한 공허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내가 어떻게 하면 번성할 수 있을까?”라고 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최초의 창조적 열망은 그를 스스로를 불태우는 강력한 내면의 열기, 즉 ‘타파스 (Tapas)’에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고행의 열기 속에서 그의 몸은 팽창하고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거대한 제물로 삼아 희생 제사를 거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해체함으로써 이 세계와 모든 존재, 그리고 신들까지도 창조했습니다. 그의 정신에서는 달이, 눈에서는 태양이, 그리고 숨결에서는 바람이 생겨나는 식이었습니다. 그의 흩어진 몸의 각 부분이 세상의 만물이 된 것입니다.


이 신화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세계의 창조가 희생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제사 의례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창조 그 자체와 동일한 힘을 가진다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인간이 제단 위에서 행하는 제사는, 프라자파티가 행했던 최초의 우주적 제사를 지상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제사를 통해 사제는 흩어지고 소멸해가는 창조주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으고, 우주의 닳아 없어지는 생명력을 갱신하는 우주적 기술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가 없다면 우주는 엔트로피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둘째, 세상 만물이 프라자파티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모든 존재가 신성한 기원을 공유하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반두 (Bandhu)’ 사상을 신화적으로 뒷받침합니다. 제단에 쌓는 벽돌의 개수와 일 년의 날수가 연결되고, 제사 때 부르는 찬가의 음절 수와 우주의 구조가 연결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행위 하나가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가능해집니다. 프라자파티의 신화는 이처럼 모든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몸의 일부라는, 심오한 유기체적 세계관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풀어낸 것입니다.


『브라마나』 시대는 인도 사상사에서 ‘행위 (Karman)의 철학’이 확립된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리그베다』의 신 중심적 세계관은 정교한 제사 의례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처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제사라는 강력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질서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주체로 부상했습니다. 제사의 정확한 절차와 그 속에 숨겨진 상징적 연결 (반두)에 대한 지식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유는 제사 의례를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브라만 계급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확립된 ‘행위의 힘’에 대한 깊은 사유, 즉 올바른 행위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은, 이후 모든 인도 사상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카르마 (Karma, 업)’ 사상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복잡한 제사 의례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끝없는 탐구는, 이후 제의의 외적인 형식을 넘어 그 내면적, 철학적 의미를 묻는 『아란야카』와 『우파니샤드』의 사유로 나아가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제단 위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이제 철학자들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사유의 불꽃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1.5. 아란야카, 제의에서 내면으로


베다 시대의 사상적 여정은 이제 번잡한 마을의 제사장을 떠나 고요한 숲속으로 그 무대를 옮깁니다. 『브라마나』 시대에 제사 의례가 극도로 정교화되고 그 행위의 힘이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로까지 격상되었다면, 이제 그 거대하고 복잡한 제의의 외적인 형식 너머,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 새로운 사유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사상적 전환의 기록이 바로 베다 문헌의 세 번째 층을 이루는 『아란야카, Āraṇyaka』, 즉 ‘삼림서 (森林書)’입니다. 이 문헌들은 인도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 중 하나인, 외적인 제의 중심주의에서 내면적 성찰 중심주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합니다.


『아란야카』라는 이름 자체가 그 사상적 성격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아란야 (āraṇya)’는 ‘숲’을 의미하며, 이 문헌들은 문자 그대로 숲에서 구전되고 학습되었습니다. 당시 사회 규범에 따르면, 한평생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의무를 다한 가장 (家長)은 노년에 접어들면 속세를 떠나 숲에 은거하며 (이를 임서기 (林棲期, Vānaprastha)라 부릅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숲에 들어간 이들에게는 더 이상 『브라마나』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은 복잡하고 값비싼 제물을 갖춘 대규모 제사를 거행할 물질적, 물리적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됩니다. “제물을 바치고 제단을 쌓는 외적인 행위 없이, 어떻게 제사를 계속할 수 있는가? 제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아란야카』는 이 질문에 대한 혁신적인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제사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의 내면화 (Internalization of Ritual)’를 통해 그 본질을 승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의 공간은 더 이상 인위적으로 지어진 제단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의 몸이 됩니다. 제단에서 타오르던 물리적인 불 (Agni)은 수행자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고행의 열기 (Tapas)와 명상의 불꽃으로 대체됩니다. 신들에게 바치던 곡식과 버터기름 같은 외적인 제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근원적인 행위인 ‘호흡 (Prāṇa)’과 같은 내적인 요소로 바뀝니다.


이러한 사유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프라나그니호트라 (Prāṇāgnihotra)’, 즉 ‘호흡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는 들숨과 날숨이라는 생명의 근원적인 활동이야말로 신에게 바치는 가장 완전하고도 지속적인 제물이라는 통찰입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행위, 음식을 섭취하여 생명력을 유지하는 행위, 말을 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신 작용이 곧 내면의 제단에서 우주적 생명력 (프라나)이라는 신에게 바쳐지는 신성한 제의가 됩니다. 이제 제사는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만 거행되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에 이루어지는 영속적인 내면의 실천이 됩니다. 이를 통해 제사는 브라만 사제 계급의 독점물에서 벗어나, 숲속의 은둔자는 물론 누구라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영성의 길로 확장될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아란야카』는 『브라마나』가 쌓아 올린 복잡하고 거대한 제사 의례의 성채를 해체하는 대신, 그 안으로 들어가 숨겨진 비밀의 방을 찾아내는 데 집중합니다. 그들은 제사의 모든 물리적 행위를 우의적(寓意的)이고 상징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제의의 본질이 외적인 행위가 아닌 내적인 깨달음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 위대한 정신적 전환을 가장 장엄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베다 시대 최고의 제사이자 왕의 절대적 주권을 상징했던 아슈바메다 (Aśvamedha), 즉 마사 (馬祀) 제의의 변용입니다.


본래 아슈바메다는 왕이 선택한 가장 훌륭한 말을 1년 동안 자유롭게 온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 말이 밟는 모든 영토에 대한 왕의 지배권을 선포하는 거대한 정치적, 종교적 이벤트였습니다. 1년 뒤 돌아온 말은 수백 명의 사제들이 집전하는 복잡한 의례를 통해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실제 제의는, 숲속에 은거하며 영적인 탐구에 몰두하는 현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란야카』의 현자들은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룹니다. 그들은 실제 말을 희생시키는 대신,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희생마 (犧牲馬)로 삼아 자신의 마음속에서 제사를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현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반두 (Bandhu)’ 사상을 극적으로 실천한 장엄한 내면의 관법 (觀法)이었습니다.


이 명상 속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말의 몸은 우주 그 자체와 완벽하게 동일시됩니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의 첫머리는 이 위대한 관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오, 새벽의 여명은 정녕 희생마의 머리이며, 태양은 그 눈, 바람은 그 숨결, 활짝 열린 입은 바이슈바나라 불 (Agni Vaiśvānara)이다. 시간 (年)은 희생마의 몸 (Ātman)이며, 하늘은 그 등, 중간 공간은 그 배, 땅은 그 발굽이다..."


이처럼 제사의 각 요소들을 우주적 실재의 각 부분과 연결함으로써, 사제는 더 이상 제물을 바치는 집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제단 위에서, 우주의 창조 (새벽의 여명)와 운행 (태양과 달), 그리고 해체와 재탄생의 전 과정을 온전히 관조하는 위대한 명상가가 되었습니다. 실제 피를 흘리는 희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우주의 비밀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깨달음이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 제사의 힘은 더 이상 정확한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뒤에 숨겨진 심오한 의미를 깨닫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그 무게 중심을 완전히 옮겨왔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유의 중심축이 ‘무엇을 행하는가 (Karman)’에서 ‘무엇을 아는가 (Jñāna)’와 ‘어떻게 명상하는가 (Upāsanā)’로 이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제의의 힘은 이제 정확한 행위의 반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뒤에 숨겨진 심오한 상징적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온전히 체험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행위의 효력은 지식과 명상에 의해 보증되고 완성됩니다. 『아란야카』의 현자들은 단순히 제사 절차를 암송하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비밀스러운 의미, 즉 ‘라하샤 (rahasya)’를 탐구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브라마나』 시대에 제의의 힘을 지칭하던 막연한 개념이었던 ‘브라만 (Brahman)’은 점차 그 의미가 심화되고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브라만은 이제 제사 의례의 효력을 담보하는 신비로운 힘을 넘어, 제사와 우주,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관통하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실재, 즉 우주의 절대적 원리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제의의 내면화는 곧 제의의 힘 (브라만)이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바로 ‘나’의 내면에도 존재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란야카』는 인도 사상사에서 침묵의 혁명을 이룬 문헌입니다. 그것은 『브라마나』의 제의 중심주의를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정교한 상징 체계를 그대로 가져와 그 의미를 내면으로 심화시키고, 외적인 행위를 내적인 명상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숲속의 은자들은 제단을 자신의 몸으로, 제물을 자신의 호흡으로 삼음으로써, 제사 의례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 위대한 정신적 전환은 곧이어 폭발하게 될 『우파니샤드』 철학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아란야카』가 “제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면, 『우파니샤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제의와 우주, 그리고 나의 내면을 관통하는 궁극적 실재 (브라만)의 본질은 무엇이며, 나의 참된 자아 (아트만)는 그것과 어떤 관계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단 위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아란야카』를 거치며 수행자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명상의 불이 되었고, 이제 그 불꽃은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에 의해 존재의 가장 깊은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횃불이 될 준비를 마쳤습니다.









1-1.6. 야즈나발키야의 위대한 가르침



베다 사상의 여정이 『아란야카』의 숲을 지나 마침내 철학적 사유의 정수인 『우파니샤드』의 시대에 이르면, 우리는 인도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거인 중 한 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야즈나발키야 (Yājñavalkya, 기원전 8-7세기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입니다. 그는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의 중심인물로서, 이전 시대의 제의 중심적 사고방식에 마침표를 찍고, 존재의 근원을 향한 내면적 탐구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혁명적인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등장은 흩어져 있던 철학적 사색들을 하나의 장엄한 교향곡으로 엮어낸 지휘자와 같았으며, 그의 가르침은 이후 전개될 모든 인도 철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야즈나발키야의 사상은 주로 그가 다른 이들과 나눈 극적인 대화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는 당대의 수많은 브라만 사제들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혹은 지혜를 갈망하는 왕 앞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와의 진솔한 대담 속에서 자신의 심오한 철학을 남김없이 펼쳐 보입니다. 이 대화들은 단순한 문답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치열한 지적 투쟁이자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영적인 탐험입니다.


그의 가르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힌두 철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아내 마이트레이(Maitreyī)와의 대화입니다. 야즈나발키야는 위대한 현자로서의 삶에 정점을 찍고,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숲으로 떠나 영적인 순례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남겨질 아내 마이트레이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이트레이는 단순한 재물에 만족하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눈빛에서, 그가 재물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찾아 떠나려 함을 직감했습니다. 그녀는 인류의 모든 실존적 고뇌를 담은, 단순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온 세상의 부(富)를 다 가진다 한들, 그것으로 제가 불멸(不滅)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죽음과 상실, 그리고 변화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야즈나발키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결코 그럴 수 없다(Neti)"고 답하며, 인류 정신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가르침의 문을 엽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 마이트레이여, 우리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아트만 (Ātman, 참된 자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남편을, 자식들을, 재산을,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 안의 아트만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언뜻 듣기에 매우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선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즈나발키야의 통찰은 그러한 피상적인 이기심을 넘어선, 사랑의 본질에 대한 충격적인 재해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왜 아름다운 음악을 사랑합니까? 그 음악의 음표나 리듬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음악이 우리 내면에서 불러일으키는 기쁨, 평화, 그리고 무한한 확장감, 바로 그 ‘느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충만함을 느낍니까? 그 사람의 육체나 생각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내 안에서 피어나는 완전함과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야즈나발키야가 말하는 아트만은 바로 이 모든 긍정적이고 충만한 느낌의 궁극적인 원천입니다. 아트만의 본성은 순수한 존재 (Sat)요, 순수한 의식 (Cit)이며, 순수한 환희 (Ānanda)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아내를, 자식을, 혹은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할 때 느끼는 그 기쁨과 충만함은, 사실 그 대상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을 거울삼아 우리 안에 본래부터 존재하던 아트만의 환희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통해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 우리 내면의 신성 (神性)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확인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모든 사랑과 애착의 비밀입니다. 그 근원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해 우리가 맛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 즉 아트만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행복의 원천이 그 대상에게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진짜 원천은 내 안의 아트만이며, 대상은 단지 그 스위치를 잠시 켜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멸, 즉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변화에 대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사랑의 대상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노력을 넘어, 그 모든 사랑의 근원인 아트만을 직접 아는 데 있습니다. 야즈나발키야는 말합니다. 아트만을 직접 보고, 듣고, 사유하고, 명상해야만 한다고. 아트만이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앎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야즈나발키야는 행복과 불멸의 길이 외부 세계의 재물을 쌓는 외적인 소유가 아닌, 내면의 가장 깊은 보물인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내적인 여정에 있음을 명확히 선언합니다. 그는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랑의 진정한 근원을 밝힘으로써 그 가치를 최상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야즈나발키야 철학의 또 다른 정점은 자나카 (Janaka) 왕과의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아트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 상태를 깨어있을 때 (jāgrat), 꿈꿀 때 (svapna), 그리고 깊이 잠들었을 때 (suṣupti)의 세 단계로 나누어 분석합니다. 깨어있을 때 우리의 자아는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활동합니다. 꿈꿀 때 우리의 자아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끊긴 채, 깨어있을 때의 경험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아트만의 가장 순수한 본질은 꿈도 없고 욕망도 없는 깊은 잠의 상태에서 드러납니다. 이 상태에서 개별적인 '나'라는 의식은 사라지고, 모든 분별과 대립이 사라진 절대적인 고요와 평화만이 남습니다. 야즈나발키야는 이 상태를 아트만이 모든 이원성을 넘어선 순수한 의식 (prajñāna-ghana)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깊이 껴안고 있을 때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처럼, 깊은 잠 속에서 아트만은 모든 대상과의 분리를 넘어선 순수한 지복 (至福, ānanda)의 상태에 머뭅니다. 이는 아트만이 개별적인 육체나 마음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주적이며 절대적인 실재임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궁극적 실재인 아트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야즈나발키야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네티, 네티 (Neti, Neti)’라는 독특하고도 심오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의미의 부정 (否定)의 논법입니다. 아트만은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생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트만을 정의하려는 모든 긍정적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아트만은 거칠지 않다, 미세하지 않다, 짧지 않다, 길지 않다..." 와 같이,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함으로써만 그 실체에 역설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부정의 과정은 단순히 언어적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든 것—육체, 감각, 마음, 생각, 욕망 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감으로써, 그 모든 것의 배후에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주체, 즉 순수한 관찰자로서의 아트만을 드러내려는 치열한 철학적 수행입니다. '네티, 네티'의 과정을 통해 모든 껍데기가 벗겨지고 남는 최후의 실재, 그것이 바로 아트만입니다. 그것은 파악될 수 없기에 파악되지 않으며, 소멸될 수 없기에 소멸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야즈나발키야는 이 내면의 궁극적 실재인 아트만이 바로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 (Brahman)과 다르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이 아트만이 바로 브라만이다 (Ayam ātmā brahma)." 이것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대헌장과도 같은 명제입니다.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아의 본질과,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의 본질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이 통찰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 위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에게 구원받아야 할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우주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가 됩니다.


야즈나발키야는 제의의 시대를 끝내고 철학의 시대를 연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는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을 외부 세계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는 사랑과 욕망의 본질을 파헤쳐 그 근원에 아트만이 있음을 밝혔고, 의식의 심층을 분석하여 분별이 사라진 순수한 자아의 경지를 드러냈으며, ‘네티, 네티’라는 독특한 방법론을 통해 언어와 사유를 넘어서 있는 절대 실재의 본성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안의 아트만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과 하나임을 선언함으로써, 인간 해방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도 사상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수많은 철학자와 구도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1-1.7. "그것이 바로 너다 (Tat Tvam Asi)“


야즈나발키야가 '네티, 네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칼날로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모든 것을 베어내며 궁극의 실재를 드러내려 했다면, 『찬도갸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또 다른 위대한 현자 웃달라카 아루니 (Uddālaka Āruṇi, 기원전 8-7세기에 활동했을 것이라 추정)는 가장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비유를 통해 아들 슈베타케투 (Śvetaketu)를 진리의 심연으로 이끕니다. 그는 추상적인 논증 대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다정한 대화 속에서 우주와 나의 존재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비밀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하여 아홉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선언합니다. 바로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 중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명제, "그것이 바로 너다 (Tat Tvam Asi, 탓 트밤 아시)"입니다.


이 위대한 가르침은 한 편의 짧은 드라마처럼 시작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슈베타케투’라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 밑에서 12년 동안이나 베다 경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학문을 배우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2년의 세월은 그를 지식으로 가득 채웠지만, 동시에 ‘나는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함으로도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듯 거만한 태도로 아버지를 대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웃달라카’는 아들의 학식은 깊어졌지만, 아직 진정한 지혜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자만심을 깨우쳐주기 위해 조용히 질문을 던집니다.


“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스스로 학식이 깊고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는구나. 그렇다면 혹시 스승에게서 ‘단 하나의 가르침’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느냐? 그것을 들으면 아직 듣지 못한 것까지 듣게 되고,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생각하게 되며, 알지 못했던 것까지 알게 된다는 바로 그 가르침 말이다.”


아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비결 (秘訣)’과 같은 가르침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님, 대체 그런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차분히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란다. 네가 만약 흙 한 덩어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게 되면, 세상의 온갖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들을 모두 알게 되는 것과 같단다. 항아리, 접시, 컵... 그 모든 것들의 다양한 모양과 이름은 결국 인간의 말에 의해 임시로 붙여진 것일 뿐, 그 모든 것의 변치 않는 진짜 실체는 오직 ‘흙’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계속해서 설명했습니다.


“금 한 덩어리의 본질을 알면 온갖 금으로 만들어진 팔찌와 목걸이를 모두 알게 되고, 쇠 한 덩어리 (책에서는 ‘손톱깎이’로 비유)의 본질을 알면 칼과 바늘 등 쇠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란다.”


이 비유를 통해 웃달라카는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아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즉,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세상의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해 보이는 모든 것들 (그릇, 장신구)은 결국 단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 (흙, 금, 쇠)가 잠시 다른 이름과 모양 (nāma-rūpa)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통찰입니다. 따라서 그 수많은 껍데기들을 하나하나 배우는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그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단 하나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슈베타케투는 아버지의 이 단순하고도 심오한 비유 앞에서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그동안 자신을 가득 채웠던 자만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엎드려 그 위대한 ‘단 하나의 가르침’을 청하게 됩니다.


아들 슈베타케투가 겸허히 가르침을 청하자, 아버지 웃달라카는 드디어 '모든 것을 알게 하는 단 하나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먼저 우주의 시작, 즉 앞서 비유로 들었던 '흙'이나 '금'에 해당하는 그 근원적인 실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그것 (Tat)'이라고 부릅니다.


웃달라카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 태초에는 오직 '존재 (Sat)'만이 있었단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하나뿐이었지."


여기서 말하는 '존재(Sat)'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물건이나 신처럼 구체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모양도, 색깔도, 이름도 없는, 그저 '있음' 그 자체인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모든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거대한 흙덩어리와도 같습니다.


웃달라카는 이 고요하고 유일한 '존재'가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들어냈는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고요하고 유일한 '존재'에게 어느 날 의지가 생겨났단다. '내가 많아져야겠다. 내가 여러 모습으로 태어나야겠다!'하고 스스로 원하게 된 것이지. 이 위대한 의지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는 세 가지 기본 재료가 생겨났는데, 바로 빛(불), 물, 그리고 흙(음식)이란다."


웃달라카는 이 세상의 모든 복잡하고 다양한 것들이 결국 이 세 가지 기본 재료가 서로 다른 비율로 섞여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화가가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물감으로 세상의 모든 색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저 하늘에 빛나는 태양에서부터 땅 위를 기어가는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저 태초의 유일한 '존재(Sat)'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우주 전체는, 단 하나의 실재인 '존재'가 스스로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펼쳐 보인 위대한 예술 작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의 근원인 '그것(Tat)'에 대한 설명을 마친 웃달라카는 이제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그 우주적 실재가 지금 여기에 있는 '너(Tvam)', 즉 아들 슈베타케투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일깨워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이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가슴으로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이용한 아홉 가지의 비유를 연속적으로 제시합니다.


첫 번째 비유로, 그는 꿀벌들이 여러 꽃에서 꿀을 모아 하나의 꿀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듭니다. 각기 다른 나무와 꽃에서 온 꿀 방울들은 벌통 안에서 하나로 합쳐져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단일한 꿀이 됩니다. 그 꿀 방울들은 더 이상 ‘나는 저 망고나무의 꿀이다’ 혹은 ‘나는 저 보리수나무의 꿀이다’라고 스스로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호랑이, 사자, 벌레 등 저마다 다른 이름과 형태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저 깊은 잠 속에서는 모두 근원적인 ‘존재’와 하나가 되어 자신들의 개별성을 잊는다고 아버지는 말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저 미세한 본질을 자신의 참된 자아로 삼고 있나니, 그것이 실재이며, 그것이 아트만(Ātman)이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아들이 더 깊은 설명을 청하자, 웃달라카는 두 번째 비유로,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는 강들을 가리킵니다. 그 모든 강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과 경로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다’ 그 자체가 됩니다. 바다가 된 강물들은 더 이상 ‘나는 갠지스 강이었다’ 혹은 ‘나는 인더스 강이었다’고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체들은 저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왔다가,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가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웃달라카는 세 번째 비유로, 아들에게 살아있는 거대한 나무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 이 나무의 뿌리를 치면 수액이 흘러나오지만 나무는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줄기를 쳐도, 가지를 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명, 즉 아트만이 그 전체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생명이 단 하나의 가지라도 떠나면 그 가지는 마를 것이고, 나무 전체를 떠나면 나무 전체가 마를 것이다.”


이 비유는 개별적인 육체는 죽더라도, 그 육체를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 즉 아트만은 결코 죽지 않으며 모든 것에 편재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가르침의 핵심이 반복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아들이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네 번째 비유를 듭니다. 그는 아들에게 거대한 반얀나무의 열매를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쪼개어 보라고 합니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씨앗들이 들어있습니다. 다시 그 씨앗 하나를 쪼개 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미세한 본질로부터 이 거대한 반얀나무 전체가 서 있는 것이니라.”


눈에 보이는 거대한 현상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본질에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준 뒤, 그는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가장 유명한 다섯 번째 비유는 소금의 비유입니다. 웃달라카는 아들에게 소금 한 덩이를 물에 넣고 다음 날 아침에 가져오라고 합니다. 다음 날, 소금은 물에 녹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의 윗부분, 중간, 그리고 아랫부분을 각각 맛보게 합니다. 슈베타케투는 어디를 맛보아도 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와 같이 ‘존재’는 바로 이 몸 안에 있느니라. 비록 네가 그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우주의 근원적 실재는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들어 있음을 이처럼 명백한 비유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가르침의 핵심이 반복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여섯 번째로, 웃달라카는 눈을 가린 채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 버려진 사람을 예로 듭니다. 그는 동서남북도 분간하지 못하고 소리치며 헤맬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그의 눈가리개를 풀어주고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면, 그는 마을에서 마을로 물어가며 마침내 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스승 (구루)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이 이 세상이라는 미망의 숲에서 벗어나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아트만을 아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아버지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일곱 번째로, 아버지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의식이 어떻게 근원으로 돌아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임종의 순간, 그의 말 (언어)이 마음 (생각)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마음은 다시 숨 (생명력) 속으로, 숨은 다시 빛 (체온) 속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은 지고한 실재, 즉 ‘존재’ 속으로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개별적 기능들이 결국 그것의 근원인 단일한 실재로 회귀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여덟 번째로는 죄인의 비유를 듭니다. 고대에는 죄인으로 의심받는 사람에게 뜨겁게 달군 도끼를 쥐게 하여 그의 진실성을 시험했습니다. 만약 그가 무죄하다면 그는 진실의 힘으로 보호받아 화상을 입지 않고, 유죄하다면 거짓으로 자신을 감쌌기에 화상을 입게 됩니다. 이처럼, 진실한 자아 (아트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고통에도 상처받지 않지만, 거짓된 자아 (육체와 마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고통받게 된다고 아버지는 가르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마지막 아홉 번째로, 웃달라카는 사람이 목이 마를 때 물이 불 (체온)을 이끌어 뿌리 (근원)로 데려가고, 배가 고플 때 물이 음식을 이끌어 뿌리로 데려가는 것을 예로 듭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생명 활동과 갈망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그것의 근원인 ‘존재’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의 뿌리를 알 때,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그는 가르침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홉 번째로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슈베타케투여, 그것이 바로 너다.”


이 아홉 번의 반복적인 가르침을 통해, 슈베타케투는 마침내 자신의 지식이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저 근원적인 실재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위대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 아홉 번의 반복적인 가르침을 통해 웃달라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실재 (Tat, 그것, 브라만)와, 지금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개별적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아 (Tvam, 너, 아트만)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육체나 마음, 생각, 감정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우주 전체의 본질과 다르지 않은 영원하고 순수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인간을 모든 속박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불안, 소외감은 바로 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 (Avidyā), 즉 '나'를 우주와 분리된 작고 유한한 개체라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가르침은 그 분리의 장벽이 환상임을 깨우쳐 줍니다. 내가 우주와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 개인적인 슬픔과 기쁨을 넘어선 우주적인 평화와 지복 (至福)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신이나 힘에 의존하는 구원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앎 (Jñāna)을 통해 스스로 성취하는 완전한 해방 (Mokṣa)의 길입니다. 야즈나발키야의 가르침이 지성의 최고봉에서 빛나는 별과 같다면, 웃달라카의 가르침은 우리 발밑의 대지처럼 따뜻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 동일한 진리를 속삭여 줍니다.









1-1.8. 나치케타스, 죽음에게 길을 묻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탐구는 때로는 가장 극적인 무대 위에서 펼쳐집니다. 그중에서도 『카타 우파니샤드』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 즉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교리문답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 어떻게 죽음이라는 최후의 관문마저 넘어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영적 서사시입니다. 주인공은 진지하고 용감한 소년 나치케타스 (Nachiketas)이며, 그의 스승은 다름 아닌 죽음의 신 야마 (Yama) 자신입니다.


이야기는 나치케타스의 아버지 바자슈라바사 (Vājaśravas)가 모든 재산을 신들에게 바치는 성대한 제사를 거행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아들 나치케타스는 아버지가 제물로 바치는 소들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젖을 짤 수도, 새끼를 낳을 수도 없는 것들임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는 이러한 보잘것없는 제물로는 결코 좋은 세상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제사를 온전하게 만들고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아버지, 저를 누구에게 바치실 것입니까?"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묻습니다. 귀찮음과 순간적인 분노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버럭 소리치고 맙니다.


"너를 죽음 (Yama)에게 주겠다!"


아버지의 홧김에 나온 말이었지만, 나치케타스는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인생이란 덧없이 스러지는 곡식과 같으니 약속을 어기지 마시라고 당부한 뒤, 스스로 죽음의 신 야마가 있는 곳으로 떠납니다. 그가 야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죽음의 신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습니다. 나치케타스는 브라만 손님으로서의 예를 갖추며, 음식도 물도 없이 사흘 밤낮을 묵묵히 야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사흘 뒤 돌아온 야마는 자신의 집 문전에서 굶주리며 기다린 브라만 소년을 보고 크게 놀라며 미안해합니다. 손님을 푸대접한 죄를 씻기 위해, 그는 나치케타스에게 기다린 사흘 밤에 대한 보상으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나치케타스의 첫 번째 소원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효심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분노를 풀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자신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으로 맞아주시기를 청합니다. 야마는 기꺼이 그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의 두 번째 소원은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천상 세계에 사는 이들은 늙음과 죽음, 슬픔과 굶주림의 고통이 없다고 들었다며, 그 천상 세계에 이르게 하는 ‘불의 제사 (Agni-vidyā)’의 비밀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야마는 나치케타스의 지적인 능력과 기억력을 시험한 뒤, 그의 비범함을 인정하고 불의 제사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가르쳐 줍니다. 더 나아가, 이 제사는 이제부터 ‘나치케타스의 불’이라 불릴 것이라며 그를 축복합니다.


마침내 세 번째 소원을 말할 차례가 되자, 나치케타스는 마침내 자신의 여정의 진짜 목적인, 가장 심오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두고 오랜 의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는 존재한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음의 신이신 당신께 이 진실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세 번째 소원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죽음의 신 야마조차 망설입니다. 그는 신들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미묘한 문제라며 다른 소원을 청하라고 나치케타스를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의 진실성을 시험하기 위해, 온갖 세속적인 욕망을 대신 제시하며 그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백 년의 수명을 누릴 아들과 손자들, 수많은 가축과 코끼리, 황금과 말을 구하여라. 광대한 영토의 왕이 되어 네가 원하는 모든 쾌락을 마음껏 누리거라. 아름다운 천상의 여인들과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춤을 즐기며 살아라. 죽음의 비밀만은 제발 묻지 말아다오."


그러나 나치케타스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이 모든 유혹을 거절합니다.


"오, 죽음의 신이시여! 당신이 말한 모든 것들은 내일이면 사라질 덧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든 감각의 활력을 쇠하게 할 뿐입니다. 아무리 긴 수명이라도 결국에는 찰나에 불과합니다. 말이든, 춤이든, 노래든 당신의 것으로 두십시오. 인간은 결코 재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신 야마는 나치케타스가 모든 세속적인 유혹을 뿌리친 것을 보고, 그가 진리를 담을 자격이 있는 영혼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삶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길은 ‘프레야스’, 즉 ‘즐거운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키고 유쾌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맛있는 음식, 재미있는 오락거리, 편안한 휴식, 그리고 타인에게 받는 칭찬과 인정이 모두 이 길에 속합니다.


이 길은 매우 달콤하고 매력적이어서 우리를 강하게 유혹합니다. 야마가 나치케타스에게 대안으로 제시했던 ‘온갖 세속적인 쾌락’, 즉 아름다운 여인들,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긴 수명 등이 바로 이 프레야스의 길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이 길이 주는 즐거움은 그 본질상 일시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의 즐거움은 식사가 끝나면 사라지고, 재미있는 오락 역시 끝나면 공허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야마는 어리석은 사람, 즉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 당장의 즐거움에 쉽게 빠져들어 결국에는 더 큰 고통이나 후회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눈앞의 달콤함에 이끌려 칼날에 묻은 꿀을 핥는 것과 같습니다. 혀끝의 순간적인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더 깊은 상처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 길은 ‘슈레야스’, 즉 ‘궁극적으로 좋은 길’ 또는 ‘지혜의 길’입니다. 이 길은 당장은 조금 힘들거나 재미없어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행복과 영혼의 성장을 가져다줍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공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명상, 그리고 타인을 돕는 선한 행동 등이 이 길에 해당합니다. 이 길은 당장의 감각적 쾌락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 존재에 진정으로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야마의 설명에 따르면,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잘 분별하여, 당장은 쓰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에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슈레야스의 길을 선택합니다. 나치케타스가 죽음의 신이 제안한 그 모든 화려한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오직 ‘죽음 너머의 진실’이라는 단 하나의 지혜 (슈레야스)를 끝까지 고집한 것은, 그가 바로 이 길을 선택할 줄 아는 현명한 영혼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야마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프레야스’라는 달콤한 유혹과 ‘슈레야스’라는 고귀한 부름 사이의 선택이며,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의 지혜의 수준과 삶의 궁극적인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야마는 나치케타스에게 아트만 (Ātman, 참된 자아)의 비밀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그는 인간 존재의 복잡한 구조와 영적 수행의 본질을 하나의 강력하고도 명쾌한 그림으로 보여주기 위해, 저 유명한 ‘전차의 비유’를 펼쳐 보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하나의 완전한 전차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아트만 (참된 자아)은 그 전차에 말없이 앉아 있는 주인입니다. 그는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이며 모든 여정의 이유이지만, 스스로 전차를 몰거나 말들에게 채찍질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바로 이 모든 여정의 의미입니다.


육체는 바로 그 주인이 타고 있는 전차 그 자체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길을 여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지만, 전차는 주인이 아니며 언젠가는 낡고 부서질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성 (Buddhi)은 전차의 방향을 결정하고 말을 다스리는 마부입니다. 지성은 ‘무엇이 궁극적으로 좋은 길 (슈레야스)인가’를 분별하는 지혜이자, 이 여정 전체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마음 (Manas)은 마부가 쥔 고삐입니다. 마음은 마부 (지성)의 의지를 말들 (감각)에게 전달하는 연결고리입니다. 고삐가 단단하고 튼튼해야만 마부의 미세한 통제가 말들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습니다.


감각 (Indriya)들은 전차를 끄는, 힘이 넘치고 거친 말들입니다. 눈, 귀, 코, 혀, 피부라는 다섯 마리의 말은 본능적으로 외부 세계의 즐거움을 향해 돌진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각의 대상들 (세상)은 바로 그 말들이 달리고 싶어 하는 온갖 종류의 유혹으로 가득 찬 길입니다. 아름다운 풍경, 달콤한 소리, 맛있는 음식들이 길 위에 널려 말들을 유혹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야마는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의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고통과 윤회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만약 마부 (지성)가 잠들어 있거나 분별력이 없다면, 그는 고삐 (마음)를 단단히 죄지 못할 것입니다. 고삐가 느슨해지자, 제멋대로 날뛰는 말들 (감각)은 마부의 통제를 벗어나, 길 위에 널린 온갖 자극적인 대상들 (세상)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릴 것입니다. 이 전차는 결국 길을 벗어나 진흙탕에 빠지거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 (Saṃsāra)의 세계를 끝없이 떠돌며 고통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완전한 자유와 해탈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만약 마부 (지성)가 항상 깨어 있고 현명하다면, 그는 고삐 (마음)를 굳게 잡고 말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할 것입니다. 사납지만 이제는 주인의 뜻을 따르는 잘 훈련된 말들 (감각)은, 더 이상 제멋대로 길을 이탈하지 않고 마부가 이끄는 올바른 길을 따라 순탄하게 달려나갑니다. 이 전차는 마침내 모든 여정의 궁극적인 목적지, 즉 완전한 자유와 해탈 (Mokṣa)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영적 수행이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기술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육체나 감각, 마음을 파괴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올바른 위계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분별하는 지혜의 힘, 즉 ‘붓디’를 일깨워, 날뛰는 마음과 감각을 제어하고, 그리하여 전차의 진정한 주인인 ‘아트만’이 자신의 본래적인 평화와 자유를 회복하도록 돕는 데 있음을, 이 장엄한 비유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야마 (죽음의 신)는 그 전차의 주인인 아트만의 본질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트만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무엇이 된 적도 없다. 그것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태초부터 존재해왔다. 육체가 죽임을 당할 때에도 아트만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미세한 것보다 더 미세하고, 거대한 것보다 더 거대하며, 모든 생명체의 심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이 아트만은 논리적인 추론이나 학문적 지식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다. 오직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이 고요해진 자만이, 내면의 은총을 통해 아트만의 위대함을 보고 모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가 펼쳐 보이는 위대한 드라마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소년 나치케타스는 인류 전체를 대신하여, 우리 모두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 즉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묻습니다.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죽음의 신 야마의 대답은 하나의 시험으로 시작됩니다. 그 시험은 바로 세속적 쾌락 (프레야스)과 영원한 진리 (슈레야스)라는 두 갈래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매 순간 이 두 갈래의 길 위에서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는 감각의 즐거움을 좇는 넓고 편안한 길이지만 그 끝은 공허함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궁극의 자유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길입니다.


나치케타스가 모든 쾌락의 유혹을 뿌리친 순간, 야마는 비로소 진정한 구원의 길을 열어 보입니다. 그 길은 외부의 신이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지혜의 길입니다. 내면의 지성 (Buddhi)이라는 마부가 깨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감각 (Indriya)이라는 사나운 말들을 제어하고 마음 (Manas)이라는 고삐를 굳게 쥘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질서를 회복하는 자만이 자신의 본질이 결코 죽지 않는 아트만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카타 우파니샤드』의 장엄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모든 것의 끝으로 만들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여는 문으로 만들 것입니까? 그 열쇠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음을, 이 고대의 지혜는 우리에게 속삭여주고 있습니다.









1-1.9. 브라만 (Brahman)과 아트만 (Ātman)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던졌던 수많은 질문과 탐구는 마침내 두 개의 거대한 개념 위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 하나는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브라만 (Brahman)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나'라고 부르는 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참된 자아, 아트만 (Ātman)입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위대함은 이 두 개념을 각각 심화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이 둘이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선언한 데 있습니다. 외부 세계를 향한 탐구와 내면세계를 향한 탐구가 결국 같은 목적지에서 만난다는 이 통찰은,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심오하고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을 외부의 신들이나 천상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되돌리게 한, 인식의 위대한 전환이었습니다.


'브라만'이라는 말의 기원은 베다 시대의 제사 의례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래 그것은 제사 때 읊조리는 ‘성스러운 기도’나 ‘주문 (呪文)’ 그 자체, 혹은 그 언어에 깃들어 있다고 믿어졌던 신비로운 힘을 의미했습니다. 브라만 사제들은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이 브라만을 구사함으로써 신들을 움직이고 우주의 질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현자들은 이 개념의 의미를 폭발적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들은 제사 의례라는 특정 행위에 국한된 힘을 넘어, 이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현상 세계 전체를 존재하게 하고, 유지시키며, 결국에는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근원적인 힘, 즉 궁극적인 실재 그 자체를 ‘브라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제단 위에서만 발현되는 힘이 아니라, 저 멀리 빛나는 별에서부터 발밑의 작은 풀잎 하나에 이르기까지, 우주 만물의 안과 밖에 남김없이 두루 퍼져 있는 존재의 바탕 (ground of being)이었습니다. 마치 모든 도자기가 ‘흙’이라는 본질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세상의 모든 이름과 형태 (nāma-rūpa)를 가진 것들은 브라만이라는 유일한 실재를 떠나서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이 브라만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했습니다. 그러나 브라만은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오직 유한하고 변화하는 것들만을 포착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이성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원인과 결과라는 틀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브라만은 그 모든 이름과 형태가 생겨나기 이전의 근원이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법칙마저 초월해 있는 절대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브라만을 어떠한 긍정적인 언어로 완벽하게 정의하려는 시도는, 마치 그물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야즈나발키야가 보여주었듯이, 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네티, 네티 (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유한한 속성들을 하나씩 부정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브라만은 거칠지 않으며 미세하지도 않고, 짧지도 길지도 않으며, 붉지도 기름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림자도 어둠도 아니며, 맛도 냄새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개념의 껍질을 벗겨내고 남는 절대적 침묵 속에서만 브라만의 실체가 어렴풋이 암시될 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파니샤드는 이 부정의 논법 너머에서 브라만의 본질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 또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그 실재를 어떻게든 가리키기 위해, 현자들은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운 세 가지 표현을 찾아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트-치트-아난다 (Sat-Cit-Ānanda)’입니다. 이는 브라만이 세 가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브라만이라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 자체가 바로 이 세 가지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첫째, 사트 (Sat)는 절대적인 ‘존재’ 또는 ‘있음’을 의미합니다. 브라만은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하고 영원한 실재입니다. 모든 것은 브라만 안에서 생겨나고, 브라만에 의지하여 머물며, 결국 브라만으로 돌아갑니다.


둘째, 치트 (Cit)는 순수한 ‘의식’ 또는 ‘앎’을 의미합니다. 브라만은 돌이나 흙처럼 아무런 의식이 없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순수한 앎의 빛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나며 다른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근원적인 지성 (知性)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식 활동은 이 근원적 의식의 바다에 떠오른 작은 물결과도 같습니다.


셋째, 아난다 (Ānanda)는 완전한 ‘환희’ 또는 ‘지복 (至福)’을 의미합니다. 브라만은 모든 결핍과 고통, 대립과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절대적인 평화와 기쁨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모든 기쁨의 편린들은, 이 궁극적인 브라만의 환희가 유한한 조건 속에서 희미하게 반사된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브라만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해체하는 근원이자, 모든 존재의 바탕이며, 그 본질은 순수한 존재요, 의식이요, 환희인 궁극의 실재입니다.


브라만을 향한 탐구가 우주적이고 객관적인 방향으로 향했다면, 아트만을 향한 탐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실존적이고 주관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 육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하는 이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현자들은 외부 세계로 향했던 시선을 완전히 돌려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아트만’이라는 말은 본래 ‘숨’이나 ‘생명의 기운’을 의미했지만, 점차 한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질, 즉 변하지 않는 영원한 ‘참된 자아 (True Self)’를 가리키는 철학적 용어로 발전했습니다.


현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참된 내가 아님을 하나씩 발견해 나갔습니다. 이 육체는 태어나고 자라며 늙고 병들어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니 참된 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외부 대상에 따라 끊임없이 즐거움과 괴로움 사이를 오가니 참된 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Manas)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온갖 생각과 감정들로 소용돌이치니 참된 나일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아트만이라는 진정한 주인이 사용하는 도구이거나 거주하는 집에 불과할 뿐, 아트만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아트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깨어있을 때 (jāgrat), 꿈꿀 때 (svapna), 그리고 깊이 잠들었을 때 (suṣupti)라는 세 가지 의식 상태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아트만의 본질에 접근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자아는 육체와 감각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활동합니다. 꿈꾸는 상태에서 육체는 잠들어 있지만, 자아는 마음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여 그 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활동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외부 세계도, 꿈속의 세계도 모두 사라집니다. 모든 생각과 욕망,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사라지고 오직 아무런 분별 없는 순수한 평화만이 남습니다.


현자들은 이 세 가지 상태를 모두 경험하면서도, 그 어떤 상태에도 속박되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불변의 관찰자, 즉 ‘증인 (Sākṣin)’이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깨어있음을 알고, 꿈꾸고 있음을 알며,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히 잘 잤다’고 기억하는 바로 그 순수한 주시자. 모든 경험의 배경이 되는 이 순수한 의식이야말로 바로 아트만입니다. 아트만은 전차의 주인이 마부와 말, 그리고 전차 자체의 모든 활동을 그저 지켜보는 것처럼, 육체와 마음, 그리고 감각의 모든 활동을 물들지 않고 지켜보는 내면의 주권자입니다.


마침내 우파니샤드의 철학은 그 정점에서 가장 위대하고도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인 아트만이 결국에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우주 (대우주, Macrocosm)와 개별적인 나 (소우주, Microcosm)를 관통하는 근본 원리가 다르지 않다는 이 통찰은, 이전 시대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다 (Tat Tvam Asi)”라는 웃달라카의 가르침과, “나는 브라만이다 (Aham Brahmāsmi)”, 그리고 “이 아트만이 바로 브라만이다 (Ayam Ātmā Brahma)”라는 우파니샤드의 대명제들은 모두 이 위대한 동일성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가리키고 있습니다.


물병 안에 담긴 공간과, 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공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병이라는 경계 때문에 두 공간은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 본질이 다를까요? 물병이 사라진다면, 안과 밖의 공간은 그저 하나의 공간일 뿐입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우리의 존재가 바로 이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개별적인 육체와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참된 본질, 즉 아트만은, 사실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생명, 즉 브라만과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고통받고, 외로워하며,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 (Avidyā), 즉 근본적인 착각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이 저 광대한 공간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자신을 그저 깨어지기 쉬운 작은 그릇 (육체와 마음)이라고 착각합니다.


‘나’를 이 작고 유한한 그릇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 만듭니다. 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텅 빈 그릇을 채우려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며, 다른 모든 그릇들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소외감에 잠기게 됩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불안과 욕망이라는 감옥을 만들어 그 안에 갇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에서 해탈 (Mokṣa)이란 죽어서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나 특별한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바로 브라만’이라는 완전한 앎을 통해 모든 분리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온 존재로써 체득하는 순간, 개인은 유한한 자아의 껍질을 벗고 우주적인 생명과 하나가 되며, 모든 슬픔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환희 (Ānanda)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나의 기쁨이 우주의 기쁨이 되고, 나의 숨결이 우주의 숨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브라만과 아트만에 대한 탐구, 그리고 그 둘의 궁극적 합일에 대한 통찰은 힌두 사상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이후 전개될 모든 철학적 여정의 궁극적인 귀결점입니다.









1-1.10. 케나, 앎과 무지를 넘어서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탐구가 브라만과 아트만이라는 두 거대한 실재의 궁극적 동일성을 선언하며 그 정점에 이르렀다면, 이제 우리는 그 앎의 본질 자체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 앎으로 과연 궁극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가? 『케나 우파니샤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이 짧지만 지극히 심오한 우파니샤드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질문입니다. ‘케나 (Kena)’는 산스크리트어로 ‘누구에 의해서 (By whom)?’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순수한 질문처럼, 그러나 가장 날카로운 철학적 예리함을 품고 우리 존재의 근원을 향해 돌진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생각에 잠기고,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태어난 순간, 그 첫 호흡을 내쉬게 한 것은 누구의 명령이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내뱉는 이 말들은 과연 어떤 근원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눈을 보게 하고,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드는 저 보이지 않는 주체는 과연 누구입니까?


이 질문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들을 향한 근원적인 탐구입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숨 쉰다’, ‘내가 본다’고 말하지만, 『케나 우파니샤드』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숨 쉬는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힘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다시 말해, 눈은 보는 도구에 불과한데, 그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진정한 ‘보는 자’는 누구이며,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진정한 ‘듣는 자’는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케나 우파니샤드』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힘, 모든 기능의 근원이 되는 순수한 동력(動力)의 본질을 파헤칩니다.


이 근원적인 질문에, 스승은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은 역설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귀의 귀이며, 마음의 마음이고, 말의 말이며, 또한 숨의 숨이고, 눈의 눈"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스승은 우리가 사용하는 감각기관이나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궁극적 실재, 즉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의 눈'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눈은 세상을 보는 도구일 뿐, '보는 능력' 그 자체는 아닙니다. 눈은 카메라 렌즈와 같고, 그 렌즈를 통해 이미지를 인식하는 것은 카메라 본체입니다. 스승은 바로 그 '보는 주체', 즉 카메라 본체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브라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귀의 귀'는 소리를 듣는 진정한 주체를, '마음의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는 진정한 주체를 의미합니다.


스승은 이어서 설명합니다. 눈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고, 귀는 자기 자신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역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생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무언가를 향해 작동하는 '도구(Object)'일 뿐, 그것들을 사용하고 작동시키는 '주체(Subject)'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라만은 바로 그 모든 도구들의 배후에 있는 영원한 주체입니다. 따라서 브라만은 결코 우리가 아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우리 의식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브라만은 그 모든 것을 아는 주체이기에, 결코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승이 단호하게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그곳 (브라만, 궁극적 실재)에는 눈도 이르지 못하고, 말도, 마음도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 (브라만, 궁극적 실재)을 알지 못하며, 그것(브라만, 궁극적 실재)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브라만이 존재하지 않거나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브라만은 우리가 감각과 이성을 통해 아는 모든 대상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모든 앎의 근원이 되는 실재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케나 우파니샤드』는 앎의 본질에 대한 충격적인 통찰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the known)과는 다르며, 또한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것 (the unknown) 너머에 있다.”


이 구절은 우파니샤드 사상의 정수 중 하나입니다. 브라만은 우리가 책을 통해 배우거나 지식으로 축적할 수 있는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속의 또 다른 대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즉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영적 탐구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브라만은 이 ‘앎’과 ‘모름’이라는 이원적 대립 구도 자체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앎의 근원이자 빛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태양이 다른 모든 것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을 비출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나는 브라만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의 ‘앎’은 유한한 개념의 틀 안에 브라만을 가두려는 오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는 브라만을 모른다”라고 겸허히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모든 모름을 아는 바로 그 ‘의식’ 자체임을 직관하는 자, 그가 바로 진정으로 아는 자입니다.


진정한 앎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우리 지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 너머의 순수한 의식과 하나가 되는 역설적인 체험입니다.


『케나 우파니샤드』는 이처럼 난해하고 추상적인 가르침을 독자들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후반부에서 한 편의 아름답고 상징적인 신화를 들려줍니다. 태초에 신 (Deva)들은 악마 (Asura)들과의 오랜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사실 브라만의 힘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지만, 신들은 교만한 마음에 빠져 그것이 자신들의 위대함과 능력 덕분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브라만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광휘에 싸인 경이로운 영 (Yaksha)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신들은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두려워하며, 자신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신들을 차례로 보내 그 정체를 알아보게 합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불의 신 아그니 (Agni)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존재였습니다. 그가 영에게 다가가자, 영은 “그대는 누구이며, 어떤 힘을 가졌는가?”라고 묻습니다. 아그니는 거만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아그니, 온 세상을 아는 자이다. 나는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들 수 있다.” 그러자 영은 그의 발밑에 마른 지푸라기 한 올을 놓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한번 태워보아라.” 아그니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지푸라기에 불을 뿜었지만, 지푸라기는 타오르기는커녕 작은 그을음 하나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동료 신들에게 돌아와, 저 영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아그니는 우리의 ‘말 (Vāk, 언어)’의 힘이나 소화력과 같은 생리적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언어와 지성은 세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궁극적 실재 앞에서는 지푸라기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무력한 것임을 이 비유는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바람의 신 바유 (Vāyu)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졌다고 자부했습니다. 영은 그에게도 똑같이 물었고, 바유는 “나는 바유, 하늘을 가로지르는 자이다. 나는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들어 올려 날려버릴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영은 다시 한번 그의 발밑에 지푸라기를 놓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한번 날려보아라.” 바유는 온 힘을 다해 바람을 일으켰지만, 지푸라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아그니처럼 참담한 패배감 속에서 돌아와, 저 영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고 실토합니다. 여기서 바유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숨 (Prāṇa)’의 힘, 즉 생명력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생명력은 경이롭고 강력하지만, 그것 역시 궁극적 실재가 부여한 힘일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님을 이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신들의 왕이자 가장 강력한 신인 인드라 (Indra)가 직접 나섭니다. 그는 교만과 자신감에 가득 차 영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에게 다가가는 순간, 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힘으로 정복하려는 대상은 결코 진정한 실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드라는 사라진 그 자리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신, 히말라야의 딸 우마 (Umā Haimavatī)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인드라는 개별적인 자아, 즉 ‘에고 (ego)’를 상징하며, 여신 우마는 모든 지식을 초월한 궁극의 지혜, 즉 ‘영적 직관 (Spiritual Intuition)’을 상징합니다. 인드라는 그녀에게 묻습니다. “방금 사라진 저 경이로운 영은 대체 누구였습니까?” 우마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브라만이었다. 너희가 거둔 승리는 바로 브라만의 승리였으며, 너희는 그 안에서 영광을 얻었을 뿐이다.”


이 신화를 통해 『케나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게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감각 (아그니)과 생명력 (바유), 그리고 이성적 자아 (인드라)의 힘만으로는 결코 브라만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의 힘은 모두 브라만으로부터 빌려온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만을 버리고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순간 (인드라가 망연자실하게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더 높은 차원의 지혜 (우마)가 나타나 진리를 열어 보여줍니다.


진정한 앎은 정복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은총과도 같은 것입니다. 결국 『케나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게 앎과 무지라는 이분법의 감옥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무언가를 더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모든 앎과 생각, 그리고 ‘안다’고 생각하는 자아마저도 넘어서 있는 순수한 존재의 빛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위대한 체험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지혜의 등불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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