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냐야-바이셰시카: 논리와 실재의 탐구

by 이호창

제1-2장: 냐야-바이셰시카: 논리와 실재의 탐구



1-2.1. 냐야의 논리학과 올바른 인식


우파니샤드의 깊고 직관적인 사유가 ‘궁극적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이제 인도의 지성은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 육파 철학의 여정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시작되며, 그 선두에 냐야 (Nyāya) 학파가 서 있습니다. 그들은 해탈 (Mokṣa)이라는 궁극의 목표는 결국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앎 (mithyājñāna)’을 제거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앎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것, 즉 확실한 지식의 근거와 방법을 체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냐야 학파는 지식의 이론, 즉 인식론 (Epistemology)과 논리학 (Logic)을 해탈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은, 인도 사상사에서 가장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사상 체계입니다.


냐야 철학의 심장은 ‘프라마나 (Pramāṇa)’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프라마나는 ‘올바른 인식의 수단’ 혹은 ‘타당한 지식의 근원’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떤 지식을 참되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네 가지의 믿을 만한 경로를 의미합니다. 냐야 학파는 이 네 가지 프라마나를 통과하지 않은 지식은 신뢰할 수 없는 의견이나 환상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철학적 탐구란 이 네 가지 도구를 날카롭게 벼리어, 실재와 비실재, 참과 거짓을 명명백백하게 분별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프라마나는 바로 직접지각 (Pratyakṣa), 추론 (Anumāna), 비교유추 (Upamāna), 그리고 믿을 만한 증언 (Śabda)입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근원적인 인식 수단은 직접지각 (Pratyakṣa)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이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얻는 가장 즉각적이고 명료한 앎입니다. 눈이 색깔과 형태를 보고, 귀가 소리를 들으며, 코가 냄새를 맡고, 혀가 맛을 보며, 피부가 감촉을 느끼는 이 모든 경험이 직접지각에 해당합니다. 냐야 철학은 이 당연해 보이는 과정을 매우 정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다섯 가지 외부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즐거움, 고통, 욕망, 의지 등 내면의 상태를 인식하는 여섯 번째 내부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 (Manas)’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감각과 마음을 통해 얻는 지식은 다른 어떤 추론이나 증언보다도 가장 확실한 진리의 토대가 됩니다. 하지만 냐야의 통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평범한 지각 (Laukika) 외에도,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범한 지각 (Alaukika)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눈앞의 소 한 마리를 지각할 때, 단순히 그 개별적인 '소'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소라는 보편성 (cowness)’을 함께 지각합니다. 또한, 차가운 얼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시각 정보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 ‘차가움’이라는 촉각적 속성까지도 함께 지각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더 나아가, 오랜 수행을 통해 마음의 장애물을 모두 제거한 요기 (Yogi)들은 과거와 미래, 멀리 떨어진 장소의 일들까지도 마치 눈앞에서 보듯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얻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냐야 학파는 직접지각이라는 경험의 범위를 일상적인 차원에서부터 초월적인 차원까지 확장하여 그 가능성을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두 번째 인식 수단은 냐야 철학의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평가받는 추론 (Anumāna)입니다. 추론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을 근거로, 아직 직접적으로 지각하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이끌어내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멀리 있는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연기를 근거로 ‘저 산에는 불이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여기서 ‘연기’는 이미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한 사실이며, ‘불’은 아직 지각하지 못했지만 추론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입니다. 냐야 사상가들은 이 추론 과정이 결코 자의적이거나 불확실한 짐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추론이 확실한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흔들리지 않는 보편적인 규칙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연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다’는 불변의 관계, 즉 ‘불변적 동반 관계 (Vyāpti)’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부엌이나 모닥불 등 수많은 경험을 통해 연기와 불 사이의 이 필연적인 관계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보편적 원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안개나 먼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추론은 결코 확실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냐야 학파는 이러한 추론 과정을 체계화하기 위해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 정교한 논증 형식, 즉 ‘5단 논법 (Pañcāvayava-vākya)’을 개발했습니다. 첫째, ‘저 산에는 불이 있다’ (주장, Pratijñā). 둘째, ‘왜냐하면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유, Hetu). 셋째, ‘연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불이 있다, 마치 부엌처럼’ (사례, Udāharaṇa). 넷째, ‘저 산에도 바로 그 불과 동반하는 연기가 있다’ (적용, Upanaya). 다섯째, ‘그러므로 저 산에는 불이 있다’ (결론, Nigamana). 이처럼 체계적인 논증 구조는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타인의 주장에 담긴 오류를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지성의 도구였습니다.


세 번째 인식 수단은 비교유추 (Upamāna)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과의 유사성을 통해,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대상의 이름과 그 실체의 관계를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숲에 가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 숲지기로부터 “야생소 (gavaya)라는 동물은 집에서 키우는 소와 비슷하게 생겼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후 그 사람이 숲에 들어가 집소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마주쳤을 때, 그는 숲지기의 말을 떠올리며 “아, 이것이 바로 야생소로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그가 얻은 새로운 지식은 단순히 그 동물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그가 얻은 것은 바로 ‘야생소’라는 이름과 눈앞의 실제 동물이 일치한다는 ‘이름과 대상의 관계’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동물을 눈으로 본 직접지각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숲지기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저 ‘소처럼 생긴 동물’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산에서 연기를 보고 불을 추론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추론이 보편적인 법칙에 근거하는 반면, 비교유추는 두 대상 사이의 구체적인 유사성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냐야 학파는 비교유추를 독립적인 인식 수단으로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장해나가는 섬세한 과정을 철학적으로 조명했습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인식 수단은 믿을 만한 증언 (Śabda)입니다. 이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나 경전의 말을 통해 진리를 얻는 과정입니다. 냐야 학파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추론할 수 없는 수많은 진리들은 결국 신뢰할 만한 권위자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증언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베다 (Veda)의 증언 (Vaidika)이고, 다른 하나는 신뢰할 만한 인간 전문가의 증언 (Laukika)입니다.


냐야 학파는 베다가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오류도 포함하지 않는 완벽한 진리의 원천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베다에서 말하는 천상 세계나 제사 의례의 효능, 그리고 해탈의 길과 같은 초월적인 진리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우리의 일상생활 역시 수많은 전문가들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의사의 진단을 믿고 약을 먹거나, 과학자의 이론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 모두 이 증언의 범주에 속합니다. 물론 인간의 증언은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할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의도가 없으며, 자신이 경험한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때에만 타당한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엄격한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처럼 냐야 학파는 올바른 앎에 이르는 길로서 직접적인 경험과 합리적인 추론,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전통의 권위를 모두 조화시키려는 균형 잡힌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1-2.2. 논증으로 오류를 넘어 해탈로


해질녘의 어스름 속에서, 우리는 바닥에 놓인 밧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뱀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순간, 심장은 거세게 뛰고 온몸은 공포로 굳어버립니다. 뱀이라는 환상은 실제 뱀보다 더 생생한 고통을 낳을 수 있습니다. 빛을 가져와 그것이 한낱 밧줄이었음을 명명백백하게 확인하는 순간, 공포는 안도감으로 바뀌고 비로소 완전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힌두 철학에서 해탈 (Mokṣa)의 과정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고통의 근원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잘못 보고 잘못 아는 것, 즉 ‘잘못된 앎 (mithyājñāna)’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치명적인 착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깊은 명상 속에서 직관의 섬광으로 그 빛을 언뜻 보여주었다면, 냐야 (Nyāya) 학파는 우리 손에 직접 등불을 들려주고자 합니다. 그 등불은 바로 ‘논증 (tarka)’이라는 이름의, 결코 꺼지지 않는 이성의 빛입니다. 그들은 해탈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감정의 고양이나 신비 체험이 아니라,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잘못된 앎’을 체계적으로 뿌리 뽑음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논리학과 인식론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생과 사의 고통이라는 거대한 문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가장 진지하고도 절박한 구원의 도구였습니다.


냐야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고타마 (Gotama)는 그의 저서 『냐야 수트라』의 첫머리에서부터, 철학이 결코 지적인 유희가 아님을 명확히 선언합니다. 그에게 철학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진단하고, 그것을 뿌리 뽑기 위한 가장 실천적인 의술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 (niḥśreyasa)은 바로 ‘해탈 (apavarga)’, 즉 모든 고통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리고 이 해탈은 오직 ‘올바른 앎 (tattvajñāna)’, 즉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올바른 앎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고타마는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하나의 거대하고 정밀한 ‘사유의 지도’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가지의 철학적 범주 (padārtha)입니다. 이 지도는 단순히 진리를 향한 여정의 목적지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여정을 떠나기 전 확인해야 할 필수 장비부터, 길을 찾는 방법, 동료와 대화하는 규칙, 그리고 길 위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온갖 함정과 샛길을 구별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탐구의 전 과정을 안내하는 완벽한 설명서와도 같습니다.


그 설명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무엇을, 어떻게 알 것인가 (탐구의 기본)


1) 올바른 인식 수단 (Pramāṇa, 프라마나): 진리를 알기 위한 네 가지의 타당한 방법입니다. 직접지각, 추론, 비교유추, 그리고 믿을 만한 증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2) 인식의 대상 (Prameya, 프라메야): 그 방법을 통해 마땅히 알아야 할 열두 가지 대상입니다. 참된 자아(Ātman), 육체, 감각, 마음, 지성, 고통, 그리고 해탈 등이 포함됩니다.


2. 어떻게 확신에 이를 것인가 (논증의 과정)


3) 의심 (Saṃśaya, 삼샤야):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4) 목적 (Prayojana, 프라요자나): 탐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 즉 고통의 소멸과 행복의 획득을 의미합니다.

5) 사례 (Dṛṣṭānta, 드라슈탄타): 논증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시입니다.

6) 확립된 원리 (Siddhānta, 싯단타): 토론의 기반이 되는, 특정 학파가 인정한 이론이나 공리입니다.

7) 논증의 구성요소 (Avayava, 아바야바): 주장, 이유, 사례, 적용, 결론으로 이루어진 5단 논법의 각 부분입니다.

8) 숙고적 논증 (Tarka, 타르카):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때, 가설을 세우고 그 귀결을 따져봄으로써 진실에 접근하는 간접적인 논증 방식입니다.

9) 확신 (Nirṇaya, 니르나야): 의심과 논증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3.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토론의 종류)


10) 정직한 토론 (Vāda, 바다): 스승과 제자처럼 진리를 발견하려는 순수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건설적인 토론입니다.

11) 비난적인 논법 (Jalpa, 잘파): 진리의 발견보다는 오직 승리에만 집착하여, 상대를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논쟁입니다.

12) 파괴적인 논쟁 (Vitaṇḍā, 비탄다): 자신의 주장은 내세우지 않은 채, 오직 상대방의 주장을 파괴하고 비판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소모적인 논쟁입니다.


4.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사유의 함정)


13) 논리적 오류 (Hetvābhāsa, 헤트바바사): 겉보기에는 타당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이유에 근거한 다섯 가지 종류의 논리적 허점입니다.

14) 속임수 (Chala, 찰라): 상대방이 사용한 단어의 다의성을 악용하여 그 의미를 왜곡함으로써 상대를 공격하는 언어적 기만술입니다.

15) 억지 반론 (Jāti, 자티): 본질적인 논점과는 무관한 피상적인 유비나 부적절한 반론을 통해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헛된 시도입니다.

16) 패배의 원인 (Nigrahasthāna, 니그라하스타나): 토론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거나, 토론의 규칙을 어겨 논리적으로 패배했음이 드러나는 스물두 가지의 구체적인 상황입니다.


이 위대한 탐구는 먼저 올바른 인식 수단 (pramāṇa)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는 진리를 파악하는 네 가지 타당한 방법, 즉 직접 지각, 추론, 유추,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눈으로 사물을 보는 직접 지각은 가장 기본적인 인식 수단입니다. 이어서 이 수단들을 통해 알아야 할 인식의 대상 (prameya)이 제시됩니다. 이는 자아, 육체, 감각 기관, 지성, 고통, 해탈 등 열두 가지 실재를 가리킵니다. 마치 탐험가가 지도와 나침반을 챙기듯, 이 두 범주는 진리 탐구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탐구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건전한 의심 (saṃśaya)에서 비롯됩니다. 의심은 모호함을 드러내어 더 깊은 사유를 촉발합니다. 이 의심을 해결하려는 동기는 명확한 목적 (prayojana)에서 나옵니다. 냐야 철학에서 목적은 고통의 소멸이라는 실천적 목표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사례 (dṛṣṭānta)를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불이 뜨겁다는 주장을 증명할 때, 이미 경험한 뜨거운 불꽃을 사례로 듭니다. 이러한 사례는 학파가 인정하는 확립된 원리 (siddhānta)에 기반해야 합니다. 이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를 뜻합니다.


탐구가 깊어지면 논증의 구성 요소 (avayava)가 중요해집니다. 이는 주장, 이유, 사례, 적용, 결론의 다섯 단계를 통해 생각을 체계적으로 펼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산에 불이 난다는 주장을 할 때, 연기를 이유로 들고, 부엌에서 본 연기와 불의 사례를 적용하여 결론짓습니다. 직접 증거가 없을 때는 숙고적 논증 (tarka)을 사용합니다. 이는 가설을 세우고 그 결과를 따져보는 과정으로, 잘못된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이 과정을 거쳐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확신 (nirṇaya)에 도달합니다. 확신은 의심을 완전히 해소한 상태입니다.


진리 탐구는 종종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냐야 철학은 이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건설적인 토론 (vāda)은 진리를 함께 찾는 순수한 대화입니다. 반면, 승리에만 집착하는 논법 (jalpa)은 상대를 꺾기 위한 공격적 논쟁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않고 상대만 파괴하는 논쟁 (vitaṇḍā)은 가장 낮은 형태입니다. 이 구분은 대화가 존중과 규칙 속에서 이뤄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냐야 철학은 이를 미리 경고합니다. 논리적 오류 (hetvābhāsa)는 겉으로는 타당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연기가 없는 곳에 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언어적 속임수 (chala)는 단어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억지 반론 (jāti)은 본질과 무관한 피상적 비유로 상대를 공격합니다. 마지막으로 패배의 원인 (nigrahasthāna)은 논쟁에서 논리적으로 지는 구체적 상황입니다. 이는 주장을 잊거나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열여섯 가지 범주는 단순히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장애물을 극복할지 구체적으로 안내합니다. 냐야 철학에서 논리는 해탈을 위한 빛입니다. 잘못된 앎의 안개를 걷어내어, 인간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이끕니다. 이 지혜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사고를 날카롭게 다듬어, 삶의 본질을 더 선명히 비춥니다.


냐야 사상가들이 보기에, 우리가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여 끝없는 고통을 겪는 이유는 하나의 거대한 연쇄 반응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고통의 인과 사슬을 냉철한 외과의사가 질병의 원인을 추적하듯 정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 사슬의 가장 마지막 고리는 바로 고통 (Duḥkha) 그 자체입니다. 육체적 질병, 정신적 불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원하지 않는 것을 마주하는 괴로움 등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은 태어남 (Janma)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태어나는가? 그것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행위, 즉 카르마 (Karma) 때문이며, 이 카르마를 낳는 것이 바로 선하거나 악한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활동 (Pravṛtti)입니다. 우리는 왜 그치지 않고 활동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결점 (Doṣa), 즉 애착 (rāga), 증오 (dveṣa), 그리고 어리석은 집착 (moha)과 같은 번뇌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애착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무언가를 증오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번뇌와 결점들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냐야 학파는 마침내 그 모든 문제의 뿌리를 찾아냅니다. 그것은 바로 잘못된 앎 (Mithyājñāna)입니다.


잘못된 앎이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여 인식하는 모든 종류의 무지를 의미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잘못된 앎은 바로 영원하고 순수한 의식 그 자체인 ‘참된 자아 (Ātman)’를, 일시적이고 고통으로 가득 찬 육체, 감각, 마음, 그리고 감정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 몸이라고 착각하고, ‘나’를 이 생각과 감정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고통의 모든 연쇄 반응은 자동으로 시작됩니다. 몸이 즐거워하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착각하여 그것에 애착하게 되고, 몸이 괴로워하는 것을 ‘나의’ 괴로움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증오하게 됩니다. 이 애착과 증오라는 결점은 우리로 하여금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기 위한 끝없는 활동으로 내몰고, 그 활동은 다시 카르마를 쌓아 우리를 새로운 태어남과 고통의 굴레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따라서 이 거대한 고통의 사슬을 끊는 유일한 방법은 그 첫 번째 고리, 즉 ‘잘못된 앎’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는 자연히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앎이 사라지면 마음의 결점들이 사라지고, 결점들이 사라지면 카르마를 낳는 활동이 멈추며, 활동이 멈추면 새로운 태어남이 없고, 태어남이 없으면 마침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완전한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냐야 사상가들의 논리학과 논증은 단순한 지적 도구를 넘어, 무지를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됩니다. 그들이 개발한 네 가지 올바른 인식 수단 (프라마나)과 다섯 단계의 논증 형식은, ‘자아는 육체나 마음과 다르다’는 진리를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앎의 경지로 이끌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입니다.


예를 들어, 냐야 사상가는 다음과 같이 논증을 펼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장 (Pratijñā): “참된 자아 (아트만)는 육체와는 다른 실체이다.”


둘째, 이유 (Hetu): “왜냐하면 자아는 ‘나의 것’이라는 소유격으로 인식되는 육체와는 달리, 그 모든 것을 아는 순수한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의 몸’, ‘나의 손’, ‘나의 생각’이라고 말하지, ‘내가 몸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몸과 생각을 소유하고 그것들을 아는 주체가 따로 있음을 암시합니다.


셋째, 사례 (Udāharaṇa): “소유되는 것과 소유하는 주체는 서로 다르다, 마치 집과 집주인이 다른 것처럼.”


넷째, 적용 (Upanaya): “이 육체 또한 ‘나의 것’으로 소유되고 인식되는 대상이다.”

다섯째, 결론 (Nigamana): “그러므로 육체는 그것을 소유하고 아는 주체인 참된 자아와는 다른 실체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논리적 사유와 명상, 그리고 스승 및 동료들과의 토론 (vāda)을 통해, ‘나는 몸이 아니다’라는 앎은 점차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냐야 철학은 이러한 건전한 토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 사이의 정직한 토론은 각자의 생각을 명료하게 하고 숨겨진 오류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양쪽 모두를 더 높은 이해의 차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승리에만 집착하여 온갖 궤변 (jalpa)을 늘어놓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파괴하기만 할 뿐 자신의 주장은 내세우지 않는 비겁한 논쟁 (vitaṇḍā)을 엄격하게 경계했습니다. 논증의 목적은 오직 진리를 향한 공동의 탐구여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체계적인 논증의 훈련은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만드는 온갖 감정적 편견과 지적 오류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마치 흐린 물이 담긴 그릇을 가만히 두면 흙탕물이 가라앉고 맑은 물이 드러나듯이, 올바른 논증의 실천은 우리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그 안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참된 자아의 빛이 스스로 드러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냐야 학파가 제시한, 이성의 힘으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 해탈의 피안에 이르는 장엄하고도 합리적인 길이었습니다.









1-2.3. 바이셰시카의 원자론적 실재론


우리의 발밑을 받치고 있는 이 단단한 대지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저 하늘을 채우고 있는 빛과 바람, 그리고 우리의 목을 적시는 물은 대체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나’라는 존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냐야 학파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파고들었다면, 그들과 함께 지혜의 길을 걷는 자매 학파인 바이셰시카 (Vaiśeṣika)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존재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들은 마치 정밀한 해부학자가 생명체를 조직과 세포 단위로 분석하듯, 이 복잡하고 광대한 우주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실재들로 분류하고 해체하려는 장대한 지적 탐구에 나섰습니다.


그들에게 이 세계는 결코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말하는 단일한 실재의 환영 (māy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그러나 명확하게 분류 가능한 실재적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고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이셰시카 철학은 이 세계의 실재성을 굳건히 옹호하는 철저한 다원론적 실재론 (Pluralistic Realism)입니다.


바이셰시카 학파의 창시자 카나다 (Kaṇāda)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포괄할 수 있는 몇 가지 근본적인 범주, 즉 ‘파다르타 (Padārtha)’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파다르타’는 ‘말 (pada)의 의미 (artha)’, 즉 우리가 어떤 단어를 통해 지칭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무한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는 결국 여섯 가지의 근본 범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여섯 가지 범주는 바로 실체 (Dravya), 속성 (Guṇa), 행위 (Karman), 보편 (Sāmānya), 특수 (Viśeṣa), 그리고 내재 (Samavāya)입니다. 이 여섯 개의 범주는 바이셰시카 철학의 골격이자, 세계를 이해하는 틀 그 자체입니다. 이 범주들에 대한 올바른 앎이야말로, ‘나’와 ‘나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하여 모든 고통의 근원인 잘못된 동일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해탈의 유일한 길입니다.


첫 번째 범주 : 실체 (Dravya, 드라뱌)


첫 번째 범주는 실체 (Dravya)로, 이는 여섯 가지 범주 중 가장 근본이 됩니다. 실체란 다른 모든 범주들, 즉 속성과 행위가 깃드는 바탕이자 기체 (substratum)입니다. 색깔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어떤 실체에 깃들여야 하고, 움직임이라는 행위 역시 움직이는 어떤 실체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실체가 아홉 가지라고 보았습니다. 바로 흙 (Pṛthivī), 물 (Āpas), 불 (Tejas), 바람 (Vāyu), 에테르 (Ākāśa), 시간 (Kāla), 공간 (Diś), 자아 (Ātman), 그리고 마음 (Manas)입니다. 이 아홉 가지 실체는 각각 고유한 본질을 지닌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재들입니다.


이 아홉 가지 실체 중에서도 처음 네 가지, 즉 흙, 물, 불, 바람은 바이셰시카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인 원자론 (Atomism)의 토대가 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흙덩이나 물방울, 촛불이나 바람은 모두 더 작은 부분들로 나뉠 수 있는 복합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분할의 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만약 무한히 분할이 가능하다면, 겨자씨와 태산의 크기가 궁극적으로는 같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할의 과정은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궁극적인 최소 단위에서 멈추어야만 합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 궁극의 입자를 ‘파라마누 (Paramāṇu)’, 즉 원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원자들은 영원불멸하며,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에도 존재했고 우주가 해체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흙의 원자, 물의 원자, 불의 원자, 바람의 원자는 각각 그 종류에 따라 고유한 질적 특성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흙의 원자는 냄새라는 고유한 속성을, 물의 원자는 맛을, 불의 원자는 색을, 바람의 원자는 감촉을 그 본질로 합니다. 우주가 창조될 때, 이 보이지 않는 원자들은 신의 의지 혹은 카르마의 법칙인 보이지 않는 힘 (Adṛṣṭa)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여, 먼저 두 개의 원자가 결합하여 이원자체 (Dvyaṇuka)를 형성하고, 세 개의 이원자체가 결합하여 삼원자체 (Tryaṇuka)를 형성합니다. 이 삼원자체부터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게 되며, 이러한 결합 과정이 계속되어 우리가 경험하는 항아리, 강, 촛불과 같은 거대한 대상들이 만들어집니다. 반대로 우주가 해체될 때는 이 결합의 과정이 역으로 일어나 모든 복합체가 다시 궁극의 원자 상태로 돌아갑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 실체, 즉 에테르, 시간, 공간, 자아, 마음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각각 하나이며, 모든 곳에 두루 퍼져 있는 (vibhu) 영원한 실체들입니다. 에테르 (Ākāśa)는 소리 (sound)라는 속성이 깃드는 유일한 실체입니다. 시간 (Kāla)과 공간 (Diś)은 각각 ‘이전과 이후’, ‘여기저기’와 같은 우리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틀입니다. 그리고 자아 (Ātman)는 바이셰시카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우파니샤드처럼 단 하나의 우주적 자아를 상정하지 않고, 생명체의 수만큼 무수히 많은 개별적 자아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자아들은 각각 영원하고 모든 곳에 두루 퍼져 있는 실체입니다.


여기서 바이셰시카 철학은 다른 모든 인도 사상, 특히 우파니샤드의 전통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입니다. 바로 ‘인식의 행위인 의식 (jñāna)’은 자아 (Ātman)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순수 의식 (Cit)’은 참된 자아 (Ātman)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 그 자체였습니다. 아트만은 빛을 본질로 하는 태양과도 같아서, 다른 어떤 조건 없이도 스스로 빛나는 순수한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그들에게 자아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투명하고 순수한 수정 구슬과도 같은 잠재적 실체입니다. 수정 구슬 자체는 아무런 색깔이 없지만, 그 옆에 붉은 꽃을 놓으면 붉은빛을 반사하여 마치 자신이 붉은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바이셰시카의 자아는 본래 의식이 없는 순수한 실체이지만,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만 비로소 의식이라는 속성을 일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 조건이란 바로 자아가 마음 (Manas) 및 감각기관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외부 세계의 정보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고, 그 정보가 마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아에 전달될 때, 비로소 ‘내가 본다’, ‘내가 생각한다’는 의식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연결의 사슬이 끊어지면, 자아는 다시 본래의 의식 없는 순수한 실체 상태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즐거움, 고통, 그리고 의식과 같은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현상들은, 자아라는 실체에 본래부터 내재된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연적 속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마음 (Manas)은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바이셰시카에게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각이나 감정의 총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자처럼 극히 미세한 크기를 가진 내부 감각기관입니다. 각 자아마다 이 마음이 하나씩 존재하는데, 그 크기가 원자처럼 작기 때문에 한순간에 오직 하나의 감각기관과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동시에 여러 가지를 보고 들을 수는 있지만, 한순간에 오직 하나의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바이셰시카의 설명입니다. 마음은 외부의 다섯 감각기관과 내부의 자아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전달하는, 영혼의 문지기이자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범주 :속성 (Guṇa, 구나)


바이셰시카 철학의 두 번째 근본 범주는 속성 (Guṇa)입니다. 속성은 어떤 실체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성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속성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아홉 가지 실체 중 하나에 깃들여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마치 붉은색이 장미꽃에 깃들어 있고, 단맛이 설탕에 깃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장미꽃 없는 붉은색이나 설탕 없는 단맛을 상상할 수 없듯이, 실체 없는 속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 세상의 모든 속성을 스물네 가지로 체계적으로 분류했습니다. 여기에는 색, 맛, 냄새, 감촉, 소리와 같은 감각적인 성질뿐만 아니라, 수, 크기, 개별성과 같은 양적인 성질도 포함됩니다. 또한 결합이나 분리와 같은 관계적인 성질도 속성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바이셰시카 철학의 가장 독창적이고도 급진적인 통찰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즐거움, 고통, 욕망, 혐오, 의지, 그리고 심지어 의식 (jñāna)과 같은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현상들조차 이 스물네 가지 속성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많은 힌두 철학 학파, 특히 우파니샤드의 전통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우파니샤드에서 의식 (Cit)은 참된 자아 (Ātman)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바이셰시카 학파에게 의식은 자아라는 실체에 본래부터 내재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아가 마음 (Manas) 및 감각기관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일시적으로 생겨나는 '우연적 속성'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해탈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의식이 자아의 본질이라면, 해탈한 상태에서도 자아는 무언가를 계속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바이셰시카에게 해탈이란, 자아가 육체와 마음과의 모든 결합에서 벗어나 그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 순수한 실체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탈한 자아에게는 더 이상 의식도, 즐거움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신적 고뇌는 결국 자아라는 순수한 실체에 일시적으로 달라붙은 속성에 불과하다는 이 분석적인 통찰이야말로, 모든 경험을 넘어선 완전한 평온의 상태로서의 해탈을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바이셰시카 철학의 위대한 지적 성취입니다.


세 번째 범주 : 행위 (Karman, 카르만)


바이셰시카 철학의 세 번째 근본 범주는 행위 (Karman)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악의 결과를 낳는 윤리적 행위 (카르마)가 아니라, 오직 물리적인 ‘움직임 (motion)’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그것을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첫 번째는 위로 향하는 움직임 (Utkṣepaṇa), 즉 위로 던지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공을 하늘로 던질 때의 움직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는 움직임 (Avakṣepaṇa), 즉 아래로 내리는 행위입니다. 나뭇가지에서 과일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낙하 운동이 여기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수축 (Ākuñcana)입니다. 손을 쥐어 주먹을 만들거나, 천이 구겨지는 것과 같은 안으로 오그라드는 움직임입니다.


네 번째는 팽창 (Prasāraṇa)입니다. 주먹을 다시 펴거나, 꽃잎이 벌어지는 것처럼 밖으로 펼쳐지는 움직임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앞의 네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움직임 (Gamana)입니다. 사람이 걷거나,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수평적인 이동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행위 역시 속성 (Guṇa)과 마찬가지로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움직임은 반드시 그것이 일어나는 바탕, 즉 실체 (Dravya)에 의존해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날아가는 행위는 새라는 실체가 있어야만 가능하고, 떨어지는 행위는 과일이라는 실체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움직임은 있으나 움직이는 것이 없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바이셰시카 철학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움직임’이라는 현상조차도 철저하게 분석하고 분류합니다. 이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해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아(Ātman)와 자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올바른 앎의 시작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범주 : 보편 (Sāmānya, 사마냐)


바이셰시카 철학의 네 번째 근본 범주는 보편 (Sāmānya)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사물을 인식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합니다. 우리가 길에서 수많은 개별적인 소들을 마주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소들은 저마다 색깔도, 크기도, 모양도 모두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다른 존재들을 ‘소’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동일한 종류의 동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바이셰시카 학파는, 그것이 단순히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편리한 분류나 개념이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각각의 개별적인 소 안에, 그 소를 ‘소’이게끔 만드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 즉 ‘소다움 (cowness)’이라는 보편적 실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소다움 또는 소로 있음’이라는 보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소 안에 동일한 형태로 내재해 있습니다. 개별적인 소들은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지만, ‘소로 있음’이라는 보편적 실재는 결코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소를 보고 그것이 ‘소’임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마음이 그 소 안에 내재된 영원한 ‘소로 있음’이라는 보편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이셰시카에게 보편은 단순히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자들 속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무질서한 개별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 보편이라는 보이지 않는 틀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명확히 이해하고 범주화하는 것은, 결국 참된 자아(Ātman)와 자아가 아닌 것을 구별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바이셰시카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섯 번째 범주 : 특수 (Viśeṣa, 비셰샤)


다섯 번째 범주는 바이셰시카 철학의 이름이 유래한 특수 (Viśeṣa)입니다. 이 개념은 앞서 살펴본 보편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개별성의 비밀을 묻습니다. 보편이 서로 다른 개체들을 ‘같음’으로 묶어주는 원리였다면, 특수는 모든 것이 동일해 보이는 그 마지막 지점에서 ‘다름’을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흙의 원자들은 ‘흙’이라는 동일한 보편성 아래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며 동일한 범주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흙 원자와 저 흙 원자를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까? 무엇이 수많은 영혼들을 각각 고유한 ‘나’와 ‘너’로 구별하게 하는 근원적인 차이입니까?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각각의 영원한 실체 (원자, 자아, 시간, 공간 등) 안에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특수성’, 즉 다른 어떤 것과도 공유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본질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특수’는 색깔이나 모양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성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한 두 실체를 궁극적으로 구별해주는, 보이지 않는 개별화의 원리입니다.


나의 자아 (Ātman)가 다른 모든 무한한 자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의 자아 안에 나만의 고유한 ‘특수’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이셰시카 철학은 세계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그 최종적인 귀결점인 ‘특수’를 통해 모든 개별 존재의 절대적인 고유성과 존엄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다름’을 명확히 아는 것은, 참된 자아 (Ātman)와 자아가 아닌 것을 철저히 분별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바이셰시카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와 깊이 연결됩니다.


여섯 번째 범주 : 내재 (Samavāya, 사마바야)


마지막 여섯 번째 범주는 내재 (Samavāya)입니다. 이 개념은 세상의 사물들이 서로 맺는 ‘관계’ 그 자체 또한 하나의 독립적인 실재 범주로 파악한 바이셰시카 철학의 정교함을 보여줍니다. 내재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분리 불가능하게 (inseparable) 묶여 있는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관계를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책이 놓여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바이셰시카 학파는 ‘결합 (Saṃyoga)’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결합 관계의 특징은 그것이 일시적이고 분리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책상에서 책을 치울 수 있으며, 그렇게 해도 책상이나 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항아리와 그 항아리의 붉은색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항아리에서 붉은색만을 분리해 낼 수 없습니다. 붉은색을 없애면 그것은 더 이상 그 항아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소와 그 소를 ‘소’이게끔 만드는 보편적 본질인 ‘소다움 (cowness)’의 관계 또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실체와 그것의 속성/행위, 보편과 그것이 깃든 개별자, 전체와 그것의 부분처럼, 서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 필연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바이셰시카 학파는 ‘내재’라고 불렀습니다.


결합이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가 맺는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관계라면, 내재는 하나의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 안에 본질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내부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이처럼 관계의 종류까지도 명확히 구분하고 범주화하는 바이셰시카의 분석적인 태도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그들의 철학적 목표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바이셰시카 (Vaiśeṣika) 학파가 설명하는 해탈


바이셰시카 철학은 이 세계를 실체, 속성, 행위, 보편, 특수, 내재라는 여섯 가지의 근본 범주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해부합니다. 그들이 그린 세계는 신비로운 환영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수많은 요소들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정교하고 분석적인 철학 체계에서 해탈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어떤 신비 체험이나 황홀한 합일의 상태가 아닙니다. 바이셰시카에게 해탈이란, 바로 이 여섯 가지 범주에 대한 명확하고 분석적인 앎 (tattvajñāna)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참된 자아 (Ātman)가 다른 모든 범주들, 즉 나를 둘러싼 몸과 마음, 감각, 그리고 외부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실체임을 철저하게 깨닫는 지적인 과정입니다.


이 올바른 앎은 우리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을 뿌리 뽑는 힘을 가집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순수한 실체인 자아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몸과 마음의 상태, 즉 즐거움, 고통, 욕망, 혐오와 같은 일시적인 속성들을 ‘나의 것’이라고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석적인 지혜를 통해 자아가 이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의 원인이 되는 다른 것들과 동일시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비(非)동일시의 상태는 새로운 카르마가 쌓이는 것을 멈추게 합니다. 마침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모든 카르마가 현재의 삶을 통해 모두 소진되었을 때, 자아는 더 이상 새로운 육체와 마음을 받아 윤회해야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죽음의 순간, 자아는 마침내 육체와 마음이라는 마지막 결합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이 해탈의 상태에서 자아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됩니까? 여기서 바이셰시카 철학은 다른 모든 인도 사상과 구별되는 가장 급진적인 결론을 제시합니다.


의식, 즐거움, 고통을 포함한 모든 속성들은 자아가 마음 및 감각과 결합했을 때만 일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그 결합이 완전히 끊어진 해탈의 상태에서 자아는 그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 순수한 실체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천상의 기쁨이나 지복(至福)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경험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절대적인 평온의 상태입니다. 의식조차도 하나의 속성으로 간주되기에, 그곳에는 ‘내가 해탈했다’고 아는 의식마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이셰시카가 그리는 궁극의 구원은 이처럼 모든 경험의 가능성이 사라진, 완전하고도 영원한 고요함입니다.









1-2.4. '다름 (viśeṣa)'으로 파악하는 사물의 본질


우리가 손에 쥔 두 개의 모래알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이 질문은 언뜻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나는 여기 있고 다른 하나는 저기 있으며, 그 모양과 크기가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두 모래알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 즉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두 개의 영원한 흙의 원자 (paramāṇu)였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두 원자는 모두 ‘흙’이라는 동일한 보편성 (sāmānya)을 공유하며, ‘실체 (dravya)’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합니다. 그 둘의 근본적인 속성 (guṇa) 역시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원자 A를 원자 A로 만들고, 원자 B를 원자 B로 만드는가? 무엇이 이 둘을 별개의 고유한 존재로 만드는 근원적인 차이인가? 이 질문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개별성 (individuality)의 비밀을 묻고 있으며,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이셰시카 (Vaiśeṣika) 학파는 그들의 가장 독창적이고도 심오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학파의 이름이 유래한 핵심 개념, ‘특수 (Viśeṣa)’입니다.


바이셰시카 학파가 제시한 여섯 가지 실재의 범주—실체, 속성, 행위, 보편, 내재, 그리고 특수—중에서, 앞의 다섯 가지만으로는 이 궁극적인 개별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실체, 속성, 행위는 모두 여러 개체에 의해 공유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보편’은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 다른 개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주는 동일성의 원리입니다. ‘내재’는 실체와 속성처럼 서로 다른 범주들이 어떻게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관계의 원리일 뿐, 개별 실체의 고유성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복합적인 사물들, 예를 들어 두 개의 항아리는 그것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배열 방식이나 수, 혹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공간적 규정과 복합적 구조가 사라진 가장 근원적인 차원, 즉 영원하고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실체들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그들을 구별하는가? 두 개의 다른 영혼 (ātman)은 모두 영원하고 모든 곳에 두루 퍼져 있는 실체인데, 무엇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가?


바이셰시카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특수 (viśeṣa)’라는 여섯 번째 범주를 꺼내 듭니다. ‘비셰샤’는 ‘특수성’, ‘특이성’, ‘궁극적 차이’를 의미하며, 다른 어떤 것과도 공유되지 않는, 오직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다른 속성들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성질이 아닙니다.


이 ‘특수’라는 원리는 아무 사물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영원하고 단순하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적인 실체들 안에만 존재합니다. 바이셰시카 철학이 말하는 이러한 영원한 실체들이란, 먼저 네 종류의 원자, 즉 흙, 물, 불, 바람의 원자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원자로 구성되지 않은 나머지 다섯 가지 실체들, 즉 에테르, 시간, 공간, 자아, 그리고 마음 또한 여기에 해당합니다.


‘특수’는 바로 이 아홉 가지 실체들 안에만 분리 불가능한 관계 (samavāya, 내재)로 깃들어 있는 궁극적인 개별화의 원리입니다. 일반적인 복합체 사물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지만,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이 영원한 실체들은 바로 이 ‘특수’ 때문에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흙의 원자들은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특수’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 ‘특수’ 때문에 각각의 원자는 다른 모든 흙의 원자들과 영원히 구별되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됩니다. 나의 자아 (ātman) 역시 나만의 고유한 ‘특수’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모든 무한한 자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나’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특수’라는 개념은 몇 가지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한 두 실체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물의 보이지 않는 주민등록번호와도 같아서,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두 존재에게 절대적인 고유성을 부여합니다.


둘째, 이 ‘특수’는 우리의 평범한 감각으로는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시공간적 형태를 초월해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오랜 수행을 통해 마음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완벽한 인식 능력을 얻게 된 요기 (yogi)들만이, 그들의 신비로운 직관 (yogaja-pratyakṣa)을 통해 이 궁극적인 개별성의 원리를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이셰시카 철학이 철저한 분석과 논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종적인 진리의 확인은 결국 내면의 영적 수행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이셰시카 철학이 지닌 가장 중요한 논리적 통찰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 의해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붉은색이라는 속성은 푸른색이라는 다른 속성에 의해 구별되고, 소라는 보편은 말이라는 다른 보편에 의해 구별됩니다. 그렇다면 이 ‘특수’ 자체는 무엇에 의해 구별되는가? 원자 A의 특수와 원자 B의 특수는 어떻게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되는가? 만약 이 특수들을 구별하기 위해 또 다른 특수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무한히 계속되는 과정 (anavasthā, 무한소급)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바이셰시카 사상가들은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특수’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구별하는 (svato-vyāvartaka)’ 고유한 성질을 지닌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특수’는 구별되는 동시에 구별하는 원리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차이의 근원이 되는 최종적인 차이이므로, 더 이상 다른 무언가에 의해 설명될 필요가 없는 궁극적인 실재입니다. 이것은 논리적 분석의 마지막 종착역이자, 모든 개별 존재가 자신의 고유성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하는 형이상학적 보증서와도 같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추상적이고 미묘한 ‘특수’의 개념이 해탈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이셰시카 학파에게 이 관계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중요합니다. 고통의 근원은 결국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으로, ‘나’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는 잘못된 앎 (mithyājñāna)에 있습니다. 즉, 영원하고 순수한 실체인 참된 자아 (ātman)를, 일시적이고 변화무쌍한 육체, 감각, 마음, 그리고 외부 세계와 혼동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자아와 자아 아닌 것을 명확하고 철저하게 분별하는 올바른 앎 (tattvajñāna)을 얻는 것입니다. 바이셰시카가 제시한 여섯 가지 범주는 바로 이 올바른 앎을 얻기 위한 정밀한 지적 도구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특수’에 대한 앎은 그 정점을 이룹니다. ‘나의 자아’가 단순히 육체나 마음과 다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무한한 자아들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고유한 ‘특수’를 지닌 유일무이한 실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자아를 모든 관계와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그 순수한 독립성을 회복하게 합니다. ‘나’는 다른 어떤 것과도 섞일 수 없는 절대적인 개별 존재라는 이 철저한 자각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뇌가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궁극적인 방어막이 됩니다. 이 올바른 앎을 통해 새로운 카르마가 쌓이는 것을 멈추고, 과거의 모든 카르마가 소진되었을 때, 자아는 마침내 육체와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그 어떤 속성도 없는 순수한 실체로서의 고독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바이셰시카 철학은 ‘다름’이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그 최종적인 귀결점인 ‘특수’를 통해 모든 개별 존재의 절대적인 존엄성과 해방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위대한 지적 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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