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상캬-요가: 이원론과 마음의 제어

by DrLeeHC

제1-3장: 상캬-요가: 이원론과 마음의 제어


1-3.1. 상캬, 순수의식과 근원물질의 이원론



우리가 이 세계를 경험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의 대상이 되는 ‘보이는 세계’입니다. 산과 강, 나무와 돌, 타인의 육체와 나의 육체, 그리고 심지어는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까지, 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객관적인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 변화무쌍한 현상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보는 자’, 즉 경험의 주체인 순수한 의식입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나’라는 의식의 빛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 체계 중 하나로 알려진 상캬 (Sāṃkhya)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이 우주와 우리의 모든 경험이 결코 하나의 실재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영원한 원리가 상호 작용하며 펼쳐내는 장대한 드라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두 원리가 바로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 (Puruṣa)와, 모든 물질세계의 근원이 되는 프라크리티 (Prakṛti)입니다. 상캬 철학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우리가 왜 고통받으며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먼저, 푸루샤는 순수한 의식 (cit)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속성도, 형태도, 활동도 없는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투명한 빛과도 같습니다. 푸루샤는 결코 무언가를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고요한 존재의 빛으로 인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어두운 방을 비추는 등불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에 관여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비추기만 하는 것처럼, 푸루샤는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현상들을 아무런 판단이나 개입 없이 그저 지켜보는 영원한 관객 (sākṣin)이자 증인입니다. 그것은 즐거움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 (kaivalya)의 상태에 있습니다.


여기서 상캬 철학은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습니다. 우파니샤드가 우주에 단 하나의 궁극적 자아 (Ātman)가 존재한다고 본 것과 달리, 상캬 학파는 이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무한한 수의 푸루샤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푸루샤가 단 하나뿐이라면, 한 사람이 해탈을 얻었을 때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동시에 해탈해야만 한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각자의 출생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 해방의 경험이 모두 다른 이유는, 바로 우리 각자가 고유한 푸루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상캬 철학은 각 개인의 실존적 독립성을 끝까지 옹호하는 철저한 다원론의 입장을 취합니다.


푸루샤가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수동적인 의식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모든 변화와 활동의 근원인 프라크리티가 있습니다. 프라크리티는 ‘근원 물질’, ‘자연’ 등으로 번역되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 세계의 유일한 뿌리입니다. 그것은 푸루샤와는 정반대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식이 없으며 (acit), 끊임없이 변화하고 활동하는 역동적인 실체입니다. 우리가 보는 산과 나무, 느끼는 바람, 그리고 우리 마음속의 생각과 감정, 심지어는 지성 (buddhi)과 자아의식 (ahaṃkāra)까지도 모두 이 단 하나의 프라크리티에서 전개되어 나온 것들입니다. 프라크리티는 마치 온갖 종류의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찰흙 덩어리와도 같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태가 없지만, 모든 형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 없는 프라크리티는 어떻게 이토록 정교하고 다채로운 우주를 펼쳐낼 수 있는가? 상캬 철학은 프라크리티가 세 가지의 근원적인 힘 또는 성질, 즉 구나 (Guṇa)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구나’는 문자적으로 ‘밧줄의 가닥’을 의미하며, 이 세 가닥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우주 만물을 엮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 구나는 바로 사트바 (Sattva), 라자스 (Rajas), 타마스 (Tamas)입니다.

사트바는 조화, 순수, 가벼움, 밝음, 앎, 그리고 즐거움의 성질입니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호수의 수면과도 같으며, 지성의 빛과 평온함을 드러내는 힘입니다.

라자스는 활동, 격정, 움직임, 욕망, 그리고 고통의 성질입니다. 그것은 쉬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이나 휘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으며, 모든 변화와 투쟁을 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타마스는 무거움, 어둠, 나태, 무지, 그리고 무관심의 성질입니다. 그것은 모든 활동을 가로막는 단단한 바위나 모든 것을 뒤덮는 어둠과도 같으며, 혼란과 타성을 낳는 힘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구나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평화롭고 명료하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사트바가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야망에 불타 잠시도 쉬지 못한다면, 그것은 라자스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무기력과 혼란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타마스의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구나는 마치 등불의 심지와 기름, 그리고 불꽃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투쟁합니다.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 즉 프라크리티가 아직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은 원초적 상태에서는 이 세 구나가 완벽한 균형과 평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고요한 균형 상태가 바로 우주의 밤입니다.


우주의 창조, 즉 이 장대한 드라마의 시작은 바로 두 주인공, 푸루샤 (Purusa)와 프라크리티 (Prakṛti)가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활동이 없는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는 결코 프라크리티를 향해 먼저 다가가지 않으며, 의식이 없는 역동적인 물질인 프라크리티는 푸루샤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상캬 철학은 이 신비로운 상호작용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름다운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런 색깔이 없는 투명한 수정 (푸루샤) 가까이에 붉은 꽃 (프라크리티)을 놓았을 때와 같습니다. 수정 그 자체는 결코 붉게 물들지 않지만, 꽃의 붉은빛을 반사하여 마치 자신이 붉은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 비유는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활동과 고통에 직접 참여하거나 물들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경험을 자신의 것인 양 비추게 되는 ‘잘못된 동일시’의 비극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것은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 (푸루샤)가 보지 못하는 장님 (프라크리티)의 어깨 위에 올라탄 것과도 같습니다. 절름발이는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장님은 움직일 수는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힘을 합치면, 절름발이는 길을 가리키고 장님은 그 지시에 따라 걸음으로써 함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두 원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필수적인지를 보여줍니다.


푸루샤의 의식이라는 빛이 없다면 프라크리티의 모든 활동은 맹목적이고 무의미하며, 프라크리티의 활동이라는 무대가 없다면 푸루샤의 의식은 비출 대상이 없어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습니다. 의식 (푸루샤)은 경험할 세상 (프라크리티)이 필요하고, 세상 (프라크리티)은 그것을 인식해 줄 의식 (푸루샤)이 필요합니다. 이 둘이 만날 때 비로소 '경험'이라는 우주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는 어떤 의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필연적인 이끌림의 결과입니다. 푸루샤의 순수한 의식의 빛이 프라크리티 위에 그저 비추어지는 것만으로, 혹은 그저 가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프라크리티 내부를 구성하는 세 가지 힘 (구나, Guṇa), 즉 사트바 (Sattva), 라자스 (Rajas), 타마스 (Tamas)의 완벽한 균형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거대한 자석 (푸루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쇳가루 (프라크리티)를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이 비접촉적인 상호작용이 바로 우주적 전개 (sarga)의 첫 번째 동력이 됩니다.


프라크리티의 고요한 균형이 깨지면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하고 미세한 원리인 마하트 (Mahat) 또는 붓디 (Buddhi), 즉 ‘위대한 자’ 또는 ‘우주적 지성’입니다. 이것은 프라크리티의 세 가지 힘 중 순수성과 조화의 힘인 사트바가 가장 우세하게 발현된 것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결정하며 알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입니다. 그것은 푸루샤의 순수한 빛을 처음으로 반사하는, 우주에서 가장 맑고 거대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 우주적 지성이라는 거울 위에서, 개별화의 원리인 아함카라 (Ahaṃkāra), 즉 ‘나를 만드는 것’ 또는 ‘자아의식’이 생겨납니다. 아함카라는 우주적인 것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누는 분리의 원리이며, 모든 개별적 경험의 토대가 됩니다. ‘내가 존재한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모든 생각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아함카라는 다시 세 가지 힘의 우세에 따라 세 갈래의 다른 길로 자신을 전개시킵니다.


순수성의 힘인 사트바가 우세한 아함카라에서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데 필요한 내적인 도구들이 생겨납니다. 여기에는 외부 정보를 종합하고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내면의 감각기관인 마음 (Manas)이 포함됩니다. 또한,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 인식 기관 (Jñānendriya), 즉 듣는 귀, 만지는 피부, 보는 눈, 맛보는 혀, 냄새 맡는 코의 잠재적 능력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외부 세계에 작용하는 다섯 가지 활동 기관 (Karmendriya), 즉 말하는 입, 잡는 손, 걷는 발, 생식과 배설을 담당하는 기관들의 잠재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열한 가지는 모두 미세하고 정신적인 차원의 원리들입니다.


반면에, 무거움과 어둠의 힘인 타마스가 우세한 아함카라에서는, 물질세계의 근원이 되는 다섯 가지 미세한 원소 (Tanmātra)가 생겨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의 근원이 되는 순수한 감각적 본질, 즉 소리의 본질, 감촉의 본질, 형태의 본질, 맛의 본질, 그리고 냄새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전개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원리인 라자스입니다. 라자스의 힘이 없다면 사트바의 산물들은 현실화될 수 없고, 타마스의 산물들은 잠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다섯 가지 미세한 원소들로부터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다섯 가지 거친 원소 (Mahābhūta)가 차례로 생겨납니다. 소리의 본질로부터는 공간과 소리를 전달하는 에테르가, 감촉의 본질로부터는 움직임의 원리인 바람이, 형태의 본질로부터는 빛과 열의 원리인 불이, 맛의 본질로부터는 유동성의 원리인 물이, 그리고 냄새의 본질로부터는 단단함의 원리인 흙이 나타납니다. 이 다섯 가지 거친 원소들의 조합을 통해, 마침내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이 물질세계가 완성됩니다.


이처럼 상캬 철학은 단 하나의 의식 없는 근원 물질인 프라크리티로부터,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의 현존이라는 계기를 통해, 지성과 자아의식, 마음과 감각기관, 그리고 미세한 원소와 거친 원소에 이르기까지, 총 스물세 가지의 원리들이 질서정연하게 전개되어 나오는 장대한 우주 진화론을 제시합니다.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의 유일한 목적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 모든 드라마를 통해, 영원한 관객인 푸루샤가 마침내 ‘나는 저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본래적인 자유를 회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상캬 철학이 그린 우주는 영원하고 순수한 관객인 무한한 수의 푸루샤들 앞에서, 의식은 없지만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단 하나의 프라크리티가 펼치는 거대한 연극 무대와도 같습니다. 프라크리티는 마치 무용수가 관객을 위해 춤을 추듯이, 푸루샤의 해방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을 온갖 형태로 펼쳐 보입니다.


이 모든 우주적 전개의 목적은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모든 변화와 활동을 남김없이 경험하고, 마침내 ‘나는 저 춤추는 무용수가 아니라, 그 모든 춤을 그저 지켜보는 순수한 관객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고통은 바로 이 둘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되며, 해탈은 이 둘을 명확히 분리하는 데서 찾아옵니다.










1-3.2. 혼동과 분리, 고통과 해탈의 원리


상캬 철학이 펼쳐 보이는 우주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만약 푸루샤가 영원히 자유롭고, 어떤 활동도 하지 않으며, 고통과 쾌락을 초월한 순수한 관객이라면, 그리고 프라크리티가 의식 없는 물질로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대체 이 ‘고통’이라는 경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순수한 자는 고통을 겪을 수 없고, 물질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데, 왜 ‘나’는 고통스러워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상캬 철학의 대답은 단호하고 명료합니다. 고통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치명적인 ‘착각’이자 ‘혼동’에서 비롯된 환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프라크리티의 변화와 활동을 바로 ‘나의 것’이라고 잘못 동일시하는 비극적인 오류에서 시작됩니다. 이 근본적인 무지, 즉 ‘분별하지 못함 (aviveka)’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어머니이자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유일한 힘입니다.


이 비극적인 혼동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상캬 철학은 수정 (水晶)의 비유를 듭니다. 투명하고 무색인 수정 구슬 그 자체는 아무런 색깔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수정 가까이에 붉은 히비스커스 꽃을 놓으면, 수정은 마치 자신이 붉은 것처럼 선명한 붉은빛을 반사합니다. 수정은 결코 붉게 물들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붉은 수정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투명한 수정은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이며, 붉은 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프라크리티의 산물, 즉 우리의 지성 (buddhi), 자아의식 (ahaṃkāra), 그리고 마음 (manas)입니다.


푸루샤는 그 자체로는 어떤 경험도 하지 않으며, 즐거움이나 고통,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어떤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푸루샤의 순수한 빛이 지성이라는 거울 위에 비추어질 때, 마치 수정이 꽃의 색을 반사하듯, 푸루샤는 지성의 모든 상태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반사하게 됩니다. 지성이 프라크리티의 세 가지 구나 (guṇa)의 작용에 따라 쾌락 (사트바의 작용)을 경험하면, 지성에 반사된 푸루샤의 의식은 “내가 즐겁다”라고 착각합니다. 지성이 고통 (라자스의 작용)을 경험하면, 그 의식은 “내가 고통스럽다”라고 착각합니다. 지성이 혼란과 무기력 (타마스의 작용)에 빠지면, 그 의식은 “나는 어리석고 혼란스럽다”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속박 (bandha)의 본질입니다. 속박은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가 실제로 밧줄에 묶이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상캬 철학은 이 관계를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에 비유합니다.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푸루샤는 객석에 고요히 앉아 있는 관객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활동하는 프라크리티는 무대 위에서 온갖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배우 (프라크리티)는 무대 위에서 기쁨에 웃고, 슬픔에 울며, 분노로 싸웁니다. 관객 (푸루샤)은 이 연극에 너무나도 깊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이 그저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는 배우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느끼고, 배우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착각합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고통받을 때, 관객은 객석에 안전하게 앉아 있으면서도 “내가 고통스럽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박의 실체입니다. 관객은 단 한 순간도 무대 위로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그는 배우의 운명에 실제로 엮인 것이 아닙니다. 속박이란 이처럼, 순수한 관조자인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모든 활동과 상태를 바로 ‘나의 것’이라고 잘못 동일시하는 깊은 인식의 착각입니다.


푸루샤는 결코 고통받지 않습니다. 고통을 겪는 것은 오직 프라크리티의 산물인 지성과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근접성 때문에 발생하는 깊은 혼동으로 인해, 푸루샤는 이 모든 고통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푸루샤는 결코 고통받지 않습니다. 고통을 겪는 것은 오직 프라크리티의 산물인 지성과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근접성 때문에 발생하는 ‘반사’ 현상으로 인해, 푸루샤는 이 모든 고통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앎, 즉 ‘분별하지 못함’이 너무나도 뿌리 깊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이 거대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프라크리티가 연출하는 쾌락과 고통의 드라마 속에서 울고 웃으며 윤회의 여정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처럼 상캬 철학에서 고통은 형이상학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식론적인 오류의 결과입니다.


상캬 철학은 우리가 이 착각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을 세 가지 종류로 체계적으로 분류합니다. 이를 ‘세 가지 고통 (duḥkha-traya)’이라고 부릅니다.


첫째는 내적인 고통 (ādhyātmika)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비롯되는 모든 고통을 포함합니다. 열병이나 소화불량과 같은 육체적 질병에서부터, 질투, 분노, 탐욕, 슬픔, 불안, 두려움과 같은 온갖 정신적인 번뇌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존재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이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는 외적인 고통 (ādhibhautika)입니다. 이것은 우리 외부의 다른 존재들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뱀에게 물리거나, 맹수에게 공격당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도둑에게 재산을 빼앗기는 등,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셋째는 초자연적인 고통 (ādhidaivika)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통제를 넘어서 있는, 거대한 자연의 힘이나 보이지 않는 운명으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혹독한 추위나 타는 듯한 더위, 홍수와 가뭄, 지진과 번개, 그리고 악령이나 유령에 의해 야기된다고 믿어지는 고통 등,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상캬 철학은 이 세 가지 고통 중 어느 하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없으며,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쾌락은 결국 이 고통들과 뒤섞여 있거나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될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은 일시적인 쾌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고통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버리는 데 있습니다.


만약 속박과 고통의 근본 원인이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를 혼동하는 ‘분별하지 못함 (aviveka)’에 있다면,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그 반대, 즉 둘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명확하게 깨닫는 ‘분별지 (viveka-jñāna)’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푸루샤는 의식이고 프라크리티는 물질이다’라는 문장을 지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수행과 명상을 통해,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이 마음이 아니다. 나는 이 지성도, 자아의식도, 감각도 아니다. 나는 이 모든 변화무쌍한 현상들을 그저 지켜보는, 영원하고 순수하며 자유로운 의식 그 자체이다’라는 사실을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직접적인 체험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어둠이 한순간에 사라지듯,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를 묶고 있던 잘못된 동일시의 사슬은 끊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상캬 철학은 프라크리티의 역설적인 역할을 설명합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원인이었던 프라크리티는, 동시에 해탈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도구가 됩니다. 프라크리티의 산물인 지성 (buddhi)이 라자스와 타마스의 격정적이고 어두운 힘에 의해 지배될 때는, 마치 흙탕물처럼 푸루샤의 순수한 빛을 왜곡하여 비춤으로써 속박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오랜 수행을 통해 지성에서 라자스와 타마스의 힘이 약해지고 순수한 사트바의 성질이 우세하게 되면, 지성은 마치 표면의 모든 먼지를 닦아낸 거울처럼 맑고 고요해집니다. 이 투명한 지성의 거울은 비로소 푸루샤의 참된 본성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지성은 자기 자신, 즉 ‘나는 프라크리티의 산물로서 변화하고 활동하는 존재이며, 저 너머에 있는 순수한 푸루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까지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프라크리티가 수행하는 이타적인 봉사입니다. 프라크리티의 모든 우주적 전개는 궁극적으로 푸루샤에게 온갖 경험을 제공하고, 마침내 그 경험을 통해 푸루샤가 자기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아 완전한 자유를 얻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별지가 완전하고 확고해지면, 프라크리티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활동을 멈춥니다. 상캬 철학은 이 마지막 순간을 무용수와 관객의 비유로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프라크리티는 무대 위에서 온갖 현란한 춤을 추는 무용수와 같습니다. 푸루샤는 객석에 앉아 그 춤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관객이 “나는 저 무용수를 충분히 보았고, 그녀의 춤의 본질을 모두 알았다”고 선언하는 순간, 무용수는 더 이상 춤을 출 이유가 없으므로 수줍게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모든 변화와 활동을 남김없이 경험하고 마침내 ‘나는 저것과 다르다’는 완전한 분별지를 얻게 되면, 프라크리티는 그 특정 푸루샤를 위해 더 이상 자신을 전개하지 않고 다시 근원적인 평형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 (mokṣa)이며, 상캬 철학에서는 이를 ‘절대적 고독 (kaivalya)’이라고 부릅니다. 이 해탈의 상태에 이른 현자는, 비록 과거의 카르마의 힘 (prārabdha-karma) 때문에 한동안 육체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도공이 돌리는 것을 멈춘 뒤에도 옹기그릇의 바퀴가 관성에 의해 한동안 계속해서 도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나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치 길 건너 불구경하듯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으로 지켜볼 뿐입니다. 마침내 남은 카르마가 모두 소진되어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완전한 해탈 (videha-mukti)을 얻게 됩니다.


그의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와의 모든 관계를 영원히 끊고, 다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의식의 빛으로서, 그 자신만의 완전한 고독과 자유 속에서 영원히 머물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신과의 합일이나 천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모든 관계와 경험, 그리고 고통의 가능성 자체가 소멸된 절대적인 평온과 독립의 상태입니다.









1-3.3. 요가 수트라, 마음 작용의 제어 기술


우리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날뛰는 원숭이와도 같고, 온갖 생각과 감정의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거친 바다와도 같습니다. 상캬 철학이 ‘왜’ 고통이 발생하는지를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라는 두 개의 거대한 원리를 통해 명쾌하게 분석했다면, 요가 철학은 ‘어떻게’ 그 고통의 근원인 마음의 활동을 실제로 제어하고 멈출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상캬가 해부학이라면, 요가는 외과수술입니다. 전설적인 현자 파탄잘리 (Pātañjali)가 집대성한 『요가 수트라』는 바로 그 수술을 위한 가장 정밀하고도 과학적인 지침서입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구름 속에 숨겨진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 소용돌이를 잠재우기 위한 체계적인 기술을 담고 있는 위대한 심리학적 보고서입니다. 파탄잘리는 그의 수트라 두 번째 구절에서 요가의 모든 것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하여 선언합니다.


“요가란 마음 작용의 소멸이다 (yogaś-citta-vṛtti-nirodhaḥ).”


이 짧은 문장 속에, 인간의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길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마음’을 의미하는 ‘치타 (citta)’라는 개념을 깊이 있게 살펴봐야 합니다. 치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개념입니다. 그것은 상캬 철학에서 프라크리티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세 가지 내적 기관, 즉 모든 것을 분별하고 결정하는 가장 순수한 지성인 ‘붓디 (buddhi)’,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며 모든 경험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자아의식인 ‘아함카라 (ahaṃkāra)’, 그리고 다섯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외부 정보를 종합하고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감각 마음인 ‘마나스 (manas)’를 모두 포함하는 마음의 복합체입니다. 이 치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빛이 없는 스크린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의 빛이 이 치타라는 스크린에 비추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본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느낀다’는 모든 의식 활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치타는 푸루샤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체이자, 모든 경험이 기록되고 상영되는 무대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이 치타라는 무대가 단 한 순간도 고요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 표면 위에는 끊임없이 ‘브리티 (vṛtti)’라고 불리는 파문 (波紋) 또는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이 브리티가 바로 ‘마음 작용’이며, 파탄잘리는 이 소용돌이가 그치는 것 (nirodhaḥ, 니로다)이야말로 요가의 진정한 목표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호수가 잔잔해져 바닥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때, 비로소 우리는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자신의 참된 본성, 즉 푸루샤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파탄잘리는 이 혼란스러운 마음의 소용돌이들이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다섯 가지 종류로 명확하게 분류될 수 있다고 통찰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 브리티는 바로 올바른 인식 (pramāṇa), 잘못된 인식 (viparyaya), 분별 망상 (vikalpa), 잠 (nidrā), 그리고 기억 (smṛti)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경험하는 모든 정신 활동은 이 다섯 가지 중 하나, 혹은 그들의 복합적인 작용에 불과합니다.


첫 번째 마음 작용인 올바른 인식 (pramāṇa, 프라마나)은 우리가 세상을 확실하게 아는 세 가지 경로, 즉 직접지각, 추론, 그리고 믿을 만한 증언을 통해 얻어지는 타당한 지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마음의 기능이지만, 요가의 관점에서는 이 역시 마음의 호수를 흔드는 하나의 파문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진실한 앎이라도 그것이 ‘대상’에 대한 앎인 이상, 순수한 주체인 푸루샤를 가리는 장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잘못된 인식 (viparyaya, 비파르야야)으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치명적인 마음 작용입니다. 어둠 속에서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모든 종류의 오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잘못된 인식은 물론, 변화하고 고통스러운 프라크리티의 산물 (몸과 마음)을 영원하고 순수한 푸루샤 (참된 자아)와 동일시하는 무지 (avidyā)입니다.


세 번째는 분별 망상 (vikalpa, 비칼파)으로, 이는 실제 대상 없이 오직 말에만 의존하여 생겨나는 개념적 상상입니다. ‘토끼의 뿔’이나 ‘허공의 꽃’처럼, 말은 존재하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공상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실재하지 않는 개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그것에 얽매여 번뇌합니다.


네 번째는 놀랍게도 잠 (nidrā, 니드라)입니다. 우리는 잠을 모든 의식 활동이 멈춘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파탄잘리는 잠 역시 ‘아무것도 없음’을 내용으로 하는 특정한 마음 작용이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잠이 완전한 무의식 상태라면, 우리는 깨어난 뒤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히 잘 잤다”고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억 자체가 잠자는 동안에도 미세한 의식 활동이 계속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기억 (smṛti, 스므리티)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다시 마음에 떠올리는 작용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에 집착하고 괴로웠던 기억에 고통받으며, 끊임없이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현재를 왜곡하여 바라봅니다. 이 기억의 소용돌이야말로 우리를 현재에 온전히 머물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이 다섯 가지 마음 작용, 즉 브리티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이 어디에서 힘을 얻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파탄잘리는 모든 브리티의 뿌리에 ‘클레샤 (kleśa)’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 근본적인 고통의 원인, 즉 번뇌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클레샤들이야말로 마음의 호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흙탕물을 일으키는 오염원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바로 무지 (avidyā, 아비드야)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불순한 것을 순수한 것으로, 고통을 쾌락으로, 그리고 자아가 아닌 것 (몸과 마음)을 참된 자아 (푸루샤)로 착각하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요가 철학은 인간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지층을 탐사합니다. 그곳에서 발견한 모든 문제의 뿌리가 바로 ‘클레샤 (kleśa)’, 즉 ‘고통의 원인’ 또는 ‘번뇌’라고 불리는 다섯 가지의 오염원입니다. 이 클레샤들은 마음의 호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흙탕물을 일으켜, 우리가 자신의 참된 본성인 푸루샤 (Purusa)의 맑고 고요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바로 무지 (avidy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모른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적극적인 착각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불순한 것을 순수한 것으로, 고통을 쾌락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가 아닌 것(몸과 마음)’을 ‘참된 자아(푸루샤)’로 착각하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이 무지라는 비옥하지만 오염된 땅 위에서, 다른 네 가지의 구체적인 번뇌가 독초처럼 자라납니다.


무지에서 가장 먼저 파생되는 번뇌는 아스미타(asmitā), 즉 ‘자아의식’ 또는 ‘에고’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존재한다’는 자각이 아니라, 순수한 ‘보는 자’인 푸루샤를, ‘보는 도구’인 지성(buddhi)과 동일시하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오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슬픔과 기쁨에 몰입합니다. 그러나 그 몰입이 극에 달하면, 우리는 잠시 자신이 영화관 의자에 앉아 있는 관객이라는 사실을 잊고,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울고 웃습니다. 아스미타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순수한 관객인 푸루샤는 지성이라는 스크린 위에 비친 세상의 모든 경험 (쾌락, 고통, 지식, 감정)을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그러나 아스미타는 이 관객과 스크린을 하나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내가 똑똑하다”, “내가 슬프다”, “나는 성공했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똑똑함’이나 ‘슬픔’은 모두 지성이라는 도구 위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상태 변화에 불과하지만, 아스미타는 그것을 ‘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의사’라는 직업, ‘어머니’라는 역할, ‘분노’라는 감정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아스미타의 작용입니다. 이 거짓된 ‘나’가 만들어지는 순간, 비로소 애착과 혐오가 달라붙을 수 있는 주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짓된 ‘나’(아스미타)가 만들어지자, 이 ‘나’는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끌어당기고 (라가, rāga) 해로운 것을 밀어내려는 (드베샤, dveṣa) 활동을 시작합니다.


라가는 바로 ‘끌어당김’, 즉 ‘애착’ 또는 ‘탐욕’입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즐거웠던 기억은 우리 마음에 흔적 (saṃskāra, 잠재인상)을 남깁니다. 라가는 바로 그 흔적에 달라붙어, 그 즐거움을 다시 경험하고 영원히 소유하려는 갈망입니다. 어제 먹었던 달콤한 케이크의 맛을 잊지 못하고 오늘 다시 그것을 찾는 마음, 칭찬받았을 때의 기쁨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모두 라가의 작용입니다. 이 애착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외부의 대상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지만, 모든 대상은 변하고 사라지기 (anitya, 無常) 때문에, 라가는 결국 불만족과 고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베샤는 그 반대편에 있는 ‘밀어냄’, 즉 ‘혐오’ 또는 ‘증오’입니다. 과거에 겪었던 괴로웠던 경험의 기억은 우리에게 고통의 흔적을 남깁니다. 드베샤는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것의 원인이 되었던 대상을 밀어내고 거부하며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실패의 쓴맛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모두 드베샤의 작용입니다. 이 혐오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적으로 가득 찬 위험한 곳으로 보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분노와 불안의 감옥에 가둡니다.


라가와 드베샤는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하며, 우리의 삶을 쾌락과 고통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시소 게임으로 만듭니다. 이 둘의 춤에 놀아나는 한, 우리는 결코 내면의 평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번뇌인 아비니베샤 (abhiniveśa)는 가장 미세하고도 강력한 것으로, 모든 생명체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집착’ 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번뇌는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비니베샤는 ‘나’가 바로 이 육체와 마음이라는 아스미타의 착각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내가 이 육체라고 굳게 믿는 한, 이 육체의 필연적인 소멸, 즉 죽음은 곧 ‘나’ 자신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모든 생존 본능의 배후에서 작동하며,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든 이 유한한 삶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넘어, 변화에 대한 저항, 늙음에 대한 불안,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다섯 가지 클레샤들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씨앗 (saṃskāra)의 형태로 깊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외부의 어떤 조건과 만나게 되면, 그 씨앗은 싹을 틔워 ‘브리티(vṛtti)’라고 불리는 마음의 소용돌이, 즉 구체적인 생각이나 감정,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다시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클레샤의 씨앗을 심고 기존의 씨앗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즐거운 기억 (라가의 씨앗)은 우연히 들은 음악에 의해 촉발되어 그리움이라는 소용돌이 (브리티)를 일으키고, 그 그리움에 사로잡혀 우리는 다시 그 즐거움을 찾아 헤매는 행동을 하게 되며, 이는 애착 (라가)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바로 요가 철학이 말하는 윤회 (saṃsāra)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요가의 모든 수행은 바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것입니다. 그 길은 마음의 소용돌이를 억지로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되는 클레샤들을 약화시키고, 마침내 그 모든 번뇌의 어머니인 무지(avidyā)를 지혜의 빛으로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습니까?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강력하고도 상호 보완적인 도구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수련 (abhyāsa, 아비야사)’과 ‘이탈 (vairāgya, 바이라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마치 새의 양 날개와도 같아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결코 마음의 하늘을 날아 해탈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수련 (abhyāsa)이란, 마음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꾸준히 노력하는 모든 종류의 적극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흩어지려는 마음을 하나의 초점으로 되돌리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며, 거친 강물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댐을 쌓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명상 중에 호흡에 집중하거나, 만트라를 반복하거나, 혹은 선한 생각에 마음을 머물게 하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이 수련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파탄잘리는 이러한 노력이 단순한 시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 수련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여,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쌓아온 우리 마음의 깊은 습관을 바꿀 수 있으려면,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첫째,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행해져야 합니다. 며칠, 혹은 몇 달의 노력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것은 헛된 욕심입니다. 깊은 골짜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천 년의 물 흐름이 필요하듯, 마음의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시간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둘째, 그것은 중단 없이 행해져야 합니다. 매일의 꾸준한 실천이 중요합니다. 이따금씩 하는 격렬한 노력은, 가뭄 끝에 쏟아지는 폭우처럼 땅의 표면만 적실 뿐 깊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가늘더라도 끊이지 않는 물줄기만이 바위를 뚫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수련이 기계적인 반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각의 실천은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려는 깊은 존중과 진실한 열망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수련은 마음의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견고한 토대가 됩니다.


하지만 수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댐을 쌓아 물길을 막으려 해도, 상류에서 계속해서 거센 비가 내린다면 댐은 언젠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두 번째 도구, 이탈 (vairāgya)입니다. 이탈은 ‘무욕 (無慾)’ 또는 ‘초연함’으로 번역되며,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한 갈망과 혐오를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부정하거나 즐거움을 억지로 억누르는 금욕주의와는 다릅니다. 진정한 이탈은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적 즐거움은 결국 변하고 사라지며, 그것에 대한 집착은 반드시 고통을 낳는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마음의 흥미를 자연스럽게 잃어버리는 상태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유치한 장난감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듯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세상의 덧없는 쾌락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음을 알기에 그것들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수련이 마음을 한곳에 고요히 머물게 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라면, 이탈은 마음을 끌어당기는 외부의 유혹들, 즉 번뇌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땔감’을 치워버리는 소극적이지만 더욱 근본적인 실천입니다. 마치 불을 끄기 위해 한편으로는 물을 붓고 (수련), 다른 한편으로는 땔감을 치워버리는 (이탈) 것과 같습니다. 수련이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면, 이탈은 그 힘이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실천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마음의 소용돌이는 점차 그 힘을 잃고 잔잔해지기 시작합니다. 꾸준한 수련을 통해 마음은 고요함에 머무는 힘을 얻게 되고, 이탈을 통해 그 고요함을 방해하는 외부의 자극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마침내 모든 파문이 사라진 고요하고 투명한 의식의 상태, 즉 ‘삼매 (samādhi)’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가 수트라』는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를 넘어,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 실험실에서 직접 수행하고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심리적인 해방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3.4. 아쉬탕가, 해탈에 이르는 여덟 단계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마음의 모든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참된 자아의 빛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정상에 이르는 길은 결코 단숨에 오를 수 있는 가파른 절벽이 아닙니다. 전설적인 현자 파탄잘리는 그 길을 여덟 개의 단계로 이루어진, 체계적이고 점진적인 하나의 사다리로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쉬탕가 (Aṣṭāṅga)’, 즉 ‘여덟 개의 가지 (aṅga)’로 이루어진 요가입니다. 이 여덟 단계는 각각 독립적인 수행법인 동시에, 나무의 뿌리에서 시작하여 줄기와 가지, 그리고 마침내 꽃과 열매로 이어지듯,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적인 토대가 되어주는 유기적인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수행 도량으로 삼는 총체적인 길이며,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바로잡는 윤리적 실천에서 시작하여, 육체와 호흡을 다스리고, 마침내 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장엄한 내면의 여정입니다. 이 여덟 개의 가지는 금계 (Yama), 권계 (Niyama), 좌법 (Āsana), 조식 (Prāṇāyāma), 제감 (Pratyāhāra), 집중 (Dhāraṇā), 명상 (Dhyāna), 그리고 삼매 (Samādhi)입니다.


아쉬탕가 여정의 첫 번째 단계이자 모든 수행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금계 (Yama, 야마)입니다.


‘야마’는 ‘제어’, ‘억제’, ‘금지’를 의미하며, 우리가 타인 및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보편적인 도덕률입니다. 파탄잘리는 이것이 특정 국가나 계급,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위대한 서약 (mahā-vrata)’이라고 선언합니다. 마음의 호수를 고요하게 만들고 싶다면, 먼저 외부에서 날아와 수면을 어지럽히는 돌멩이들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야마는 바로 그 돌멩이를 던지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첫 번째 금계는 아힘사 (Ahiṃsā), 즉 ‘비폭력’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생명체의 육체에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을 넘어, 말과 생각으로도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타인을 향한 증오나 악의에 찬 생각은 그 자체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독소입니다. 아힘사의 수행이 확고해진 요기 (yogi)의 주위에서는 모든 적대감이 사라진다고 『요가 수트라』는 말합니다.


두 번째는 사트야 (Satya), 즉 ‘진실함’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말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타인과의 신뢰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기만 행위입니다. 진실함에 굳건히 서게 된 사람의 말은 그 자체로 힘을 얻어,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아스테야 (Asteya), 즉 ‘훔치지 않음’입니다. 이것은 타인의 물질적 재산을 훔치지 않는 것을 넘어, 타인의 아이디어나 공로를 가로채거나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탐하는 마음까지도 포함합니다. 훔치지 않음이 확립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보물이 저절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네 번째는 브라마차리야 (Brahmacarya)입니다. 흔히 ‘금욕’으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브라만 (Brahman)을 따라 걷는 삶’을 뜻하며, 모든 감각적 쾌락, 특히 성적인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그것을 더 높은 영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은 마음을 가장 격렬하게 흔드는 소용돌이 중 하나이기에, 이 에너지를 제어하는 것은 내면의 힘을 기르는 데 필수적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아파리그라하 (Aparigraha), 즉 ‘소유하지 않음’ 또는 ‘탐하지 않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그것을 얻으려는 불안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아, 우리 마음을 영원한 결핍의 감옥에 가둡니다. 소유하지 않음이 확고해진 사람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삶까지도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아쉬탕가의 두 번째 단계는 권계 (Niyama, 니야마)입니다.


‘니야마’는 ‘규칙적인 수행’ 또는 ‘자기 정화’를 의미하며, 우리 자신을 향해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 적극적인 내면의 규율입니다. 야마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지침이라면, 니야마는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권계는 샤우차 (Śauca), 즉 ‘청정’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몸을 깨끗이 씻고 주변 환경을 정돈하는 외적인 청결뿐만 아니라, 탐욕과 분노,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내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내적인 청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몸과 마음의 청정은 타인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두 번째는 산토샤 (Santoṣa), 즉 ‘만족’입니다. 이것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만족은 외부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행복이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나는 평화입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을 얻게 됩니다.


세 번째는 타파스 (Tapas), 즉 ‘고행’ 또는 ‘수련’입니다. 이것은 춥고 더움, 즐거움과 괴로움, 칭찬과 비난과 같은 이원적인 대립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의식적인 훈련입니다. 타파스는 불순물을 태워 순금을 만들 듯,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쌓인 불순한 잠재의식 (saṃskāra)들을 태워 없애고 의지력을 강화시킵니다.


네 번째는 스바디야야 (Svādhyāya), 즉 ‘자기 탐구’ 또는 ‘경전 공부’입니다. 이것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밝혀주는 우파니샤드와 같은 성스러운 경전들을 독송하고 그 의미를 깊이 사색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이슈바라 프라니다나 (Īśvara-praṇidhāna), 즉 ‘이슈바라 (Īśvara, 自在神)에 대한 헌신’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와 그 결과를 ‘신’ 또는 더 높은 힘에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는 에고 (ahaṃkāra)를 내려놓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길 때, 우리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완전한 내면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파탄잘리는 이 이슈바라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삼매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길 중 하나라고 강조합니다.


아쉬탕가의 세 번째 단계는 좌법 (Āsana, 아사나)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야마와 니야마라는 윤리적, 내면적 토대를 굳건히 다진 뒤에야, 비로소 수행자는 요가의 세 번째 단계인 좌법 (Āsana, 아사나)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요가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다양한 신체적 자세들이 바로 이 아사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파탄잘리가 말하는 아사나의 본질적인 목적은 단순히 신체를 유연하게 만들거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요가 수트라』에서 아사나는 단 하나의 구절, “아사나란 안정되고 편안한 자세이다 (sthira-sukham-āsanam)”로 정의됩니다. 즉, 아사나의 진정한 목적은 오랜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이어질 명상의 단계들은 모두 몸의 존재 자체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안정과 고요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거나 불편하면,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몸으로 향하게 되어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아사나 수련은 몸의 긴장과 경직을 풀어주고, 신경 체계를 안정시키며, 수행자가 마침내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않고도’ 그 안에 편안히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아쉬탕가의 네 번째 단계는 조식 (Prāṇāyāma, 프라나야마), 즉 ‘호흡의 제어’입니다.

‘프라나 (prāṇa)’는 단순히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를 넘어, 우주와 모든 생명체에 깃들어 있는 근원적인 생명 에너지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아야마 (āyāma)’는 그것을 확장하고 제어하는 것을 뜻합니다. 요가의 현자들은 마음과 프라나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흥분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마음이 평온하면 호흡이 고요해집니다. 역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호흡을 제어할 수 있다면, 마음의 움직임 또한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프라나야마는 들숨 (pūraka), 날숨 (recaka), 그리고 그 사이의 숨 멈춤 (kumbhaka)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확장하는 훈련입니다. 이 수련을 통해 수행자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원인인 욕망과 번뇌의 장막을 걷어내고, 내면의 빛을 가리고 있던 무지의 구름을 흩어버릴 수 있습니다. 프라나야마는 이후에 이어질 내면의 여정을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준비 단계입니다.


아쉬탕가의 다섯 번째 단계는 제감 (Pratyāhāra, 프라탸하라)입니다.


앞의 네 단계가 외부 세계와의 관계 및 육체와 호흡을 다스리는 외적인 수행 (bahir-aṅga)이었다면, 다섯 번째 단계인 제감 (Pratyāhāra)은 그 에너지를 외부에서 내부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합니다. ‘프라티야하라’는 ‘감각의 철회’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다섯 감각기관은 본성적으로 외부 세계의 대상들, 즉 소리, 형태, 맛, 냄새, 감촉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주된 원인입니다. 프라티야하라는 마치 거북이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 자신의 머리와 네 다리를 등껍질 안으로 완전히 거두어들이듯, 외부 대상을 향해 뻗어 나가던 감각의 촉수들을 의식적으로 끊고 내면으로 되돌리는 훈련입니다. 이 단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수행자는 외부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더 이상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이제 마음은 외부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내면의 빛을 향한 여정에 온전히 집중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아쉬탕가의 여섯 번째 단계인 집중 (Dhāraṇā, 다라나)부터는 본격적인 명상의 과정, 즉 내적인 수행 (antar-aṅga)이 시작됩니다.


‘다라나’는 마음 (citta)을 하나의 특정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외부 세계로부터 감각을 거두어들인 마음은 이제 텅 빈 공간에서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단 하나의 지지점에 묶여야 합니다. 그 대상은 심장이나 미간과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일 수도 있고, 성스러운 음절인 ‘옴 (Oṃ)’과 같은 만트라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숭배하는 신의 형상일 수도 있습니다. 다라나는 마치 한 마리의 벌이 꿀을 찾아 여러 꽃 사이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하나의 꽃 위에 내려앉으려는 노력과도 같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대상에서 벗어나 다른 생각으로 흘러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수행자는 끊임없이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아쉬탕가의 일곱 번째 단계인 명상 (Dhyāna, 디야나)은 이러한 집중의 노력이 무르익어, 더 이상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마음이 대상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다라나가 점점이 끊어지는 물방울과 같다면, 디야나는 하나의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끊어짐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기름의 흐름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대상에 대한 생각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끼어들지 않으며, 마음은 대상과 하나가 된 듯한 깊은 고요함 속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명상하고 있다’는 미세한 자아의식만이 남아 있을 뿐, 마음은 온전히 대상의 본질에 대한 사색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아쉬탕가 요가의 마지막 여덟 번째 단계인 삼매 (Samādhi)는 명상의 가장 깊고도 궁극적인 경지입니다. 일곱 번째 단계인 디야나 (Dhyāna)에서 우리는 끊어짐 없는 명상의 흐름을 유지했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내가 지금 명상하고 있다’는 미세한 자아의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삼매는 바로 그 마지막 남은 주관적인 자아의식마저 사라지고, 오직 명상의 대상만이 홀로 빛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명상하는 자 (주관), 명상 행위 (과정), 그리고 명상의 대상 (객관)이라는 세 가지 구별이 완전히 녹아내립니다. 마음은 마치 투명한 수정이 대상의 색깔을 그대로 비추듯, 대상의 형태를 온전히 취하게 됩니다. 이것은 더 이상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가 되는 체험입니다. 연주자가 음악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내가 연주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는 순간, 그는 음악 그 자체가 됩니다. 삼매는 바로 그러한 완전한 몰입과 합일의 상태입니다.


파탄잘리는 이 삼매의 상태에서 비로소 모든 대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앎 (prajñā)이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책을 통해 배우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직접 만나는 직관적인 통찰의 빛입니다.


그리고 이 삼매의 수행이 더욱 깊어지면, 마침내 수행자는 모든 대상이라는 마지막 지지점마저 내려놓게 됩니다. 마음 작용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그 절대적인 고요 속에서, 그는 자신의 참된 본성인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모든 현상, 즉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의 모든 변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최종적인 분별지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고통이 영원히 사라진 절대적 자유의 상태, 즉 ‘절대적 고독 (kaivalya, 카이발야)’입니다. 여기서 ‘고독’은 결코 외로움이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 완전하고 충족된 상태를 의미하는, 가장 숭고한 의미의 독립입니다.


이처럼 아쉬탕가 요가는 인간의 실존 전체를 아우르는, 윤리에서 시작하여 명상을 거쳐 마침내 완전한 해탈에 이르는 가장 체계적이고도 위대한 실천의 지도입니다.


이 고대의 지혜는 끊임없는 정보의 홍수와 외부의 자극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성찰을 안겨줍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무언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에 집착하고, 타인의 평가에 흔들립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내가 가진 것, 내가 하는 일,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동일시하며 살아갑니다.


삼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 모든 소란스러운 마음의 활동이 우리의 본질이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진정한 평화는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면의 고요함과 만날 때 찾아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판단 없이 자신의 호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실 때는 차의 향과 맛에 온전히 집중하고, 걸을 때는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흩어진 마음을 현재로 되돌리는 힘을 길러줍니다.


이와 같은 카이발야 (kaivalya)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위안을 줍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와 존엄성은 외부의 어떤 조건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결코 더럽혀지거나 상처받지 않는 순수한 의식의 공간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모든 변화와 불확실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찾게 될 것입니다.









1-3.5. 상캬-요가 사상과 푸라나 신화의 만남



상캬 철학이 제시하는 우주의 그림은 지적으로는 명쾌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지극히 차갑고 비인격적입니다. 그곳에는 영원히 고독한 무한한 수의 관객 (푸루샤)들과, 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춤을 추는 단 하나의 무용수 (프라크리티)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 엄격한 이원론의 세계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고 갈망하는 인격적인 신, 즉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은총을 베풀며 악을 벌하는 구체적인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철학자에게는 ‘순수의식’과 ‘근원물질’의 분별지를 얻는 것이 해탈의 길일지 모르지만, 평범한 대중에게는 그 길이 너무나도 멀고 메마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힌두 사상의 위대한 지혜는 철학의 골격 위에 신화라는 따뜻한 살과 피를 입히기 시작합니다. 상캬-요가의 심오하고 추상적인 원리들은 후대에 등장하는 방대한 신화 문헌인 『푸라나, Purāṇa』의 세계 속에서, 생생한 인격을 가진 신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재탄생합니다.


상캬 철학의 세계는 차갑고 정밀한 건축 도면과도 같습니다. 푸루샤와 프라크리티, 그리고 세 가지 구나라는 선과 각으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우리는 우주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힌두 사상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심오한 철학적 통찰이 가장 대중적인 신화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프라크리티의 세 가지 근원적인 힘인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는 이제 『푸라나』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무대 위에서, 각각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파괴하는 세 명의 위대한 신, 즉 트리무르티 (Trimūrti)의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철학의 언어가 신화의 언어로 번역되는 이 경이로운 순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주의 드라마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라자스 (Rajas) : 브라흐마 (Brahmā)


우주의 밤이 끝나고 새로운 창조의 새벽이 밝아올 때, 모든 것이 분화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던 근원 물질의 바다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활동과 생성을 향한 격정, 라자스 (Rajas)입니다. 이 붉은빛의 에너지는 고요한 균형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합니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빚어내고, 형태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며, 이름 없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려는 끝없는 창조적 갈망 그 자체입니다.

푸라나의 세계 속에서 이 라자스의 힘은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창조의 신, 브라흐마 (Brahmā)의 인격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우주가 시작될 때 거대한 황금 알 (Hiraṇyagarbha)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깊은 우주적 잠에 빠진 비슈누의 배꼽에서 피어난 연꽃 위에서 눈을 뜹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사방을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고요함 속에서 깊은 고독에 빠집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오랜 시간 명상에 잠깁니다. 이 최초의 실존적 고뇌와 자기 탐구야말로, 무의식적인 전개가 아닌 의식적인 창조의 첫걸음입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과 입, 그리고 몸의 각 부분으로부터 신들과 악마, 인간과 동물, 식물과 광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브라흐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네 개의 얼굴은 결코 기이한 형상이 아니라, 그의 창조 원리를 보여주는 심오한 상징입니다. 각각의 얼굴은 동서남북 사방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창조의 힘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의 모든 방향으로 편재하며, 그의 지혜가 모든 것을 동시에 꿰뚫어 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이 네 개의 얼굴은 그의 네 개의 입에서 각각 흘러나왔다고 전해지는 네 권의 베다(Veda) 경전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동쪽 얼굴에서는 신들에 대한 찬가인 『리그베다』가, 서쪽 얼굴에서는 제사의 노래인 『사마베다』가, 남쪽 얼굴에서는 제사의 구체적인 절차를 담은 『야주르베다』가, 북쪽 얼굴에서는 일상적인 의례와 주문을 담은 『아타르바베다』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브라흐마의 창조가 단순히 물질적인 창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창조된 세계가 따라야 할 우주적 법칙과 신성한 지혜, 즉 다르마 (Dharma)를 동시에 부여하는 행위임을 상징합니다. 그의 창조는 지혜와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브라흐마의 존재는 상캬 철학의 ‘라자스’가 단순히 맹목적이고 혼돈스러운 활동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엄한 신화적 증언입니다. 그것은 지혜와 질서를 바탕으로 한 의식적인 창조의 힘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로부터 시작되는 거룩한 행위임을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트바 (Sattva) : 비슈누 (Viṣṇu)


창조된 세계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곧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창조의 격정적인 활동인 라자스는 때로 과도한 욕망과 투쟁을 낳고, 어둠의 힘인 타마스는 모든 것을 무기력과 쇠퇴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우주의 균형을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고요하고도 강력한 힘, 사트바 (Sattva)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트바는 조화와 순수, 선함과 자비, 그리고 지혜의 빛입니다. 그것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고,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며,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길 (Dharma)을 따라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우주적 보존의 원리입니다.


푸라나의 세계에서 이 사트바의 힘은 질서의 수호신, 비슈누 (Viṣṇu)의 인격으로 빛을 발합니다. 그는 황금빛 옷을 입고, 네 개의 팔에는 각각 우주의 근본 원리를 상징하는 신성한 물건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가 든 소라 고둥은 그가 불 때 우주의 근원적 소리 ‘옴 (Om)’이 울려 퍼지며, 신성한 법칙과 존재의 시작을 알립니다. 빛나는 원반은 시간의 흐름과 마음의 작용을 다스리고 모든 악을 단번에 베어버리는 절대적인 힘을 나타냅니다. 그의 철퇴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지와 아집을 부수는 원초적인 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가 든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순수함과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약속합니다.


비슈누는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광대한 우유의 바다 위에서, 영원을 상징하는 거대한 뱀 아난타 (Ananta)를 침대 삼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잠은 무관심이나 방관이 아닙니다. 그는 우주의 모든 숨결을 느끼고 있으며, 지상의 질서 (Dharma)가 악의 세력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는 위기의 순간마다, 자비의 마음으로 깨어나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완전한 신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내려오지 않습니다. 시대의 필요와 고통받는 존재들의 수준에 맞춰, 그는 다양한 모습의 화신 (Avatāra)으로 이 땅에 태어납니다. 세상이 거대한 홍수에 잠겨 모든 생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거대한 물고기 (Matsya)가 되어 인류의 시조인 마누의 방주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생명의 씨앗을 구원합니다. 강력한 악마가 대지를 통째로 훔쳐 우주의 깊은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 그는 거대한 멧돼지 (Varāha)가 되어 자신의 강력한 어금니로 대지를 건져 올려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신도, 인간도, 짐승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축복을 받아 교만해진 악마 왕이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자, 그는 사자도 인간도 아닌 반인반수의 나라심하 (Narasiṃha)의 모습으로 나타나, 해질녘 궁전의 문지방 위에서 허벅지에 악마를 올려놓고 손톱으로 배를 찢어 처단함으로써 우주의 법칙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이상적인 왕이자 아들로서 자신의 의무 (Dharma)를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희생마저 감수한 라마 (Rāma)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정의의 길을 보여주고, 매혹적인 피리 소리로 모든 영혼을 사로잡는 사랑의 신 크리슈나 (Kṛṣṇa)가 되어, 우리에게 헌신과 지혜, 그리고 사랑의 길을 몸소 가르쳐줍니다. 비슈누의 이 다양한 화신 이야기는, 상캬 철학의 ‘사트바’가 단순히 수동적인 순수함이나 고요한 상태가 아님을 우리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는 감동적인 서사시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여 적극적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가장 낮은 곳까지 기꺼이 내려와 눈물을 닦아주는 능동적이고 자비로운 힘입니다.


타마스 (Tamas) : 시바 (Śiva)


모든 창조된 것은 언젠가 낡고 쇠퇴하며, 그 본래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생명이 없는 질서는 경직된 교리가 되고, 활력을 잃은 세상은 부패의 늪에 빠집니다. 이때, 낡은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근원으로 되돌리는 거대한 힘, 타마스 (Tamas)가 그 위력을 발휘합니다. 타마스는 무거움과 어둠, 해체와 소멸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푸라나의 신화 속에서 타마스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악한 힘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가장 신성하고도 필수적인 힘이며, 이 위대한 파괴의 춤을 추는 자가 바로 위대한 신, 시바 (Śiva)입니다.


그는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봉우리에서 모든 세속적 욕망을 태워버리는 불같은 고행에 잠겨 있는 위대한 요기 (Mahāyogī)입니다. 그의 모습은 질서정연한 문명의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묘지에서 유령들과 어울리고, 온몸에 시신을 태운 신성한 재를 바르며, 살아있는 뱀을 장신구로 삼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삶과 죽음, 순수함과 불순함이라는 인간적인 모든 이원적 분별을 넘어선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이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제3의 눈이 감겨 있으며, 이 눈이 뜨이는 순간 세상의 모든 환영은 불타 사라집니다. 그의 목이 푸른빛을 띠는 것은, 태초에 신들과 악마들이 불멸의 감로수를 얻기 위해 우유의 바다를 휘저었을 때 솟아오른 치명적인 독 (hālāhala)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자, 모든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 그 독을 삼켜 자신의 목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의 파괴적인 힘의 이면에는 가장 깊은 자비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삼지창은 프라크리티를 구성하는 세 가지 힘 (구나)을 모두 지배하는 그의 권능을 상징하며, 그가 든 작은 북 (damaru)이 울릴 때마다 시간의 맥박이 뛰고 새로운 창조의 리듬이 시작됩니다. 우주의 한 시대 (yuga, 유가)가 마침내 그 수명을 다하고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타락에 빠졌을 때, 시바는 마침내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 ‘탄다바 (Tāṇḍava)’라 불리는 격렬하고도 장엄한 파괴의 춤을 춥니다. 그의 발길에 온 우주가 진동하고, 그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별들이 궤도를 잃으며, 그의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낡고 부패한 세상을 남김없이 불태워 버립니다. 이 춤은 맹목적인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모든 이름과 형태를 그것의 근원적인 원소로 되돌려 보내는 질서정연하고 장엄한 의식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분화되지 않은 근원 물질, 즉 프라크리티의 잠재 상태로 되돌려놓습니다.


시바의 파괴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정화 (淨化)이며, 가장 심오한 자비의 행위입니다. 그의 춤이 멈춘 고요한 잿더미 위에서, 브라흐마는 비로소 다시 새로운 창조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되며, 비슈누는 새로운 질서를 세울 깨끗한 대지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시바의 신화는 상캬 철학의 ‘타마스’가 단순히 무기력이나 혼돈, 혹은 악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모든 환영과 낡은 껍데기를 벗겨내고, 우리를 순수한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가장 자비로운 해방의 힘일 수 있음을, 그의 격렬하고도 아름다운 춤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세 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주의 운행이 어느 한 신의 독단적인 의지가 아니라, 창조 (라자스), 유지 (사트바), 파괴 (타마스)라는 세 가지 힘의 영원하고도 역동적인 상호작용임을 가르쳐 줍니다. 푸라나의 신화는 상캬의 추상적인 세 가지 구나를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라는 생생하고도 매력적인 캐릭터로 변모시킴으로써, 평범한 신자들조차도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창조와 갈등, 조화와 파괴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 거대한 우주적 힘의 작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경배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라는 상캬 철학의 두 근본 원리 역시 푸라나 신화 속에서 놀랍도록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집니다. 그 대표적인 이미지가 바로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아난타샤야나 비슈누 (Anantaśayana Viṣṇu)’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비슈누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깊은 요가적 잠 (yoganidrā)에 빠져, 끝이 없는 우주적 뱀 아난타 (Ananta)의 몸 위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광대하고 아무런 형태도 없는 우유의 바다 (Kṣīra Sāgara) 위에 떠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상캬 철학의 완벽한 신화적 번역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비슈누는 바로 순수하고 초월적인 관객인 푸루샤를 상징합니다. 그가 누워 있는 광대하고 분화되지 않은 우유의 바다는, 세 구나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의 프라크리티를 나타냅니다. 마침내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다가오면, 비슈누의 배꼽에서부터 하나의 거대한 연꽃이 피어오르고, 그 연꽃 위에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푸루샤의 고요한 현존이 프라크리티의 균형을 깨뜨려, 그 안에서 활동성의 원리인 라자스 (브라흐마)가 가장 먼저 발현되어 우주적 전개를 시작한다는 상캬의 창조론을 하나의 장엄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여신 데비 (Devī) 또는 샥티 (Śakti)


또한, 힌두교의 여신 숭배 전통, 즉 샥티를 숭배하는 종파 (Śākta)의 신화 속에서 위대한 여신 데비 (Devī) 또는 샥티 (Śakti)는 프라크리티의 개념을 가장 역동적이고 강력하게 인격화합니다. 상캬 철학의 세계가 순수한 의식 (푸루샤)과 근원 물질 (프라크리티)이라는 두 개의 영원한 원리로 이루어진, 지적으로는 명쾌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차가운 이원론의 우주였다면, 샥티파의 세계는 바로 그 프라크리티가 살아있는 의지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주의 유일한 주체로 깨어나는, 뜨겁고 생명력 넘치는 우주입니다. 상캬 철학에서 프라크리티는 그 자체로는 의식이 없는 수동적인 원리처럼 묘사되지만, 샥티파의 신화 속에서 여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파괴하는 능동적이고 절대적인 힘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모든 신들의 힘의 근원이며,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라는 위대한 남성 신들조차도 그녀의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그녀는 때로는 모든 악마를 물리치고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사자를 타고 열여덟 개의 팔에 모든 신들의 무기를 든 무시무시한 전사 두르가 (Durg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또 때로는 시간 (kāla)마저 집어삼키며 모든 이름과 형태를 자신의 근원적인 어둠 속으로 되돌리는, 해골 목걸이를 걸고 잘린 머리를 든 파괴적인 칼리 (Kālī)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자비와 파괴, 창조와 소멸이라는 모든 가능성을 자신의 존재 안에 품고 있는 여신의 모습은, 상캬 철학의 프라크리티 개념이 지닌 잠재력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상캬 철학의 두 주인공이었던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의 관계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드라마로 변모합니다. 남성 신인 시바가 종종 움직이지 않는 순수한 의식, 즉 푸루샤의 측면을 상징한다면, 그와 함께 춤을 추는 그의 배우자 샥티는 그 의식의 힘이 발현되고, 그 의식이 자신을 인식하며, 그 의식이 세계를 창조하게 만드는 역동적인 에너지, 즉 프라크리티의 측면을 상징하게 됩니다. 상캬 철학에서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의 만남이 ‘잘못된 동일시’라는 비극적 착각으로 그려졌다면, 샥티파의 세계에서 시바와 샥티의 만남은 분리될 수 없는 두 연인의 영원하고도 즐거운 사랑의 유희 (Līlā)입니다. 의식은 에너지 없이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으며, 에너지는 의식 없이는 맹목적인 혼돈에 불과합니다. “샥티가 없다면, 시바는 한낱 시신 (śava)에 불과하다”는 탄트라의 유명한 격언은 바로 이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파스 (Tapas)’의 원리


요가의 실천적 측면 역시 푸라나 신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그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신화 속에서 신들과 위대한 현자 (ṛṣi)들은 종종 상상을 초월하는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고행 (Tapas)과 깊은 명상에 잠깁니다. 시바는 히말라야의 카일라쉬 산에서 영원한 명상에 잠겨 있는 ‘위대한 요기 (Mahāyogī)’의 원형으로 묘사됩니다. 비슈누의 여러 화신들이나 위대한 현자들은 강력한 악마를 물리치거나 신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얻기 위해, 수천 년간 한 발로 서 있거나 불길에 둘러싸여 명상하는 등 극적인 고행을 감수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요가 수트라』가 제시하는 ‘타파스 (Tapas)’의 원리가 단순히 개인의 내면을 정화하는 소극적인 수련을 넘어, 우주적 힘을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신화 속에서 현자의 타파스는 너무나도 강력하여, 때로는 신들의 왕 인드라의 천상 세계마저 위협할 정도의 거대한 열기를 뿜어냅니다. 신들은 종종 이 위협적인 힘을 막기 위해 아름다운 천상의 무희를 보내 현자의 명상을 방해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요가적 수행이 개인의 해탈을 넘어, 세상의 질서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가진다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또한, 이러한 혹독한 고행을 통해 현자들이 하늘을 날거나, 자신의 몸을 원자처럼 작게 만들거나 산처럼 거대하게 바꾸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등의 초능력, 즉 싯디 (Siddhi)를 얻게 되는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능력들은 요가 수행의 심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들을 대중에게 암시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길이 어떻게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힘으로 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에게 수행에 대한 강력한 동기와 경이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푸라나의 신화들은 상캬-요가의 난해하고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들을, 살아있는 신들의 구체적인 행적과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 녹여냈습니다.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의 분별이라는 어려운 개념은, 시바의 고행이나 파르바티의 헌신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로 변모했습니다. 이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철학적 논증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사상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놓아졌습니다. 결국 철학은 신화를 통해 살아있는 생명을 얻었고, 신화는 철학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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