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경험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이 세계는 진짜인가? 나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그리고 이 견고하게 느껴지는 육체와 끝없이 펼쳐진 저 산과 바다는 과연 흔들리지 않는 실재 (實在)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인도 사상사뿐만 아니라 인류 정신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도 철저한 답변을 내놓은 철학자가 있습니다. 8세기경 남인도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불과 32년의 짧은 생애 동안 인도의 지성계를 완전히 평정한 위대한 사상가, 샹카라 (Shankara)입니다. 그의 철학, 즉 아드바이타 베단타 (Advaita Vedānta), 즉 ‘불이일원론 (不二一元論)’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을 하나의 절대적인 선언으로 압축합니다.
“브라만만이 실재이며 (Brahma satyam), 이 세계는 거짓이다 (jagat mithyā). 개별 영혼은 브라만과 다르지 않다 (jīvo brahmaiva nāparaḥ).”
이 짧은 문장 속에, 인간의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고 우리를 영원한 자유로 이끌 유일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샹카라는 주장합니다.
샹카라 철학의 심장은 ‘실재 (Sat)’란 무엇인가에 대한 엄격한 정의에서 출발합니다. 그에게 진정한 실재란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결코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불변의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그 어떤 것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존재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존재 (Sat)요, 순수한 의식 (Cit)이며, 순수한 환희 (Ānanda) 그 자체인 브라만 (Brahman)입니다. 브라만은 모든 이름과 형태를 초월해 있으며, 어떠한 속성이나 부분도 가지지 않는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ekam eva advitīyam) 분할 불가능한 실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샹카라가 말하는 궁극적 진리, 즉 파라마르티카 사트야 (pāramārthika-satya)의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이 다채로운 세계, 즉 산과 강, 사람들과 도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은 대체 무엇인가? 샹카라는 이 질문에 대해 충격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이 모든 경험의 세계는 궁극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실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의 엄격한 실재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vikāra),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에 의존하여 잠시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은 다음 순간의 생각에 의해 대체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샹카라는 이 세계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 (asat)’, 예를 들어 ‘토끼의 뿔’이나 ‘허공의 꽃’과 같은, 순전한 비존재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 세계는 나름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세계는 절대적인 실재 (sat)도 아니고, 완전한 비실재 (asat)도 아닌, 그 둘 사이의 기이하고도 설명 불가능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집니다. 샹카라는 바로 이 세계의 신비로운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우파니샤드에 이미 등장했던 개념인 ‘마야 (Māyā)’를 그의 철학의 핵심적인 열쇠로 사용합니다.
‘마야’는 흔히 ‘환영 (illusion)’으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샹카라가 말하는 마야는 세계가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깨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명할 수 없음 (anirvacanīya)’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즉, 마야는 그것이 실재인지 비실재인지, 브라만과 동일한지 다른지,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의 이성적 언어로는 결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 또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마야는 마치 마술사가 자신의 본모습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눈앞에 온갖 신기한 현상들을 펼쳐 보이는 그 신비로운 ‘마술의 힘’과도 같습니다. 이 마야라는 힘 때문에, 본래 아무런 속성도 형태도 없는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은, 우리의 무지 (avidyā)한 눈에는 마치 이름과 형태를 가진 무한히 다양한 이 세계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변화와 다양성은 오직 이 현상 세계의 차원, 즉 우리가 경험하는 상대적 진리인 비야바하리카 사트야 (vyāvahārika-satya)의 차원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샹카라는 이 신비로운 힘, 마야가 두 가지의 강력하고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을 장악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두 가지 힘은 동시에 작동하며, 서로를 의지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라는 거대한 환영의 무대를 만들어냅니다.
그 첫 번째 힘은 ‘아바라나 샤크티 (āvaraṇa-śakti)’, 즉 ‘가리는 힘’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조각이 거대한 태양 전체를 가려버리듯,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의 참된 본성을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근원적으로 가려버리는 힘입니다. 아바라나의 힘 때문에, 우리는 본래부터 완전하고, 무한하며, 지복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앞에 있는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론적인 안개와도 같습니다. 이 힘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을 망각하고, 대신 이 세상이 유한하고,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거짓된 믿음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모든 소외감과 결핍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은 바로 이 ‘가리는 힘’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본래 바다 그 자체이지만, 아바라나의 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의 고립된 파도에 불과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 두 번째 힘은 ‘비크셰파 샤크티 (vikṣepa-śakti)’, 즉 ‘투사하는 힘’입니다. 이 힘은 단순히 진실을 가리는 소극적인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실재의 참된 본성이 가려진 바로 그 자리 위에 거짓된 현상 세계를 적극적으로 덧씌웁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진짜인 것처럼 생생한 하나의 완전한 가상현실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착각을 넘어 강력한 마술과도 같습니다. 만약 첫 번째 힘인 ‘가리는 힘’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저 텅 빈 어둠 속을 헤맬 뿐이겠지만, 바로 이 창조적인 ‘투사하는 힘’ 때문에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구체적인 환영의 세계를 마주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샹카라가 즐겨 사용하는 밧줄과 뱀의 비유는 이 두 가지 힘의 동시적인 작용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해질녘의 어스름한 길 위에 밧줄이 놓여 있습니다. 먼저 어둠이라는 조건, 즉 아바라나 (āvaraṇa)의 힘이 밧줄의 진짜 모습 (그것이 밧줄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가려버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가려진 실체 위에,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뱀에 대한 기억과 두려움이, 비크셰파 (vikṣepa)의 힘을 통해 하나의 생생한 뱀의 형상을 ‘투사’해 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뱀을 보고 공포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힘의 작용 때문에, 우리는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 브라만이라는 실재의 밧줄 위에, 무한히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이 우주라는 환영의 뱀을 덧씌워 놓고,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 나의 가족, 나의 재산, 나의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은 비크셰파의 힘이 투사해 낸 환영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이 환영을 진짜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고통을 느낍니다. 이처럼 샹카라에게 인간의 모든 고통은 외부 세계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마야의 이 두 가지 힘에 의해 벌어지는 우리 내면의 거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따라서 이 환영의 뱀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즈나나)의 등불을 밝혀 그것이 본래 밧줄이었음을 깨닫고, 아바라나와 비크셰파의 이중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마야의 개념은 샹카라가 우파니샤드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였던, ‘어떻게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브라만이,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하며 고통으로 가득 찬 이 다양한 세계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만약 세계가 브라만의 실제적인 ‘변형 (pariṇāma)’이라면, 마치 우유가 요구르트로 변하듯, 브라만 자신도 변화와 불완전함에 물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브라만의 절대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샹카라는 세계가 브라만의 실제적인 변형이 아니라, 오직 ‘가현 (假現, vivarta, 비바르타)’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바르타’란 원인 그 자체는 변하지 않으면서, 결과가 마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밧줄은 뱀으로 ‘보일’ 뿐, 실제로 뱀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수정은 붉은 꽃의 색을 ‘반사할’ 뿐, 실제로 붉게 ‘물든’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브라만은 이 세계로 ‘보일’ 뿐, 결코 실제로 이 세계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브라만은 영원히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자신의 본성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계는 우리의 무지한 인식 속에서만 그 위에 덧씌워진 환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완전함은 결코 브라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꿈속에서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처럼,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만 실재하는 상대적인 현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야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브라만과 독립된 제2의 실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불이 (不二, advaita)’라는 샹카라의 대전제는 무너집니다.
샹카라는 마야가 브라만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브라만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관계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불과 그 ‘타는 힘’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타는 힘은 불과 분리될 수는 없지만, 불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마야는 브라만이 가진 신비로운 힘 (śakti)으로서, 브라만에 의존하여 존재하지만 브라만의 본질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처럼 설명 불가능한 마야의 존재 때문에, 우리는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을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샹카라 철학의 여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 유일하고 완전하며 변하지 않는 순수한 의식이라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이 다채롭고, 변화하며, 고통과 기쁨으로 가득 찬 세계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샹카라는 이 깊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리가 진실을 두 가지의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의 풍경을 맨눈으로 볼 때와, 특정한 색깔의 안경을 쓰고 볼 때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풍경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에 따라 다른 현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이 현실, 즉 ‘경험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의 차원 (vyāvahārika-satya)’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마주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입니다. 이 세계 안에서, 절대적 실재인 브라만은 마야라는 신비로운 힘의 안경을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때 브라만은 더 이상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순수한 의식이 아니라,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파괴하는 구체적인 역할을 가진 인격적인 신, 즉 이슈바라 (Īśvara) 혹은 사구나 브라만 (saguṇa-brahman, 속성을 가진 브라만)으로 나타납니다.
이슈바라는 바로 우리가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기도하며, 은총을 구하는 바로 그 신의 모습입니다. 그는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우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그에 따른 결과를 주는 정의로운 지배자입니다. 우리가 사원에서 경배하는 비슈누, 시바, 혹은 위대한 여신 데비가 바로 이 이슈바라의 다양한 얼굴들입니다. 이 상대적인 진리의 차원 안에서,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는 분명히 분리된 실체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신을 향한 헌신을 바치며, 선한 행위를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헛된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샹카라는 우리에게 이 차원이 최종적인 진실이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야의 안경을 벗어 던졌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궁극적인 진리 (pāramārthika-satya)’의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숭배했던 인격신 이슈바라마저도 마야의 영역에 속하는 상대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나’라고 불리는 이 개별적인 영혼,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이 우주 전체는 모두, 하나의 실재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모든 마야의 장막이 걷혔을 때 드러나는 브라만의 참된 본성은, 어떠한 속성이나 행위, 이름이나 형상도 없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의식, 즉 니르구나 브라만 (nirguṇa-brahman, 속성이 없는 브라만)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창조주’나 ‘지배자’와 같은 역할을 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나 지배와 같은 모든 행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만 의미가 있는데, 니르구나 브라만은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 자체를 낳은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샹카라 철학이 가리키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실재입니다.
샹카라는 이 두 가지 진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매일 밤 경험하는 ‘꿈’의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겪는 모든 사건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실제적입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호랑이에게 쫓기며 진짜 공포를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진짜 기쁨을 느낍니다. 꿈의 논리 안에서 그 모든 것은 100퍼센트 유효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심지어 꿈속의 신에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한낱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꿈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호랑이도, 나를 기쁘게 하던 연인도, 그리고 고통받던 ‘꿈속의 나’ 자신마저도, 사실은 모두 나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샹카라가 말하는 해탈이란, 바로 이 우주적인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브라만에 대한 올바른 앎 (jñāna)이라는 깨달음의 빛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던 이 세계와 ‘나’라는 개별적 자아는 뱀이 밧줄로 드러나듯, 그 본래의 실체인 브라만으로 환원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세계가 물리적으로 폭발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침대와 방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오직, 세계를 나와 분리된 실재로 보았던 우리의 무지한 시선, 즉 꿈을 현실이라고 착각했던 우리의 어리석음뿐입니다. 깨달은 자의 눈에는 더 이상 수많은 존재들이 경쟁하고 다투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유일한 실재인 브라만이 강물과 나무, 사람과 별이라는 무수한 이름과 형상의 옷을 입고 스스로와 즐겁게 유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위대한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꿈속의 인물이 되어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침내, 그 모든 꿈을 꾸고 있는 유일하고 영원한 꿈꾸는 자, 즉 브라만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은 모두 꿈속 인물의 몫이었을 뿐, 꿈을 꾸는 자의 본질은 단 한 순간도 상처받거나 더럽혀진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샹카라가 제시하는, 모든 고통을 넘어서는 가장 완전하고도 장엄한 자유의 길입니다.
1-5.2. 무지와 동일시, 속박의 원인
한 나라의 왕이 깊은 잠에 빠져 자신이 비참한 거지라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꿈속에서 그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추위에 떨며,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겪는 모든 고통은 꿈을 꾸는 동안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절대적인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와중에도 그는 단 한 순간도 왕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의 고통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꿈속의 거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샹카라 철학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속박 (bandha)과 고통의 본질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본성인 아트만/브라만이 실제로 어딘가에 갇히거나 더러워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히 순수하고 자유롭습니다. 속박의 유일한 원인은 바로 ‘무지 (Avidyā)’이며, 그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치명적인 착각, 즉 ‘동일시 (adhyāsa)’입니다.
샹카라가 말하는 무지 (Avidyā, 아비드야)는 단순히 ‘지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이 그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온갖 환영과 공포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힘인 것처럼, 실재의 참된 본성을 가리고 그 위에 거짓된 세계를 창조해내는 강력하고도 창조적인 힘입니다. 이 무지는 우주적 차원에서는 마야 (Māyā)라고 불리지만, 개별적인 존재의 내면에서 작동할 때는 아비드야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anādi) 근원적인 어둠이며, 우리가 ‘언제부터 무지가 시작되었는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미 무지 속에서 질문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무지는 태양 앞의 구름처럼 우리의 본성인 브라만의 빛을 가려버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가려진 자리 위에서, 모든 비극의 씨앗인 ‘동일시’가 일어납니다.
샹카라는 이 ‘동일시’의 과정을 ‘아디야사 (Adhyāsa)’, 즉 ‘중첩 (superimposi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보았던 어떤 것의 속성을, 지금 눈앞에 있는 다른 어떤 것 위에 잘못 덧씌우는 정신 작용입니다. 저 유명한 밧줄과 뱀의 비유에서, 우리가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은 단순히 밧줄을 보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밧줄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무지 (Avidyā) 위에, 과거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뱀의 형상과 그 속성 (꿈틀거림, 위험함 등)을 적극적으로 ‘덧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뱀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 앞에서 생생한 공포를 자아냅니다. 우리의 모든 실존적 고통은 바로 이 아디야사라는 근본적인 오류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 순수한 주체 (subject)이자 ‘보는 자’인 참된 자아 (Ātman)와, 끊임없이 변하며 ‘보이는 대상 (object)’에 불과한 ‘자아가 아닌 것 (anātman)’을 서로 뒤섞어 버립니다. 즉, 우리는 아트만이라는 밧줄 위에, 자아가 아닌 것들이라는 뱀의 환영을 끊임없이 덧씌우고, 그 환영을 바로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적 기관:’‘안타카라나 (antaḥkaraṇa)’
그렇다면 우리가 ‘나’라고 잘못 동일시하는 이 ‘자아가 아닌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샹카라는 이 거짓된 자아의 정체를, 마치 숙련된 외과의사가 질병의 근원을 찾아내듯 집요하게 파헤쳐 그 복잡하고 미세한 구조를 낱낱이 해부합니다. 그는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이 주관적 경험의 가장 중심에는 ‘안타카라나 (antaḥkaraṇa)’, 즉 ‘내적 기관’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거대한 마음의 복합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네 가지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나’라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정교한 심리적 장치입니다.
그 첫 번째 기능은 마나스 (manas), 즉 ‘감각 마음’입니다. 마나스는 우리 내면 세계의 문지기이자 수신기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눈, 귀, 코, 혀, 피부라는 다섯 감각의 문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날것의 정보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마나스는 이 정보들을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장의 소음처럼,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인상들의 연속일 뿐입니다. 마나스의 본질은 망설임과 의심입니다. 그것은 대상을 마주할 때 ‘이것일까, 저것일까’ 하고 흔들리며, ‘이것을 원한다, 저것을 원치 않는다’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의 표면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마나스는 외부의 자극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뿐 스스로 안정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마나스가 받아들인 불확실한 정보들은 두 번째 기능인 붓디 (buddhi), 즉 ‘지성’ 또는 ‘결단심’으로 넘어갑니다. 붓디는 내적 기관의 총리나 재판관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마나스가 가져온 혼란스러운 정보들을 분석하고, 과거의 기억과 비교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분별하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능입니다. ‘저것은 항아리다’, ‘이것은 옳은 일이다’,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다’와 같은 모든 확정적인 판단과 신념은 바로 이 붓디에서 나옵니다.
붓디는 우리 세계관의 설계자이며, 우리의 모든 경험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강력한 분별의 힘 때문에, 붓디는 우리를 속박하는 가장 견고한 감옥의 벽돌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똑똑하다’ 혹은 ‘나는 실패자다’와 같은 잘못된 판단에 한번 집착하게 되면, 붓디는 그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왜곡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붓디 (buddhi)가 어떤 대상을 향해 ‘이것은 이러이러하다’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세 번째 기능인 아함카라 (ahaṃkāra), 즉 ‘자아의식’ 또는 ‘에고’가 즉시 개입합니다. 이것은 ‘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그 의미 그대로, 모든 경험을 ‘나의 것’으로 도장 찍어 귀속시키는 강력한 중심점입니다. 아함카라는 붓디가 내린 객관적인 판단을 주관적인 경험으로 강탈합니다.
예를 들어, 붓디가 ‘이것은 즐거운 경험이다’라고 판단하면 아함카라는 ‘내가 즐겁다’고 느끼게 하고, ‘저것은 고통스러운 사건이다’라고 판단하면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합니다. ‘훌륭한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객관적인 인식이 ‘내가 그 일을 해냈다’는 교만으로 바뀌는 것도 바로 이 아함카라의 작용입니다.
“내가 본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행한다”고 말하게 하는 바로 그 강력하고도 집요한 ‘나’라는 느낌이 바로 이 아함카라의 작용입니다. 샹카라에게, 모든 고통과 속박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 아함카라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나’와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 들고, 그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 불안해하며, 그것을 잃었을 때 고통받는, 환영의 중심축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기능은 이 모든 작용의 보이지 않는 토대가 되는 치타 (citta), 즉 ‘기억 저장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중립적인 데이터베이스가 아닙니다. 치타는 우리가 수많은 생을 거치며 경험했던 모든 행위와 생각, 감정들이 남긴 미세한 인상들, 즉 잠재의식 (saṃskāra)이 저장되어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바다입니다. 이 잠재의식들은 각각 쾌락이나 고통의 감정적 에너지를 품고 있으며, 현재의 마나스와 붓디, 그리고 아함카라의 작용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에게 이유 없이 끌리거나 반감을 느끼고, 특정한 상황에서 비합리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모두 이 치타라는 깊은 저장고에서 올라온 과거의 그림자 때문입니다.
샹카라는 이 네 가지 기능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내적 기관, 즉 안타카라나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식이 없는, 프라크리티에서 생겨난 미세한 물질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순수한 의식의 빛인 아트만이 이 안타카라나라는 거울에 반사될 때, 비로소 놀라운 착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이 진짜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이 마음의 작용들을 바로 ‘나’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결정한다”, “나는 슬프다”라는 모든 동일시는, 사실은 빛나는 태양 (아트만)이 구름 (안타카라나)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그림자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그 그림자를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따라서 이 마음의 작용을 바꾸거나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는 이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그것을 비추는 영원한 빛이다’라는 진실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나’라고 착각하는 세 가지의 다른 몸
이러한 동일시는 더 나아가, 우리가 입고 있는 여러 겹의 옷과도 같은 육체의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베단타 철학은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사실은 세 가지의 다른 몸, 즉 ‘세 가지 몸 (śarīra-traya)’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분석합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은 ‘거친 몸 (sthūla-śarīra、스툴라 샤리라)’, 즉 우리가 만지고 볼 수 있는 이 물리적인 육체입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 거친 원소 (흙, 물, 불, 바람,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을 겪습니다. “나는 키가 크다”, “나는 뚱뚱하다”, “나는 늙었다”라는 동일시는 바로 이 거친 몸의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그보다 더 미세한 안쪽에는 ‘미세한 몸 (sūkṣma-śarīra、숙슈마 샤리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 거친 몸과 함께 소멸하지 않고, 우리의 카르마와 잠재의식을 다음 생으로 운반하는 영적인 운반체입니다. 이 미세한 몸은 앞서 말한 안타카라나 (마나스, 붓디, 아함카라, 치타)와 다섯 가지 인식 기관, 다섯 가지 활동 기관, 그리고 다섯 가지 생명 에너지 (prāṇ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활동하는 것이 바로 이 미세한 몸입니다. 꿈속에서는 물리적인 육체가 잠들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세한 몸을 통해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끼며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지혜롭다”, “나는 욕망한다”라는 모든 정신적, 감정적 동일시는 바로 이 미세한 몸의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원인의 몸 (kāraṇa-śarīra, 까라나 샤리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층으로, 거친 몸과 미세한 몸의 원인이 되는 씨앗의 형태로 잠재해 있는 무지 (avidyā)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 (suṣupti)에 빠졌을 때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 원인의 몸입니다. 그곳에는 깨어있을 때의 외부 세계도, 꿈꿀 때의 내면 세계도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도, 어떤 감정도, 분별도 없는 완전한 어둠과 고요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철학적 전통은 바로 이 모든 것이 사라진 순수한 ‘무 (無)’의 상태처럼 보이는 지점을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와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자아, 즉 아트만 (Ātman)은 우리가 경험하는 육체나 마음, 심지어 꿈 없는 깊은 잠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트만은 깨어있을 때, 꿈꿀 때, 깊이 잠들었을 때의 모든 상태를 끊임없이 지켜보는 '영원한 주시자'이며, 육체나 마음 등은 그 주시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깨어있는 나, 꿈꾸는 나, 그리고 깊이 잠든 나, 이 모든 경험의 배후에서 단 한 순간도 잠들거나 변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그저 고요히 지켜보고 있는 순수한 의식의 빛이야말로 진정한 ‘나’, 즉 아트만입니다. 아트만은 경험되는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원한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잠의 상태 역시 우리가 경험하고 기억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 실재인 아트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지와 동일시로 인해, 영원하고 순수한 아트만은 이 세 가지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몸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아트만은 스스로를 ‘지바 (jīva)’, 즉 윤회하는 개별 영혼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지바는 아트만이라는 실재 위에 덧씌워진 환영적인 인격체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바가 “나는 행위자 (kartā)이다”라고 생각하며 카르마를 쌓고, “나는 경험자 (bhoktā)이다”라고 생각하며 그 행위의 결과인 쾌락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박 (bandha)의 실체입니다.
속박은 외부의 어떤 힘이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아가 아닌 것’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지적인 오류이자 자기 최면 상태입니다.
샹카라는 이 끔찍한 비극의 원인이 너무나도 단순한 ‘착각’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동시에 그 해법 또한 너무나도 명확함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얻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꿈속의 거지가 자신이 왕임을 깨닫는 순간, 그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지듯,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참된 자아, 즉 브라만임을 깨닫는 앎의 빛 속에서, 이 모든 속박의 사슬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환영처럼 저절로 녹아내릴 것입니다.
1-5.3. 지식 (Jñāna)을 통한 궁극의 합일
꿈속의 거지가 자신이 겪는 모든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더 많은 음식을 구걸하거나, 더 따뜻한 옷을 얻으려 애쓰거나, 자신을 가엾게 여겨줄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꿈 속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를 진정으로 구원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나는 거지가 아니라 왕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샹카라의 불이일원론 (Advaita Vedānta)이 제시하는 해탈의 길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 (Karma)를 통해 공덕을 쌓거나, 어떤 신을 향한 헌신 (Bhakti)을 통해 은총을 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속박의 근본 원인이 ‘무지 (Avidyā)’라는 인식론적 오류에 있다면, 그 유일한 해결책 역시 ‘올바른 앎 (Jñāna)’이라는 인식론적 깨달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샹카라에게, 브라만에 대한 완전한 앎은 해탈에 이르는 여러 수단 중 하나가 아니라, 앎 그 자체가 바로 해탈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중요하고 혁명적인 선언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샹카라가 ‘행위의 길 (Karma Mārga)’과 ‘지혜의 길 (Jñāna Mārga)’ 사이에 그었던 날카롭고도 분명한 경계선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미맘사 학파와 같은 전통적인 사상가들은 베다에 명시된 올바른 제사 의례와 같은 선한 행위를 통해 더 나은 세상에 태어나거나 천상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샹카라는 이러한 행위의 길은 결코 영원한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네 가지의 유한한 결과를 낳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이전에 없었던 것을 ‘생산’하거나 (utpatti), 이미 있는 것을 ‘변형’시키거나 (vikāra),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거나 (āpti), 혹은 무언가를 ‘정화’ (saṃskāra)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공은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항아리라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우유는 발효 과정을 통해 요구르트로 변형되며, 여행자는 길을 걸어 마을에 도달하고, 더러운 거울은 닦는 행위를 통해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갈망하는 해탈, 즉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인 브라만은 이 네 가지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브라만은 이미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이므로 새롭게 생산될 수 없습니다. 브라만은 어떠한 부분도 없고 변하지 않는 절대자이므로 변형될 수 없습니다. 브라만은 모든 곳에 두루 퍼져 있는 실재이므로 어떤 장소처럼 도달해야 할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브라만은 본래부터 영원히 순수하므로 정화될 필요가 없습니다.
해탈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착각했지만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는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왕자가 어릴 때 기억을 잃고 자신이 가난한 농부라고 믿으며 평생을 살았다고 합시다. 어느 날 신하가 찾아와 그의 진짜 신분을 알려주었을 때, 그는 어떤 행위를 통해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앎의 순간, 자신이 ‘원래부터 왕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입니다. 앎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가리고 있던 무지의 장막을 제거할 뿐입니다.
행위는 무지와는 다른 영역에 속하므로, 결코 무지를 직접적으로 파괴할 수 없습니다.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빛을 비추는 것뿐인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샹카라는 카르마 (행위)가 결코 해탈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다만,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해지는 이타적인 행위 (karma-yoga)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 이기심과 같은 거친 먼지들을 닦아내는 정화 (citta-śuddhi)의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인 앎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중요한 예비적 단계가 될 수는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거울이 깨끗해졌을 때, 비로소 그 거울은 참된 자아의 얼굴을 왜곡 없이 비출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무지를 파괴하는 구원적인 앎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것은 단순히 책을 읽거나 지적인 토론을 통해 얻어지는 파편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존재 전체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완전한 변혁의 과정이며,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체계적인 단계, 즉 슈라바나 (Śravaṇa), 마나나 (Manana), 니디디야사나 (Nididhyāsana)를 통해 성취됩니다.
이 세 가지는 이미 앞서 간단하게 살펴 보았지만 다시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슈라바나 (Śravaṇa), 즉 듣는 단계는 진리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듣는 것'인가? 베단타 전통은 브라만에 대한 앎이 우리 스스로의 추론이나 상상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임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오직 현상 세계만을 포착할 수 있고, 우리의 논리는 그 감각이 제공한 재료 안에서만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감각을 초월한 궁극의 실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베단타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즉 베다와 우파니샤드라는 신성한 지혜의 전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경전의 문자는 그 자체로 죽어있습니다. 아무리 우파니샤드를 수천 번 읽어도, 그것이 단지 종이 위의 글자에 머문다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경전의 말씀이 살아있는 힘을 얻으려면, 그것을 체득한 스승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어야 합니다. 스승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교사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전체로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진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경전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이 바로 너다 (Tat Tvam Asi)"라는 선언을 들을 때,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영혼에서 영혼으로 불꽃이 옮겨 붙는 성스러운 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더 이상 스승을 찾지 않습니다.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 있고, 모든 경전이 번역되어 책장에 꽂혀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베단타가 말하는 슈라바나는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존재의 전환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특수한 의심을 알아채고, 그의 마음의 상태를 파악하며, 경전의 어느 구절이 바로 지금 이 제자에게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아냅니다. 책은 모두에게 같은 문장을 보여주지만, 스승은 각 제자에게 필요한 고유한 열쇠를 건넵니다.
마나나 (Manana), 즉 사유의 단계는 맹목적인 신앙을 지적인 확신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베단타 철학의 독특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많은 종교적 전통들은 의심을 죄악시하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베단타는 정반대입니다. 베단타는 제자에게 스승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모든 가능한 의심을 제기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내가 정말 브라만이라면, 왜 나는 배고픔을 느끼는가?' '만약 아트만이 불멸이라면,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만약 브라만이 유일한 실재라면, 이 다양한 세계는 무엇인가?' 마나나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이러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베단타의 논리 체계를 사용하여 하나씩 해결해 나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을 논박하기 위한 논쟁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의심의 뿌리를 뽑아내는 치열한 내적 투쟁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마나나의 과정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방식 속에서 자랐고, 증명되지 않은 것을 믿지 않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선언 앞에서 저항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일상적 경험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나나가 필요합니다. 베단타는 우리에게 이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성을 끝까지 사용하여, 우리의 일상적 경험 자체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착각에 불과한지를 스스로 깨닫게 만듭니다.
니디디야사나 (Nididhyāsana), 즉 깊은 명상의 단계는 지적 이해를 존재의 변형으로 전환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과정입니다. 슈라바나와 마나나를 통해 우리는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진리를 머리로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머리의 이해와 가슴의 체험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몸이 아니다'라고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몸에 상처가 나면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나는 마음이 아니다'라고 배웠지만, 모욕을 당하면 여전히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니디디야사나는 바로 이 간극을 메우는 과정입니다.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 수행자는 끊임없이 좌절을 경험합니다. '나는 순수한 의식이다'라고 명상하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저녁에 뭘 먹지?', '내일 회의 준비는 했나?'와 같은 온갖 잡념들이 밀려듭니다. 명상은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베단타는 이 좌절이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수한 생 동안 외부 대상들을 향해 달려가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이제 그 흐름을 역전시켜 내면을 향하도록 만드는 것은 강물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수련을 계속하면, 명상의 질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잡념들이 끼어드는 빈도가 줄어들고,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하나의 생각이 점점 더 길고 안정되게 지속됩니다. 마침내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면, 명상하는 '나'와 명상의 대상인 '브라만'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의 이원성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의 순수한 의식만이 스스로를 비추고 있음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디 (Samādhi), 즉 완전한 삼매의 상태입니다.
이 깨달음의 순간, 지혜의 불꽃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카르마의 거대한 창고를 한순간에 태워버립니다. 산치타 카르마 (sañcita-karma), 즉 아직 결실을 맺지 않은 잠재적 카르마는 그 씨앗이 발아하기도 전에 불에 타 소멸합니다. 아가미 카르마 (āgāmi-karma), 즉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카르마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위한다'는 에고의 주체가 환영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림자의 주인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미 날아가기 시작한 화살처럼, 현재의 육체를 유지시키는 프라라브다 카르마 (prārabdha-karma)는 그 동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때문에 깨달은 현자는 즉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곁에 머뭅니다. 이것이 바로 지반묵티 (Jīvanmukti), 즉 살아있는 해탈의 상태입니다.
지반묵타는 겉으로 보기에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도 먹고, 자고, 말하고, 걷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근본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고통의 장소로 보지 않고, 브라만의 유희 (līlā)로 봅니다. 그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지 않으므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번뇌가 그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배우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더 이상 이기심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세상을 향한 자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마침내 프라라브다 카르마가 모두 소진되어 육체가 죽을 때, 그는 비데하묵티 (Videhamukti), 즉 육체를 벗어난 완전한 해탈에 이릅니다. 이것은 상캬 철학이 말하는 푸루샤의 고립도 아니고, 라마누자가 말하는 신과의 사랑의 관계도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 합일입니다.
'나'라는 관념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집니다. 해탈한 자도, 해탈을 이룬 순간도, 도달한 곳도 없습니다. 애초에 분리된 적이 없었기에 합일도 없고, 떠난 적이 없었기에 귀환도 없습니다. 오직 브라만만이 있었고, 브라만만이 있으며, 브라만만이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존재, 순수한 의식, 순수한 환희인 그 하나가 영원히 스스로를 빛낼 뿐입니다. 이것이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하고 영원한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