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미맘사-베단타: 경전 해석과 진리의 체계

by 이호창

제1-4장: 미맘사-베단타: 경전 해석과 진리의 체계


1-4.1. 미맘사, 행위 (카르마)로서의 진리



‘아푸르바 (Apūrva)’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Ko'ham)?’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갔다면, 그들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진리를 탐구한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숲을 나와 다시 마을의 제사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명상을 위한 방석이 아니라, 제사에 쓸 신성한 국자와 장작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궁극적 실재란 무엇인가 (Kim Brahman)?’가 아니라,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Ko me dharmaḥ)?’였습니다. 이들은 바로 미맘사 (Mīmāṃsā) 학파, 즉 ‘탐구’ 또는 ‘해석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철학 체계들이 베다의 마지막 부분인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사색에서 영감을 얻으려 할 때, 미맘사 학파는 의도적으로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베다의 가장 오래된 부분, 즉 신들을 향한 찬가 (Saṃhitā)와 제사 의례의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는 브라마나 (Brāhmaṇa) 문헌에 자신의 모든 지적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베다는 해탈에 대한 신비로운 암시를 담은 철학서가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 (vidhi, 긍정적 명령)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 (niṣedha, 부정적 명령)을 명시한, 오류 없는 절대적인 법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진리란 사색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베다의 명령에 따라 올바른 행위, 즉 카르마 (Karma)를 수행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미맘사 철학의 세계관은 다른 학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에게 이 세계는 상캬 철학처럼 순수의식과 근원물질의 비극적인 혼동의 장도 아니며, 후대의 샹카라가 주장하듯 브라만이라는 유일한 실재가 드리운 환영 (māyā)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 세계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실제적인, 행위의 무대이자 그 과보를 받는 현실의 공간입니다. 그들은 이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수많은 모순을 낳을 뿐이며, 베다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며, 그 안에서 영원한 자아 (ātman)들은 자신들이 지은 행위의 결과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윤회의 사슬을 끊고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베다에 명시된 올바른 행위, 즉 야즈나 (Yajña, 제사 의례)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다르마 (Dharma)’의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정의됩니다. 다르마는 더 이상 베다 시대의 막연한 우주적 질서 (ṛta, 리타)도 아니며, 후대의 법전에서 말하는 사회적, 윤리적 의무도 아닙니다. 미맘사 학파에게 다르마란 오직 “베다의 명령에 의해 규정된, 제사라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베다가 하라고 명령한 것을 하는 것이 다르마이며,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다르마의 실천입니다. 이 외에 다른 어떤 길도 없습니다.


여기서 미맘사 철학은 하나의 거대한 난제에 직면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상 세계 (svarga)에서의 행복을 얻기 위해 오늘 특정한 제사를 올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제사의 결과인 천상의 행복은 그가 죽은 뒤, 아주 먼 미래에나 실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행한 이 일시적인 행위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먼 미래에 그 결과를 정확하게 낳을 수 있는가? 행위는 행해지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데, 무엇이 그 힘을 미래까지 전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미맘사 학파는 그들의 가장 독창적이고도 중요한 개념인 ‘아푸르바 (Apūrva)’를 제시합니다. ‘아푸르바’는 ‘이전에 없었던 것’,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의미하며, 올바른 제사 의례가 수행되었을 때 그 행위 자체에서 생겨나는 신비로운 힘입니다. 이 아푸르바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행위자의 자아 (ātman) 속에 저장됩니다. 그리고 마치 땅속에 심겨진 씨앗이 때가 되면 싹을 틔우듯, 이 아푸르바는 적절한 시간이 되었을 때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 즉 천상에서의 행복이나 지상에서의 부와 같은 과보를 낳습니다.


이 아푸르바라는 개념의 도입은 힌두 사상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더 이상 인격적인 신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종교 체계에서는 신이 인간의 선악을 심판하고 그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는 재판관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미맘사 철학에서 이 과정은 완벽하게 자동적이고 비인격적입니다. 제사라는 올바른 행위는 마치 불이 뜨거운 성질을 낳듯, 필연적으로 아푸르바라는 힘을 낳고, 그 아푸르바는 기계적인 정확성으로 정해진 결과를 산출합니다.


신들은 제사의 대상으로서 이름이 불릴 뿐, 제사의 결과를 좌우할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들조차 이 제사의 법칙 아래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미맘사 학파는 신의 자리에 ‘행위의 법칙’을 올려놓음으로써, 우주를 하나의 거대하고도 완벽한 도덕적 인과율의 시스템으로 파악했습니다. 이 세계는 신의 변덕이나 은총이 아니라, 오직 행위와 그 결과라는 냉엄한 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아파우루셰야 (Apauruṣeya)’ 선언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되는 베다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흔들림 없어야만 합니다. 미맘사 학파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모든 논리적 역량을 쏟아부어 베다의 무오류성 (無誤謬性)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텍스트에 오류가 개입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통로가 바로 '저자'의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나 심지어 신이라 할지라도, 인격 (puruṣa)을 가진 존재인 이상 무지, 편견, 실수, 혹은 속이려는 의도라는 한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맘사 학파가 이 미세한 균열의 가능성마저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세운 가장 강력하고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바로, 베다는 ‘아파우루셰야 (Apauruṣeya)’라는 선언입니다.


이 개념을 단순히 ‘저자 미상’으로 이해해서는 그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저자 미상’이란 저자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신원을 알지 못할 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저자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맘사 학파가 말하는 ‘아파우루셰야’는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대담한 주장입니다. 그것은 바로 ‘저자 없음’, 즉 저자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베다는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저작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인간이 발견하기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해 온 우주의 근본적인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소리 (śabda)이며 실재입니다. 위대한 현자 (ṛṣi)들은 결코 베다의 저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영원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그 신성한 소리를, 자신들의 오랜 수행으로 맑아진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본 ‘발견자’ 혹은 ‘청취자’에 불과합니다. 베다는 인간의 손을 탄 적이 없기에, 인간의 어떤 오류로도 더럽혀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파우루셰야 사상의 핵심입니다.


베다의 증언 (śabda)


더 나아가, 미맘사 학파는 언어 자체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은 단어 (śabda)와 그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 (artha) 사이의 관계가, 우리가 사회적으로 약속하여 만든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내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소’라는 단어는 ‘소’라는 동물의 본질과 태초부터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어와 의미, 그리고 그 둘의 관계가 모두 영원하기 때문에, 그 단어들로 구성된 베다의 문장들 역시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다의 명령은 어떤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윤리 강령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의무, 즉 다르마입니다. 이처럼 미맘사 철학은 베다의 권위를 수호하는 가장 강력한 지적 보루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냐야 학파처럼 직접지각이나 추론과 같은 다른 인식 수단들도 인정했지만, 인간의 감각과 이성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초월적인 다르마의 영역에 관한 한, 오직 베다의 증언 (śabda)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의 원천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미맘사 학파가 그린 자아 (ātman)의 모습 역시 다른 학파들과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들에게 자아는 상캬 철학에서처럼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순수한 관객이 아닙니다. 자아는 이 세계 속에서 실제로 행위하는 주체 (kartā)이며, 그 행위의 결과를 즐기거나 괴로워하는 경험자 (bhoktā)입니다. 그것은 육체나 감각, 마음과는 분명히 다른, 영원하고 불멸하는 실체입니다.


우리가 “내가 제사를 올린다”, “내가 천상의 행복을 누린다”라고 말할 때, 이 모든 행위와 경험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초기 미맘사 학터들에게 ‘해탈 (mokṣa)’은 그다지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베다의 명령에 따라 올바른 제사를 수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부와 행복을 얻고, 죽은 뒤에는 천상 세계에서 궁극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다른 철학 학파들의 영향으로 해탈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해탈이란, 자아가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아 더 이상 쾌락을 추구하거나 고통을 피하려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윤회의 순환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다라는 영원한 진리의 나침반에 따라, 행위라는 배를 저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미맘사 철학에게 진리는 저 멀리 있는 피안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해지는 모든 신성한 발걸음 속에 있었습니다.









1-4.2. 야즈나 (Yajña): 베다 제사 의례의 실제



고대 베다 시대 사람들의 세계에서, 인간과 신, 그리고 우주는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서로의 숨결에 의지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교환하는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신성한 교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장소가 야즈나 (Yajña), 즉 ‘희생 제사’의 제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사란 단순히 조상을 기리거나 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소박한 의례로 여겨질 수 있지만, 베다 시대의 야즈나는 그러한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그들의 삶의 중심이자 우주의 축소판이었으며, 사회를 조직하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기술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우주의 운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들의 힘을 강화하고, 그 대가로 지상에서의 풍요와 안녕을 보장받는, 하나의 장엄한 우주적 드라마였습니다. 미맘사 철학이 이 야즈나를 ‘궁극의 다르마’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행위가 고대인들의 삶 속에서 차지했던 압도적인 실제성 때문이었습니다.


야즈나가 거행되는 제사 공간은 아무렇게나 마련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구조를 지상에 그대로 재현한 신성한 소우주였습니다. 제사를 거행하기에 앞서, 사제들은 먼저 땅을 신성하게 정화하고, 베다의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정확한 치수로 제단 (vedi)을 쌓았습니다. 제단의 모양과 크기는 제사의 종류와 목적에 따라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단은 사각형으로, 땅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단은 원형으로 만드는 식이었습니다. 이 신성한 공간 안에는 보통 세 개의 제단 불이 놓였습니다. 서쪽에 위치한 원형의 가르하파트야 (Gārhapatya) 불은 ‘가장의 불’로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 (yajamāna)의 가정을 상징하며 결코 꺼뜨려서는 안 되는 영원한 불이었습니다. 동쪽에 위치한 사각형의 아하바니야 (Āhavanīya) 불은 ‘헌납의 불’로서, 신들을 초대하여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입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반달 모양의 닥쉬나그니 (Dakṣiṇāgni) 불은 조상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악마적인 힘으로부터 제사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세 개의 불은 각각 땅과 하늘, 그리고 중간 공간을 상징하며, 이 불들이 타오르는 제사 공간은 바로 우주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이 신성한 무대의 주인공은 제사를 후원하고 그 과보를 받게 될 제주 (yajamāna)와, 그의 뜻을 신들에게 전달하는 전문 사제단, 즉 리트비즈 (ṛtvij)였습니다. 제주는 보통 부유한 가장이나 왕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부와 번영, 자손의 탄생, 전쟁에서의 승리, 혹은 죽은 뒤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사제들을 고용하여 제사를 의뢰했습니다. 야즈나는 극도로 복잡하고 정밀한 기술을 요구했기에, 오랜 시간 베다를 학습하고 구전으로 전수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익힌 전문 사제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주요 제사에는 보통 네 종류의 사제가 참여하여, 각자 맡은 역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호트리 (hotṛ)로, 그는 『리그베다』의 전문가로서 신들을 제단으로 초대하고 찬양하는 아름다운 찬가들을 낭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는 우드가트리 (udgātṛ)로, 그는 『사마베다』의 전문가로서 제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신성한 멜로디에 맞추어 찬가를 노래하여 제사의 효력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셋째는 아드바르유 (adhvaryu)로, 그는 『야주르베다』의 전문가이자 제사의 총감독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제단을 쌓고, 불을 피우며, 제물을 준비하고 바치는 모든 물리적인 행위를 직접 수행하며, 그 모든 과정에 필요한 짧은 제의 공식 (yajus)들을 읊조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브라만 (brahman) 사제는 이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는 최고의 감독관이었습니다. 그는 세 베다 모두에 정통해야 했으며, 제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실수나 예기치 않은 사태를 즉시 알아차리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주문을 외워 제사가 완벽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이 네 명의 사제가 마치 하나의 몸처럼 조화를 이루어 각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야즈나는 우주를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야즈나의 핵심은 헌납 (haviryajña), 즉 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행위였습니다. 신들 역시 인간처럼 음식을 통해 힘을 얻고 기쁨을 느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물 (havis)로는 주로 우유, 버터기름 (ghṛta), 곡식, 빵 등이 사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정화된 버터기름은 불의 신 아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드바르유 사제가 신성한 주문과 함께 국자로 버터기름을 떠서 아하바니야 불꽃 속으로 던져 넣는 순간은 제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불꽃은 제물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하늘로 타올랐고, 그 연기와 향기는 인간의 기원을 신들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신성한 전령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불꽃의 중심에는 모든 제사의 필수적인 매개자인 불의 신 아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들의 입이자 사제이며, 그의 도움 없이는 그 어떤 제물도 신에게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과 신, 땅과 하늘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습니다.


수많은 야즈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신성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소마 (Soma) 제사였습니다. 소마는 특정 식물의 줄기를 으깨어 짠 즙으로 만든 신성한 음료이자, 그 음료 자체를 신격화한 신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 황금빛의 음료는 신들에게는 불멸의 생명 (amṛta)과 힘을, 그것을 마시는 사제들에게는 황홀한 신비 체험과 시적 영감을 준다고 믿어졌습니다. 소마 제사는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 복잡한 의례였습니다. 사제들은 이른 아침부터 돌로 소마 줄기를 으깨고, 양털로 만든 체에 그 즙을 걸러 우유나 보릿가루와 섞어 신성한 음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는 시간, 정오, 그리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호트리 사제는 폭풍우의 신 인드라를 비롯한 신들을 소마 연회에 초대하는 우렁찬 찬가를 낭송했습니다. 특히 인드라는 소마를 가장 사랑하는 신으로, 그는 소마를 마시고 힘을 얻어 악마 브리트라를 물리치고 세상에 비를 내리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제들은 신들에게 바친 소마의 일부를 자신들도 마셨고, 그 환각적인 힘 속에서 자신들이 신과 하나가 되는 듯한 신비로운 합일의 경지를 체험했습니다. 소마 제사는 단순히 신에게 음료를 바치는 것을 넘어, 인간이 신의 세계를 직접 엿보고 그 힘에 동참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체험의 장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즈나는 단순히 개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의례를 넘어, 왕의 권위를 확립하고 사회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공공 의례로 발전했습니다. 그중 가장 장엄하고 유명한 것이 바로 아슈바메다 (Aśvamedha, 마사, 馬祀), 즉 말 희생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오직 위대한 왕만이 거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제사로서, 왕의 절대적인 주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정치적, 종교적 이벤트였습니다. 제사는 왕이 선택한 가장 훌륭한 백마 한 마리를 1년 동안 자유롭게 온 땅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왕의 군대는 그 말의 뒤를 따르며, 그 말이 들어가는 모든 영토의 왕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만약 어떤 왕이 그 말을 막아서면, 그것은 곧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1년 뒤, 말이 무사히 돌아오면, 왕은 수백 명의 사제들을 초빙하여 며칠에 걸쳐 성대한 제사를 거행하고, 마침내 그 말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왕은 ‘전륜성왕 (cakravartin)’이라는 칭호를 얻고, 그의 주권은 신들에 의해 보증된 절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수천 년 전의 이 거대하고 장엄한 희생 제사는 단지 역사책 속의 기이한 풍습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아슈바메다의 상징적 구조 속에는, 현대인의 삶과 영적 여정을 관통하는 가장 깊은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이 고대의 의례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지금도 펼쳐지고 있는, 자아 (ego)의 왕국을 건설하고 마침내 그것을 신성에게 바치는 위대한 드라마의 완벽한 축소판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삶이라는 왕국의 왕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하는 야망과 욕망, 생명력과 의지는 바로 왕이 풀어놓은 저 자유로운 백마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세상이라는 광활한 들판에 풀어놓습니다. 우리는 경력을 쌓고, 관계를 맺으며, 명성을 얻고, 지식을 탐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전과 마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경쟁자를 만나 싸워야 하고 (전쟁),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 앞에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했을 때, 우리의 백마는 마침내 영광스럽게 왕국으로 귀환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성공과 개인적인 성취라는, 눈부신 왕관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아슈바메다의 진정한 정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왕은 자신의 주권을 확립해 준 바로 그 백마를,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성취의 상징을, 신성한 불꽃 앞에 기꺼이 제물로 바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카르마 요가 (Karma Yoga)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의 완벽한 상징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속박하는 것은 성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성취에 대한 우리의 ‘소유권’ 주장, 즉 ‘내가 이것을 이루었다’는 자아의 교만입니다. 아슈바메다의 마지막 제사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당신이 이룬 모든 성공과 당신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 그리고 당신을 지금의 당신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강력한 의지와 야망마저도,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으라고 말입니다. 그것들을 모두 더 높은 실재, 즉 신성 (神性) 혹은 우주적 다르마의 제단 위에 온전한 제물로 바칠 때, 비로소 당신은 진정한 왕, 즉 ‘전륜성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전륜성왕은 더 이상 외부 세계의 영토를 지배하는 왕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왕국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자, 즉 성공에 교만하지 않고 실패에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의 모든 행위를 신성한 봉헌으로 바칠 줄 아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즈나는 고대 인도 사회의 종교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삶의 모든 국면을 신성하게 만드는 가장 실제적이고도 강력한 실천이었습니다. 미맘사 학파가 이 복잡하고 생생한 행위의 세계 속에서,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의무로서의 진리, 즉 다르마를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 전체가 바로 이 아슈바메다와 같은 하나의 거대한 제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신성을 향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음을 이 고대의 지혜는 속삭여주고 있습니다.









1-4.3. 언어와 실재의 영원한 관계



우리는 어떻게 ‘소’라는 소리가 저 네 발 달린 동물을 가리킨다고 알게 되었는가? 누군가 최초의 인간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는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사회적 약속을 통해 그렇게 정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언어학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미맘사 (Mīmāṃsā) 학파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철학 전체의 존립이 걸린, 가장 치열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자의적인 약속의 체계에 불과하다면, 신성한 베다 경전에 담긴 문장들 역시 그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가르침이 될 뿐입니다. 베다의 명령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진리, 즉 영원한 다르마 (Dharma)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명령을 담고 있는 언어 자체가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실성을 담보해야만 합니다. 미맘사 학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가 실재 (實在)와 맺고 있는 관계가 결코 우연적이거나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존재해 온 영원하고도 분리 불가능한 관계라는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미맘사 철학의 대전제는, 다르마에 관한 한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오직 베다의 증언 (śabda, 샤브다)만이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베다를 구성하는 ‘소리 (śabda)’, 즉 단어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미맘사 사상가들은 먼저 ‘소리’의 본질에 대한 깊은 탐구에 나섭니다.


우리가 입으로 내뱉는 ‘소’라는 발음은 어떻습니까? 이 소리는 발음되는 순간 생겨났다가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물결과도 같습니다. 물결은 잠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호수는 다시 고요해집니다. 만약 단어의 본질이 이처럼 덧없는 물결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그 안에 영원한 진리가 담길 수 있겠습니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맘사 학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세계를 뒤집는 대담하고도 심오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듣는 이 물리적인 소리가 진짜 단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미맘사 사상가들에게, 우리가 발음하는 물리적인 소리, 즉 드바니 (dhvani)는 진짜 단어가 아니라, 진짜 단어를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어둠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비추는 손전등 불빛과도 같습니다. 손전등 불빛은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사물의 존재를 우리에게 잠시 ‘드러내’ 보여줄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짜 ‘소리’, 즉 샤브다 (śabda)는 영원 전부터 모든 공간에 편재해 있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실체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우리는 이 영원한 실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폐에서 나오는 공기의 힘, 즉 바람 (vāyu, 바유)을 빌려 이미 존재하는 그것을 우리의 청각이 인지할 수 있도록 ‘현현 (manifest)’시킬 뿐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단어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단위인 음소 (音素)의 차원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소’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ㅅ’, ‘ㅗ’와 같은 근본적인 음소들, 즉 바르나 (varṇa)들은 각각이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실체들입니다. 그것들은 마치 우주적인 알파벳의 글자들과도 같아서,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소’라고 말을 할 때, 우리는 ‘ㅅ’과 ‘ㅗ’라는 새로운 실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영원히 존재하는 그 음소들을 우리의 의지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소’와 당신이 말하는 ‘소’, 그리고 천 년 전 인도의 현자가 말했던 ‘소’라는 발음은, 물리적으로는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영원한 실체를 각기 다른 순간에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단어 그 자체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닌 영원한 실체임을 증명함으로써, 미맘사 학파는 자신들의 철학 전체를 떠받치는 가장 단단하고도 흔들림 없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만약 베다 경전을 구성하는 단어들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라면, 그 단어들이 담고 있는 의미와 그 문장들이 선포하는 진리 또한 시간의 흐름에 의해 침식되거나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왜곡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생각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성한 몸 그 자체가 됩니다. 미맘사 학파에게, 베다의 진리가 시간의 흐름을 넘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언어의 본질 자체가 영원하다는 깊은 믿음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어가 영원한 실체라는 깊은 믿음 위에 섰을 때, 미맘사 학파의 사상가들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거대한 질문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소리가 영원하다면, 그 소리가 가리키는 대상, 즉 의미 (artha) 또한 영원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만약 언어와 실재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거나 사라진다면, 언어의 영원성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미맘사 철학의 존립이 걸린,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소’라는 단어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만약 그 단어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특정한 털 색깔과 뿔 모양을 가진 이 누렁소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심각한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 누렁소는 태어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어 사라질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렁소가 태어나기 전에는 ‘소’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고, 그 누렁소가 죽은 뒤에는 다시 의미를 잃게 될 것입니다. 단어는 영원한데 그 의미가 일시적이라면, 이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이처럼 단어가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사물 (vyakti)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순간, 언어와 실재 사이의 영원한 연결은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미맘사 학파는 우리가 ‘소’라고 말할 때, 결코 이 누렁소나 저 얼룩소와 같은 특정한 개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단어가 가리키는 진짜 대상은, 그 모든 개별적인 소들의 배후에 존재하며, 그 모든 소들을 ‘소’이게끔 만드는 공통되고 영원한 본질, 즉 보편적인 형태 (ākṛti) 또는 종 (種)의 본질 (jāti)이라는 것입니다. ‘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눈앞의 이 소나 저 소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소 안에 동일하게 내재해 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소로 있음 (cowness)’ 그 자체입니다.


이 ‘소로 있음’이라는 보편적 실재는 단순히 우리 마음이 여러 소들의 공통점을 추상화하여 만들어낸 정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미맘사 학파에게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저 멀리 있는 천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개별적인 소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입니다. 각각의 소들은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지만, 그들 모두를 관통하며 흐르는 ‘소로 있음’이라는 보편적 실재는 결코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소를 보고도 그것이 ‘소’임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마음이 그 소 안에 내재된 영원한 ‘소의 특성’이라는 보편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미맘사 학파는 단어의 의미가 되는 대상을, 태어나고 죽는 개별자의 차원을 넘어, 결코 변하지 않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실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언어와 실재 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하고도 흔들림 없는 토대 위에 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영원한 단어는 영원한 의미를 가리키며, 그 둘의 관계 또한 영원합니다. 이 세 가지의 영원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베다 경전의 모든 문장은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이나 시대적 변화를 넘어서는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베다가 “천상을 원하는 자는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명령할 때, ‘천상’과 ‘제사’라는 단어의 의미는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를 가리키므로, 그 명령 또한 영원히 유효한 절대적인 다르마 (Dharma)가 되는 것입니다. 미맘사 학파의 이 치열한 언어 철학은, 결국 행위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성한 율법의 영원성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단단하고도 깊은 지적 초석이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미맘사 언어 철학의 가장 깊은 심장부에 도달합니다. 영원한 단어 (śabda)와 영원한 의미 (artha)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 둘을 연결하는 관계 (sambandha)가 만약 인간의 약속 (saṃketa)에 불과하다면, 베다의 절대적 권위라는 거대한 성채는 모래 위에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태초의 어떤 인간이나 신이 모여 “자, 지금부터 이 소리를 저 네 발 달린 동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자”라고 정했다면, 그 약속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자의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계약에 불과하다면, 그 언어로 쓰인 베다 역시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미맘사 학파는 바로 이 ‘언어 약정설’이 가진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을 철저하게 논파했습니다. 만약 언어를 최초로 만든 존재가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약속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 어떤 형태의 언어를 사용했어야만 합니다. ‘이 소리는 저것을 의미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소리’, ‘의미’, ‘약속’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공유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무한한 후퇴 (anavasthā)에 빠지게 되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따라서 단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는 결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미맘사 학파는 그 관계가 ‘아우트팟티카 (autpattika)’, 즉 ‘타고난’, ‘본래적인’, ‘자연적인’ 관계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마치 불과 뜨거움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불은 뜨거움을 자신의 속성으로 선택하지 않았으며, 뜨거움은 불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뜨거움은 불의 본질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라는 소리는 ‘소로 있음’이라는 의미와 원인도 없고 시작도 없이 영원 전부터 내재적으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소’라는 소리는 ‘소로 있음’이라는 실재의 소리-몸 (sound-body)이며, 그 둘의 관계는 인간의 의지나 신의 개입을 초월한, 우주의 근본 구조 그 자체입니다.


이처럼 단어와 의미, 그리고 그 둘의 관계라는 세 개의 기둥이 모두 영원하고 내재적이기 때문에, 그 단어들로 구성된 베다의 문장들 역시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담게 됩니다. 베다가 “천상을 원하는 자는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의미는 결코 변하거나 왜곡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법률이나 도덕률처럼 시대에 따라 재해석될 필요가 없는, 객관적이고 영원한 사실의 진술입니다. 이 진술의 힘은 그것을 말한 저자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맘사 학파에게 베다에는 저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apauruṣeya, 아파우루셰야). 베다의 힘은 바로 언어 그 자체에 내재된, 실재와의 영원한 연결에서 나옵니다.


이처럼 미맘사 학파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깊고도 치밀한 탐구를 통해, 베다의 모든 명령이 인간의 주관적인 해석을 넘어선, 객관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진리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 언어는 단순히 실재를 묘사하는 불완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재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는 진리의 몸이었으며, 그 몸을 통해 드러난 다르마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영원한 단어들이 영원한 의미를 가리키고, 그 둘의 관계마저 영원하다는 깊은 확신 위에 섰을 때, 미맘사 학파의 사상가들은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거대한 질문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원한 단어들이 모여 하나의 문장 (vākya)을 이룰 때,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의미가 생겨나는가? 개별적인 단어의 의미들은 마치 흩어진 구슬과 같은데, 무엇이 그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의미 있는 목걸이로 만드는가? 이 질문은 언어 철학의 가장 깊은 수수께끼이며, 미맘사 학파는 이 문제 앞에서 다시 한번 그들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분석의 칼날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학파는 두 개의 주요한 흐름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길을 이끈 이는 위대한 사상가 쿠마릴라 바타 (Kumārila Bhaṭṭa)입니다.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상식적인 직관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는 문장을 구성하는 각각의 단어들이 먼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립적인 의미를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소’, ‘풀’, ‘먹는다’라는 단어들은 각각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단어들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먼저 소의 형상, 풀의 형상, 그리고 먹는 행위의 관념이 각각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우리의 마음은 이 개별적으로 떠오른 의미들을 문법적인 기대와 논리적인 가능성, 그리고 문맥적인 필요에 따라 서로 연결하여, ‘소가 풀을 먹는다’는 하나의 통일된 문장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집을 짓기 위해 먼저 각각의 벽돌과 기둥, 서까래를 완벽하게 준비한 뒤, 그것들을 설계도에 따라 순서대로 조립하여 하나의 완전한 집을 만들어내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벽돌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비로소 집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서, 문장의 의미는 개별 단어들의 의미가 합쳐져 ‘이후에’ 구성되는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쿠마릴라의 제자였던 프라바카라 (Prabhākara)는 스승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급진적이고도 통찰력 있는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단어란 애초에 고립된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단어는 오직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 속에서, 즉 문장이라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가져오다’라는 동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단어는 그 자체로 ‘누가’, ‘무엇을’, ‘어디로’ 가져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져오다’라는 단어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를 갈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소에게’라는 명사는 ‘무엇을 하다’라는 행위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따라서 프라바카라에게 문장의 의미는 개별 단어들의 의미를 단순히 합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문장이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의 통일된 의미가 먼저 존재하며, 그 전체적인 의미가 각각의 단어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완전한 조각상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에 가깝습니다. 각각의 부분은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집니다. 이 견해에서 단어의 의미는 문장의 의미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 두 견해의 차이는 단순한 학문적 논쟁을 넘어, 의미가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쿠마릴라가 부분의 합이 전체를 이룬다고 본 분석적인 입장이었다면, 프라바카라는 전체가 부분을 규정한다는 통합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치열한 지적 논쟁의 이면에서, 그들은 모두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모두 베다의 문장이 인간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자의적인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 내재적이고 객관적인 의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문장의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든, 그 최종적인 의미는 단 하나이며 영원불변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베다의 명령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면, 무엇이 올바른 행위 (다르마)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지고, 미맘사 철학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미맘사 학파는 언어라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 활동의 본질을 파헤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 중심적 철학이 설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도 흔들림 없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위대한 해석학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1-4.4. 브라마 수트라, 우파니샤드 사상의 체계화



우파니샤드는 하나의 거대하고 비옥한 숲과도 같습니다. 그 안에는 야즈나발키야의 대담한 사유와 웃달라카의 다정한 가르침, 그리고 나치케타스의 용감한 질문처럼, 온갖 형태와 빛깔을 지닌 보석 같은 진리들이 흩어져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숲은 때로 너무나도 깊고 광대하여 길을 잃기 쉽습니다. 어떤 우파니샤드는 세상을 브라만의 유희라고 노래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고통으로 가득 찬 속박의 장소로 묘사합니다. 어떤 구절은 브라만이 모든 속성을 초월했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구절은 브라만이 자비와 사랑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라고 암시합니다. 이처럼 다채롭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의 홍수 속에서, 후대의 구도자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위대한 진리의 숲을 체계적으로 탐험할 수 있는 지도, 흩어진 보석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목걸이로 꿰어낼 단단한 실은 과연 없는 것인가? 바로 이 지적이고 영적인 요청에 응답하여, 힌두 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가 탄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설적인 현자 바다라야나 (Bādarāyaṇa)가 집대성했다고 전해지는 『브라마 수트라, Brahma-sūtra』입니다.


『브라마 수트라』는 ‘베단타 수트라 (Vedānta-sūtra)’라고도 불리며, 그 이름이 말해주듯 베다의 끝 (anta), 즉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하려는 위대한 시도의 결과물입니다. 이 책의 목적은 결코 새로운 철학을 창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미 우파니샤드라는 신성한 경전 (Śruti, ‘들은 것’)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모든 가르침이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의 목표, 즉 브라만 (Brahman)에 대한 올바른 앎을 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 있습니다.


바다라야나는 우파니샤드의 숲을 탐험하는 위대한 식물학자처럼, 겉으로는 달라 보이는 수많은 나무와 꽃들을 세심하게 분류하고,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브라만’이라는 단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났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우파니샤드의 수많은 구절들을 하나하나 가져와 그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고, 서로 다른 가르침들 사이의 모순을 조화시키며, 외부의 다른 철학 학파들로부터 제기되는 비판들을 논리적으로 격파합니다.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바다라야나가 선택한 형식은 바로 ‘수트라 (sūtra)’, 즉 ‘실’ 또는 ‘경 (經)’이라는 극도로 압축된 아포리즘 형식입니다. 『브라마 수트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해독 불가능한 암호문처럼 느껴져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책 전체를 여는 첫 번째 수트라는 “아타토 브라흐마 지즈냐사 (athāto brahma-jijñāsā)”라는 단 네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뜻은 “이제, 그러므로, 브라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입니다. 이처럼 수트라는 최소한의 단어를 사용하여 최대한의 의미를 담으려는, 극단적인 지적 경제성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기억을 돕기 위한 핵심적인 표제어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극도의 간결함 때문에, 수트라는 그 자체만으로는 거의 이해가 불가능하며, 반드시 스승의 구체적인 설명이나 상세한 주석서, 즉 ‘바샤 (bhāṣya)’를 통해서만 그 깊은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힌두 철학사의 위대한 아이러니이자 풍요로움이 탄생합니다. 『브라마 수트라』의 문장들이 너무나도 함축적이고 암호와 같았기 때문에, 후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동일한 수트라들을 각자 자신의 철학적 통찰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불이일원론 (Advaita)을 주창한 샹카라, 한정 불이일원론 (Viśiṣṭādvaita)을 세운 라마누자, 그리고 이원론 (Dvaita)을 내세운 마드바는 모두 자신이야말로 바다라야나의 수트라에 담긴 진정한 의도를 올바르게 해석했다고 주장하며, 각자 방대한 주석서를 저술했습니다. 이처럼 『브라마 수트라』는 단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이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단타 철학이라는 거대한 강의 물줄기를 다채롭게 만들어낸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파니샤드, 그리고 신들의 노래인 『바가바드 기타』와 함께, 베단타 철학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기둥, 즉 ‘프라스타나트라이 (Prasthānatrayī, 세 개의 출발점)’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됩니다.


바다라야나는 『브라마 수트라』의 거대한 체계를 네 개의 장 (adhyāya)으로 나누어 구성했으며, 각 장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논의를 심화시켜 나갑니다.


조화의 장 사만바야 (Samanvaya)


『브라마 수트라』의 첫 번째 장인 ‘사만바야 (Samanvaya)’, 즉 ‘조화’의 장에서 바다라야나는 자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과업에 착수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파니샤드라는 광대한 지혜의 숲속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가르침들이,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북극성, 즉 브라만 (Brahman)을 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단순히 문헌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학문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즉 상캬 (Sāṃkhya) 학파의 도전에 맞서 베단타 철학의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치열한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상캬 학파 또한 우파니샤드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그들 역시 우파니샤드의 일부 구절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궁극적 원인이 의식이 없는 비인격적인 근원 물질, 즉 프라크리티 (Prakṛti) 또는 프라다나 (Pradhāna)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기에, 많은 구도자들은 이 세계가 정말로 지성적인 근원 없이, 맹목적인 물질의 기계적인 전개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한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만약 세계의 근원이 의식이 없는 물질이라면, 우리의 삶과 의식 또한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다라야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베단타의 심장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칼을 듭니다. 그는 상캬 학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우주의 창조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파니샤드의 핵심 구절들을 하나씩 세심하게 분석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밝혀냅니다. 그는 묻습니다. 어떻게 아무런 의식도, 의지도 없는 물질이 이토록 정교하고 질서정연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는 찬도갸 우파니샤드와 같은 경전에서 우주의 근원이 “내가 많아지리라”고 스스로 ‘사유하고 의욕했다’고 묘사하는 구절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사유하고 의욕하는 것은 오직 의식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의식이 없는 물질인 프라크리티는 결코 궁극적 원인이 될 수 없다고 그는 논증합니다. 이것은 마치 위대한 시 한 편이 잉크와 종이가 우연히 결합하여 저절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시의 배후에는 반드시 시인의 지성적인 의도가 있듯이, 이 질서정연한 우주의 배후에는 반드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힘을 가진 지성적인 실재, 즉 브라만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다라야나는 더 나아가, 우파니샤드의 문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구절만이 아니라 그 구절이 포함된 전체 문맥을 반드시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상캬 학파는 우주의 근원이 의식이 없는 물질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특정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하지만 바다라야나는 그 구절들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면, 그것들이 실은 지성적인 실재인 브라만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을 설명하는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만바야’ 장의 목적은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우파니샤드의 여러 구절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바다라야나는 각 구절의 고유한 표현을 존중하면서도, 그 모든 가르침이 결국 우주의 유일한 근원인 ‘브라만’이라는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됨을 체계적으로 증명합니다.


비모순의 장 아비로다 (Avirodha)


『브라마 수트라』의 두 번째 장인 ‘아비로다 (Avirodha)’, 즉 ‘비모순’의 장은 본격적인 철학적 논쟁의 전쟁터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바다라야나가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이 브라만이라는 단일한 진리를 향한다는 내부적인 조화의 성채를 쌓았다면, 이제 그는 그 성채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동시에 라이벌 학파들의 이론이 왜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이 장은 베단타 철학이 단순히 경전에 의지하는 신앙의 체계가 아니라, 가장 엄밀한 이성의 검증을 통과한, 논리적으로 가장 완벽하고 모순이 없는 철학적 시스템임을 확립하려는 치열한 지적 투쟁의 기록입니다.


바다라야나의 비판의 칼날은 먼저 당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상캬 학파의 심장부를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상캬 학파는 세계가 순수한 의식인 푸루샤와 활동적인 물질인 프라크리티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라야나는 묻습니다. 만약 푸루샤가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오직 지켜보기만 하는 영원한 관조자라면, 그리고 프라크리티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맹목적인 물질이라면, 대체 이 둘 사이에 어떻게 최초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는가? 의식 없는 프라크리티가 어떻게 자신을 지켜보는 푸루샤를 위해 춤을 추기 시작할 수 있으며, 아무런 의지도 없는 푸루샤가 어떻게 그 춤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것은 마치 절름발이와 장님의 비유처럼, 둘이 만나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애초에 그 둘이 어떻게 만날 수 있었는지를 결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라야나는 그 모든 설명이 논리적 필연성이 결여된 시적인 묘사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그의 비판은 이어 바이셰시카 학파의 원자론으로 향합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 세계가 영원불멸하는 원자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라야나는 다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본래 활동성이 없는 원자들이 어떻게 최초로 움직여서 서로 결합할 수 있었는가? 그 최초의 운동을 일으킨 제1원인은 무엇인가? 바이셰시카 학파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카르마의 법칙에 따른 보이지 않는 힘 (adrsta)이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다라야나는 의식이 없는 그 힘이 어떻게 각각의 원자들을 이토록 질서정연하고 목적에 맞게 결합시켜 이 복잡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되묻습니다. 이것은 마치 벽돌과 시멘트가 저절로 모여 하나의 완벽한 집을 짓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그 배후에는 집을 설계하고 짓는 건축가의 지성적인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자들의 결합 배후에는 반드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힘을 가진 지성적인 실재, 즉 브라만의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고 바다라야나는 논증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당시 인도 사상계의 또 다른 거대한 축이었던 불교의 가르침들 또한 논리적 허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모든 것이 순간마다 생겨나고 사라질 뿐 영원한 실체는 없다고 보는 불교의 무아론 (無我論)에 대해, 그는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로 기억하고, 과거에 지은 행위의 결과를 미래의 내가 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모든 것이 단절된 찰나의 연속이라면, 기억과 카르마의 연속성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의 나타남일 뿐이라는 유식 사상에 대해서는, 만약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공통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지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합니다.


이처럼 바다라야나는 당대의 모든 주요한 철학 체계들을 하나씩 검토하며, 그들이 결국에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됨을 체계적으로 격파합니다. 이 장대한 논박의 과정을 통해, 그는 베단타 철학의 입장이 단순히 신앙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상 체계보다도 이성적으로 가장 우월하고 모순이 없는 유일한 길임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수행의 장 사다나 (Sādhana)


『브라마 수트라』의 세 번째 장인 ‘사다나 (Sādhana)’, 즉 ‘수행’의 장은 이제 치열했던 철학적 논쟁의 전쟁터를 지나, 구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이라는 고요한 성소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브라만이 유일한 궁극적 실재이며 다른 모든 이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앎은 이제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나는 어떻게 그 브라만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 장에서 바다라야나는 더 이상 외부의 비판을 방어하는 논객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 헤매는 영혼을 위한 자비로운 안내자가 됩니다. 그는 우파니샤드라는 광대한 숲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명상법 (upāsanā)과 영적 수행의 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하여, 구도자가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정상에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완전한 지도를 그려 보입니다.


바다라야나는 브라만에 대한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앎, 즉 즈나나 (jñāna)를 얻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수단임을 분명히 합니다. 고통의 근본 원인이 무지 (avidyā)라면, 그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지혜의 빛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더러운 거울이 태양의 빛을 온전히 반사할 수 없듯이,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이 미묘하고도 심오한 진리를 결코 담아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즈나나라는 궁극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지혜를 담을 그릇, 즉 마음을 정화하는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바다라야나는 카르마 요가, 즉 결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 없이 자신의 모든 행위를 신에게 바치는 봉헌의 삶을 통해 마음속의 탐욕과 이기심을 닦아낼 것을 가르칩니다. 또한, 정결한 삶과 감각의 제어,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통해, 밖으로만 향하려는 마음의 거친 에너지를 내면으로 돌려 고요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윤리적, 정신적 훈련은 해탈 그 자체를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 스승의 가르침과 경전의 진리가 왜곡 없이 스며들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마련해 줍니다.


마음의 준비가 된 구도자를 위해, 바다라야나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다양한 상징에 대한 명상법들을 비교하고 그 의미를 조화롭게 풀어냅니다. 어떤 우파니샤드는 ‘옴 (Oṃ)’이라는 성스러운 음절을 브라만으로 명상하라고 가르치고, 다른 곳에서는 심장 속의 작은 공간이나 태양의 빛을 브라만으로 명상하라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가르침은 브라만을 우주의 창조주이자 자비로운 인격신, 즉 속성을 가진 브라만 (saguṇa- brahman)으로 묘사하는 반면, 다른 가르침은 모든 속성과 분별을 넘어선 순수한 의식, 즉 속성을 초월한 브라만 (nirguṇa-brahman)을 궁극의 진리로 제시합니다.


바다라야나는 이처럼 겉보기에 달라 보이는 명상법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의 자질과 성향에 따라 주어진 서로 다른 단계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인격적인 신에 대한 명상은 마음을 집중시키고 신앙심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는 마침내 모든 형상을 넘어선 절대적 실재를 깨닫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다나의 장은 베단타 철학이 결코 메마른 지적 유희가 아니라, 윤리적 삶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인 명상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삶 전체를 통해 닦아나가야 할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적 여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결과의 장 팔라 (Phala)


『브라마 수트라』의 마지막 네 번째 장인 ‘팔라 (Phala)’, 즉 ‘결과’의 장은 기나긴 철학적, 실천적 여정의 최종 목적지에 대해 논합니다. 논쟁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수행의 땀을 닦아낸 구도자의 영혼은 마침내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가? 브라만에 대한 완전한 앎을 성취한 자는 어떻게 되며,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즉 해탈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이 장에서 바다라야나는 그 영광스럽고도 신비로운 경지의 풍경을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브라만을 깨달은 현자 (jñānin)는 죽은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 살아있는 동안에도 이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로운 존재, 즉 지반묵타 (jīvan-mukta)입니다. 이것은 마치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한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꿈의 세계 속에 머물러 있지만, 더 이상 꿈속의 사건들에 울고 웃으며 휘둘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반묵타는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먹고, 자고, 말하지만, 그의 내면은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브라만의 영원한 평화와 지복 속에 머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카르마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바다라야나는 이 지점에서 카르마를 세 종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내가 행위한다’는 이기적인 자아의식 (ahaṃkāra)이 없으므로, 미래에 결과를 낳을 새로운 카르마 (āgāmi-karma)는 더 이상 쌓이지 않습니다. 또한, 브라만에 대한 앎이라는 거대한 불꽃은, 과거의 무수한 생들로부터 창고에 쌓여 있던 막대한 양의 잠재적 카르마 (sañcita-karma)를 단 한순간에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카르마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미 활시위를 떠나 날아가고 있는 화살과도 같은, 현재의 이 육체를 태어나게 하고 유지시키는 프라라브다 카르마 (prārabdha-karma)입니다. 지반묵타는 바로 이 프라라브다 카르마의 힘이 다할 때까지, 마치 도공이 돌리는 것을 멈춘 뒤에도 관성에 의해 한동안 계속해서 도는 옹기그릇의 물레처럼, 이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갈 뿐입니다.


마침내 활시위를 떠난 화살의 힘이 다하듯, 그를 이 세상에 묶어두었던 프라라브다 카르마가 모두 소진되어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개별적인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 궁극의 질문 앞에서, 『브라마 수트라』의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들은 후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각기 다른 두 개의 거대한 강을 파낼 수 있는 드넓은 평원이 됩니다.

샹카라 (Śaṅkara)는 이 최종적인 상태를 절대적인 합일로 해석합니다. 그에게 개별적인 영혼, 즉 지바 (jīva)는 애초부터 무지 (avidyā)가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해탈이란, 마치 강물이 바다에 합쳐지듯, 개별적인 이름과 형태를 완전히 잃고 본래의 고향인 브라만과 하나가 되어 다시는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강물이 바다가 된 뒤에 더 이상 스스로를 강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해탈한 영혼은 더 이상 개별적 존재로 남지 않고, 순수한 존재, 의식, 환희 그 자체인 브라만으로 돌아갑니다.


반면에 라마누자 (Rāmānuja)는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그에게 개별 영혼은 환영이 아니라, 신의 몸을 구성하는 영원하고 실재적인 부분입니다. 따라서 해탈은 소멸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해탈한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잃지 않은 채, 모든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의 영원한 거처인 바이쿤타 (Vaikuṇṭha)에 도달합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신과 같은 순수하고 완전한 본성을 회복하지만, 결코 신 그 자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설탕이 되어 설탕의 맛을 볼 수 없는 것과 달리, 영원히 신의 곁에서 그의 무한한 영광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사랑의 봉사 (kaiṅkarya)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바다라야나 자신은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명확하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의 수트라는 때로는 완전한 합일을 암시하는 것처럼, 또 때로는 미묘한 차이가 남는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둡니다. 이처럼 그는 최종적인 상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우파니샤드의 다양한 구절들을 제시하며 그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지를 그저 암시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 위대한 모호함이야말로, 바다라야나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혜의 길을 통해 ‘내가 곧 그것이다’라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과, 사랑의 길을 통해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다’라는 관계의 기쁨을 갈망하는 이들 모두가, 결국 하나의 동일한 경전 속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무한한 지혜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브라마 수트라』는 우파니샤드라는 광대한 숲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도이자, 그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나침반이며, 동시에 그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 후대의 모든 철학자들이 끝없이 탐구하고 논쟁할 수 있는 거대한 무대를 마련한 위대한 지성의 기념비입니다.









1-4.5. 브라만에 대한 앎과 궁극의 해탈



모든 지식의 끝에서, 모든 논증과 체계의 너머에서 베단타 철학이 약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나은 삶이나 천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 즉 모든 고통과 한계,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순환의 수레바퀴 자체로부터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해방입니다. 이 궁극의 목표는 선한 행위 (Karma)를 쌓거나 신을 향한 열렬한 기도를 통해 얻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베단타 철학의 대담하고도 혁명적인 선언에 따르면, 해탈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착각했지만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는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 즉 ‘내가 바로 브라만이다 (Aham Brahmāsmi)’라는 완전한 앎 (Jñāna)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베단타의 길에서, 브라만에 대한 앎은 해탈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앎 그 자체가 바로 ‘해탈’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무지를 파괴하는 구원적인 앎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것은 단순히 책을 읽거나 지적인 토론을 통해 얻어지는 파편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존재 전체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완전한 변혁의 과정이며,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체계적인 단계, 즉 슈라바나 (Śravaṇa), 마나나 (Manana), 니디디야사나 (Nididhyāsana)를 통해 성취됩니다.


첫 번째 단계인 슈라바나는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격을 갖춘 스승 (Guru)의 발치에 앉아, 우파니샤드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 특히 “그것이 바로 너다 (Tat Tvam Asi)”와 같은 위대한 선언 (Mahāvākya)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배우는 과정입니다. 스승은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스스로 그 진리를 체득하여 살아가는 살아있는 증거이기에, 그의 말을 통해 전달되는 진리는 단순한 문자를 넘어선 생명력을 지니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인 마나나는 ‘사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들은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논리를 총동원하여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고 성찰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그 가르침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의심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다른 철학 학파들의 비판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그 진리가 자신의 이성으로도 결코 흔들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인 니디디야사나는 ‘깊이 명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슈라바나와 마나나를 통해 지적으로 명확해진 진리를, 이제 끊임없고 중단 없는 명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전체로 체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브라만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브라만이다’라는 진리 위에 자신의 모든 의식을 온전히 집중하여,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사라진 직접적인 체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기름이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끊어짐 없이 흘러가듯, 명상의 흐름이 중단 없이 이어질 때, 마침내 무지의 마지막 잔재마저 사라지고 구도자는 최종적인 깨달음의 상태, 즉 사마디 (Samādhi)에 이르게 됩니다.


이 궁극의 앎은 마치 거대한 불꽃과도 같아서, 우리가 수억 겁의 시간 동안 쌓아온 카르마의 씨앗들을 단 한순간에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베단타 철학은 카르마를 다시 세 종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산치타 카르마 (sañcita-karma)로, 과거의 무수한 생들로부터 창고에 쌓여 아직 그 결과를 낳지 않은 막대한 양의 잠재적 카르마입니다. 둘째는 아가미 카르마 (āgāmi-karma)로, 현재의 삶에서 새롭게 짓고 있는 미래의 카르마입니다. 브라만에 대한 앎의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 이 두 종류의 카르마는 마치 불 속에 던져진 솜뭉치처럼 흔적도 없이 완전히 타서 소멸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내가 행위한다’는 에고 (ahaṃkāra)의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류의 카르마, 즉 프라라브다 카르마 (prārabdha- karma)는 이미 활시위를 떠나 날아가고 있는 화살과도 같아서, 그 힘이 다할 때까지는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이 육체를 태어나게 하고 유지시키는, 이미 그 결과를 낳기 시작한 카르마입니다. 바로 이 프라라브다 카르마 때문에, 브라만을 깨달은 현자 (jñānin)는 즉시 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이 세상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동안 완전한 해탈을 성취한 경지를 ‘지반묵티 (Jīvanmukti)’라고 부릅니다. 지반묵타, 즉 살아있는 해탈자는 우리와 함께 먹고, 자고, 말하지만, 그의 내면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을 고통과 속박의 장소로 보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브라만의 즐거운 유희 (līlā)로 비칠 뿐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번뇌가 그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연극 무대 위의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의 슬픔에 빠져 울면서도, 그 내면에서는 자신이 배우임을 잊지 않는 것처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 어떤 것에도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더 이상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오직 세상의 안녕을 위한 자비로운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뿐입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의 힘이 마침내 다하듯, 그를 이 세상에 묶어두었던 프라라브다 카르마가 모두 소진되어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비데하묵티 (Videhamukti)’, 즉 육체 없는 완전한 해탈을 성취하게 됩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그 이름과 형태를 잃고 바다 그 자체가 되듯이, 그의 개별적인 영혼은 더 이상 분리된 존재로 남지 않고, 그 본래의 고향인 브라만, 즉 순수한 존재 (Sat), 순수한 의식 (Cit), 순수한 환희 (Ānanda)의 바다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미맘사 학파가 그토록 강조했던 행위의 길, 즉 카르마 마르가 (Karma Mārga)와,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궁극의 길이라고 선언했던 지혜의 길, 즉 즈나나 마르가 (Jñāna Mārga)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특정한 결과를 ‘생산’해 냅니다. 제사를 올리는 행위는 천상에서의 행복이라는 결과를 낳고, 선행은 미래의 복된 삶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우주의 공정한 인과 법칙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통해 생산된 모든 결과는,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오래 지속된다 하더라도, 시작이 있었기에 반드시 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것입니다. 천상에서의 행복 역시 언젠가는 그 공덕이 다하여 끝나게 되며, 그 후에는 다시 윤회의 굴레로 떨어져야만 합니다. 씨앗을 심어 얻은 열매는 언젠가 다 먹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해탈은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변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한한 원인인 행위가 영원한 결과인 해탈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해탈은 우리가 노력해서 새롭게 만들어내거나 (생산), 불완전한 영혼을 깨끗하게 닦아서 완성하거나 (정화),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여 도달해야 할 (도달) 그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 역시 시간의 법칙 아래 종속된 또 다른 유한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베단타 철학의 위대한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합니다. 해탈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본성인 아트만은 본래부터 영원히 자유로우며, 완전하고, 브라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해탈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무지 (avidyā)’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사람이 강을 건넌 뒤, 한 사람이 인원을 세면서 자기 자신을 빼고 아홉 명만 센 뒤 사라진 열 번째 사람을 찾아 슬퍼하는 유명한 비유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열 번째 사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그는 어떤 행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지 ‘세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열 번째 사람이다’라는 올바른 앎을 통해 ‘발견’될 뿐입니다.


이처럼 해탈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본래부터 완전한 자유였다는 영원한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행위의 길은 마음의 때를 닦아내고 우리를 진리 앞으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준비 과정일 수는 있지만,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무지의 장막을 직접 걷어낼 수는 없습니다.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지혜의 빛뿐인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유일한 적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무지 (Avidyā)’ 또는 ‘아즈나나 (Ajñāna)’입니다. 이 무지는 단순히 ‘모른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적극적인 착각이며, 실재 위에 비실재를 겹쳐보는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베단타 철학은 이 무지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저 유명한 밧줄과 뱀의 비유 (rajju-sarpa-nyāya)를 듭니다. 해질녘 어스름한 길 위에 밧줄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길을 가던 나그네는 그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뱀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온몸은 공포에 휩싸이며, 도망치거나 공격해야 한다는 온갖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겪는 공포와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원인이 된 뱀은 단 한 순간도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밧줄이라는 실재 (substratum) 위에, 어둠이라는 조건 속에서, 나그네의 무지가 덧씌운 (adhyāsa, 重疊) 환영일 뿐입니다. 이 나그네를 뱀의 공포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뱀을 달래는 기도를 하거나, 뱀을 쫓는 주문을 외우거나, 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행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등불을 가져와 그 실체를 비추어 보는 것, 즉 ‘저것은 뱀이 아니라 밧줄이다’라는 올바른 앎 (Jñāna)을 얻는 것입니다. 그 앎의 빛이 비추는 순간, 뱀은 싸워서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환영으로서 저절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뱀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이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밧줄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영원하고 순수하며 지복으로 가득 찬 참된 자아, 즉 아트만/브라만이라는 밧줄 위에, 우리는 무지라는 어둠 속에서 ‘나’라는 개별적인 에고 (ahaṃkāra), 그리고 이 변화무쌍한 몸과 마음, 감각의 세계라는 뱀을 덧씌워 놓고,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하며 끝없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탈이란, 이 환영의 뱀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환영임을 깨닫는 앎 그 자체입니다. 이 앎은 다른 모든 행위처럼 결과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가리고 있던 무지의 장막을 ‘제거’할 뿐입니다. 맑은 거울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행위가 거울의 반사 능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했던 그 능력을 다시 드러내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베단타 철학은 카르마 (행위)가 결코 해탈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다만,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해지는 이타적인 행위 (karma-yoga)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 이기심과 같은 거친 먼지들을 닦아내는 정화 (citta-śuddhi)의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인 앎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중요한 예비적 단계가 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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