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볼을 스치는 바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그리고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은 정말 한낱 꿈이나 환영에 불과한 것인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거짓이라면,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과 헌신, 의무와 책임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샹카라 (Śaṅkara)의 장엄한 불이일원론이 도달한 궁극의 지평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실존적 고뇌입니다. 샹카라의 날카로운 지성이 제시한 ‘브라만만이 실재이며 세계는 거짓이다’라는 선언은,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빛을 제시했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과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 생생한 현실 세계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깊은 공허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1세기 남인도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신앙인인 라마누자 (Rāmānuja)는 뜨거운 심장으로 철학의 물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그는 샹카라의 철학이 우파니샤드의 진정한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선언하며, 이 세계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신의 실재성 (實在性)을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나섭니다. 그의 철학, 즉 ‘비쉬슈타드바이타 베단타 (Viśiṣṭādvaita Vedānta)’, 즉 ‘한정 불이일원론 (限定不二一元論)’은 이 세계가 신의 영광스러운 속성이며, 결코 거짓될 수 없는 신의 살아있는 몸이라고 선포합니다.
라마누자는 샹카라 철학의 심장부, 즉 마야 (Māyā)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샹카라에게 마야는 브라만이라는 유일한 실재 위에 이 현상 세계라는 거짓된 환영을 덧씌우는, 설명 불가능한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라마누자는 이 마야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일곱 가지의 강력한 논증 (saptavidhā-anupapatti)을 통해 마야 이론의 근거를 조목조목 무너뜨립니다. 예를 들어, 이 무지 (avidyā)의 거처는 대체 어디인가? 만약 그것이 개별 영혼 (jīva) 안에 있다면, 개별 영혼 자체가 무지의 산물인데 어떻게 원인이 결과 안에 거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브라만 안에 있다면, 순수한 앎의 빛 그 자체인 브라만이 어떻게 자신을 가리는 어둠을 품을 수 있는가? 이처럼 ‘무지’라는 것는 브라만에도, 개별 영혼에도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하는 논리적 유령에 불과하다는 것이 라마누자의 첫 번째 비판의 핵심입니다.
또한, 샹카라는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비유를 들지만, 라마누자는 모든 인식에는 반드시 실재적인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비록 왜곡된 형태일지라도, 어떤 실재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라마누자는 샹카라의 ‘설명 불가능한 오류 이론 (anirvacanīya-khyāti)’ 대신, ‘실재하는 것에 대한 오류 이론 (sat-khyāti)’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사막의 신기루를 보고 물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물이라고 잘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실제 뜨거운 공기의 아지랑이나 빛의 굴절 현상이라는 ‘실재하는 대상’을, 물이라는 다른 실재와 혼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개껍데기를 보고 은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그 조개껍데기의 반짝이는 광택이라는 ‘실재하는 속성’을, 은의 광택이라는 다른 실재의 속성과 연결 짓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라마누자에게 우리의 경험 세계는 결코 근거 없는 환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불완전하게 인식할지라도, 명백히 실재하는 것들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샹카라 철학의 또 다른 기둥인 ‘니르구나 브라만 (nirguṇa-brahman)’, 즉 ‘속성이 없는 절대자’라는 개념 역시 라마누자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샹카라는 브라만이 모든 이름과 형태, 속성을 초월한 순수한 존재-의식-환희 그 자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라마누자는 ‘속성이 없는 실체’란 말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라고 반박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에 ‘존재’라는 속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브라만을 ‘의식’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의식’이라는 속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속성이 없다’는 것조차 하나의 속성이 될 뿐입니다. 모든 인식은 대상을 그 속성을 통해 파악하는 행위인데, 만약 브라만이 아무런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심지어 경전이 그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게 됩니다.
라마누자는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을 ‘속성이 없다 (nirguṇa)’고 묘사하는 구절들은, 브라만이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고통, 유한성, 불완전함과 같은 ‘부정적인 속성’이나 ‘결함’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우파니샤드는 브라만이 진리 (satya), 지혜 (jñāna), 무한 (ananta), 자비 (kāruṇya), 사랑 (prema)과 같은 무한하고 완전하며 상서로운 ‘긍정적인 속성’들로 가득 찬 존재임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마누자에게 궁극적 실재는 차가운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온갖 지고한 덕성을 지닌 최고의 인격체, 즉 ‘사구나 브라만 (saguṇa-brahman, 속성을 가진 브라만)’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숭배하고 사랑해야 할 신 (Īśvara)입니다.
이러한 비판의 토대 위에서, 라마누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이고도 아름다운 철학 체계, 즉 ‘한정 불이일원론 (Viśiṣṭādvaita, 비쉬슈타드바이타)’을 세웁니다. ‘비쉬슈타 (viśiṣṭa)’는 ‘~에 의해 한정된’ 또는 ‘~을 속성으로 가지는’이라는 의미이며, ‘아드바이타 (advaita)’는 ‘불이 (不二)’, 즉 ‘둘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철학은 ‘속성들에 의해 한정된 유일자’에 대한 이론입니다. 샹카라가 절대적인 ‘동일성’을 주장했다면, 라마누자는 ‘차이를 내포한 통일성’을 말합니다. 그에게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세 가지의 실재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셋은 바로 최고의 주체인 ‘신 (Īśvara, 브라만)’, 그리고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의식체인 ‘영혼 (cit)’, 그리고 의식이 없는 물질세계인 ‘물질 (acit)’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영혼과 물질 역시 신처럼 영원하고 실재하지만, 결코 신과 동등한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마누자는 이 세 요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힌두 사상의 가장 강력한 비유 중 하나인 몸과 영혼의 관계 (śarīra-śarīrī-bhāva)를 제시합니다. 신 (브라만)은 이 우주의 영혼 (śarīrī, 몸의 주인)이며, 무한한 수의 개별 영혼들 (cit)과 이 물질세계 (acit) 전체는 바로 그 신의 몸 (śarīra)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몸을 지탱하고, 통제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듯이, 신은 이 우주라는 자신의 몸을 안에서부터 지배하고 유지하며 자신의 신성한 유희 (līlā)를 위해 사용합니다. 이 비유는 여러 가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몸은 영혼과 분리될 수는 없지만, 결코 영혼 그 자체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와 개별 영혼들은 신의 일부이자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신 그 자체와 동일하지는 않은, 실재적이고 고유한 개별성을 지닙니다. ‘나’라는 영혼은 결코 신과 완전히 합일하여 사라져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신의 일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둘째, 몸의 모든 활동이 영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듯, 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우리 영혼의 모든 경험은 궁극적으로 신의 무한한 힘과 자비, 그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 세계는 더 이상 벗어나야 할 환영의 감옥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체험하고 신을 향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성한 무대, 즉 신의 살아있는 몸이 됩니다.
따라서 라마누자에게 이 세계는 명백히 ‘실재’합니다. 그것은 신의 실제적인 창조물이며, 신의 무한한 속성들이 발현된 것입니다. 샹카라가 밧줄과 뱀의 비유를 통해 세계가 브라만의 ‘가현 (vivarta)’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라마누자는 우유가 요구르트로 변하는 것처럼, 브라만이 실제로 이 세계로 ‘변형 (pariṇāma)’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변형은 브라만 자신의 내적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상태 (sūkṣma)로 자신 안에 잠재해 있던 영혼들과 물질이, 창조의 시기에 이르러 거친 상태 (sthūla)로 펼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거미가 자신의 몸 안에서 실을 뽑아 거미줄을 만들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듯, 신은 자신의 몸인 이 세계를 주기적으로 펼쳐냈다가 다시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신 자신의 본성은 결코 변하거나 훼손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라마누자는 이 세계의 실재성과 다양성을 긍정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함을 보임으로써, 우파니샤드의 불이 (不二, advaita)의 가르침과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현실 세계 사이의 모순을 아름답게 조화시켰습니다. 그의 철학은 차가운 지성의 길을 넘어, 신의 살아있는 몸인 이 세계 속에서 신을 사랑하고 섬기며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뜨거운 헌신 (Bhakti)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1-6.2. 환영의 장막에 던지는 일곱 개의 질문
라마누자는 샹카라의 마야 이론이 가진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기 위해, 마치 숙련된 검객처럼 일곱 번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이 일곱 가지 논증 (saptavidhā-anupapatti, 삽타비다-아누파파티) 은 마야라는 개념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비판입니다.
첫째, 거처에 대한 물음 (Āśrayānupapatti)
"그 무지의 환영 (Māyā, 마야)은 대체 어디에 기생하고 있는가?"
샹카라 철학의 심장부에는 '무지' (Avidyā, 아비드야) 또는 '마야'가 있습니다. 라마누자는 바로 그 무지의 주소지를 묻는 것으로 첫 번째 공격을 시작합니다.
만약 무지가 브라만 (Brahman, 브라만) 안에 있다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브라만은 순수한 앎의 빛 (Jñāna, 즈나나)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빛의 본질을 가진 태양 안에 어둠이 깃들 수 있겠습니까? 앎과 무지는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의식인 브라만이 무지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무지가 개별 영혼 (Jīva, 지바) 안에 있다면? 이것 또한 모순입니다. 샹카라의 철학에 따르면, 개별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로 무지가 만들어낸 환영의 산물입니다. '나'라는 분리된 존재가 있다는 착각이 바로 무지인데, 어떻게 그 착각의 결과물이 다시 착각의 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무지는 브라만에도, 개별 영혼에도 기생할 곳이 없습니다. 라마누자에게 주소지가 불분명한 존재는 실재할 수 없는 유령과도 같습니다.
브라만의 본질은 스스로 빛나는 순수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비춰질 필요가 없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실체도 없는 무지라는 얇은 장막이 이글거리는 태양 자체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태양의 본성은 빛을 발하는 것이기에, 어떤 장막도 그 빛에 의해 타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브라만의 본성이 순수한 앎이라면, 무지는 그 앎의 빛 앞에서 한순간도 버틸 수 없습니다. 무지가 브라만을 가린다는 주장은, 어둠이 촛불을 집어삼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셋째, 본질에 대한 물음 (Svarūpānupapatti)
"그 마야라는 것의 정체는 실재인가, 비실재인가?"
라마누자는 마야의 존재론적 지위를 묻습니다. 이 세상은 명백히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마야가 실재 (Sat, 사트)한다면? 이는 샹카라 철학의 근간을 무너뜨립니다. 만약 마야가 브라만과 별개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실재라면, 세상에는 두 개의 실재가 존재하게 되어 '불이일원론(Advaita)'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마야가 비실재 (Asat, 아사트)라면? 이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토끼의 뿔'이나 '허공의 꽃'처럼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이처럼 생생하고 질서정연한 우주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없는 것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습니다.
결국 마야는 실재라고 할 수도, 비실재라고 할 수도 없는 모호한 존재가 됩니다. 라마누자에게 이것은 명확한 철학적 규명이 아니라, 회피에 불과합니다.
넷째, 설명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 (Anirvacanīyānupapatti)
"'설명 불가능하다'는 것은 철학적 대답이 될 수 없다."
샹카라는 위와 같은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마야의 본질이 실재도 비실재도 아닌, 언어와 이성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설명 불가능한 것’ (Anirvacanīya, 아니르바차니야) 이라고 말합니다.
라마누자는 바로 이 '설명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철학 역사상 들어본 적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은 대상을 '이것이다' 또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 외에 제3의 범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설명 불가능하다'는 것은 마야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단지 설명에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증거에 대한 물음 (Pramāṇānupapatti)
"마야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증거로 알 수 있는가?"
라마누자는 마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타당한 인식 수단 (Pramāṇa, 프라마나) 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직접지각 (Pratyakṣa, 프라티약샤)으로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세상을 지각할 뿐, 세상을 환영으로 만드는 '마야' 그 자체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추론 (Anumāna, 아누마나)으로 알 수 있는가? 연기를 보고 불을 추론하듯, 마야의 존재를 추론할 만한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습니다.
경전 (Śabda, 샤브다)이 증명하는가? 라마누자는 이 지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박합니다.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경전 어디에도 세계가 거짓된 환영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은 없으며, 오히려 경전은 신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실재하는 세계'를 창조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야는 그 어떤 타당한 증거로도 입증될 수 없는, 독단적인 가정에 불과합니다.
여섯째, 제거에 대한 물음 (Nivartakānupapatti)
"무엇으로 무지를 제거할 수 있는가?"
샹카라는 '내가 바로 브라만이다'라는 궁극의 앎 (Jñāna, 즈나나) 이 무지를 제거한다고 말합니다. 라마누자는 이 주장 또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샹카라가 말하는 궁극의 브라만은 어떤 속성도 없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알려지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상 없는 앎'이 가능하며, 그 앎이 어떻게 무지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러한 앎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내가 브라만임을 아는 앎' 역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 즉 현상 세계의 일부입니다. 샹카라의 논리에 따르면,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은 마야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야의 산물인 '앎'이 자신의 어머니인 '마야'를 파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꿈속의 인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일곱째, 속박 자체에 대한 물음 (Nivṛttyanupapatti)
"도대체 누가, 무엇에 의해 속박되었다는 말인가?"
이 마지막 질문은 마야 이론 전체의 근간을 흔듭니다.
만약 브라만이 속박되었다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브라만은 영원히 자유롭고 완전한 존재입니다.
만약 개별 영혼이 속박되었다면? 샹카라에게 개별 영혼은 마야가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환영이 어떻게 실제로 속박될 수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밧줄에 묶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속박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환영이라면,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라마누자는 마야 이론이 구원의 문제 자체를 공허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라마누자의 일곱 가지 논증은, 샹카라가 세운 장엄한 불이일원론의 성채가 '마야'라는 이름의 모래 기둥 위에 서 있음을 폭로하려는 치열한 지적 시도였습니다. 라마누자는 이 비판의 폐허 위에서, 비로소 세계와 영혼, 그리고 신이 모두 실재하는, 사랑과 헌신이 가능한 새로운 철학의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1-6.3. 절대자는 인격신 비슈누이다
샹카라의 철학이 우리를 궁극적 실재의 본질, 즉 ‘무엇’이라는 질문으로 이끌었다면, 라마누자의 철학은 우리를 그 실재와의 인격적인 만남, 즉 ‘누구’라는 질문으로 초대합니다. 만약 궁극적 실재가 모든 이름과 형태를 넘어선 순수한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 (satya), 지혜 (jñāna), 무한 (ananta), 자비 (kāruṇya), 그리고 사랑 (prema)과 같은 무한하고 상서로운 속성들로 가득 찬 존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비인격적인 ‘그것 (It)’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 맺고 사랑하며 의지할 수 있는 ‘그분 (He)’이 되기 때문입니다.
라마누자에게 철학의 목적은 차가운 지성의 칼로 모든 것을 해체하여 텅 빈 동일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사랑의 가슴으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격체이신 절대자와의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인격의 절대자는 과연 누구인가? 라마누자는 우파니샤드와 푸라나, 그리고 『바가바드 기타』를 포함한 모든 신성한 경전들이 한목소리로 가리키는 이름은 바로 나라야나 (Nārāyaṇa), 즉 비슈누 (Viṣṇu)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라마누자 자신이 속한 비슈누파 (Vaishnavism)의 신앙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경전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도 일관된 해석의 필연적인 귀결이었습니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수많은 구절들이 궁극적 실재를 창조주, 유지자, 파괴자,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거주하는 지배자 (Antaryāmin, 안타르야민)로 묘사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역할들은 속성이 없는 비인격적인 원리가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힘과 지혜, 그리고 자비를 지닌 최고의 인격체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베다 시대 이후 힌두교의 대중적 신앙의 중심을 이루어 온 푸라나 문헌, 특히 비슈누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비슈누 푸라나』와 같은 경전들이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진리를 보완하고 구체화하는 중요한 권위를 지닌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경전은 더 이상 추상적인 브라만을 암시하는 비밀스러운 텍스트가 아니라, 최고의 인격신이신 비슈누의 영광과 속성, 그리고 그의 자비로운 행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사랑의 계시였습니다. 따라서 라마누자의 브라만은 더 이상 ‘사트-치트-아난다 (존재-의식-환희)’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 세계라는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모든 영혼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시는 최고의 주 (主), 푸루쇼타마 (Puruṣottama), 즉 비슈누입니다.
라마누자의 비슈누는 결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신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결점과 부정적인 속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무한하고 상서로운 속성 (kalyāṇa-guṇa, 칼야나-구나)들의 바다입니다. 그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진리 (Satya), 지혜 (Jñāna), 무한 (Ananta), 환희 (Ānanda), 그리고 순수 (Amalatva)입니다.
이 다섯 가지 본질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그는 다시 여섯 가지의 위대한 영광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아는 완전한 지혜 (Jñāna)입니다.
둘째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주권 (Aiśvarya)입니다.
셋째는 이 우주 전체를 지치지 않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무한한 힘 (Śakti)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을 지탱하는 흔들림 없는 권능 (Bala)입니다.
다섯째는 다른 어떤 것의 도움도 없이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완전한 자족 (Vīrya)입니다.
여섯째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눈부신 광휘 (Tejas)입니다.
이 여섯 가지 속성은 다시 자비, 사랑, 관대함, 부드러움과 같은 헤아릴 수 없는 다른 속성들의 근원이 됩니다. 이처럼 라마누자의 신은 샹카라의 ‘속성이 없는’ 절대자와는 정반대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을 그 완전성의 극치에서 지니고 있는, 무한히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격체입니다.
이 위대하고 초월적인 신이 어떻게 유한하고 고통받는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라마누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이 스스로를 다섯 가지의 다른 형태로 드러내신다는 심오한 신학 이론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신이 다섯 조각으로 나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비로운 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섯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맞춰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파라 (Para)’ : ‘초월적 형태’
첫 번째 형태는 ‘파라 (Para)’, 즉 ‘초월적 형태’ 입니다. 이것은 신성의 가장 근원적이고 완전한 본체로서, 다른 모든 신적 형태들이 흘러나오는 궁극의 원천입니다. 이 파라의 상태에서 신, 즉 나라야나 (Nārāyaṇa)는 물질 우주의 창조와 소멸,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약을 넘어서 있는 자신의 영원한 거처, 바이쿤타 (Vaikuṇṭha) 에 머뭅니다.
바이쿤타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물질세계처럼 세 가지 구나 (guṇa)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은 오직 순수한 선성 (śuddha-sattva)으로만 이루어진, 영원한 빛과 의식, 그리고 지복 (Ānanda)으로 가득 찬 초월적인 영역입니다. 그곳에는 늙음도, 죽음도, 슬픔도 없으며, 오직 신의 무한한 영광을 향한 사랑의 봉사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 영원의 왕국에서, 파라로서의 비슈누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질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배우자이자 자비의 화신인 락슈미 (Lakṣmī) 여신과 함께합니다. 락슈미는 단순히 그의 아내가 아니라, 신의 은총 (kṛpā) 그 자체를 인격화한 존재로서, 모든 영혼의 어머니이자 신과 영혼 사이를 잇는 자비로운 중재자입니다. 그녀 없이는 신의 구원 또한 완전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오직 신을 섬기는 것뿐인 영원한 헌신자들, 즉 니티야수리 (Nityasuri) 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영원과 무한을 상징하는 거대한 뱀 아난타 (Ananta) 입니다. 그는 신이 기댈 수 있는 옥좌이자 침상이 되어, 자신의 몸으로 신을 섬기는 완전한 봉사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베다의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신성한 새 (bird) 가루다 (Garuḍa) 는 신의 뜻을 온 우주에 전하는 가장 빠른 탈것으로서, 영혼을 해탈로 이끄는 신성한 지식의 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헌신자들 곁에는, 우리처럼 한때 윤회의 바다에서 고통받았으나 마침내 해탈하여 이곳에 도달한 무한한 수의 영혼들, 즉 묵타 (Mukta) 들이 함께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카르마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으며, 신과 같은 순수한 본성을 회복하여, 신의 영원한 유희 (līlā)에 동참하며 무한한 지복 속에서 사랑의 봉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파라’의 형태는 인간의 감각이나 마음으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의 가장 궁극적이고도 신비로운 본체입니다. 그러나 이 초월적인 형태가 너무 멀리 있다고 해서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내려오는 모든 화신 (Avatāra)들과,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는 신 (Antaryāmin)은 모두 바로 이 ‘파라’라는 무한한 빛의 바다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광선이기 때문입니다. 파라는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자, 모든 영혼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인 것입니다.
‘뷰하 (Vyūha)’ : ‘전개적 형태’
두 번째 형태는 ‘뷰하 (Vyūha)’, 즉 ‘전개적 형태’입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신이 우주의 창조, 유지, 파괴와 같은 우주적 기능을 수행하고, 명상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를 네 가지의 다른 형태로 전개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고의 신, 나라야나는 저 멀리 모든 창조 세계를 넘어선 영원한 빛의 거처 바이쿤타 (Vaikuṇṭha)에 홀로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그의 무한한 자비는 유한한 존재들을 향한 끝없는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떻게 하면 저 고통받는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지를 항상 고뇌합니다. 바로 이 구원을 향한 신의 역동적인 의지가, ‘뷰하 (Vyūha)’, 즉 ‘전개 (展開)’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이 단순히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명상하는 자와 헌신하는 자들이 그의 신성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네 개의 빛나는 우주적 인격체로 펼쳐 보이는 장엄한 신학적 드라마입니다. 이 네 신성한 존재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위대한 신 크리슈나의 가문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은 바로 크리슈나 자신인 바수데바 (Vāsudeva), 그의 형 산카르샤나 (Saṅkarṣaṇa), 그의 아들 프라듐나 (Pradyumna), 그리고 그의 손자 아니룻다 (Aniruddha)입니다. 이 가족 관계는 단순히 신화적 흥미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로부터 우주가 어떻게 단계적으로 현현하는지를 보여주는 심오한 상징 체계입니다.
모든 전개의 근원이자 중심은 바수데바입니다. 그는 초월적 형태 (Para)의 신이 최초로 자신을 드러낸 모습이며, 라마누자가 말하는 여섯 가지 영광의 속성, 즉 완전한 지혜 (Jñāna), 무한한 힘 (Śakti), 절대적 주권 (Aiśvarya), 흔들림 없는 권능 (Bala),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자족 (Vīrya), 그리고 눈부신 광휘 (Tejas)를 모두 완벽하고 충만하게 지니고 있는 궁극의 실체입니다. 신화 속에서 바수데바는 크리슈나 자신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가져오고, 불의에 맞서 싸우며, 사랑과 지혜의 노래인 『바가바드 기타』를 설하는 완전한 인격신입니다. 철학적으로, 그는 다른 모든 형태의 근원이 되는 순수한 브라만 그 자체이며, 그에게서부터 다른 모든 우주적 기능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는 명상하는 자에게 궁극적인 해탈의 길을 열어주는 순수한 지혜의 원천입니다. 모든 것은 바수데바에서 시작하여 바수데바로 돌아갑니다.
이 완전한 바수데바로부터 두 번째 형태인 산카르샤나가 전개됩니다. 신화 속에서 산카르샤나는 크리슈나의 형이자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발라라마 (Balarāma)와 동일시됩니다. 그는 종종 쟁기를 무기로 들고 나타나며, 그의 분노는 세상을 뒤흔들 만큼 강력합니다. 철학적으로, 산카르샤나는 신의 여섯 가지 속성 중 지혜 (Jñāna)와 권능 (Bala)을 주로 드러냅니다. 그의 첫 번째 위대한 임무는 바로 우주의 ‘해체 (saṃhāra)’, 즉 파괴입니다. 그는 한 시대가 끝나갈 때, 모든 개별 영혼들과 물질세계를 다시 미세한 형태로 되돌려, 모든 것을 근원적인 프라크리티의 상태로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신화 속에서 발라라마가 종종 분노를 터뜨리며 세상을 파괴할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우주적 해체의 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파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동시에 모든 영혼들에게 참된 지혜,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최초의 ‘교사 (śāstra-pravartaka)’입니다. 그는 모든 영혼 속에 깃든 무지 (avidyā)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참된 앎의 씨앗을 심습니다. 이처럼 산카르샤나는 파괴와 가르침이라는 양면적인 역할을 통해, 낡은 것을 소멸시키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역동적이고도 필수적인 우주적 힘입니다.
산카르샤나로부터 세 번째 형태인 프라듐나가 전개됩니다. 신화 속에서 프라듐나는 크리슈나의 아들이며, 사랑의 신 카마 (Kāma)의 화신으로 여겨질 만큼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는 창조적인 사랑의 힘과 매혹적인 매력을 상징합니다. 철학적으로, 프라듐나는 신의 속성 중 주권 (Aiśvarya)과 자족 (Vīrya)을 주로 드러냅니다. 그의 위대한 임무는 바로 새로운 우주의 ‘창조 (sṛṣṭi)’입니다. 그는 산카르샤나가 거두어들인 미세한 세계를 바탕으로, 다시 구체적인 이름과 형태를 가진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신화 속에서 그가 사랑의 신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바로 이 창조 행위 자체가 무 (無)에서 유 (有)를 낳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강력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창조된 세계가 따라야 할 보편적인 법칙과 질서, 즉 다르마 (Dharma)를 세상에 펼치고 확립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내고, 모든 영혼들이 각자의 카르마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프라듐나는 단순히 세상을 만드는 건축가를 넘어, 그 세상이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위대한 입법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라듐나로부터 네 번째 형태인 아니룻다가 전개됩니다. 신화 속에서 아니룻다는 크리슈나의 손자이며, ‘막을 수 없는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용맹하고 거침없는 젊은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철학적으로, 아니룻다는 신의 속성 중 힘 (Śakti)과 광휘 (Tejas)를 주로 드러냅니다. 그의 위대한 임무는 프라듐나가 창조한 세계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 (sthiti)’입니다. 그는 창조된 세계가 혼돈과 악의 세력에 의해 붕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강력한 수호자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부여하며,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악과 싸우며, 선한 이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신화 속에서 아니룻다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행적들은 바로 이 우주적 보호의 힘을 상징합니다. 그는 네 가지 뷰하 중에서 우리와 같은 유한한 존재들에게 가장 가깝고도 친밀한 형태입니다. 그가 바로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 거주하며 우리를 이끄는 내면의 지배자 (Antaryāmin)의 원형이며,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응답하는 자비로운 구원자입니다.
이처럼 뷰하의 개념은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를 위대한 신화적 서사로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초월적인 절대자는 바수데바라는 완전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해체의 힘을 지닌 산카르샤나가, 다시 창조의 힘을 지닌 프라듐나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호의 힘을 지닌 아니룻다가 차례로 전개됩니다. 이 네 단계의 전개는 단순한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실재가 어떻게 다양한 우주적 기능으로 자신을 펼쳐 보이는지를 보여주는 논리적 과정입니다. 라마누자에게 이 뷰하의 개념은, 신이 단순히 저 멀리 옥좌에 앉아 있는 초월자가 아니라, 우주의 모든 과정—창조, 유지, 파괴, 그리고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펼쳐 보이는, 가장 역동적이고도 자비로운 지배자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비바바 (Vibhava)’ : ‘화신적 형태’
세 번째 형태는 ‘비바바 (Vibhava)’, 즉 ‘화신적 형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아바타라 (Avatāra) 입니다. ‘아바타라’는 ‘내려오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지고한 신이 역사 속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스스로의 의지로 특정한 형상을 취하여 이 지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내려오심’은 결코 신의 본질이 변하거나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라마누자의 철학에서 아바타라의 몸은 샹카라가 말하는 마야 (Māyā)처럼 환영이나 마술적인 형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물질(prakṛti)로 만들어진 육체가 아니라, 오직 순수한 선성(śuddha-sattva)으로만 이루어진, 신성하고 실제적인 몸입니다. 신은 이 신성한 몸을 통해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고, 먹고, 말하며, 심지어 고통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신이 자신의 무한한 위대함을 잠시 감추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시려는, 지극한 자비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바타라의 목적은 단순히 악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선한 이들을 보호하고 흔들리는 다르마(Dharma)를 바로 세우며, 무엇보다도 우리와 같은 유한한 존재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사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추상적인 절대자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함입니다. 책 속의 교리나 철학적 사변만으로는 결코 점화될 수 없는 사랑의 불꽃을, 신은 자신의 살아있는 현존을 통해 직접 우리 가슴에 지펴주시는 것입니다.
라마 (Rāma)와 크리슈나 (Kṛṣṇa) 와 같은 완전한 화신들은 신이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와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우리를 향한 그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직접 보여주는 가장 감동적인 증거입니다. 라마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의무 (Dharma)의 길을 배우고, 크리슈나의 유희 (Līlā)를 통해 우리는 사랑 (Prema)의 길을 배웁니다. 아바타라는 우리에게, 신이 저 멀리 있는 초월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갈망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자비로운 주인임을 깨닫게 하는, 신의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안타르야민 (Antaryāmin)’ : 즉 ‘내면의 지배자’
네 번째 형태는 ‘안타르야민 (Antaryāmin)’, 즉 ‘내면의 지배자’ 입니다. 이것은 신성의 모든 형태 중 가장 내밀하고도 친밀한 현존이며, 신이 우리를 구원하려는 자비로운 사랑이 마침내 도달한 가장 깊은 곳입니다. 안타르야민은 저 멀리 있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모든 개별 영혼의 심장 가장 깊은 곳, 우리 의식의 가장 성스러운 성소에 친구이자 증인으로서, 그리고 안내자로서 영원히 거주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는 '증인 (sākṣin)' 입니다. 우리가 홀로 있다고 느끼는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한 의도를 품는 순간에도, 그리고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비밀스러운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에도, 그는 항상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우리를 심판하려는 재판관의 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자비로운 시선입니다. 이 내면의 증인을 의식하는 삶은, 우리에게 깊은 도덕적 책임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가장 큰 위안을 줍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진리의 길을 향하도록 내면에서부터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안내자 (guide)' 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속삭임으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을 때 느끼는 내면의 평화로, 그리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느끼는 미묘한 불안감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음에 귀를 막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신성한 안내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가 수행자들이 깊은 명상 속에서 바로 이 내면의 신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고요한 소통의 길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영원한 '동반자 (companion)' 이자 '친구 (suhṛd)' 입니다. 초월적 형태 (Para)의 신이 너무나도 멀고 장엄하게 느껴지고, 화신 (Vibhava)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느낄 때조차, 안타르야민은 우리의 심장 박동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기쁨 속에서 함께 미소 짓고, 우리의 슬픔 속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우리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이 내면의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실존적 고독과 소외감을 치유하는 궁극의 약입니다.
‘아르차 (Arcā)’ : 즉 ‘성상 (聖像)적 형태’
마지막 다섯 번째 형태는 ‘아르차 (Arcā)’, 즉 ‘성상 (聖像)적 형태’ 입니다. 이것은 신의 모든 현현 중 가장 자비롭고도 구체적인 형태로, 신이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의 무한한 힘을 기꺼이 한계 짓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마누자에게 신상은 결코 단순한 돌이나 금속 조각, 혹은 신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의식을 통해 축성되었을 때, 신이 자신의 모든 영광과 속성을 지닌 채 실제로 그 안에 살아있는 몸으로 거주하며 신자들의 예배를 직접 받고 은총을 베푸는 신 그 자체입니다. 신은 우리의 사랑과 봉사를 받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쉽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물질이라는 ‘감옥’에 가두시는 것입니다.
이 아르차의 개념은 평범한 신자들에게 신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바이쿤타(Vaikuṇṭha)라는 머나먼 천상을 상상하거나, 깊은 명상 속에서 내면의 빛(Antaryāmin)을 찾기 위해 고된 수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 눈앞의 사원에서, 우리 집의 작은 제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직접 보고(darśana, 다르샨), 그의 발에 꽃을 바치며, 그를 목욕시키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드리며, 정성껏 만든 음식을 바치는 일상적인 봉사(sevā, 세바)를 통해 신과 직접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신은 더 이상 두려운 심판자나 철학적 원리가 아니라, 나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나의 사랑에 기뻐하는, 가장 친밀한 연인이자 자녀가 됩니다.
이처럼 라마누자의 신, 비슈누는 저 멀리 있는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가 아니라, 다섯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우리를 찾으며,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갈망하는, 가장 자비롭고도 인격적인 절대자입니다.
현대의 영성 개발은 추상적 관념에 갇히기 쉽습니다. 라마누자의 지혜는 궁극적 실재가 멀리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내 안 (Antaryāmin)과 눈앞 (Arcā)에 현존하는 인격적인 '누군가'임을 일깨웁니다. 진정한 성장은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신성한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로 여기고 모든 것을 기쁘게 봉헌하는 데 있습니다.
1-6.4. 헌신 (Bhakti)과 은총을 통한 구원
샹카라의 세계에서 구원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마누자의 세계에서 구원은 ‘머나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이것이 꿈이다’라는 앎 (Jñāna)만이 필요할 뿐, 다른 어떤 노력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험난한 여정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길을 알아야 하고 (jñāna yoga, 즈나나 요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묵묵히 걸어가야 하며 (karma yoga, 카르마 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사랑 (bhakti yoga, 박티 요가)이 있어야만 합니다. 라마누자에게 해탈이란, 밧줄을 뱀으로 착각했던 무지의 어둠이 걷히는 차가운 지성의 섬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이라는 영원한 연인을 향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을 통해, 마침내 그분과의 영원한 합일에 이르는 뜨거운 가슴의 여정입니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서 구원의 길은 필연적으로 헌신 (Bhakti)과 은총 (Prasāda)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집니다.
라마누자는 샹카라처럼 행위의 길 (Karma Mārga)이나 지혜의 길 (Jñāna Mārga)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들이 구원의 여정에 필수적인, 그러나 불완전한 예비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카르마 요가 (Karma Yoga): 마음의 거울을 닦는 길
구원의 여정은 가장 먼저 카르마 요가의 실천을 통해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선한 행위를 쌓는 것을 넘어, 행위의 동기와 목적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훈련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되, 그 행위를 통해 얻게 될 개인적인 욕망이나 결과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습니다. 성공이나 실패, 칭찬이나 비난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모든 행위를 지고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하나의 거룩한 제물로서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한다’는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길 때, 행위는 더 이상 우리를 얽매는 카르마의 사슬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거울을 어지럽히는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거친 먼지를 닦아내는 정화의 도구가 됩니다. 마음이 이처럼 정화되지 않은 자는, 마치 먼지 낀 거울이 태양을 온전히 비출 수 없듯, 결코 신의 무한한 위대함을 올바르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즈나나 요가 (Jñāna Yoga): 사랑할 대상을 아는 길
카르마 요가를 통해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하고 청정해지면, 수행자는 다음 단계인 즈나나 요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경전, 특히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를 깊이 탐구하고 사유함으로써, 세계와 나, 그리고 신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지적인 이해를 확립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나’의 참된 본성이 이 덧없는 육체나 마음이 아니라,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원한 의식체 (cit, 치트)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내가 돌아가야 할 궁극적 실재는 속성 없는 텅 빈 원리가 아니라, 무한하고 상서로운 속성들로 가득 찬 인격신 비슈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이 지적인 앎은 결코 메마른 사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자비로운지를 아는, 모든 진정한 사랑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님의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를 향한 흔들림 없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박티 요가 (Bhakti Yoga): 사랑의 명상으로 나아가는 길
그러나 이 두 단계는 최종적인 해탈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단지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인 박티 요가 (Bhakti Yoga, 박티 요가)를 시작하기 위한 자격을 갖추게 할 뿐입니다. 라마누자가 말하는 ‘박티’는 단순히 신의 이름을 노래하거나 감정적인 황홀경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박티는 앞선 두 가지 예비 단계를 통해 얻어진, 신의 무한한 위대함과 자비에 대한 지적인 확신을 바탕으로 하는, 흔들림 없는 ‘사랑의 명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끊어짐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기름의 흐름처럼 (taila-dhārāvat, 타일라-다라바트), 다른 어떤 생각의 개입도 없이 오직 신의 아름다움과 덕성만을 향한 사랑의 생각 (smṛti, 스므리티) 이 중단 없이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이 깊은 사랑의 명상 속에서, 신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은 점차 그분을 직접적으로 보는 듯한 생생한 직관 (darśana-samānākāra, 다르샤나-사마나카라) 으로 변모해 갑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마음과 감각을 오직 신에게만 고정시키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는 이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우리를 묶고 있는 과거의 모든 카르마의 밧줄을 태워버리고 우리를 해탈로 이끄는 직접적인 힘이라고 라마누자는 가르칩니다.
프라파티 (Prapatti) : ‘완전한 자기 포기’ 또는 ‘절대적인 귀의’
그러나 라마누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전통적인 박티 요가의 길이 가진 현실적인 어려움과 한계를 누구보다도 깊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이 길은 너무나도 험난하고 가파릅니다. 그것은 베다를 학습할 수 있는 높은 계급의 남성에게만 주로 열려 있었으며,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쌓아온 엄청난 공덕과 지적인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한순간의 실수로도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학식이 부족한 사람, 낮은 계급의 사람, 여성, 그리고 이 험난한 길을 걸어갈 의지력이나 능력이 없는 죄 많은 사람들은 영원히 구원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가? 신의 자비가 그토록 편협하고 조건적일 수 있는가? 바로 이 절박한 질문 앞에서, 라마누자는 힌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하고도 혁명적인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프라파티 (Prapatti), 즉 ‘완전한 자기 포기’ 또는 ‘절대적인 귀의 (歸依)’의 길입니다.
프라파티는 어떤 복잡한 수행이나 지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완전한 무력감 (kārpaṇya)을 처절하게 깨닫고, ‘오, 주님이시여! 저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공덕도, 힘도 없습니다. 이제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의 발아래 내려놓으니, 부디 저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온전히 내맡기는 단 한 번의 결단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영을 포기하고 물에 몸을 맡긴 사람이 물의 부력에 의해 저절로 떠오르듯, 구원을 위한 ‘나’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신의 구원하시는 힘, 즉 은총 (Prasāda 또는 Kṛpā)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학식이나 계급, 성별이나 죄의 유무를 묻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갈 곳 없는 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찾듯, 신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지금 이 순간 즉시 열려 있는 문입니다. 프라파티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산을 오르려는 고된 등반이 아니라, 산 정상에서 내려온 밧줄을 굳게 붙잡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라마누자의 전통 (Śrī Vaiṣṇavism)은 이 완전한 귀의의 행위가 여섯 가지의 구성 요소 (ṣaḍaṅga-prapatti)를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신의 뜻에 순응하려는 결심 (ānukūlya-saṅkalpa)입니다.
둘째는 신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마음 (prātikūlya-varjana)입니다.
셋째는 신께서 반드시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mahā-viśvāsa)입니다.
넷째는 다른 어떤 신이나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비슈누만을 나의 보호자로 선택하는 것 (goptṛtva-varaṇa)입니다.
다섯째는 나의 영혼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을 신의 소유물로 온전히 내어맡기는 것 (ātma-nikṣepa)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는 앞서 말한, 나의 무력함에 대한 절절한 자각 (kārpaṇya)입니다. 이 여섯 가지 마음의 자세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프라파티는 완성됩니다.
이처럼 한 영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의 발아래 완전히 엎드릴 때, 비로소 신의 은총은 거침없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여기서 라마누자의 신학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신화적 장치를 통해 신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의 전통에서, 비슈누는 정의와 공의의 측면을 상징하는 엄격한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그는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며, 함부로 죄인의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배우자이자 자비의 화신인 여신, 락슈미 (Lakṣmī) 또는 슈리 (Śrī)가 있습니다. 그녀는 죄 많은 자식의 허물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자비로운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그녀는 영혼이 프라파티를 행하는 순간, 비슈누에게 다가가 그의 공의로운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이 영혼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이제 모든 것을 뉘우치고 당신께 귀의했으니 부디 용서해 주소서’라고 간청하는 중재자 (puruṣakāra)의 역할을 합니다. 신의 정의가 우리를 심판하려 할 때, 신의 자비가 먼저 나서서 우리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어머니의 간청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자식을 용서하듯, 비슈누는 락슈미의 중재를 받아들여 자신의 구원하는 은총을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이처럼 프라파티의 길은 우리의 노력과 신의 은총,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여신의 자비로운 사랑이 함께 엮어내는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이처럼 박티나 프라파티를 통해 신의 은총을 선택받은 영혼은,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 때 더 이상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은 모든 카르마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빛의 길을 따라 마침내 신의 영원한 거처인 바이쿤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라마누자가 말하는 해탈 (Mokṣa)입니다. 그러나 이 해탈은 샹카라가 말하는 것처럼, 강물이 바다에 합쳐져 그 이름과 형태를 잃어버리는 소멸의 상태가 결코 아닙니다. 라마누자에게 해탈이란, 개별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의식과 정체성을 영원히 유지한 채, 신과 같은 순수하고 완전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해탈한 영혼은 더 이상 무지와 고통에 시달리지 않으며, 신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무한한 지복 (Ānanda)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영혼의 유일한 활동은 바로 카인카르야 (kaiṅkarya), 즉 신을 향한 사랑의 봉사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의무적인 봉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는 연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가득 찬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해탈한 영혼들은 신의 영원한 유희에 동참하며, 신의 영광을 노래하고, 신을 섬기는 무한한 기쁨 속에서 신과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라마누자의 구원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로서 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사랑의 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