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의 눈앞에 놓인 항아리가 진짜 항아리가 아니라 흙이라는 실재 위에 덧씌워진 환영에 불과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더 나아가, 당신이 느끼는 모든 기쁨과 슬픔, 그리고 ‘나’라고 믿고 있는 이 존재 자체가 사실은 저 멀리 있는 거대한 바다의 한 물방울에 불과하여 언젠가는 그 속으로 합쳐져 사라져야 할 운명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샹카라에서부터 라마누자에 이르기까지, 베단타 철학의 주된 흐름인 불이론이 도달한 궁극의 지평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실존적 고뇌입니다. 즉, 우리의 개별성과 이 세계의 가치가 궁극적으로는 부정될 수 있다는 불안감인 것입니다.
샹카라에서부터 라마누자에 이르기까지, 베단타 철학의 위대한 거장들은 어떻게든 궁극적 실재가 ‘하나’ 혹은 ‘하나로 통합된 전체’라는 불이 (不二, advaita)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했습니다. 샹카라는 세계를 마야 (Māyā)라는 환영으로 돌렸고, 라마누자는 세계와 영혼을 신의 몸 또는 속성으로 귀속시켰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이 장엄한 불이의 전통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위대한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마드바 (Madhva)이며, 그의 철학 ‘드바이타 베단타 (Dvaita Vedānta)’, 즉 ‘이원론 (二元論)’은 하나의 단순하고도 강력한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차이 (bheda)는 환영이 아니라, 이 세계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진실입니다.”
마드바에게 샹카라의 불이일원론은 단순히 철학적 견해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전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신의 위대함을 훼손하며, 개인의 실존적 의미를 파괴하는 위험하고도 위장된 무신론 (pracchanna-bauddha, 프라찬나-바우다) 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성전을 지키는 용맹한 전사처럼, 샹카라 철학의 모든 기둥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논리적 역량을 총동원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샹카라 철학의 심장부, 즉 ‘니르구나 브라만 (nirguṇa-brahman)’, ‘속성이 없는 절대자’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샹카라는 브라만이 모든 이름과 형태, 속성을 초월한 순수한 존재-의식-환희 그 자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마드바는 우리의 모든 인식 수단—직접지각 (pratyakṣa, 프라티약샤), 추론 (anumāna, 아누마나), 그리고 경전의 증언 (śabda, 샤브다)—이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속성을 가진 대상’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의 속성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브라만이 아무런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허공의 꽃’이나 ‘토끼의 뿔’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속성이 없는 실체란 말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며, 우리의 어떤 인식 수단으로도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드바는 우파니샤드가 브라만을 ‘속성이 없다(nirguṇa)’고 말할 때, 그것은 브라만이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프라크리티에서 비롯된 유한하고, 변화하며, 고통스러운 물질적 속성 (prākṛta-guṇa, 프라크리타-구나) 이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오히려 브라만은 지혜, 힘, 자비, 사랑과 같은 무한하고 완전하며 초월적인 정신적 속성 (aprākṛta-guṇa, 아프라크리타-구나) 들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마드바의 궁극적 실재는 결코 텅 빈 침묵의 원리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상서로운 덕성들로 가득 찬 최고의 인격신, 비슈누 (Viṣṇu) 입니다.
샹카라 철학의 두 번째 기둥인 마야 (Māyā) 이론, 즉 ‘세계는 거짓이다 (jagat mithyā, 자가트 미트야)’라는 주장 역시 마드바의 가차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샹카라는 이 세계가 실재도 비실재도 아닌, 설명 불가능한 (anirvacanīya, 아니르바차니야) 환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드바는 이러한 ‘설명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지성인의 언어가 아니라고 일축합니다. 어떤 것은 존재하거나 (sat, 사트), 존재하지 않거나 (asat, 아사트) 둘 중 하나일 뿐, 그 중간 지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명백하게 보고 경험하는 이 항아리와 옷감, 산과 강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직접지각이라는 가장 확실한 인식 수단 (pramāṇa, 프라마나) 이 이 세계의 실재성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는데, 어떻게 경전의 몇몇 모호한 구절을 근거로 이 명백한 진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마드바는 경전의 증언이 직접지각과 충돌할 때는, 그 경전의 구절을 비유적이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이 세계는 결코 환영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고의 인격신인 비슈누가 자신의 무한한 힘으로 창조한, 실재하고 질서정연한 창조물입니다. 다만, 그것은 신처럼 완전하고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paratantra, 파라탄트라) 종속적인 실재일 뿐입니다. 이 세계를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신의 권능과 영광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개별 영혼 (jīva, 지바) 과 브라만 (Brahman) 의 동일성에 대한 마드바의 비판은 가장 격렬하고도 철저합니다. “그것이 바로 너다 (Tat Tvam Asi, 타트 트밤 아시)”라는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선언을 샹카라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너(tvam)’라는 개별 영혼의 본질이 바로 ‘그것(tat)’이라는 브라만과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라마누자는 이 둘이 ‘몸과 영혼’의 관계처럼 차이를 내포한 통일성을 이룬다고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마드바는 이 두 해석 모두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는 상식과 경험에 호소합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우며, 무한한 지복 그 자체인 신과, 무지하고, 고통받으며, 윤회의 굴레에 묶여 있는 이 유한한 영혼이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는 숭배받는 주군 (svāmin, 스바민) 이고, 다른 하나는 숭배하는 종 (sevaka, 세바카) 입니다. 하나는 독립적이고 (svatantra, 스바탄트라), 다른 하나는 전적으로 의존적 (paratantra, 파라탄트라) 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백하고 절대적이어서,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경전의 가르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마드바는 여기서 그의 놀라운 문법적, 해석학적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는 ‘Tat Tvam Asi’라는 문장을 ‘Saḥ ātmā atat tvam asi’로 풀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 영혼(saḥ ātmā), 너는 그것(atat)이 아니다(asi)”라는 의미로, 오히려 경전이 영혼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a’라는 접두사가 때로는 부정뿐만 아니라 ‘유사함’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atat tvam asi’를 ‘너는 그것과 같지 않다’ 혹은 ‘너는 그것의 완전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해석에서는, 문장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봅니다. 여기서 ‘tat(그것)’은 브라만을 가리키고, ‘tvam(너)’은 영혼을 가리키지만, ‘asi(이다)’라는 동사가 절대적인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너는 그것의 소유물이다’, ‘너는 그것을 닮았다’, 혹은 ‘너는 그것 안에 있다’는 종속적 관계를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마드바는 불이론의 가장 강력한 성서적 근거가 되었던 경전의 구절들을, 철저한 논리와 문법적 분석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이원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마드바의 철학은 샹카라와 라마누자가 쌓아 올린 모든 형태의 불이론에 대한 철저하고도 전면적인 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에게 진정한 경건함은 ‘내가 신이다’라고 선언하는 오만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차이를 깨닫고, 신의 무한한 위대함 앞에 온전히 엎드리는 겸허함에 있습니다. 그는 샹카라가 제시한 ‘차이가 없는 동일성’도, 라마누자가 제시한 ‘차이를 내포한 통일성’도 모두 거부합니다.
그가 굳건히 세운 진리는 오직 하나, 바로 ‘차이 그 자체의 실재성 (bheda-satya, 베다-사트야)’입니다. 신과 영혼은 영원히 다르며, 신과 물질도 영원히 다르고, 영혼과 물질도 다르며, 각각의 영혼들도 서로 다르고, 각각의 물질적 대상들도 서로 다릅니다. 이 영원하고도 환원 불가능한 차이야말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이자, 신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1-7.2. 다섯 가지 영원한 차이 (Pañca-bheda)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착각인가, 아니면 의미 있는 질서인가? 저 하늘의 태양과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의 차이는 궁극적으로는 사라져야 할 환영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영원한 진실인가? 샹카라로부터 라마누자에 이르기까지 베단타 철학의 주된 흐름이 어떻게든 ‘차이’를 ‘동일성’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으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면, 마드바는 바로 그 ‘차이 (bheda)’야말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신성한 현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에게 차이는 무지 (avidyā)의 산물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의 의지가 드러난 질서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앎이란 모든 것의 차이를 무시하고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명확하고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마드바는 이 우주를 지탱하는, 결코 무너지거나 뒤섞일 수 없는 다섯 개의 영원한 기둥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철학의 심장이자 굳건한 토대인 ‘판차베다 (Pañca-bheda)’, 즉 ‘다섯 가지 영원한 차이’입니다. 이 다섯 가지 차이는 우리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틀이며, 해탈에 이른 뒤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하며, 다른 모든 차이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신 (Īśvara)과 개별 영혼 (Jīva)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은 마드바 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샹카라가 ‘내가 곧 브라만’이라고 선언하고, 라마누자가 영혼을 ‘신의 몸의 일부’라고 말한 것과 달리, 마드바는 신과 영혼 사이의 간격이 무한하며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라고 단언합니다. 신은 유일하게 독립적인 실재 (Svatantra)이며,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반면에, 개별 영혼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신에게 의존하는 종속적인 실재 (Paratantra)입니다. 신은 전지 (omniscience)하고 전능 (omnipotence)하며, 무한한 지복 (Ānanda) 그 자체입니다. 반면에, 영혼은 본질적으로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힘이 미약하며, 윤회의 과정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하나는 숭배를 받는 영원한 주군 (svāmin)이며, 다른 하나는 숭배를 드리는 영원한 종 (sevaka)입니다. 이 관계는 결코 역전되거나 동일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영혼이 신과 동일하다면, 경전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헌신 (Bhakti)과 예배, 그리고 구원을 향한 모든 기도는 자기 자신을 향한 무의미한 독백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드바에게 해탈이란, 내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을 처절하게 깨닫고, 저 무한하고 완전한 신의 위대함 앞에 온전히 엎드려, 그분과의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해탈의 상태에서 영혼은 고통에서는 벗어나지만, 자신의 개별성을 잃지 않은 채, 신의 영광을 영원히 찬미하며 그 발치에서 봉사하는 무한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신과 영혼의 영원한 차이야말로, 의미 있는 종교적 삶과 사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두 번째 영원한 차이는 신 (Īśvara)과 의식 없는 물질 (Jada) 사이의 차이입니다. 이 물질세계는 샹카라가 말하는 것처럼 환영 (māy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의 의지에 의해 창조된 실재적인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신 그 자체가 아니며, 라마누자가 말하는 것처럼 신의 몸도 아닙니다. 신은 이 세계의 능동적인 원인 (nimitta-kāraṇa), 즉 이 세계를 설계하고 창조한 위대한 건축가입니다. 반면에, 프라크리티 (Prakṛti)라고 불리는 근원 물질은 그 창조를 위한 질료적인 원인 (upādāna-kāraṇa), 즉 도공이 사용하는 점토나 가마의 장작과 같습니다. 도공은 점토를 사용하여 항아리를 만들지만, 도공 자신이 점토가 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은 프라크리티를 사용하여 이 우주를 만들어내지만, 신 자신이 물질세계가 되지는 않습니다. 신은 창조의 과정 너머에 영원히 초월해 있으며, 물질의 불완전함에 결코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신은 순수한 의식 (cit) 그 자체이며, 물질은 의식이 없는 (acit) 존재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아는 주체이며, 물질은 알려지는 대상입니다. 이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마드바는 이 세계의 실재성을 굳건히 옹호하는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함과 변화가 초월적인 신의 완전성에 아무런 흠집도 낼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세계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지만, 결코 신 그 자신일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영원한 차이는 개별 영혼들 사이의 상호적인 차이 (jīva-paraspara-bheda)입니다. 이것은 마드바 철학의 가장 독특하고도 논쟁적인 주장 중 하나입니다. 샹카라에게 모든 개별 영혼 (jīva)은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의 아트만/브라만 위에 덧씌워진 환영에 불과하며, 라마누자에게 모든 영혼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식체로서 신의 몸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마드바는 각각의 영혼이 태초부터 서로 다른 고유한 본성 (svarūpa)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영혼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영혼들 사이에 ‘타라타미야 (tāratamya)’, 즉 영원한 ‘등급’ 또는 ‘서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서열에 따라, 영혼들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해탈에 적합한 영혼 (mukti-yogya)’입니다. 이들은 본성적으로 사트바 (sattva)적인 성향이 강하며, 신에 대한 헌신과 올바른 앎을 통해 결국에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신의 곁에서 영원한 지복을 누리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는 ‘영원히 윤회하는 영혼 (nitya-saṃsārī)’입니다. 이들은 본성적으로 라자스 (rajas)적인 성향이 강하여,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영원히 이 세상 속에서 윤회를 계속하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어둠에 적합한 영혼 (tamo-yogya)’입니다. 이들은 본성적으로 타마스 (tamas)적인 성향이 강하여, 신에 대한 영원한 증오와 악의를 품고 있으며, 결국에는 안단타마스 (Andhantamas)라고 불리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끝없는 고통을 겪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영혼이 각기 다른 본성과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왜 어떤 사람은 선을 향하고 어떤 사람은 악을 향하는지, 왜 모두가 똑같이 노력해도 그 결과가 다른지에 대한 마드바의 근본적인 대답입니다. ‘나’의 영적 여정은 ‘너’의 영적 여정과 다르며, 나의 궁극적인 운명 또한 너의 운명과 다릅니다. 이 개별성의 존중이야말로 마드바 이원론의 또 다른 핵심입니다.
네 번째 영원한 차이는 개별 영혼 (Jīva)과 의식 없는 물질 (Jada) 사이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지만, 철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영혼은 의식을 가진 실체 (cetana)이며, ‘아는 자 (jñātā)’, ‘행하는 자 (kartā)’, ‘경험하는 자 (bhoktā)’입니다. 반면에, 물질은 의식이 없는 실체 (acetana)이며, 알려지고, 행해지며, 경험되는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이 육체와 감각, 그리고 마음 (manas)조차도 모두 프라크리티에서 생겨난 미세한 물질에 불과합니다. 속박이란, 바로 의식을 가진 주체인 영혼이, 의식 없는 대상인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잘못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영혼은 자신의 도구인 몸과 마음을 사용하여 세상을 경험하지만, 결코 그 도구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명백한 차이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참된 영적 본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영원한 차이는 물질적 대상들 사이의 상호적인 차이 (jaḍa-paraspara-bheda)입니다. 내 눈앞의 항아리는 옷감과 다르고, 물은 흙과 다르며, 하나의 흙 원자는 다른 모든 흙 원자들과 다릅니다. 샹카라가 이 모든 다양성을 궁극적으로는 이름과 형태 (nāma-rūpa)에 불과한 환영이라고 본 것과 달리, 마드바는 이 세상의 다양성과 복수성 (plurality)이 너무나도 실재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차이는 신의 무한한 창조력과 질서정연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신은 무의미한 동일성이 아니라, 의미 있는 다양성을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이 세계의 다채로움은 우리가 벗어나야 할 환영의 감옥이 아니라,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들의 향연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그 고유한 차이 속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주이신 신의 뜻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이처럼 마드바가 세운 다섯 개의 기둥은, 신의 절대적인 주권, 영혼의 고유한 개별성, 그리고 이 세계의 생생한 실재성을 동시에 굳건히 지켜내는 강력한 철학적 성채입니다. 이 성채 안에서, 모든 존재는 뒤섞이거나 사라질 염려 없이, 각자의 고유한 모습으로 신과의 영원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1-7.3. 신을 향한 봉사와 영혼의 기쁨
신과 나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이 서늘하고도 명징한 진실은 마드바 철학의 끝이 아니라, 가장 뜨거운 신앙의 시작점입니다. 샹카라에게 해탈이 ‘내가 바로 브라만’이라는 동일성의 깨달음이라면, 그리고 라마누자에게 해탈이 신의 몸의 일부로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마드바에게 해탈이란 ‘나는 결코 신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는 절대적인 차이를 처절하게 깨닫고, 그 무한한 위대함 앞에 나의 모든 존재를 온전히 바치는 영원한 봉사 (sevā) 속에서 최고의 기쁨 (ānanda)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의 세계에서 영혼의 가장 위대한 운명은 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드바의 철학은 논리의 차가운 정점에서 시작하여, 헌신이라는 가장 뜨거운 종교적 체험으로 귀결됩니다.
이 구원의 길, 즉 사다나 (sādhana)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것은 먼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에 비하면 하찮고 덧없다는 것을 깨닫는 깊은 이탈 (vairāgya)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의 쾌락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시선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고요해지면, 비로소 구도자는 신을 향한 여정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 여정의 핵심은 바로 박티 (Bhakti), 즉 신을 향한 사랑과 헌신입니다. 그러나 마드바의 박티는 감정적인 황홀경이나 맹목적인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마하트미야 즈나나 (māhātmya-jñāna)’, 즉 ‘신의 위대함에 대한 올바른 앎’을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완전하며, 자비로운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결코 깊고 흔들림 없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도자는 스승의 가르침과 경전 연구 (śravaṇa), 그리고 깊은 사유 (manana)를 통해, 먼저 신이신 비슈누가 모든 상서로운 속성들로 충만하며, 다른 모든 존재—심지어 브라흐마나 시바와 같은 위대한 신들조차도—를 초월하는 유일하고 독립적인 절대자임을 지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앎을 바탕으로 한 사랑, 즉 박티는 단순히 마음속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표현되어야 합니다. 마드바는 열 가지의 실천적인 헌신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몸에 신의 상징을 새기고 (ankana, 안카나), 몸에 신의 상징을 그리며 (nāmakaraṇa, 나마카라나), 신을 예배 (bhajana, 바자나) 하고, 신의 만트라 (mantra) 를 읊조리며, 신의 성상을 모시고 경배하며 (pūjā, 푸자), 신께 절하고 (vandana, 반다나), 신의 종으로서 자신을 여기며 (dāsya, 다샤), 신을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sakhya, 사키야), 자신의 모든 것을 신께 바치는 (ātma-nivedana, 아트마-니베다나) 등의 행위들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외적인 행위들은 내면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강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 실천은 가장 먼저 자신의 몸을 신의 성전으로 봉헌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안카나 (ankana)는 신자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보통 불로 달군 금속 도장을 사용하여 몸에 비슈누의 상징인 소라 고둥이나 원반의 형상을 새기는 의식으로, 자신의 몸이 더 이상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신께 바쳐진 성전임을 선언하는 지워지지 않는 서약과도 같습니다.
이 영구적인 헌신의 표식 위에, 매일 아침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신성한 흙이나 백단향 가루로 이마와 몸에 신의 이름이나 상징을 그리는 나마카라나 (nāmakaraṇa) 를 통해, 그 헌신은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롭게 기억되고 실천됩니다.
몸이 신의 성전으로 준비되었다면, 이제 그 성전 안에서 신과의 살아있는 교감이 시작됩니다. 신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바자나 (bhajana) 를 통해, 개인적인 명상은 공동체가 함께 사랑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적인 예배로 확장됩니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신성한 만트라 (mantra) 를 끊임없이 암송하는 내면적인 실천은, 산만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의식을 신성한 차원으로 조율하는 힘을 가집니다. 또한 신의 형상을 살아있는 존재로 모시고 존귀한 손님을 대하듯 물, 꽃, 향, 등불, 음식을 정성껏 바치는 푸자 (pūjā, 푸자) 의례를 통해, 추상적인 신은 비로소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 앞에 마주하게 됩니다.
이 모든 외적인 행위들은 결국 내면의 깊은 태도, 즉 마음의 자세를 통해 그 생명력을 얻습니다. 신의 위대함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낮추어 절하는 반다나 (vandana)는 ‘나’라는 이기적인 자아를 내려놓고 신의 발아래 온전히 엎드리는 겸손과 귀의의 표현입니다. 이 겸손은 자신을 신의 충실한 하인으로 여기는 다샤 (dāsya)의 마음으로 깊어집니다. 하인이 주인의 기쁨을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듯, 나의 모든 행위가 오직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봉사가 되게 하는 헌신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이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면, 신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 (sakhya, 사키야) 가 되며, 신앙은 의무가 아닌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몸과 마음, 영혼,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소유물이 본래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임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신께 되돌려 바치는 아트마-니베다나 (ātma-nivedana)에 이르러 헌신은 그 정점을 이룹니다.
그러나 마드바가 제시한 이 모든 외적인 행위들과 내면의 태도는 결국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 즉 니디디야사나 (nididhyāsana)를 향한 준비 과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끊임없고 중단 없는 명상이며, 모든 헌신의 최종적인 귀결점입니다. 구도자는 자신의 마음을 오직 비슈누의 무한한 영광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비로운 행적에만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 깊은 명상 속에서, 신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은 점차 신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생생한 체험으로 변모해 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드바 철학의 또 다른 핵심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게 의무를 다하고, 깊이 명상하며, 열렬히 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윤회의 굴레를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한하고 종속적인 존재인 영혼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무지의 속박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신의 선택, 즉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신의 은총 (Prasāda)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와 헌신적인 노력은 구원을 ‘쟁취’하는 대가가 아니라, 단지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할 뿐입니다. 신이신 비슈누는 자신의 무한한 자유의지로, 그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보여준 영혼을 ‘선택’하여, 그에게 자신의 참된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궁극의 비전, 즉 ‘아파록샤 즈나나 (aparokṣa-jñāna)’를 허락하십니다. 이 직접적인 앎의 빛 속에서, 영혼은 비로소 ‘나는 신의 영원한 종이며, 나의 존재는 전적으로 그분께 의존해 있다’는 자신의 참된 본성 (svarūpa, 스바루파)을 완전하고도 명명백백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 영혼을 묶고 있던 모든 카르마의 사슬은 끊어집니다. 과거에 쌓아온 막대한 양의 산치타 카르마는 소멸되고, 새로운 아가미 카르마는 더 이상 쌓이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몸을 유지시키는 프라라브다 카르마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는 이 세상에 머물게 됩니다. 마침내 육체가 죽음을 맞이할 때, 해탈한 영혼은 더 이상 이 고통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샹카라가 말하는 것처럼 브라만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라마누자가 말하는 것처럼 신과 유사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드바에게 해탈 (Mukti)이란, 자신의 고유하고 영원한 본성 (svarūpa)을 완전히 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드바 철학의 가장 독특한 지점입니다. 그가 주장했던 영혼들 사이의 영원한 서열 (tāratamya)은 해탈의 상태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영혼은 태초부터 각기 다른 양의 순수한 의식과 지복 (ānanda)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해탈이란, 바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잠재력을 아무런 장애 없이 100퍼센트 발현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해탈한 영혼들이 누리는 기쁨의 양과 질은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해탈한 인간의 영혼이 누리는 기쁨은 해탈한 현자나 신들의 영혼이 누리는 기쁨보다 본질적으로 적으며, 그 모든 기쁨을 합친다 해도 신이신 비슈누가 누리는 무한한 지복의 바다에 비하면 한 방울의 물방울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처럼 해탈의 상태에서조차 신과 영혼의 차이, 그리고 영혼들 사이의 차이는 영원히 유지됩니다. 해탈은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해탈한 영혼들은 신의 영원한 거처인 바이쿤타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들의 유일하고도 지고한 활동은 바로 신을 향한 사랑의 봉사 (sev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어떤 영혼은 신의 영광을 노래하고, 어떤 영혼은 신의 시중을 들며, 또 어떤 영혼은 신의 신성한 유희에 동참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윤회의 세계에서처럼 의무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행하는 고된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인 신의 위대함을 바로 곁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환희로 가득 찬 활동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해탈한 영혼은 신을 섬기는 행위 그 자체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장 완전한 실현과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신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입니다. 이처럼 마드바의 구원은 ‘나’의 소멸을 통한 텅 빈 자유가 아니라, ‘나’라는 고유한 존재로서 신이라는 영원한 타자와 맺는 사랑과 봉사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한계마저 기쁨으로 끌어안는, 역동적이고도 충만한 영혼의 찬가입니다.
1-7.4. 비이원론의 세계, 신의 순수한 발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저 경이로운 반짝임은 한낱 환영에 불과한가? 갓 피어난 꽃잎의 섬세한 결을 어루만질 때 손끝에 전해지는 저 생생한 감촉은 궁극적으로는 거짓인가? 만약 이 세계가 벗어나야 할 감옥이거나, 극복해야 할 환영이라면,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샹카라가 이 세계를 마야 (Māyā)라는 신비로운 장막으로 덮어버리고, 라마누자가 세계를 신의 몸이라는 종속적인 지위로 설명했으며, 마드바가 세계를 신과는 영원히 다른 피조물로 규정했다면,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위대한 사상가이자 신앙인인 발라바 (Vallabhācārya, 발라바차르야 1479?-1531)는 이 모든 조심스러운 거리두기를 단숨에 뛰어넘습니다.
그는 이 세계가 신의 환영도, 몸도, 피조물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세계는 바로 신 그 자신입니다. 그의 철학, 즉 ‘슈타드바이타 베단타 (Śuddhādvaita Vedānta)’, 즉 ‘순수 불이일원론 (純粹不二一元論)’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먼지 한 톨에서부터 밤하늘의 은하수에 이르기까지, 신의 순수한 본질이 조금도 더러워지거나 변질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노래하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기쁨에 찬 긍정의 철학입니다.
발라바 철학의 이름에 붙은 ‘순수 (Śuddha)’라는 단어는 바로 샹카라의 마야 개념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샹카라는 유일하고 순수한 브라만이 어떻게 이 다양하고 불완전한 세계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마야라는 ‘불순한’ 매개물을 끌어들여야만 했습니다. 즉, 그의 불이일원론은 마야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마야에 의해 ‘오염된’ 불이일원론이라고 발라바는 보았습니다. 발라바는 이 마야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폐기합니다. 그에게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완전하고 전능하며, 자신의 본질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이 다양한 세계로 펼쳐낼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어 마야와 같은 외부적인 마술의 힘에 의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발라바의 불이일원론은 마야라는 불순물이 제거된, 원인 (브라만)과 결과 (세계)가 모두 동등하게 ‘순수하다’고 선언하는 진정한 의미의 ‘순수 불이일원론’입니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샹카라의 비유 대신, 발라바는 금과 금 장신구의 비유를 듭니다. 금으로 만든 팔찌는 결코 금의 환영이 아닙니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은 100퍼센트 순수한 금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브라만의 환영이 아니라, 이름과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은 100퍼센트 순수한 브라만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브라만이, 이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한 세계와 동일할 수 있는가? 발라바는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본질이 바로 ‘릴라 (Līlā)’, 즉 ‘유희’ 또는 ‘놀이’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발라바의 궁극적 실재는 속성이 없는 차가운 원리가 아니라, 순수한 존재 (Sat), 순수한 의식 (Cit), 그리고 순수한 환희 (Ānanda)로 충만한 최고의 인격신, 크리슈나 (Kṛṣṇa)입니다. 그분은 아무런 결핍도, 목적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충만함 그 자체입니다. 바로 그 완전한 환희 속에서, 신은 순수한 기쁨으로 스스로와 놀이를 하고 싶다는 갈망을 느낍니다. 홀로 존재하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사랑의 충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많아지리라 (Ekoham bahu syām)”는 우파니샤드의 선언은, 발라바에게 있어 바로 이 신성한 놀이를 향한 신의 즐거운 외침입니다. 이 세계의 창조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이나 의무 때문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런 목적 없이 순수한 기쁨으로 모래성을 쌓고 부수듯, 신이 자신의 무한한 환희를 표현하기 위해 시작한 즐겁고도 자발적인 유희입니다.
이 신성한 유희의 과정에서, 신은 자신의 본질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바로 ‘발현 (Āvirbhāva)’과 ‘은폐 (Tirobhāva)’의 원리입니다. 신이신 크리슈나의 본질은 완전한 사트-치트-아난다 (존재-의식-환희) 그 자체입니다. 그가 자신을 이 의식 없는 물질세계 (Jagat 또는 Jada)로 드러내고자 할 때, 그는 자신의 세 가지 본질 중 의식 (Cit)과 환희 (Ānanda)라는 두 가지 속성을 의도적으로 ‘은폐’합니다. 그 결과, 오직 존재 (Sat)라는 속성만이 드러난 신의 모습이 바로 이 물질세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의식과 기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환영이거나 저급한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이 자신의 두 가지 영광스러운 얼굴을 잠시 가린 채, ‘존재’라는 얼굴만으로 우리와 놀고 있는 것입니다. 산과 강, 돌멩이 하나하나는 모두 신의 순수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이 자신을 무한한 수의 개별 영혼 (Jīva)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 그는 자신의 세 가지 본질 중 오직 환희 (Ānanda)라는 속성만을 ‘은폐’합니다. 그 결과, 존재 (Sat)와 의식 (Cit)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드러난 신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 개별 영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고 사유하는 의식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유한성과 고통, 그리고 끝없는 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에 내재된 무한한 환희를 잃어버렸거나, 혹은 신이 놀이를 위해 그것을 잠시 감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발라바에게 영혼은 샹카라가 말하듯 무지라는 거울에 비친 브라만의 ‘그림자 (pratibimba)’가 아니라, 거대한 불에서 튀어나온 ‘불꽃 (aṃśa)’ 그 자체입니다. 불꽃은 불과 분리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불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개별 영혼은 신의 유희 속에서 신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신과 동일한 순수한 존재이자 의식입니다.
이처럼 발라바의 세계에서, 신과 세계, 그리고 영혼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 즉 브라만입니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신의 유희 속에서 특정 속성이 드러나고 감추어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더 이상 우리가 벗어나야 할 고통의 장소나 극복해야 할 환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이 자신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는 신성한 무대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환희를 되찾고 신과의 사랑의 유희에 동참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산에서 피어나는 꽃 한 송이는 신의 숨겨진 미소이며, 강물의 도도한 흐름은 신의 영원한 생명력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신의 순수한 발현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샹카라에게 속박의 원인이 무지 (avidyā)였다면, 발라바에게 속박의 원인은 신이 자신의 환희를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기적인 ‘나 (aham)’와 ‘나의 것 (mama)’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이 작은 에고에 대한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 속에 현존하는 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유일한 장막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길은 이 세계를 부정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 모든 것들을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으로 보고, 신을 위해 사용하며, 신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를 통해 신성하게 변화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이처럼 발라바의 순수 불이일원론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신의 순수한 발현으로 긍정하고 끌어안음으로써, 철학을 메마른 지성의 영역에서 삶과 사랑,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생생한 종교적 체험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1-7.5. 은총의 길 (Pushtimarga)과 순수한 사랑
우리의 영혼은 거대한 불에서 튀어나온 작은 불꽃과도 같습니다. 그 본질은 신성한 불과 다르지 않은 순수한 존재 (Sat)이자 의식 (Cit)이지만, 신의 신성한 유희 (Līlā) 속에서 그만 가장 중요한 것, 즉 무한한 환희 (Ānanda)의 측면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끝없는 갈망과 불만족,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방황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잃어버린 그 기쁨을 향한 희미한 기억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잃어버린 환희를 되찾고, 불꽃이 다시 거대한 불길 속으로 돌아가 그 완전한 기쁨을 회복하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16세기 인도의 위대한 바이슈나바 철학자인 발라바 (Vallabhācārya)는 힌두 사상의 전통적인 길과는 구별되는, 오직 사랑과 은총으로만 열린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푸슈티 마르가 (Puṣṭi Mārga)’, 즉 ‘은총의 길’입니다.
이 길의 독특함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발라바가 제시한 두 가지의 근본적으로 다른 구원의 경로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 길은 ‘마르야다 마르가 (Maryādā Mārga)’, 즉 ‘규범의 길’ 또는 ‘율법의 길’입니다. 이것은 베다 경전과 그 부속 문헌들이 제시하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경로입니다. 이 길을 걷는 구도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해탈을 성취해야만 합니다. 그는 경전을 공부하여 지혜 (Jñāna)를 얻어야 하고, 사회적, 종교적 의무 (Karma)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며, 요가의 수행을 통해 감각과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 길은 엄격한 규칙과 규율, 그리고 개인의 자격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험난하고 길며, 오직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 험준한 산을 오르는 등반가의 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발라바는 이 전통적인 길 외에, 훨씬 더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두 번째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푸슈티 마르가 (Puṣṭi Mārga)’, 즉 ‘은총의 길’입니다. ‘푸슈티 (Puṣṭi)’는 ‘자양 (滋養)’, ‘풍요’, ‘번성’을 의미하며, 신학적으로는 신이 베푸는 아무런 조건 없는 ‘은총 (Anugraha)’을 의미합니다. 이 길에서 구원의 주체는 더 이상 고군분투하는 개별 영혼이 아닙니다. 구원의 유일한 주체는 바로 신, 즉 크리슈나 자신입니다. 이 길은 영혼이 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신의 무한한 자유의지로 특정 영혼을 ‘선택’하여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는 길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품에 안아 젖을 물려 키우듯, 신은 자신이 선택한 영혼을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보살피고, 그 영혼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마침내 자신과의 영원한 사랑의 유희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이 길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하기에, 구도자의 계급이나 성별, 학식이나 도덕적 청정함과 같은 그 어떤 세상의 자격도 묻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뿐입니다. 이것은 험준한 산을 오르는 길이 아니라, 산 정상에서 내려온 밧줄을 그저 붙잡기만 하면 되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 은총의 길에서 영혼이 해야 할 유일한 실천은 바로 ‘세바 (Sevā)’, 즉 ‘사랑의 봉사’입니다. 그러나 발라바의 세바는 단순히 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순간을 신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바꾸는, 존재 방식 그 자체입니다. 샹카라의 길을 걷는 즈나니 (jñānī)가 이 세계를 환영으로 보고 버리려 한다면, 푸슈티 마르가의 박타 (bhakta)는 이 세계가 신의 순수한 발현임을 알기에,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끌어안아 신께 다시 바칩니다. 그의 집은 더 이상 개인의 거처가 아니라 신이 거하시는 사원 (mandir)이 됩니다. 그가 요리하는 음식은 더 이상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께 가장 먼저 바치는 신성한 공물 (bhog)이 됩니다. 그가 입는 옷, 그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 그가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은 오직 사랑하는 크리슈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세바의 가장 중심에는 신의 ‘스와루파 (svarūpa)’, 즉 신의 본질적 형태를 모신 성상 (聖像)에 대한 경배가 있습니다. 발라바의 전통에서 신상은 단순한 돌이나 금속 조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이 자신의 은총으로 신자들과 직접적으로 교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완전한 현존을 드러낸, 살아있는 신 그 자체입니다. 신자는 하루 종일 정해진 시간에 따라 이 살아있는 신을 섬깁니다. 아침에는 부드러운 노래로 신을 깨우고, 정성껏 목욕시키며,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로 꾸며드립니다. 맛있는 음식을 바치고, 향을 피우며, 그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가 (kīrtan)를 부릅니다. 저녁에는 다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편히 쉬시도록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의무적인 종교 의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연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가득 찬 친밀한 교감입니다. 신자는 이 세바를 통해,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로서의 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내 눈앞에서 미소 짓고, 음식을 맛보며, 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인격신 크리슈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푸슈티 마르가 (Puṣṭi Mārga)가 추구하는 사랑의 가장 완전하고도 눈부신 이상은, 신화 속 인물이자 모든 구도자의 영원한 원형인 브라즈 (Vraj)의 고피 (Gopī)들, 즉 크리슈나가 지상에서 유희를 즐겼던 브린다반의 소치는 목동 여인들의 삶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크리슈나를 향한 사랑은 베다의 어떤 규범 (maryādā, 마르야다) 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체면, 가족에 대한 의무, 심지어는 종교적 율법마저도 아득히 뛰어넘는, 순수하고 자발적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크리슈나가 숲속에 서서 그의 마법의 피리 반수리 (Bāṃsurī)를 불기 시작하면, 그 신비로운 선율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영원의 고향으로부터 들려오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신의 애타는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고피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하던 모든 일을 그 자리에서 내팽개칩니다. 남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던 여인은 끓고 있는 우유를 잊어버리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어머니는 아이를 내려놓으며, 가족의 시중을 들던 며느리는 모든 체면을 잊어버립니다. 그들은 남편의 만류와 사회의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 피리 소리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미친 듯이 한밤중의 숲속으로 맨발로 달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세속적 사랑이나 불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개별 영혼이 지고한 신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세속의 모든 의무 (dharma)와 집착, 그리고 ‘나’라는 에고마저도 모두 버리고 오직 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박티 사상의 가장 급진적이고도 아름다운 상징입니다. 그들은 크리슈나와의 합일을 통해 천상에 가거나 해탈을 얻으려는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갈망은 오직 크리슈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으며, 그를 향한 사랑 그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님을 사랑하는 행위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는 사랑, 이것이 바로 발라바가 말하는 ‘슈다 프레마 (śuddha-prema)’, 즉 ‘순수한 사랑’이며, 은총의 길을 걷는 영혼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입니다.
이 은총의 길을 통해 신의 완전한 사랑을 얻게 된 영혼의 최종적인 운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샹카라가 말하는 것처럼 브라만 속으로 합일하여 ‘나’라는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꽃이 불 속으로 돌아가 자신의 존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발라바에게 해탈 (Mokṣa)이란, 영혼이 자신의 본성에 잠재해 있던 무한한 환희 (Ānanda)를 완전히 회복하고,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영원히 유지한 채, 신의 영원한 거처인 골로카 (Goloka)에서 크리슈나의 신성한 ‘영원한 유희 (Nitya-līlā)’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더 이상 지상의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신의 영원한 동반자로서 그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사랑을 나눕니다. 어떤 영혼은 크리슈나의 친구가 되고, 어떤 영혼은 그의 부모가 되며, 가장 축복받은 영혼은 고피가 되어 그와 연인의 사랑을 나눕니다. 이처럼 구원은 고통의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신의 세계로의 초대입니다. 발라바의 은총의 길은 우리에게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결론을 보여줍니다. 즉, 이 세계는 신의 사랑의 표현이며, 우리의 삶은 그 사랑에 응답하여 함께 춤추는 축제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