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발견한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라는 장엄한 진리는, 인간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성의 봉우리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처럼 가파르고 고독한 정상을 향해 곧바로 오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며,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구체적인 역할과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저 높은 하늘의 형이상학적 진리는, 이 흙먼지 나는 땅 위의 구체적인 삶과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힌두 사상의 위대한 지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추상적인 진리를 살아있는 삶의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거대한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 샤스트라 (Dharmaśāstra)’, 즉 ‘다르마에 관한 학문’ 또는 ‘법전’이라고 불리는 문헌들입니다. ‘마누 법전 (Manusmṛti)’으로 대표되는 이 문헌들은, 힌두교를 단순한 철학 사변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문명이자 생활 방식으로 만든 사회적 청사진입니다. 이 청사진의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바로 한 개인의 일생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아슈라마 다르마 (Āśrama Dharma)’와, 사회 전체를 수평으로 아우르는 ‘바르나 다르마 (Varṇa Dharma)’입니다.
바르나 다르마와 카스트
바르나 다르마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합니다.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체 (肢體)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조화롭게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 사회적 분업의 신화적 원형은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리그베다의 ‘푸루샤 숙타 (Puruṣa Sūkta)’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태초의 거인 푸루샤 (Puruṣa)가 희생 제물로 바쳐졌을 때, 그의 입에서는 브라만 (Brāhmaṇa)이, 팔에서는 크샤트리야 (Kṣatriya)가, 넓적다리에서는 바이샤 (Vaiśya)가, 그리고 발에서는 수드라 (Śūdra)가 태어났습니다. 이 네 가지 바르나 (varṇa), 즉 ‘사회적 의무의 틀’은 단순히 인간이 만든 계급이 아니라, 우주 창조의 신성한 질서 속에 이미 내재된 원리라고 믿어졌습니다.
첫 번째 바르나인 브라만은 사회의 머리에 해당합니다. 그들의 다르마는 베다 경전을 학습하고 가르치며, 신들을 위한 제사를 집전하고, 영적인 지혜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지성이자 양심이며, 정신적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집니다.
두 번째 바르나인 크샤트리야는 사회의 팔에 해당합니다. 그들의 다르마는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고, 나라를 정의롭게 통치하며,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힘이자 권력이며, 물리적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집니다.
세 번째 바르나인 바이샤는 사회의 몸통에 해당합니다. 그들의 다르마는 농업, 목축, 그리고 상업을 통해 부 (富)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생명력이자 동력이며, 경제적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집니다.
마지막 네 번째 바르나인 수드라는 사회의 발에 해당합니다. 그들의 다르마는 앞의 세 바르나를 자신의 노동으로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기반을 튼튼하게 받치는 것입니다.
이 이상적인 청사진 속에서, 바르나 다르마는 결코 억압적인 계급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각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 (svabhāva, 스바바바)과 자질에 따라 사회 전체의 안녕에 기여할 수 있는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하는, 유기적인 협력의 체계였습니다.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의무, 즉 ‘스바다르마 (svadharma)’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사회 전체라는 거대한 야즈나 (yajña, 제사)에 자신의 몫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다르마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삶이야말로, 카르마의 법칙 속에서 공덕을 쌓고 더 나은 내생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이상적인 역할 분담의 원리는 점차 혈통에 따라 직업과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경직된 신분 제도, 즉 오늘날 우리가 아는 ‘카스트 (Jāti)’ 제도로 변질되어, 수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슈라마 다르마
만약 바르나 다르마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개인이 맡아야 할 수평적인 역할이라면, 아슈라마 다르마는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개인이 거쳐가야 할 수직적인 네 단계의 길입니다. ‘아슈라마 (āśrama)’는 ‘수행하는 장소’ 또는 ‘노력의 단계’를 의미하며,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순례의 여정으로 바라보는 심오한 통찰입니다. 이 네 단계는 전통적으로 상위 세 바르나의 남성에게 적용되었으며, 각각의 단계는 고유한 목표와 의무를 가집니다.
브라마차리야 (Brahmacarya): 에너지를 담을 그릇을 빚는 학생기
첫 번째 단계는 ‘브라마차리야 (Brahmacarya)’, 즉 ‘학생기 (學生期)’입니다. 소년은 입문식 (upanayana, 우파나야나)을 거치며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 뒤, 집을 떠나 영적인 스승 (Guru, 구루)의 곁으로 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배우기 위한 유학이 아니라, 이후의 삶 전체를 담아낼 그릇, 즉 자신의 인격을 빚어내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는 스승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스승을 섬기고, 그 대가로 베다의 신성한 지식을 배웁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금욕과 절제, 그리고 순종을 통해 자신의 감각과 마음을 통제하는 훈련입니다. 특히 ‘브라마차리야’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인 금욕은, 단순히 성적인 에너지를 억제하는 것을 넘어, 그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지적인 탐구와 영적인 성장을 위한 연료로 전환시키는 내면의 연금술과도 같습니다. 이 단계의 목표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견고한 인격과 도덕적 기틀을 마련하는, 영혼의 담금질 과정입니다.
그리하스타 (Gṛhastha): 세상의 중심에서 춤추는 가장기
두 번째 단계는 ‘그리하스타 (Gṛhastha)’, 즉 ‘가장기 (家長期)’입니다. 교육을 마친 청년은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자신의 바르나에 맞는 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이 단계는 영적인 삶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치열한 삶의 한복판에서 영성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단계로 여겨집니다. 가장만이 자녀를 낳아 가문의 대를 잇고 조상에 대한 빚을 갚으며, 다른 세 아슈라마에 속한 학생과 은둔자, 유행자를 부양할 사회적, 경제적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인간은 인생의 세 가지 정당한 목표, 즉 의무 (Dharma), 재물 (Artha, 아르타), 그리고 사랑과 쾌락 (Kāma, 카마) 을 조화롭게 추구하도록 장려됩니다. 가장의 삶은 세속적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다르마라는 더 큰 틀 안에서 통제하고, 모든 사회적, 가정적 행위를 하나의 거대한 제사 (yajña, 야즈나)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실천의 장입니다.
바나프라스타 (Vānaprastha): 숲으로 돌아가 자아를 찾는 임서기
세 번째 단계는 ‘바나프라스타 (Vānaprastha)’, 즉 ‘임서기 (林棲期)’입니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의무를 모두 마친 가장은 마침내 세속적인 삶의 무대에서 물러날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슬픈 은퇴가 아니라, ‘하는 자’에서 ‘존재하는 자’로 전환하는 영광스러운 졸업입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혹은 홀로 모든 재산과 명예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갑니다.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그는 최소한의 소유만으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며, 남은 생을 오직 영적인 수행과 명상에 바칩니다. 이 단계의 목표는 세상에 대한 마지막 남은 미련과 애착을 끊어내고, 마음을 정화하며, 죽음과 그 너머의 여정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제단 위에서 행해지던 외적인 제사는 이제 내면의 제사로 전환됩니다. 그의 호흡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고, 그의 몸은 신성한 제단이 되며, 그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명상의 불꽃은 우주를 비추는 빛과 하나가 됩니다.
산냐사 (Sannyāsa):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이 되는 유행기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산냐사 (Sannyāsa)’, 즉 ‘유행기 (遊行期)’입니다. 숲속에서의 수행을 통해 모든 집착을 끊어낸 구도자는 마침내 마지막 남은 속박마저도 벗어 던집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가족, 심지어는 ‘나’라는 정체성마저도 포기하고, 자신의 장례식을 스스로 치름으로써 사회적인 죽음을 선언합니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도는 완전한 자유인이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사회적 규범이나 제사 의례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직 구걸을 통해 얻은 최소한의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이 세상의 모든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궁극적 실재, 즉 브라만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마침내 이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해탈 (Mokṣa, 모크샤) 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산냐시는 살아있는 해탈자로서, 그의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속박을 넘어선 자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경전이 됩니다. 이처럼 아슈라마 다르마는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태어남의 경이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책임과 내면적 성찰을 거쳐, 마침내 무한한 자유 속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완전하고도 신성한 순례의 여정으로 완성시킵니다.
삶의 좌표축: 바르나와 아슈라마
이처럼 바르나 다르마와 아슈라마 다르마는 서로 교차하며 한 힌두교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좌표축을 형성합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려주는 우주적 지도와도 같습니다. 사회라는 가로축 (바르나) 위에서의 나의 위치와, 인생이라는 세로축 (아슈라마) 위에서의 나의 단계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내가 지금 여기서 마땅히 행해야 할 구체적인 의무, 즉 스바다르마 (svadharma) 가 명확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바르나슈라마 다르마 (Varṇāśrama Dharma)’ 의 체계는, 인간의 모든 삶의 국면—사회적 역할과 개인적 성장, 세속적 욕망과 영적 추구—을 하나의 신성한 질서 속에 통합하려는 위대한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삶이 반드시 세상을 등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학생으로서 지식을 탐구하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며, 상인으로서 부를 창출하는 모든 세속적인 행위가,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다르마에 따라 올바르게 행해질 때, 그 자체로 하나의 거룩한 제사 (yajña)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상적인 체계는 역사 속에서 종종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경직된 신분 제도로 왜곡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이상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질문, 즉 ‘나는 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나의 인생 속에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삶의 의미와 방향을 묻는 영원한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다르마의 복잡하고도 때로는 고통스러운 딜레마야말로, 힌두 사상의 위대한 영웅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마주해야 했던 실존적 전쟁터의 핵심입니다. 하나의 다르마가 다른 다르마와 충돌할 때, 개인적인 사랑이 사회적인 의무와 맞설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법전의 차가운 조문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대서사시의 영웅들이 자신의 온 삶을 걸고 피와 눈물로 써 내려간, 살아있는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1-9.2. 신들의 이야기, 인간의 삶을 비추다
철학의 언어는 종종 차갑고 예리합니다. 그것은 지성의 칼날로 실재와 비실재를 가르고, 개념의 그물로 진리를 포획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오직 논리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은 이해하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사랑하기를 원하며, 분석하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경배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브라만은 순수한 의식이다’라는 진리가 장엄하다 한들, 우리가 고통의 심연에 빠져 절망의 눈물을 흘릴 때, 그 추상적인 원리가 우리의 손을 잡아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우리의 슬픔에 공감하며, 때로는 우리와 함께 웃고 우는, 인격적이고도 친밀한 신을 갈망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힌두 사상의 위대한 지혜는 소수의 철학자들이 오르던 고독한 지성의 정상에서 내려와, 모든 이들이 함께 걷고 노래할 수 있는 드넓은 평원으로 그 무대를 옮깁니다. 그리고 그 평원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 바로 대서사시 (Itihāsa, 이티하사)와 푸라나 (Purāṇa)라고 불리는, 신들의 장대한 이야기입니다.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주로 브라만 계급의 사제와 현자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스러운 가르침이었다면,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라는 두 편의 위대한 대서사시, 그리고 수많은 푸라나 문헌들은 카스트나 성별, 학식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시대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더 이상 제단의 불꽃 앞에서만 속삭여지는 난해한 주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을의 광장에서 음유시인의 노래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잠자리 이야기로, 그리고 축제의 밤에 펼쳐지는 다채로운 연극으로 살아 숨 쉬었습니다. 힌두교가 소수의 철학적 사유를 넘어 수억만 민중의 삶을 아우르는 살아있는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야기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푸라나와 대서사시는 우파니샤드의 추상적인 철학적 진리를, 구체적인 인격과 감정을 가진 신들의 드라마틱한 서사로 번역해내는 위대한 연금술을 행했습니다. 샹카라의 철학 속에서 모든 속성을 초월한 채 침묵하고 있던 ‘니르구나 브라만’은, 이제 푸라나의 세계 속에서 악을 벌하고 선을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오는 자비로운 비슈누로, 혹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온 우주가 떠나가라 슬퍼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신 시바로, 그리고 자식을 지키기 위해 우주적 분노를 터뜨리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 데비로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이 신들의 이야기는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적 공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삶을 비추는 가장 강력하고도 정직한 거울입니다. 신들은 더 이상 저 멀리 하늘 위에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실수하고 질투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상적인 왕이자 남편인 라마는 악마에게 납치된 아내 시타를 되찾기 위해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온 대륙을 헤맵니다. 그의 고뇌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인간의 슬픔을 봅니다. 위대한 신 시바는 사랑하는 아내 사티의 죽음 앞에서 이성을 잃고 광란의 춤을 추며 온 세상을 파괴하려 합니다. 그의 분노 속에서, 우리는 상실의 고통이 어떻게 한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지를 목격합니다. 매혹적인 신 크리슈나는 어린 시절 짓궂은 장난으로 어머니를 애태우고, 젊은 시절에는 목동 여인들과의 열정적인 사랑의 유희에 빠져듭니다. 그의 장난과 사랑 속에서, 우리는 삶의 순수한 기쁨과 인간적 관계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신들의 이야기는 신성 (神性)을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한 가능성을 일깨워 줍니다. 신들이 겪는 드라마는 곧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겪는 희로애락의 우주적 확대판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작은 고통과 기쁨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공감대 속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위안을 얻습니다.
더 나아가, 이 신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힌두 사상은 인간의 삶이 추구해야 할 네 가지의 정당하고 궁극적인 목표, 즉 푸루샤르타 (Puruṣārtha) 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철학서들이 이 목표들을 추상적으로 정의한다면, 신화는 바로 그 목표들을 향해 살아갔던 신들과 영웅들의 삶 그 자체를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입니다.
첫 번째 목표는 의무 (Dharma, 다르마)입니다. 다르마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왕좌를 버리고 14년간의 숲 유배를 떠납니다. 그는 남편으로서 납치된 아내 시타를 구하기 위해 악마의 군대와 맞서 싸우며, 왕으로서 백성들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개인적인 슬픔마저 감수합니다. 라마의 삶은 우리에게 다르마가 단순히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서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더 큰 질서와 책임을 위해 걸어가야 하는 살아있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바로 다르마를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두 번째 목표는 재물 (Artha, 아르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세속적 성공, 즉 부와 명예, 안전과 번영을 포괄합니다. 힌두 사상은 이러한 세속적 성취를 결코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르마의 테두리 안에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정당한 목표로 여깁니다.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인 판다바 형제들의 기나긴 투쟁은 바로 이 아르타를 되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들은 불의하게 빼앗긴 자신들의 왕국을 되찾기 위해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결코 다르마의 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르타의 추구가 다르마라는 더 큰 가치에 의해 통제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며, 정의롭지 못한 부와 성공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세 번째 목표는 욕망 (Kāma, 카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쾌락을 넘어, 예술과 아름다움을 통해 얻는 감각적 기쁨과 사랑을 통해 느끼는 정서적 충만함까지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미학적, 감성적 갈망을 의미합니다. 카마의 가장 숭고한 본질은 시바와 그의 배우자 파르바티의 이야기 속에 그려집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넘어, 우주적인 의식 (푸루샤)과 에너지 (프라크리티)의 영원한 합일입니다. 파르바티는 사랑을 얻기 위해 혹독한 고행을 감수하고, 시바는 사랑을 잃은 슬픔에 온 우주를 파괴하려 합니다. 그들의 장대한 사랑 이야기는, 카마가 억제해야 할 저급한 욕망이 아니라, 두 존재가 서로를 완성해 나가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신성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네 번째 목표는 해탈 (Mokṣa, 모크샤)입니다. 이것은 앞의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넘어서는 궁극의 목표로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해탈을 향한 갈망은 어떻게 표현됩니까? 그것은 자신의 모든 사회적, 가정적 의무를 버리고 오직 신 크리슈나의 피리 소리를 따라 한밤중의 숲으로 달려 나갔던 고피들의 맹목적인 사랑 속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쿠룩셰트라의 전쟁터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위대한 영웅 아르주나가, 마침내 자신의 모든 지성과 의지를 내려놓고 크리슈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하는 그 완전한 자기 포기의 순간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신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추상적인 도덕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를 수 있는 살아있는 역할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의무와 성공, 사랑과 해방이라는 네 가지 목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비추는 영원한 북극성과도 같습니다.
결국, 푸라나와 대서사시의 세계에서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궁극적으로는 신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탄생과 죽음, 우리의 사랑과 이별,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더 이상 우연하고 무의미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들이 영원 전부터 반복해 온 거대한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이자 재현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 속에는 신성한 원형 (archetype)이 숨어 있으며, 신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숨겨진 그 깊은 의미의 층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릴 때, 그는 단지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를 풍요롭게 하는 비슈누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연인이 사랑에 빠질 때, 그들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시바와 샥티의 우주적인 결합을 지상에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화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신성한 의례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고통스럽고 유한한 삶 너머에, 우리가 참여하고 속해 있는 더 크고 영원한 이야기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의 작은 삶은 비로소 그 의미와 목적, 그리고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9.3. 삼주신 (트리무르티) 신화의 형성과 의미
베다 시대의 하늘은 수많은 신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폭풍우의 신 인드라가 있었고, 불의 신 아그니가 있었으며, 하늘의 신 바루나와 태양의 신 수리야가 있었습니다. 각각의 신들은 자연의 강력한 힘을 대변하며, 인간의 경배와 기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인간의 지성은 이 다채롭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신들의 만신전 (萬神殿) 너머에,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더 근본적이고 통일된 질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유지되며, 마침내 어떻게 끝을 맺는가? 이 거대한 순환의 드라마를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과연 무엇인가? 푸라나 시대의 위대한 신화 작가들은 이 심오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베다의 수많은 신들을 세 명의 위대한 주신 (主神)의 기능 속으로 종합하고 재편성하는 놀라운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우주관을 상징하는 가장 위대한 아이콘, 트리무르티 (Trimūrti), 즉 ‘세 개의 형상’의 탄생입니다. 트리무르티는 우주를 관장하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기능 — 창조 (Sṛṣṭi), 유지 (Sthiti), 그리고 해체 (Saṃhāra) — 을 각각 브라흐마 (Brahmā), 비슈누 (Viṣṇu), 시바 (Śiva)라는 세 명의 위대한 신의 인격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세 명의 동등한 신을 숭배하는 삼신론 (三神論)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인 절대적 실재가,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엄한 신학적 모델입니다.
우주적 드라마의 첫 번째 막을 여는 이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입니다. 그는 푸라나 신화 속에서 종종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 모든 것이 분화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던 근원적인 물의 바다 위에서 눈을 뜹니다. 질서의 신 비슈누가 우주적 뱀 아난타의 몸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배꼽에서부터 하나의 눈부신 황금 연꽃이 피어오르고, 그 연꽃의 한가운데에 네 개의 얼굴을 가진 브라흐마가 앉아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브라흐마가 궁극적인 근원이 아니라, 더 높은 실재 (비슈누)의 의지로부터 창조의 임무를 부여받은 기능적인 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사방을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고요함 속에서 깊은 고독에 빠집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오랜 시간 명상에 잠깁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과 지혜를 사용하여 이 텅 빈 공간을 채울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신들과 악마들, 현자들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몸으로부터 밤과 낮, 빛과 어둠을 분리하며, 마침내 최초의 인간인 마누 (Manu)와 샤타루파 (Śatarūpā)를 창조하여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게 합니다.
그의 네 개의 얼굴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창조의 무한한 힘과 전지 (全知)를 상징하며, 네 개의 손에 들린 베다 경전, 물 주전자, 묵주, 그리고 연꽃은 그의 창조가 지혜와 정화, 그리고 신성한 질서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브라흐마의 역할은 이 창조의 행위가 끝나는 순간 거의 마무리됩니다. 그는 위대한 건축가처럼 우주라는 장엄한 건물을 설계하고 지었지만, 그 건물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돌보는 역할은 다른 신들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푸라나 신화 속에서 그는 종종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애착이나 욕망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거나, 다른 신들로부터 저주를 받는 등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인도에서 브라흐마를 주신으로 숭배하는 사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는 존경받는 우주의 아버지이지만, 대중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받는 구원의 신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역할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여는 것이었고, 그가 펼쳐놓은 무대 위에서 진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다른 두 위대한 신이었습니다.
브라흐마가 창조한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선과 악, 질서와 혼돈이 함께 존재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악의 세력 (Asura, 악마)이 강성해져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위협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창조된 세계가 붕괴되지 않도록 붙들고 유지하며, 흔들리는 정의 (Dharma)를 바로 세우는 위대한 보존의 힘이 개입합니다. 그 힘의 인격적 현현이 바로 질서의 수호신, 비슈누입니다. 그는 트리무르티 중에서 가장 자비롭고 인간에게 친밀한 신으로, 고통받는 존재들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하는 구원자입니다. 그의 본성은 순수한 선함과 조화 (Sattva)이며,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우주의 안녕과 다르마의 유지입니다. 그는 저 멀리 모든 세계를 넘어선 자신의 영원한 거처 바이쿤타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도, 한순간도 이 세상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며, 악이 선을 압도하고 다르마가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한한 힘과 영광의 일부를 가지고, 시대와 상황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화신, 즉 아바타라 (Avatāra)가 되어 이 고통의 땅으로 직접 내려옵니다.
그는 거대한 물고기 (Matsya)가 되어 대홍수 속에서 인류의 시조 마누와 모든 생명의 씨앗을 구원하고, 맹렬한 멧돼지 (Varāha)가 되어 악마가 빼앗아 우주의 바다 밑에 숨겨놓은 대지 (Bhūmi)를 자신의 어금니로 건져 올립니다. 그는 포악한 악마 왕 히란야카시푸를 처단하기 위해 사자도 인간도 아닌 반인반수의 나라심하 (Narasiṃha)로 나타나고, 교만한 왕 발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난쟁이 바라문 바마나 (Vāmana)의 모습으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상적인 왕이자 아들, 남편으로서 다르마의 길을 몸소 보여준 라마 (Rāma)와, 사랑의 유희를 즐기는 매혹적인 목동이자 쿠룩셰트라의 전쟁터에서 『바가바드 기타』라는 영원한 지혜를 설한 위대한 스승 크리슈나 (Kṛṣṇa)라는,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비슈누의 이 수많은 아바타라 이야기는, 신이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며, 우리의 고통에 응답하여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와 우리와 함께 걷는, 가장 자비롭고도 능동적인 사랑의 신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언젠가 그 생명력을 다하고 낡고 부패하게 됩니다. 별들은 빛을 잃고, 강은 말라붙으며, 인간 사회는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타락과 불의에 빠져듭니다. 유지의 힘만으로는 이 거대한 우주적 엔트로피를 막을 수 없습니다. 낡은 질서는 파괴되어야만 새로운 질서가 태어날 수 있으며, 생명이 다한 껍데기는 불태워져야만 새로운 씨앗이 싹틀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대하고도 필수적인 우주적 해체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가 바로 파괴의 신, 시바입니다. 그는 브라흐마의 창조적 격정이나 비슈누의 자비로운 질서와는 전혀 다른, 예측할 수 없고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원초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그는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모든 세속적 욕망을 초월한 채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위대한 고행자 (Mahāyogī)이며, 동시에 묘지에서 유령들과 함께 춤을 추고, 온몸에 시신의 재를 바르는 기이하고도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의 이마에는 세상을 불태울 수 있는 제3의 눈이 번뜩이고, 그의 목은 우주를 구하기 위해 삼킨 치명적인 독 때문에 푸른빛을 띠고 있습니다 (Nīlakaṇṭha). 그의 손에 들린 삼지창 (Triśūla)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세 차원, 혹은 프라크리티의 세 가지 구나를 모두 지배하는 그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우주의 한 시대가 그 종말을 고할 때, 시바는 마침내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 ‘탄다바 (Tāṇḍava)’라 불리는 격렬하고도 장엄한 파괴의 춤을 춥니다. 그의 발길에 온 우주가 진동하고,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별들이 궤도에서 이탈하며, 그의 작은 북 (damaru) 소리는 모든 창조된 것들의 해체를 알리는 장송곡이 됩니다. 그의 춤사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은 낡고 부패한 세상을 남김없이 불태워, 모든 이름과 형태를 소멸시키고, 모든 것을 다시 분화되지 않은 근원적인 프라크리티의 상태로 되돌려놓습니다. 그러나 시바의 파괴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정화 (淨化)이며, 가장 심오한 자비의 행위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파괴한 잿더미 위에서, 브라흐마는 다시 새로운 창조의 연꽃을 피울 수 있게 되며, 비슈누는 새로운 질서를 세울 깨끗한 대지를 얻게 됩니다. 시바는 파괴를 통해 재생의 가능성을 여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 서 있는 역설적인 신입니다.
이처럼 트리무르티의 신화는 우주가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으며, 창조, 유지, 해체라는 세 가지 힘의 영원하고도 역동적인 순환의 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는 서로 경쟁하는 세 명의 신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세 명의 연주자와도 같습니다. 때로는 창조의 선율이, 때로는 유지의 화음이, 그리고 때로는 파괴의 격렬한 리듬이 전면에 나서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존재’라는 단 하나의 장엄한 주제를 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위대한 신화적 상징을 통해, 힌두교는 우주의 근본적인 세 가지 힘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겪는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이라는 모든 과정이 거대한 우주적 리듬의 일부임을 깨닫게 하는 심오한 지혜를 마련했습니다.
1-9.4. 바가바드 기타, 세 길의 만남
인도의 위대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의 심장부에 자리한 『바가바드 기타』는, 전설적인 현자 비야사 (Vyāsa)에 의해 기원전 5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집대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위대한 ‘노래’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전통적인 포기의 길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 가정적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의 길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장 치열한 삶의 한복판에서 완전한 내면의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가라는, 가장 실천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신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나의 이익’과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그리고 ‘세속적 성공’과 ‘내면의 평화’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이 실존적 전쟁터 한복판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깃발을 들어야 하며,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힌두 사상의 모든 강물이 합류하는 위대한 바다, 『바가바드 기타, Bhagavad-gītā』, 즉 ‘거룩한 자의 노래’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도 실천적인 대답입니다. 그것은 고요한 숲속이나 사원에서 설해진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촌과 스승, 그리고 존경하는 친족들을 죽여야만 하는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쟁, 쿠룩셰트라 (Kurukṣetra)의 들판 한가운데서, 삶의 모든 의미를 잃고 절망에 빠진 한 위대한 전사의 처절한 부르짖음에 대한 신의 응답입니다. 이 극적인 무대 위에서, 힌두 사상을 이끌어 온 세 가지의 위대한 길, 즉 행위의 길 (Karma Yoga), 지혜의 길 (Jñāna Yoga), 그리고 사랑의 길 (Bhakti Yoga)은 더 이상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통합된 여정으로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판다바 (Pāṇḍava) 가문의 위대한 영웅, 아르주나 (Arjuna)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궁수이자, 정의 (Dharma)를 위해 싸우는 용맹한 전사입니다. 오랜 망명 생활과 불의를 견뎌낸 판다바 형제들은 마침내 그들의 왕국을 되찾기 위해, 사악한 사촌인 카우라바 (Kaurava) 가문과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소라 고둥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양 진영의 군대가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마주보는 일촉즉발의 순간, 아르주나는 자신의 마부에게 전차를 양 군대의 한가운데로 몰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똑똑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습니다. 적진에는 그가 평생 존경하고 사랑했던 스승 드로나 (Droṇa)와 할아버지 비슈마 (Bhīṣma), 그리고 수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깨닫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곧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 순간, 아르주나의 손에서 활 (Gāṇḍīva)이 힘없이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그의 온몸은 제어할 수 없는 슬픔과 연민으로 떨리고, 그의 입에서는 절망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마부이자 친구, 그러나 그 정체는 바로 지고한 신의 화신 (Avatāra)인 크리슈나 (Kṛṣṇa)에게 부르짖습니다.
“오, 크리슈나여! 왕국의 영광을 위해 나의 스승과 친족을 죽여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피로 얼룩진 승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가족의 전통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파괴될 이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무기를 버리고 적의 칼에 죽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에 대한 공포나 비겁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개인적인 애정과 사회적 의무 (Dharma) 사이에서 겪는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딜레마입니다. ‘전사 (kṣatriya)로서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회적 다르마와, ‘제자와 손자로서 스승과 할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는 가족적 다르마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아르주나는 삶의 모든 방향을 잃고 완전한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 절망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크리슈나의 가르침이라는 영원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크리슈나는 먼저 슬픔에 잠긴 아르주나를 꾸짖으며, 그의 고뇌가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명하지 못한 감상과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혜의 길 (Jñāna Yoga)의 문을 열어 보입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말합니다.
“현명한 자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네가 죽인다고 생각하는 저들과, 네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너 자신은 사실 태어난 적도, 죽는 적도 없다.”
크리슈나는 참된 자아, 즉 아트만 (Ātman)의 본질에 대해 설합니다. 아트만은 칼로 베어지지 않고, 불로 태워지지 않으며, 물로 적실 수 없고, 바람으로 말릴 수도 없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실체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취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네가 죽이는 것은 결코 저들의 참된 자아가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덧없는 육체의 껍데기일 뿐이다. 그러니 너는 결코 살인자가 아니며, 그들 역시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또한, 춥고 더움, 즐거움과 괴로움과 같은 모든 이원적인 경험들은 감각이 대상과 접촉할 때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니, 그것들에 흔들리지 말고 초연하게 견뎌내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아트만의 불멸성에 대한 올바른 앎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그러나 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행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카르마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가? 여기서 크리슈나는 행위의 길 (Karma Yoga)이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가장 독창적이고도 위대한 가르침을 펼쳐 보입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말합니다.
“너에게는 행위할 권리가 있을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행위의 결과를 너의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또한 행위하지 않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결과에 대한 집착 없는 행위 (niṣkāma-karma)’의 본질입니다.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이익과 손해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오직 ‘마땅히 해야 할 일 (Dharma)’ 그 자체를 위해, 평정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겨 왕국을 얻겠다는 욕망도, 패배하여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모두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다르마는 전사로서 싸우는 것이니, 그 결과가 어떠하든 흔들림 없이 너의 역할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바로 우리를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는 밧줄입니다. 이 집착의 밧줄을 끊어버릴 때, 행위는 더 이상 카르마의 씨앗을 심지 않고, 우리를 정화하고 해탈로 이끄는 신성한 제사 의례가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이처럼 어려운, 결과에 대한 집착 없는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가?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마침내 크리슈나는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드러내며, 사랑의 길 (Bhakti Yoga, 박티 요가)이라는 궁극의 문을 열어 보입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자신이 바로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인 지고한 신임을 밝힙니다. 그는 모든 신들이 경배하는 대상이며, 모든 제사를 받는 주인이자, 모든 존재의 심장 속에 거주하는 참된 자아입니다. 그리고 그는 선언합니다.
“너의 모든 행위를 나에게 바치고, 나를 너의 유일한 피난처로 삼아라. 마음을 오직 나에게만 고정시키고, 나의 헌신자가 되어라. 나를 예배하고, 나에게 절하라. 그리하면 너는 반드시 나에게 오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너에게 하는 진실한 약속이다. 너는 나에게 더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행위의 길과 지혜의 길은 사랑의 길 속에서 그 정점을 발견합니다.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그 행위와 결과를 모두 신께 바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한다’는 에고 (ahaṃkāra)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나를 통해 행하신다’는 신의 도구로서 행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행위를 신을 향한 사랑의 제물로 바칠 때, 그 행위는 우리를 속박하기는커녕, 우리를 신과의 더 깊은 합일로 이끄는 사랑의 끈이 됩니다. 또한, 내가 바로 불멸의 아트만이라는 지혜는, 더 나아가 내가 바로 지고한 신의 영원한 일부이자 사랑받는 자녀라는, 더 따뜻하고도 친밀한 앎으로 승화됩니다.
결국 『바가바드 기타』가 제시하는 길은 세 개의 분리된 길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길입니다. 그것은 올바른 지혜 (Jñāna)를 바탕으로,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자신의 의무 (Karma)를 다하되, 그 모든 행위를 신을 향한 사랑 (Bhakti)의 제물로 바치는 삶입니다. 크리슈나의 가르침에 힘입어 마침내 모든 의심과 혼란에서 벗어난 아르주나는, 떨어진 활을 다시 집어 들고 결연한 목소리로 선언합니다.
“오, 흔들림 없는 이여! 당신의 은총으로 저의 모든 미망은 사라졌고, 저는 참된 지혜를 되찾았습니다. 이제 저의 모든 의심은 사라졌으니, 당신의 말씀에 따라 싸우겠습니다.”
이 마지막 선언은, 힌두 사상의 모든 위대한 가르침이 어떻게 한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극복하고, 그를 다시 삶의 전쟁터 한복판으로 당당히 걸어가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증언입니다.
1-9.5. 아르주나의 고뇌와 의무 (Dharma)의 딜레마
인생의 모든 길이 막혀버린 듯한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파괴와 슬픔만이 남을 것이라 예감되는, 끔찍하고도 거대한 딜레마의 벽 앞에 홀로 서게 되는 순간. 위대한 판다바의 영웅, 아르주나는 바로 그 순간을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앞에는 18일간의 대전쟁이 시작될 쿠룩셰트라의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의 (Dharma)와 불의 (Adharma) 사이의, 우주의 질서를 건 최후의 결전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궁수였으며, 그의 어깨에는 불의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자신의 형제들과 아내의 명예를 되찾고, 찬탈당한 왕국에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전사 (kṣatriya)로서의 신성한 의무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정당한 분노와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신궁 (神弓) 간디바 (Gāṇḍīva)는 적들의 피를 갈망하며 팽팽하게 울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소라 고둥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양 진영의 군사들이 지축을 울리는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마주보는 일촉즉발의 순간. 아르주나는 자신의 마부이자 신성한 친구인 크리슈나에게, 자신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똑똑히 보기 위해 전차를 양 군대의 한가운데로 몰라고 명령합니다. 그의 눈은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광경은, 그의 영혼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신념의 기둥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저편, 적진의 가장 선두에는 존경하는 할아버지 비슈마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아르주나를 포함한 판다바와 카우라바 형제 모두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의 지혜와 용맹은 모든 이들의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무예 스승인 드로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활쏘기를 가르쳐 그를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어준 은인이었습니다. 그들 뒤로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수많은 사촌 형제들과 친구들, 처남과 장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르주나에게 ‘적’이라는 개념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지 ‘죽여야만 하는 나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마치 독화살처럼 그의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그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입은 바싹 마르며, 온몸은 제어할 수 없는 떨림에 휩싸였습니다. 그의 손에서, 신들조차 두려워했던 위대한 활 간디바가 힘없이 미끄러져 전차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조차 없어, 전차의 좌석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그의 입에서는 절망의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을 앞둔 군인의 일시적인 공포나 나약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 전체가 그 의미의 근거를 잃어버리는, 완전한 실존적 붕괴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크리슈나를 향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다르마’라는 개념이 가진 가장 깊고도 비극적인 딜레마에 대한 치열한 철학적 고뇌였습니다.
“오, 크리슈나여! 내 눈앞에 서 있는 이들은 나의 친족들입니다. 이들을 죽여서 얻는 승리와 왕국과 쾌락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온 세상, 아니 삼계 (三界)의 지배권을 준다 한들, 나는 결코 이들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들은 나의 스승이시며, 아버지이며, 아들이고, 손자이며, 할아버지이고, 외삼촌이며, 장인이고, 처남입니다. 오, 마두수다나여! 이들을 죽이는 것은 끔찍한 죄악 (pāpa)일 뿐입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나의 가족을 죽이고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아르주나의 첫 번째 고뇌는 바로 ‘쿨라 다르마 (kula-dharma)’, 즉 가족과 혈족에 대한 의무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보편적인 연민의 정 (情)에서 비롯됩니다. 그에게 비슈마와 드로나는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 마땅히 절하고 공경해야 할 어른입니다. 피를 나눈 사촌들을 죽이는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패륜적인 죄악입니다. 이것은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는 그의 사회적 의무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근본적인 도덕률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이 피로 얼룩진 승리의 과실을 따먹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갖지 않고 숲속에서 구걸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고 그는 절규합니다.
그의 고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오, 크리슈나여! 전쟁으로 인해 가문이 멸망하면, 그 가문의 영원한 전통과 의례, 즉 ‘쿨라 다르마 (kula-dharma)’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르마가 사라진 곳에는 불의 (adharma)가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가 가문을 지배하게 되면, 가문의 여인들이 타락하게 되고, 오, 바르슈네야여! 여인들이 타락하면 ‘바르나 산카라 (varṇa-saṅkara)’, 즉 계급의 혼란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아르주나의 고뇌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붕괴에 대한 깊은 우려에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대 인도의 사회 질서는 각 계급 (varṇa)이 자신의 고유한 의무와 역할을 다함으로써 유지되는 유기체와도 같았습니다. 아르주나는 전쟁으로 인해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죽게 되면, 그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의무가 끊어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더 나아가, 보호자를 잃은 여인들이 타락하여 다른 계급의 남자들과 결합하게 되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계급 질서가 뒤섞이고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계급의 혼란은 가문을 파괴한 자들뿐만 아니라, 그 가문 전체를 지옥으로 이끌게 될 것이며, 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례가 끊어지면 조상들의 영혼마저 구원받지 못하고 쓰러지게 될 것이라고 그는 탄식합니다. 이처럼 아르주나의 눈에는 이 전쟁이 단순히 왕국을 되찾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문과 사회, 그리고 조상들의 영혼까지도 파멸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연쇄 반응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결국 아르주나의 고뇌는 하나의 거대한 딜레마로 수렴됩니다. 그는 두 개의 상충하는 다르마 사이에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한편에는 ‘스바 다르마 (sva-dharma)’, 즉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는 전사 계급 (kṣatriya)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다르마는 불의에 맞서 싸우고, 사회의 질서를 보호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 다르마를 저버리는 것은 전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며, 비겁함이라는 영원한 불명예를 얻게 되는 길입니다. 만약 그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 (adharma)가 승리하도록 방관하는 것이며, 이 또한 끔찍한 죄악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앞서 그가 절규했듯이, 가족과 스승에 대한 의무인 ‘쿨라 다르마’와, 모든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보편적인 도덕률로서의 다르마가 있습니다. 이 다르마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최악의 죄악입니다. 그는 싸워도 죄인이 되고, 싸우지 않아도 죄인이 되는, 완벽한 외통수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지성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그의 마음은 슬픔과 혼란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크리슈나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맡깁니다.
“저의 온 존재는 연민의 허물로 인해 압도되었고, 저의 마음은 무엇이 다르마인지에 대해 완전히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신께 묻나니, 저에게 진정으로 선한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제자이며, 당신께 귀의한 영혼입니다. 부디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 완전한 자기 포기의 순간, 이 처절한 구원의 요청이야말로, 『바가바드 기타』라는 영원한 지혜의 강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신성한 샘이 됩니다. 아르주나의 고뇌는 더 이상 그 혼자만의 고뇌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인류의 고뇌를 대변하게 되며,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 한 사람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구도자들의 길을 비추는 영원의 등불이 될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1-9.6. 카르마, 즈나나, 박티 요가의 통합
아르주나의 붕괴는 단순한 감정의 폭풍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힌두 사상이 오랫동안 품어온 가장 근본적인 두 갈래의 길, 즉 세상 속에서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는 행위의 길 (pravṛtti-mārga, 프라브리티- 마르가)과,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포기의 길 (nivṛtti-mārga, 니브리티-마르가) 사이의 거대한 균열이 한 개인의 영혼 속에서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가? 행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이 양자택일의 딜레마 앞에서 아르주나는 완전히 무력해졌습니다.
크리슈나의 가르침, 즉 『바가바드 기타』의 위대함은 이 두 가지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두 길이 결코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의 더 높은 진리 안에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제3의 길을 열어 보인 데 있습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숲으로 도망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가장 치열한 삶의 전쟁터 한복판에 굳건히 세워두고, 바로 그곳에서 어떻게 완전한 내면의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이를 위해 그는 힌두 사상의 세 가지 위대한 영적 흐름, 즉 행위의 요가 (Karma Yoga), 지혜의 요가 (Jñāna Yoga), 그리고 헌신의 요가 (Bhakti Yoga)를 하나의 장엄한 교향곡으로 엮어냅니다.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 즉 ‘행위’의 딜레마에서 시작됩니다. 아르주나는 행위 (전쟁)가 끔찍한 죄악 (pāpa)과 고통스러운 결과 (친족의 죽음)를 낳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행위를 포기하려 합니다. 이에 대해 크리슈나는 카르마 요가 (Karma Yoga)라는 혁명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는 먼저 누구도 단 한 순간도 행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숨을 쉬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행위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속박하는 행위와 해방시키는 행위의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크리슈나는 선언합니다.
“너에게는 행위할 권리가 있을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행위의 결과를 너의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또한 행위하지 않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결과에 대한 집착 없는 행위 (niṣkāma-karma, 니시카마-카르마)’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결과 —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이익과 손해 — 에 대한 우리의 이기적인 ‘집착 (saṅga)’과 ‘갈망 (kāma)’입니다. 승리하여 왕국을 얻겠다는 욕망도, 패배하여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모두 버리고, 오직 ‘마땅히 해야 할 일 (Dharma)’ 그 자체를 위해, 평정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결과에 대한 집착의 밧줄을 끊어버릴 때, 행위는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카르마의 사슬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우리를 해탈로 이끄는 신성한 제사 의례 (yajña)가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이 이처럼 어려운, 초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무집착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성공을 바라지 않고 어떻게 노력할 수 있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크리슈나는 카르마 요가가 결코 홀로 설 수 없으며, 반드시 더 깊은 토대를 필요로 함을 보여줍니다. 그 토대가 바로 즈나나 요가 (Jñāna Yoga), 즉 ‘올바른 앎’입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시선을 전쟁터의 비극적인 현실에서 영원한 진리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는 가르칩니다.
“너는 결코 이 몸이 아니다. 너의 참된 자아, 즉 아트만 (Ātman)은 태어난 적도 없고, 죽는 적도 없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트만은 칼로 베어지지 않고, 불로 태워지지 않으며, 물로 적실 수 없고, 바람으로 말릴 수도 없는 불멸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낡고 병드는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취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네가 죽인다고 생각하는 저들의 참된 자아는 결코 죽지 않으며, 네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너의 참된 자아 또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이 몸과 마음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멸하는 순수한 의식이다’라는 올바른 앎이야말로, 모든 집착의 가장 깊은 뿌리를 잘라내는 지혜의 칼입니다. 우리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는 이유는, 결국 그 결과가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 몸과 마음에 즐거움이나 고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결과들은 더 이상 나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슬픈 영화가 스크린 자체를 적시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성공과 실패는 나의 참된 본성인 아트만의 고요한 평화를 결코 깨뜨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즈나나 요가는 카르마 요가가 설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철학적, 심리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올바른 지혜를 얻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삶은 숭고하지만, 여전히 차갑고 외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길에는 아직 가슴의 뜨거운 온기가 부족합니다. 마침내 크리슈나는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드러내며, 모든 길을 하나로 녹여내는 궁극의 용광로, 즉 박티 요가 (Bhakti Yoga)의 문을 활짝 엽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자신이 바로 이 우주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지배자인 지고한 인격신 (Puruṣottama)임을 점진적으로 밝혀 나갑니다. 그는 태양의 빛이며, 물의 맛이고, 베다의 신성한 음절 ‘옴 (Oṃ)’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의 심장 속에 거주하는 내면의 지배자이며, 동시에 악을 벌하고 선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내려오는 자비로운 화신 (Avatāra)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장엄하고도 친밀한 본모습을 드러낸 뒤, 그는 아르주나에게 가장 쉽고도 강력한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너의 모든 행위를 나에게 바쳐라. 네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제물로 바치든, 무엇을 주든, 어떤 고행을 하든, 그 모든 것을 나를 위한 봉헌물로 행하라.”
이 위대한 선언 속에서, 즈나나와 카르마는 마침내 박티라는 사랑의 불꽃 속에서 하나로 통합됩니다.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바로 그 행위와 결과 모두를 내가 사랑하는 신께 바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한다’는 이기적인 자아의식 (ahaṃkāra)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나를 통해 행하신다’는 신의 사랑스러운 도구로서 행위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전쟁이라는 끔찍한 행위조차도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신성한 제물이 됩니다. 아르주나는 더 이상 자신의 왕국이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고한 신 크리슈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에 다르마를 바로 세우려는 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싸우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행위를 신을 향한 사랑의 제물로 바칠 때, 그 행위는 우리를 속박하기는커녕, 우리를 신과의 더 깊은 합일로 이끄는 사랑의 끈이 됩니다. 또한, ‘나는 불멸의 아트만이다’라는 즈나나의 차가운 지혜는, ‘나는 지고한 신의 영원한 일부이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훨씬 더 따뜻하고도 친밀한 관계로 승화됩니다. 지혜는 더 이상 고독한 깨달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위대함을 아는 기쁨이 됩니다.
『바가바드 기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즉 요기 (yogi)는 숲속에 은거하는 명상가도, 제단 앞에서 의무만을 다하는 사제도, 감정에 휩싸여 신의 이름만을 노래하는 신자도 아닙니다.
그는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된 통합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즈나나 (지혜)를 통해 자신의 참된 본성과 세상의 덧없음을 알기에 어떤 결과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카르마 (의무)를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수행을 오직 신을 향한 박티 (사랑)의 표현으로 봉헌함으로써, 그는 행위 속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 위대한 통합의 가르침 속에서, 아르주나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의심과 슬픔을 극복하고, 쿠룩셰트라의 전쟁터를 신성한 제단으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의무를 신을 향한 위대한 사랑의 노래로 승화시킬 힘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