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장: 카슈미르 시바파의 철학

by 이호창

제1-14장: 카슈미르 시바파의 철학



1-14.1. 세계, 시바 의식의 순수한 진동 (Spanda)



만약 궁극적 실재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초월한 고요한 침묵이라면, 대체 이 시끄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동하는 우주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텅 빈 캔버스 위에 어떻게 이토록 현란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으며, 연주자 없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이 장엄한 생명의 교향곡이 울려 퍼질 수 있습니까? 샹카라의 위대한 불이일원론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실재 (브라만)와 환영 (마야)이라는 두 개의 층위를 설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9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북인도의 카슈미르 지방에서 꽃피운, 탄트라 사상의 가장 정교하고도 심오한 철학 체계인 카슈미르 시바파 (Kashmir Shaivism)는 이 모든 이원론적인 설명을 단숨에 뛰어넘는, 더 대담하고도 통합적인 비전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선언합니다. 이 세계는 환영이 아니며, 궁극적 실재로부터 분리된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이 세계는 바로 궁극적 실재, 즉 지고한 의식인 시바 (Śiva) 그 자신의 내재적인 본성인, 살아있는 ‘진동 (Vibration)’ 또는 ‘떨림 (Throb)’이라고. 이 근원적인 우주적 맥박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스판다 (Spanda)입니다.


스판다 철학은 궁극적 실재인 시바를 결코 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샹카라의 브라만이 오직 순수한 ‘빛 (Prakāśa)’으로서만 존재한다면, 카슈미르 시바파의 시바는 그 빛과 더불어, 그 빛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힘 (Vimarśa)’을 본질적으로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빛은 스스로 빛나지만, 자신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빛이나 다름없습니다. 시바는 순수한 의식 (Prakāśa)인 동시에, 그 의식이 ‘나는 존재한다 (Aham)’라고 느끼는 역동적인 자기 인식의 힘 (Vimarśa)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 인식이 바로 그의 에너지, 즉 <strong>샥티 (Śakti)</strong>입니다. 샹카라에게 마야 (샥티)가 브라만에게 덧씌워진 설명 불가능한 환영이었다면, 카슈미르 시바파에게 샥티는 시바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의 살아있는 심장박동 그 자체입니다. 시바와 샥티는 두 개의 다른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재가 가진 고요한 측면과 역동적인 측면입니다. 그리고 스판다는 바로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고요한 의식의 바다가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며 일으키는 최초의 미세한 파문이며, 절대적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최초의 창조적 맥박입니다.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움직임이나 진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움직임 이전의 ‘움직이려는 충동’이며, 모든 창조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순수한 의식의 내재적인 생명력입니다.


이 최초의 신성한 떨림, 즉 스판다는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떨어진 돌멩이가 동심원의 파문을 만들어내듯, 점차 자신을 여러 단계로 펼쳐내며 이 우주 전체를 현현시킵니다. 카슈미르 시바파의 창조론은 어떤 외부의 신이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고한 의식이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료로 하여, 스스로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펼쳐내는 과정입니다. 최초의 스판다는 먼저 가장 미세한 차원, 즉 ‘소리 (śabda)’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탐구했던 만트라의 세계, 즉 ‘옴 (Oṃ)’과 같은 근원적인 진동은 바로 이 스판다의 첫 번째 표현입니다. 이 소리의 진동은 점차 응축되고 구체화되어, 생각과 개념의 세계를 낳고, 더 나아가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미세한 원소 (tanmātra)들과 거친 원소 (mahābhūta)들을 차례로 현현시킵니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저 멀리 빛나는 별의 운행에서부터 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생각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가장 단단한 바위에서부터 가장 부드러운 바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근원적인 시바 의식의 스판다가 각기 다른 주파수와 패턴으로 진동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우주는 신이 연주하는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이며, 그 모든 다채로운 선율은 ‘스판다’라는 단 하나의 음 (音)을 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우리 자신, 즉 개별적인 영혼 (jīva)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샹카라의 철학에서 개별 영혼은 무지라는 거울에 비친 브라만의 환영적인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카슈미르 시바파에게, 개별 영혼은 환영이 아니라, 바로 그 지고한 시바 의식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하고 자유로운 시바라고 느끼지 못하고, 이토록 유한하고 고통받는 존재로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고한 의식이 스스로와 ‘숨바꼭질’ 놀이를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무한한 힘을 ‘수축 (saṅkoca)’시켰기 때문입니다. 시바는 자신의 신성한 유희 (Līlā)를 위해, 자신의 무한한 본성을 스스로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다른 것들과 분리된 개별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이 자기 제한의 과정은 ‘말라 (mala)’, 즉 ‘더러움’ 또는 ‘제약’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덮개를 통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제약인 ‘아나바 말라 (āṇava-mala)’는 무한한 의식이 스스로를 미세한 원자 (aṇu)처럼 여기게 만드는 근본적인 유한성의 느낌입니다. “나는 완전함 그 자체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미미한 존재다”라는 착각입니다. 두 번째 제약인 ‘마이야 말라 (māyīya-mala)’는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통일성의 시각을 잃고, 세상을 ‘나’와 ‘너’,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분별의식을 만들어냅니다. 세 번째 제약인 ‘카르마 말라 (kārma-mala)’는 스스로가 모든 행위의 자유로운 주체임을 잊고, 자신이 행위의 결과에 묶여 있는 유한한 행위자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 세 가지 제약 때문에, 본래 전지전능한 시바였던 우리는, 스스로를 카르마의 법칙에 얽매여 윤회의 굴레를 떠도는 가련한 영혼 (jīva)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카슈미르 시바파에서 구원, 즉 해탈이란, 이 세계라는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 속에서, 그리고 바로 나 자신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시바 의식의 자유로운 유희이자 순수한 진동임을 ‘재인식 (Pratyabhijñā)’하는 것입니다. ‘프라티야비즈나’는 ‘다시 알아봄’을 의미하며, 이 학파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아, 바로 저 사람이었지!’라고 한눈에 알아보는 것과 같은 직접적이고도 충격적인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얻거나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원래부터 누구였는지’를 다시 기억해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 재인식의 순간,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세 가지 제약 (mala)의 족쇄는 힘을 잃고 저절로 풀려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조각배가 아니라, 그 모든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바다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것은 스승의 가르침과 경전 연구를 통해 지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āṇavopāya), 만트라 낭송이나 명상과 같은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으며 (śāktopāya), 때로는 아무런 노력 없이 스승의 강력한 은총 (śaktipāta)이나 일상 속의 강렬한 경험 (예: 극도의 공포나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을 통해 섬광처럼 한순간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śāmbhavopāya).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든, 그 깨달음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심장의 고동 소리에서, 내 생각의 미세한 떨림에서,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든 현상 속에서, 쉬지 않고 맥동하고 있는 단 하나의 신성한 리듬, 즉 스판다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해탈자 (jīvanmukta)는 세상을 버리고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더 온전히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이제 세상을 고통과 속박의 장소로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인 시바가 펼치는 아름답고도 즐거운 유희의 무대로 봅니다. 그는 모든 것 속에서 시바의 진동을 느끼며, 모든 경험—즐거움과 고통, 만남과 이별, 성공과 실패—을 신성한 유희의 일부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일하는 모든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시바 의식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표현하는 살아있는 예술가가 됩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이기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투쟁이 아니라, 우주적 리듬에 맞춰 춤추는 자유로운 영혼의 노래가 됩니다. 이처럼 스판다의 철학은 우리에게 해탈이 슬픔의 소멸이 아니라 기쁨의 확장이며,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과의 완전한 합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맥박 속에서 우주의 심장박동을 느끼라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생명력 넘치는 초대입니다.










1-14.2. 인식 (Pratyabhijñā)을 통한 신성 (神性)의 회복



먼 길을 떠났던 왕자가 기억을 잃고 자신이 비참한 거지라고 믿으며 수십 년을 살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어느 날, 그의 옛 스승이 그를 찾아와 그의 어깨에 있는 희미한 흉터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그대는 거지가 아니오. 그대는 이 나라의 잃어버린 왕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왕자의 내면에서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납니다. 잊혔던 과거의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문득 ‘알아봅니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새로운 노력을 통해 왕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원래부터 왕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냈을 뿐입니다. 그 앎의 순간, 거지로서 겪었던 모든 고통과 한계는 한낱 지나간 꿈처럼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카슈미르 시바파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성을 획득하는 길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우리 자신의 본래 신성을 ‘다시 알아보는’ 길입니다. 이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프라티야비즈나 (Pratyabhijñā), 즉 ‘재인식 (再認識)’입니다.


이 ‘재인식’이라는 개념은 카슈미르 시바파 철학의 심장이자, 다른 모든 힌두 사상의 구원론과 구별되는 가장 독창적이고도 빛나는 지점입니다. 샹카라의 불이일원론에서 구원이 ‘이것은 뱀이 아니라 밧줄이다’라는 부정 (neti, neti)을 통한 오류의 제거라면, 프라티야비즈나는 ‘아,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긍정적인 알아봄입니다. 상캬-요가 철학에서 해탈이 순수한 의식 (푸루샤)과 물질 (프라크리티)을 ‘분리’시키는 것이라면, 프라티야비즈나는 이 모든 물질세계가 바로 내 자신의 의식 (시바)의 자유로운 표현임을 깨닫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벗어나거나 버려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억해내기만 하면 됩니다. 무엇을 기억해내는 것입니까? 바로 ‘나’라고 불리는 이 유한하고 불안한 개별적 자아가 사실은 환영이며, 나의 진짜 정체성은 바로 이 우주 전체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파괴하는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지고한 의식, 즉 시바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명백한 진실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까? 카슈미르 시바파는 그 원인이 어떤 원죄 (原罪)나 근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고한 의식인 시바가 스스로와 ‘숨바꼭질’이라는 신성한 유희 (Līlā)를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무한한 힘을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 제한의 과정은 ‘말라 (mala)’, 즉 ‘더러움’ 또는 ‘제약’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보이지 않는 족쇄를 통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족쇄는 ‘아나바 말라 (āṇava-mala)’, 즉 ‘원자적 제약’입니다. 이것은 무한하고 완전한 의식이 스스로를 ‘나는 불완전하고 미미한 존재다’라고 여기게 만드는 근본적인 유한성의 느낌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소외감과 결핍감의 뿌리입니다. 두 번째 족쇄는 ‘마이야 말라 (māyīya-mala)’, 즉 ‘마야의 제약’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통일성의 시각을 잃고, 세상을 ‘나’와 ‘나 아닌 것’, ‘주관’과 ‘객관’, ‘선’과 ‘악’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인 분별 의식입니다. 이 분리의 장막 때문에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세상을 우리 자신과 무관한 외부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족쇄는 ‘카르마 말라 (kārma-mala)’입니다. 이것은 스스로가 모든 행위의 자유로운 창조자임을 잊고, 자신이 과거 행위의 결과에 묶여 있는 유한한 행위자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말라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한, 우리는 영원히 우리 자신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한 채, 카르마의 법칙에 얽매여 윤회의 굴레를 떠도는 가련한 영혼 (jīva)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프라티야비즈나의 길은 바로 이 세 겹의 안경을 벗어 던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새로운 지식을 외부에서부터 쌓아나가는 학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진리는 이미 우리 안에 완벽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이 기억을 되찾는 여정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카슈미르 시바파는 이 재인식의 깨달음이 일어나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길, 즉 우파야 (upāya)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길은 ‘아나보파야 (āṇavopāya)’, 즉 ‘개인의 길’입니다. 이것은 의례, 호흡 제어 (prāṇāyāma), 만트라 낭송,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 명상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와 수행에 의존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외부적인 도구들을 통해 수행자는 점차 자신의 산만한 마음을 정화하고,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길은 ‘샥토파야 (śāktopāya)’, 즉 ‘에너지의 길’입니다. 이 길에서는 더 이상 외부적인 도구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오직 순수한 자각의 힘만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끊임없이 주시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순수한 질문이나, ‘나는 시바다 (Śivo'ham)’라는 강력한 확언의 흐름을 유지함으로써, 그는 점차 개별적인 생각의 파도를 넘어 그 모든 생각의 근원인 순수한 의식의 바다로 녹아 들어갑니다.


그러나 가장 높고도 직접적인 길은 ‘샴바보파야 (śāmbhavopāya)’, 즉 ‘시바의 길’입니다. 이 길에는 어떤 특정한 노력이나 방법론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스승 (Guru)의 강력한 은총 (śaktipāta)이나, 일상 속의 어떤 강렬한 경험을 통해, 마치 번개가 어둠을 가르듯 한순간에 찾아오는 즉각적이고도 자발적인 깨달음입니다. 스승이 던지는 단 한마디의 말, 혹은 그의 고요한 현존 그 자체가 제자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신성을 일깨우는 방아쇠가 됩니다. 이 순간, 구도자는 자신이 시바임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바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마지막 남은 에고마저 사라지고, 오직 시바라는 유일한 의식만이 스스로의 영광 속에서 빛나게 됩니다. 이 최고 경지 너머에는 심지어 ‘길 없는 길 (anupāya)’조차 존재하는데, 이것은 이미 완전한 깨달음 속에 머물고 있는 존재에게는 더 이상 어떤 길도 필요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재인식의 순간, 세상은 어떻게 보입니까? 샹카라의 깨달음 속에서 세상은 환영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프라티야비즈나의 깨달음 속에서 세상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더 이상 그것은 나를 속박하는 감옥이나 고통의 원인이 아닙니다. 이 세계는 바로 나 자신인 시바가, 나의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펼쳐놓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자 즐거운 놀이터 (Līlā)입니다. 산의 장엄함은 나의 장엄함이며, 강의 도도한 흐름은 나의 생명력이고, 꽃의 아름다움은 나의 미소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눈 속에서, 나는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을 봅니다. 모든 이원적인 구분이 사라지고, ‘보는 자’와 ‘보이는 것’, ‘경험하는 자’와 ‘경험되는 것’이 모두 나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의식의 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해탈자 (jīvanmukta)는 세상을 버리고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더 온전히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카르마의 법칙에 얽매인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위를 통해 신성한 창조의 유희에 동참하는 자유로운 예술가가 됩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더 이상 이기적인 욕망이나 과거의 습관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오직 그 순간 속에서 흘러넘치는 신성한 의지의 자발적이고도 창조적인 표현, 즉 스바탄트리야 (svātantrya, 절대적 자유의지)가 됩니다. 그는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일하는 모든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시바 의식의 무한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목표를 향한 투쟁이 아니라, 매 순간이 바로 그 목적인, 영원한 현재 속에서의 춤이 됩니다. 이처럼 프라티야비즈나는 우리에게 해탈이 슬픔의 소멸이 아니라 기쁨의 무한한 확장이며,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과의 완전한 사랑의 합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의 가장 평범한 경험 속에서, 잃어버렸던 우리 자신의 신성한 얼굴을 다시 알아보고 회복하라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희망에 찬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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