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장: 위대한 여신들, 그리고 지혜와 헌신의 신

by 이호창

제1-12장: 위대한 여신들, 그리고 지혜와 헌신의 신들



1-12.1. 락슈미, 두르가, 칼리: 여신의 다양한 얼굴들



힌두교의 만신전 (萬神殿)이 주로 남성 신들의 드라마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창조주 브라흐마, 질서의 수호자 비슈누, 그리고 파괴의 신 시바. 그러나 이 위대한 남성 신들의 발치 아래, 그리고 그들의 모든 권능의 배후에는, 그들을 낳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며, 그들이 춤출 수 있는 무대 자체를 제공하는, 더 근원적이고도 압도적인 힘이 고요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데비 (Devī)’, 즉 ‘위대한 여신’이며, 우주를 움직이는 역동적인 에너지 그 자체인 ‘샥티 (Śakti)’입니다. 힌두 사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우주적 여성성은 결코 남성 신의 소극적인 배우자나 종속적인 파트너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창조와 변화,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며, 그녀의 힘이 없다면 순수한 의식 그 자체인 시바 (Śiva)조차도 한낱 움직이지 않는 시신 (śava)에 불과하다고 선언됩니다.


이 위대한 어머니 여신은 하나의 고정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식인 우리를 대할 때,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비로운 어머니의 얼굴로, 때로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서운 무기를 든 전사의 얼굴로,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모든 환영과 아집을 남김없이 파괴하여 우리를 궁극의 자유로 이끄는 두려운 여신의 얼굴로 그 모습을 바꿉니다. 그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 우리는 락슈미 (Lakṣmī), 두르가 (Durgā), 그리고 칼리 (Kālī)라는 세 가지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을 통해, 여신의 다채롭고도 심오한 본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장 온화하고 자비로우며, 모든 생명체가 갈망하는 여신의 얼굴은 바로 ‘락슈미 (Lakṣmī)’입니다. 그녀는 부 (富)와 풍요, 행운과 아름다움, 그리고 길상 (吉祥)의 여신입니다. 그녀의 탄생 이야기는 힌두 신화 중 가장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서사시인 ‘우유 바다 젓기 (Samudra-manthana)’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태초에 신 (Deva)들과 악마 (Asura)들은 불멸의 감로수 암리타 (Amṛta)를 얻기 위해, 거대한 만다라 산을 젓는 막대로, 그리고 우주적 뱀 바수키를 밧줄로 삼아 광대한 우유의 바다를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년간의 격렬한 휘젓기 끝에, 바다 속에서는 온갖 경이로운 보물들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신성한 소와 말,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취하게 하는 술의 여신과 달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그때, 그 모든 보물들의 빛을 압도하며, 우유 바다의 파도 한가운데서 눈부신 광휘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연꽃이 피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연꽃의 한가운데, 손에는 연꽃을 들고, 온몸은 황금빛 광채로 빛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여신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락슈미였습니다. 그녀의 등장에 온 우주는 경탄했으며, 신들과 악마들 모두 그녀를 차지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분, 질서의 수호자이자 우주의 유지자인 비슈누에게만 향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비슈누의 목에 영원한 반려자가 되겠다는 상징인 꽃 화환을 걸어주었고, 그 순간부터 그녀는 비슈누의 영원한 배우자이자 그의 힘 (Śakti)이 되었습니다.


락슈미의 모든 형상은 풍요와 순수함, 그리고 영적인 각성을 상징합니다. 그녀는 언제나 붉은색이나 황금색 사리를 입고, 만개한 연꽃 (padma) 위에 앉아 있거나 서 있습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은, 이 혼란스러운 세속의 세계 속에서도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그녀의 신성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네 개의 팔은 인간 삶의 네 가지 목표 (푸루샤르타)를 모두 관장하는 그녀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그녀의 두 손에서는 종종 황금 동전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은 그녀가 단지 세속적인 부 (dhana)뿐만 아니라, 다르마와 해탈과 같은 영적인 부 (mokṣa-lakṣmī)까지도 아낌없이 베푸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곁에는 종종 한 쌍의 흰 코끼리들이 서서, 자신들의 코로 물을 길어 올려 그녀를 경건하게 목욕시키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코끼리는 왕권과 힘, 그리고 풍요로운 비구름을 상징하며, 이는 락슈미가 있는 곳에 언제나 풍요와 번영이 함께함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결코 무서운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그녀의 힘은 파괴가 아니라 생성과 유지, 그리고 자양 (滋養)에 있습니다. 그녀는 모든 가정의 안녕을 돌보는 자애로운 어머니이며, 모든 성실한 노력에 축복을 내리는 행운의 여신입니다. 그녀는 비슈누가 라마로 화신했을 때는 시타가 되어 그의 곁을 지켰고, 크리슈나로 화신했을 때는 그의 연인 라다가 되어 사랑의 유희를 함께했습니다. 이처럼 락슈미는 신성한 질서와 조화, 그리고 삶의 모든 긍정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가장 상서롭고도 사랑스러운 여신의 얼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언제나 평화롭고 조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어떤 남성 신의 힘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강력한 악의 세력이 우주의 질서를 송두리째 위협하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여신은 자비로운 어머니의 미소를 거두고, 모든 악을 섬멸하는 두려운 전사의 얼굴로 그 모습을 바꾸십니다. 그 이름은 바로 ‘두르가 (Durgā)’, 즉 ‘접근하기 어려운 자’, ‘무적의 요새’입니다. 그녀의 탄생 신화는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어떻게 궁극의 희망이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이야기는 강력한 물소 악마 마히샤수라 (Mahiṣāsura)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창조신 브라흐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혹독한 고행을 했습니다. 그의 노력에 감동한 브라흐마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히샤수라는 매우 교활하게도 "그 어떤 남성 신이나 인간, 혹은 (남성) 악마에게도 죽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고, 브라흐마는 이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사실상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힘을 얻게 된 마히샤수라는 극도의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 무적의 힘을 믿고 신들의 천상 세계를 침공하여 신들을 모두 쫓아내고 스스로 우주의 왕이 되었습니다. 힘을 잃은 신들은 절망에 빠져, 창조주 브라흐마와 수호신 비슈누, 그리고 파괴신 시바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세 명의 위대한 주신은 분노로 얼굴을 붉혔고, 그들의 입과 온몸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의 빛, 즉 테자스 (tejas)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모든 신들의 몸에서도 각각의 신성한 빛이 뿜어져 나와, 이 모든 빛들이 하늘의 한 지점에서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그곳에서 수천 개의 태양보다도 더 밝고,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불덩어리와 같은 빛의 구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부신 광휘 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아름답고도 두려운 여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녀가 바로 위대한 여신 두르가, 즉 마하데비 (Mahādevī, 위대한 여신)였습니다.


두르가의 모습은 그녀가 모든 신들의 통합된 힘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녀는 열여덟 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신들은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그녀에게 기꺼이 바쳤습니다. 시바는 자신의 삼지창을, 비슈누는 원반을, 바람의 신 바유는 활과 화살을, 불의 신 아그니는 창을, 그리고 히말라야 산은 그녀가 탈 사나운 사자를 바쳤습니다. 그녀는 모든 신들의 힘을 한 몸에 지닌, 우주적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녀가 사자를 타고 전장으로 나아가며 내지르는 포효에 온 세상이 진동했고, 바다는 들끓었으며, 산들은 흔들렸습니다. 그녀와 마히샤수라의 싸움은 9일 밤낮으로 이어졌습니다. 마히샤수라는 교활하게 자신의 모습을 코끼리로, 사자로, 그리고 다시 물소로 바꾸며 저항했지만, 두르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두르가는 자신의 발로 거대한 물소의 목을 짓밟고, 삼지창으로 그의 가슴을 꿰뚫어, 마침내 그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악이 패배하고 다르마가 승리하는 순간, 모든 신들은 환호하며 그녀의 발 앞에 엎드려 그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영원한 투쟁에 대한 심오한 알레고리입니다.


물소 악마 마히샤수라는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 (에고)와 동물적인 욕망을 상징합니다. 두르가는 바로 그 내면의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힘, 즉 우리 안에 잠재된 신성한 자각의 힘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어머니 여신이며, 그녀의 분노는 파괴를 위한 분노가 아니라, 자식들을 구원하기 위한 자비의 표현입니다.


여신의 얼굴 중에는 두르가의 정의로운 분노마저도 넘어서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길들여지지 않은, 두려운 얼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죽음, 그리고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멸을 관장하는 위대한 여신, ‘칼리 (Kālī)’입니다. 그녀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의 피부를 가졌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갓 잘린 머리들로 엮은 목걸이와 잘린 팔들로 만든 허리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긴 혀를 내밀고 있으며, 네 개의 손에는 피 묻은 칼과 잘린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남편인 시바의 하얀 몸뚱이를 밟고 서서 춤을 추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 기이하고도 무서운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칼리의 탄생 신화는 그 비밀의 열쇠를 제공합니다. 두르가가 락타비자 (Raktabīja), 즉 ‘피의 씨앗’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력한 악마와 싸울 때였습니다. 이 악마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한 방울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곳에서 똑같은 힘을 가진 자신의 복제 악마가 수천, 수만 명씩 태어나는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들은 절망에 빠졌고, 두르가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이마가 검게 변하더니, 그곳이 갈라지며 번개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의 여신 칼리가 뛰쳐나왔습니다.


칼리는 즉시 전장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거대한 혀를 길게 내밀어 락타비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에 닿기 전에, 단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모두 핥아 마셔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칼로 수많은 복제 악마들의 목을 베어, 그들을 통째로 씹어 삼켰습니다. 마침내 피의 근원이 마르고 더 이상의 복제가 불가능해지자, 락타비자는 힘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승리의 희열에 도취된 칼리는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녀의 발걸음에 온 우주가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의 춤을 멈출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남편 시바가 스스로 그녀의 발밑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혹은 움직이지 않는 시신의 모습으로 눕습니다. 미친 듯이 춤을 추던 칼리는 문득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 자신의 남편임을 깨닫고, 그 순간 놀라움과 수치심에 혀를 길게 내밀며 춤을 멈춥니다. 이 이미지는 힌두 사상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시신처럼 누워있는 시바는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의식 (Purusha)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 위에서 춤추는 칼리는 그 의식을 활동하게 하고, 우주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역동적인 에너지, 즉 샥티 (Prakṛti)입니다. 샥티가 없다면 시바는 힘없는 시신 (śava)에 불과하며, 시바가 없다면 샥티의 춤은 맹목적인 파괴에 불과합니다. 이 둘의 합일이야말로 존재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칼리의 두려운 모습은 결코 악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시간 (Kāla)의 여신으로서, 모든 창조된 것을 예외 없이 삼켜버리는 우주의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녀가 베어 든 머리는 바로 ‘나’라는 이기적인 자아 (에고)의 머리이며, 그녀가 마시는 피는 우리의 모든 욕망과 번뇌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헌신자들에게 가장 자비로운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가장 근본적인 속박인 에고와 시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모든 이름과 형태를 넘어선 궁극의 자유, 즉 완전한 해탈 (Mokṣa)로 이끌어주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두려운 사랑의 얼굴인 것입니다.


이처럼 락슈미의 풍요, 두르가의 보호, 그리고 칼리의 해방은 결코 서로 다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 자식인 우리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준엄하게, 그리고 때로는 두렵게 그 모습을 바꾸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무한하고도 다채로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1-12.2. 샥티파 (Śākta) 사상: 우주를 움직이는 여성적 에너지



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별들은 무엇에 의해 그 궤도를 돌고 있으며, 우리 심장은 어떤 힘으로 박동합니까? 힌두 사상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의식’과 ‘물질’, ‘브라만’과 ‘마야’라는 이원적인 틀 안에서 사유했다면, 힌두교의 가장 깊고도 오래된 지층에는 이 모든 구분을 뛰어넘는, 더 대담하고도 원초적인 통찰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우주가 어떤 정적인 원리나 수동적인 실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하나의 거대한 ‘힘 (Power)’, 즉 샥티 (Śakti)의 역동적인 표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샥티파 (Śākta) 사상은 바로 이 우주적 에너지를 궁극적 실재로 숭배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힌두 사상의 한 줄기입니다. 이 사상 체계에서, 우리가 앞서 신화 속에서 만났던 위대한 여신 (Devī)은 더 이상 어떤 남성 신의 배우자나 보조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녀는 바로 창조주 브라흐마와 수호자 비슈누, 그리고 파괴자 시바마저도 자신의 자궁에서 낳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며, 마침내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궁극인 절대자 그 자체입니다.


샥티파 사상의 핵심은 궁극적 실재가 결코 정적인 ‘존재 (Being)’일 수 없으며, 끊임없이 활동하고 생성하는 ‘힘 (Becoming)’이어야만 한다는 통찰에 있습니다. 샹카라의 순수한 의식인 브라만은 모든 활동과 속성을 초월해 있기에, 그 자체만으로는 이 다채로운 현상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결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샹카라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마야’라는 설명 불가능한 환영의 힘을 도입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샥티파 사상가들에게는 그러한 인위적인 장치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 실재인 위대한 여신은 그 자신의 본질 안에, 순수한 의식 (Cit)이라는 측면과, 그 의식을 무한한 세계로 펼쳐내는 역동적인 힘 (Śakti)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그리고 분리 불가능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이 그 자체의 ‘타는 힘’과 분리될 수 없고, 태양이 그 ‘빛을 발하는 힘’과 분리될 수 없듯이, 궁극적 실재는 순수한 ‘있음’과 그것을 드러내는 ‘힘’이 하나로 통합된 완전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는 더 이상 벗어나야 할 환영이나 저급한 실체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바로 여신 자신의 힘이, 그녀 자신의 본질이, 그녀 자신의 기쁨이 스스로를 펼쳐낸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거미가 외부의 어떤 재료도 없이 오직 자신의 몸 안에서 실을 뽑아 거미집을 짓듯이, 위대한 여신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 우주라는 장엄한 직물을 짜냅니다. 따라서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먼지 한 톨에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별에 이르기까지, 신성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여신의 살아있는 몸이며, 그녀의 신성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힌두교의 또 다른 거대한 흐름인 시바파 (Shaivism), 특히 탄트라 (Tantra)의 전통과 만나면서 그 가장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그곳에서 궁극적 실재는 시바-샥티 (Śiva-Śakti)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의 원리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시바는 더 이상 푸라나 신화 속의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상캬 철학의 푸루샤 (Puruṣa)처럼 모든 활동을 넘어선, 순수하고, 변하지 않으며, 스스로 빛나는 의식 (Prakāśa 또는 Cit)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는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텅 비고 고요한 공간이며, 모든 것을 비추지만 결코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영원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는 잠재성이며, 순수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시바라는 순수한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으며, 창조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안다’는 자각조차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샥티가 등장합니다. 샥티는 시바 안에 잠재되어 있던 힘이 깨어나는 것이며, 그의 역동적인 에너지이자, 창조적인 활동력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자기 인식 (Vimarśa)’입니다. 샥티는 시바라는 거울이 비로소 ‘내가 존재한다’, ‘내가 본다’, ‘내가 창조한다’고 스스로를 자각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녀는 고요한 바다 (시바) 위를 휘젓는 바람이며, 그 바람으로 인해 창조라는 무한한 파도가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탄트라의 가장 유명한 격언 중 하나는 “샥티가 없다면, 시바는 한낱 시신 (śava)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시바 (Śiva)’라는 단어에서 모음 ‘이 (i)’는 바로 샥티를 상징하는데, 이 모음이 빠지면 남는 것은 ‘샤바 (śava)’, 즉 ‘송장’이라는 단어뿐입니다. 이것은 의식 (consciousness, 시바)이 에너지 (energy, 샥티)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활동도, 심지어는 자각도 없는 무력한 상태임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반대로, 샥티 역시 시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바라는 안정된 토대와 순수한 의식의 빛이 없다면, 샥티의 에너지는 목적 없이 폭주하는 맹목적이고 혼란스러운 힘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둘은 결코 두 개의 분리된 실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의 실재가 가진 두 개의 다른 측면이며, 마치 단어와 그 의미, 불과 그 열기처럼 영원히 함께합니다. 힌두교의 신상들 속에서, 이 심오한 철학은 시바의 몸 왼쪽 절반은 여신 파르바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다나리슈바라 (Ardhanārīśvara)의 형상으로, 혹은 움직이지 않는 시바의 몸 위에서 칼리가 격렬하게 춤을 추는 형상으로 시각화됩니다. 이 모든 이미지는 궁극적 진리가 남성성과 여성성, 고요함과 활동성, 존재와 생성이 하나로 통합된 완전한 합일의 상태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샥티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구원, 즉 해탈 (Mokṣa)의 의미 또한 근본적으로 재정의됩니다. 해탈은 더 이상 이 고통스러운 물질세계 (saṃsāra)를 부정하고 ‘탈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계가 여신의 신성한 유희 (Līlā)임을 깨닫고, 그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샥티파 사상가들에게 속박의 원인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를 여신의 신성한 몸으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여기는 우리의 이원론적인 시각, 즉 무지 (avidyā)입니다. 우리가 ‘나’라는 작은 에고의 감옥에 갇혀, 세상의 모든 것을 나의 쾌락과 고통이라는 좁은 잣대로 판단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여신의 춤에 희생되는 무력한 존재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과 수행 (sādhana)을 통해 이 이기적인 자아의 껍질을 깨고 나올 때, 우리는 놀라운 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내 안에서 나를 살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사랑하게 하는 이 생명의 힘이, 저 멀리 은하수를 움직이고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 거대한 우주적 힘, 즉 샥티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몸 전체로 체험하는 직접적인 각성입니다. 샥티파 사상, 특히 탄트라의 전통은 인간의 몸을 더 이상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나 죄악의 근원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몸은 거대한 우주 전체의 축소판, 즉 소우주 (microcosm)이며, 그 안에는 우주를 움직이는 모든 신성한 힘들이 잠재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척추의 가장 아래쪽에는 뱀처럼 또아리를 튼 채 잠들어 있는 무한한 잠재력의 에너지, 쿤달리니 샥티 (Kuṇḍalinī Śakti)가 있으며, 정수리에는 순수한 의식의 중심인 시바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요가와 명상, 그리고 만트라와 같은 다양한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 잠들어 있는 내면의 여신, 쿤달리니를 깨워, 척추를 따라 존재하는 여러 에너지 중심점 (Cakra)들을 차례로 통과하여, 마침내 정수리에서 시바와 합일시키는 것입니다. 이 내면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순간, 개별적인 자아는 우주적인 의식 속으로 녹아들고, 수행자는 더 이상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시바-샥티의 영원한 춤 그 자체가 됩니다. 그는 살아있는 해탈자 (jīvanmukta)가 되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더 이상 세상에 묶이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더 이상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오직 여신의 신성한 유희를 표현하는 자발적이고도 기쁨에 찬 흐름이 됩니다.


이처럼 샥티파 사상은 힌두교의 다른 어떤 흐름보다도 이 세계와 우리의 육체를 급진적으로 긍정하고, 그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며, 마침내 우리 자신이 바로 우주를 움직이는 그 위대한 여성적 에너지의 일부임을 깨닫게 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해방의 길을 제시합니다.














1-12.3. 나바라트리 축제: 여신 숭배의 살아있는 현장



힌두교의 시간은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신성한 리듬을 타고 순환하는 하나의 거대한 축제입니다. 그 수많은 축제들 중에서도,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여성적 에너지, 즉 샥티 (Śakti)를 향한 숭배가 그 가장 장엄하고도 다채로운 정점에 이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을의 문턱에서 펼쳐지는 ‘나바라트리 (Navarātri)’, 즉 ‘아홉(nava) 밤(rātri)’의 축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축제가 아니라, 아홉 번의 밤과 열 번의 낮 동안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여정이며, 신화와 사상, 그리고 종교적 실천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살아있는 현장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인도 대륙 전체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 (Mahādevī)을 경배하는 거대한 사원이 됩니다. 가정의 작은 제단에서부터 도시의 광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여신의 이름이 노래되고, 그녀의 형상이 숭배되며, 그녀의 힘을 상징하는 춤과 의례가 펼쳐집니다. 나바라트리 축제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둠과 싸워 그것을 정화하고, 그 정화된 땅 위에 새로운 풍요와 지혜의 씨앗을 뿌리며, 마침내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한 힘의 승리를 기념하는, 영혼의 대서사시입니다.


이 아홉 밤의 여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심리적, 영적인 드라마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며, 각각의 단계는 여신의 서로 다른 세 가지 측면에 헌정됩니다.


첫 번째 사흘 밤은 파괴와 정화의 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신자들은 여신의 가장 두렵고도 강력한 모습, 즉 두르가 (Durgā)와 칼리 (Kālī)를 불러냅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악마, 즉 마히샤수라 (Mahiṣāsura)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악마는 단순히 신화 속의 물소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기적인 자아 (ahaṃkāra), 즉 탐욕, 분노, 질투, 증오, 그리고 두려움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경향들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 내면의 적들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강력한 힘, 즉 어머니 여신의 파괴적인 자비에 의지합니다. 신자들은 단식을 하거나 음식을 절제하며, 여신의 이름을 노래하고, 그녀가 악마를 물리치는 이야기를 담은 경전 『데비 마하트미얌, Devī Māhātmyam』을 낭송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악을 파괴해달라는 기원이 아닙니다. “오, 어머니시여! 부디 저의 마음속에 있는 이 더러움과 부정함, 이 완고한 아집을 당신의 칼로 베어주소서”라고 외치며, 우리 자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기꺼이 여신의 제단 위에 제물로 바치는 용감한 행위입니다. 두르가의 삼지창은 우리의 세 가지 근본적인 고통을 꿰뚫고, 칼리의 칼은 우리의 모든 집착의 머리를 베어냅니다. 이 첫 사흘 밤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밭의 잡초를 모두 뽑아내고 돌을 골라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전쟁터를 휩쓸고 간 파괴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두 번째 사흘 밤, 즉 창조와 풍요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이제 신자들은 여신의 자애롭고 풍요로운 모습, 즉 락슈미 (Lakṣmī)를 경배합니다. 첫 사흘 동안 파괴되고 정화된 영혼의 땅은 이제 비어 있고 가난합니다. 이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바로 락슈미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락슈미가 가져다주는 ‘부 (富)’는 단순히 황금이나 돈과 같은 세속적인 재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파괴된 자리에 새롭게 심겨져야 할 모든 긍정적이고 신성한 덕성들, 즉 사랑, 자비, 인내, 용서, 평화, 그리고 만족과 같은 영적인 부를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집과 사원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름다운 등불과 꽃으로 장식하며, 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그들은 여신에게 달콤한 음식과 향기로운 꽃을 바치며, 그녀의 자비로운 은총이 자신들의 삶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간 동안의 분위기는 첫 사흘의 준엄함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희망과 감사, 그리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락슈미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어머니이며, 우리의 텅 빈 가슴을 사랑으로 채우는 여신입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진정한 풍요란 외부적인 소유가 아니라 내면의 덕성을 가꾸는 데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 두 번째 사흘 밤은 잡초가 뽑힌 밭에 비옥한 거름을 주고,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심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흘 밤은 마침내 이 모든 여정의 정점, 즉 지혜와 해방의 시간입니다. 밭이 깨끗해지고 (두르가/칼리), 그 위에 좋은 씨앗이 심겨졌다면 (락슈미), 이제 그 씨앗이 싹을 틔워 찬란한 지혜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햇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 빛의 원천이 바로 지식과 예술, 음악과 지혜의 여신, 사라스바티 (Sarasvatī)입니다. 이 기간 동안, 신자들은 모든 형태의 ‘앎 (jñāna)’을 경배합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책과 필기구를 여신의 제단 앞에 놓고 축복을 구하며, 음악가들은 자신의 악기를 바치고, 장인들은 자신의 연장을 바칩니다. 이것은 모든 지식과 예술의 궁극적인 원천이 바로 여신 자신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개인적인 명예가 아니라 신성한 봉사의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사라스바티는 순백의 옷을 입고, 순백의 연꽃 위에 앉아 있으며, 순백의 백조를 타고 다닙니다. 이 모든 흰색은 모든 무지와 혼란의 어둠을 꿰뚫는 순수한 지혜의 빛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네 개의 팔 중 두 손에는 베다 경전과 묵주 (japa-mālā)가 들려 있어 영적인 지혜와 수행의 중요성을, 다른 두 손에는 비나 (vīṇā)라는 현악기가 들려 있어 예술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진정한 해탈이란 단순히 내면의 악을 파괴하고 선한 덕성을 쌓는 것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녀는 우리를 속박하는 마지막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는 깨달음의 여신입니다.


이 아홉 밤낮의 치열한 내면의 여정이 끝나면, 마침내 열 번째 날, ‘비자야다샤미 (Vijayādaśamī)’, 즉 ‘승리의 열 번째 날’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이날은 ‘두세라 (Dussehra)’라고도 불리며, 여신 두르가가 마침내 악마 마히샤수라의 목을 베어 우주에 평화를 되찾은 날이자, 동시에 라마 왕이 악마 왕 라바나를 물리치고 아내 시타를 구출한 날로 기념됩니다. 그것은 선이 악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기며, 다르마가 아다르마를 이긴, 우주적인 승리의 날입니다. 인도 전역의 도시와 마을에서는 거대한 라바나의 인형을 만들어 그 안에 폭죽을 채운 뒤, 라마로 분장한 배우가 불화살을 쏘아 그것을 불태우는 장대한 의식이 펼쳐집니다. 이 불꽃은 단순히 신화 속 악마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홉 밤 동안의 수행을 통해 내 안의 모든 부정성과 아집이 마침내 불타 사라졌음을 상징하는 정화와 갱신의 불꽃입니다.


나바라트리 축제는 인도 전역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위대한 드라마를 살아냅니다.


서부 구자라트 지방에서는, 마을의 광장마다 구멍이 뚫린 흙 항아리 ‘가르바 (garba)’를 모십니다. 그 안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혀두는데, 이 항아리는 우주를 품고 있는 여신의 자궁을, 그 안의 등불은 생명의 빛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이 가르바 주위에 동심원을 그리며 밤새도록 전통적인 춤 ‘가르바’와 ‘단디야 라스 (dāṇḍiyā-rās)’를 춥니다. 손뼉을 치고, 화려한 막대기를 부딪치며, 여신의 찬가를 부르는 이 원무 (圓舞)는, 창조와 소멸을 반복하는 우주의 순환적인 시간과 그 중심에서 변하지 않는 여신의 영원한 현존을 상징하는, 역동적인 명상입니다.


동부 벵골 지방에서는 ‘두르가 푸자 (Durgā Pūjā)’라는 이름으로 이 축제를 기념합니다. 장인들은 몇 달에 걸쳐 진흙으로 마히샤수라를 무찌르는 여신 두르가의 거대하고 화려한 신상 (murti)을 빚어냅니다. 축제의 마지막 닷새 동안, 이 신상은 임시로 지어진 화려한 천막 (pandal)에 모셔져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며, 도시 전체가 거대한 야외 미술관이자 축제의 장으로 변모합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 신자들은 눈물과 환호 속에서 이 신상을 강물이나 바다로 운반하여 그 속으로 떠내려 보냅니다 (visarjan). 이것은 여신이 다시 자신의 본래 거처로 돌아감을 의미하며, 모든 이름과 형태는 결국 근원적인 에너지의 바다로 돌아간다는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는 가슴 뭉클한 작별의 의식입니다.


남부 인도에서는 ‘골루 (Golu)’ 또는 ‘콜루 (Kolu)’라고 불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축제를 기념합니다. 가정에서는 홀수 개의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온갖 신들과 성인, 인간과 동물의 인형들을 장엄한 우주적 위계질서에 따라 전시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여신의 신성한 드라마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며, 그 모든 다양성 속에 하나의 신성한 질서가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전시입니다.


이처럼 나바라트리 축제는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힌두교의 신화와 사상, 그리고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져,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매년 새롭게 살아나는, 가장 위대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여신 숭배의 살아있는 현장입니다.











1-12.4. 장애물을 제거하는 지혜의 신, 가네샤




힌두교의 장엄한 신들의 세계 속에서, 어떤 신은 저 멀리 히말라야의 눈 덮인 정상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고, 어떤 신은 우주적 바다 위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 삶의 문턱, 우리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바로 그 모든 시작의 순간에, 가장 먼저 우리를 맞아주고 길을 열어주는 친근하고도 자비로운 신이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경이롭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그의 지혜는 심오하지만 우리를 멀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머리를 한, 지혜와 행운의 신, 가네샤 (Gaṇeśa)입니다. 힌두교의 그 어떤 신보다도 종파를 넘어 가장 널리 사랑받고 경배받는 가네샤는, 단순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모든 힌두교도의 삶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살아있는 현존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리 가네샤야 나마하 (Shri Ganeshay Namah)”, 즉 “위대한 가네샤께 경배를”이라고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부르는 전통은, 그가 없이는 어떤 성공적인 시작도 불가능하다는 깊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가네샤의 가장 중요한 신격은 바로 ‘비그네슈바라 (Vighneśvara)’, 즉 ‘장애물의 주 (主)’입니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자비로운 신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는 바로 그 장애물 자체를 ‘만들어내는’ 주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길이 너무 쉽거나 우리가 교만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시험하고 더 깊은 성찰로 이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장애물을 놓아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그에게 기도하고,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를 보일 때, 그는 자신이 놓았던 그 장애물을 누구보다도 자비롭게 치워주는 위대한 스승이 됩니다. 따라서 모든 일의 시작에 앞서 그를 경배하는 것은, 앞으로 닥칠지 모를 미지의 장애물들을 미리 제거해 달라는 기원이자, 혹여 장애물을 마주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는 우리가 넘어져야 할 때를 알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주어야 할 때를 아는, 가장 지혜로운 안내자입니다.


가네샤의 모습은 단순한 신화적 형상을 넘어, 그 자체로 우주의 심오한 진리와 인간 영혼의 여정을 담아낸 살아있는 상징 언어입니다. 그의 독특하고도 사랑스러운 모습 하나하나에는 우리가 어떻게 삶의 장애물을 넘어서고, 내면의 지혜를 깨우며, 마침내 완전한 조화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가르침이 암호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이자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인 코끼리의 머리는, 앞선 신화에서 보았듯이, 단순한 기형이 아니라 극적인 변형의 결과물입니다. 본래 파르바티가 자신의 몸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소년의 머리는, 아버지 시바와의 비극적인 오해와 충돌 속에서 잘려나갔습니다. 이 잘려나간 인간의 머리는 바로 ‘나’라는 분리된 개체 의식, 즉 모든 고통과 속박의 근원인 이기적인 자아, 아집 (ahaṃkāra)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코끼리의 머리가 붙여졌다는 것은, 이처럼 제한적이고 파괴적인 개인적 에고가 부서지고, 그 자리에 더 크고, 포용적이며, 우주적인 지혜가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위대한 영적 변혁의 상징입니다. 코끼리는 동물 중에서 가장 거대한 몸집과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동시에 놀라운 기억력과 깊은 지혜, 그리고 온순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존재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가네샤의 거대한 코끼리 머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지혜를 남김없이 담고 있는 우주적 총명함의 표현입니다.


그의 크고 넓은 귀는 마치 키처럼, 세상의 온갖 소리와 정보들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고 진실한 것만을 가려내어 듣고 (śravaṇa),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들은 걸러내는 완벽한 분별력을 상징합니다. 현대 사회처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듣고 무엇을 흘려버려야 하는지를 아는 이 지혜는 더욱 절실합니다. 그의 길고 구부러진 코 (trunk)는 여러 겹의 심오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강한 힘으로 거대한 나무를 뿌리 뽑을 수도 있고, 동시에 땅에 떨어진 작은 바늘 하나를 집어 올릴 수도 있는, 힘과 섬세함의 완벽한 조화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이 코는 실재와 비실재,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 선과 악을 명확하게 분별해내는 예리한 지성의 힘 (비베카, viveka)을 나타냅니다. 또한, 코끼리가 코를 사용하여 먹이를 입으로 가져가듯, 가네샤가 자신의 코로 달콤한 과자인 모다카 (modaka)를 집어 즐겁게 먹는 모습은, 지혜가 이끄는 삶이 결코 고통스럽거나 메마른 것이 아니라, 마침내 달콤하고 풍요로운 결실, 즉 깨달음의 기쁨 (ānanda)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네샤는 보통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동서남북 사방에 두루 미치는 전능함과, 인간의 내면 세계 (안타카라나)의 네 가지 기능 (마나스, 붓디, 아함카라, 치타)을 모두 관장함을 상징합니다. 각각의 손에는 그의 역할과 힘을 나타내는 다양한 상징물들이 들려 있습니다. 한 손에는 종종 밧줄 (pāśa)이 들려 있는데, 이것은 수행자를 세속적인 집착과 환영의 세계로부터 끌어당겨 더 높은 진리의 길로 이끌고, 동시에 그의 발치로 다가오는 헌신자들을 묶어 보호하는 신성한 밧줄입니다. 다른 한 손에는 도끼 (aṅkuśa) 또는 코끼리 몰이꾼이 사용하는 갈고리가 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종류의 집착과 번뇌의 뿌리를 단호하게 잘라내고, 게으름과 무지의 어둠 속에 주저앉으려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각성의 도구입니다. 또 다른 손에는 앞서 언급한 모다카라는 달콤한 과자 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수행의 길이 비록 험난할지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달콤한 보상, 즉 지혜와 해탈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약속하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손은 종종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채 축복의 손짓 (abhaya-mudr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에게 귀의하는 모든 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모든 위험과 장애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자비로운 약속의 표현입니다.


가네샤의 모습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부러진 한쪽 상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신화가 전해지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현자 비야사 (Vyāsa)가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서사시인 『마하바라타』를 구술할 때, 가네샤가 그의 필경사 역할을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쓰던 펜이 부러지자, 가네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오른쪽 상아를 부러뜨려 그것을 펜 삼아 서사시 전체를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숭고한 가르침과, 완전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불완전함 속에서도 위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의 커다란 배는 단순히 음식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경험, 즉 좋은 것과 나쁜 것, 즐거움과 괴로움, 성공과 실패를 모두 편안하게 소화하고 포용하는 그의 너그러운 우주적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어떤 것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조화를 찾는 능력임을 그의 모습은 말없이 보여줍니다.


아마도 가네샤의 모습에서 가장 역설적이고도 심오한 상징은 그의 발치에 있는 작고 미천한 생쥐 (mūṣaka)일 것입니다. 어떻게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동물인 코끼리를 머리로 한 신이,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동물인 생쥐를 자신의 탈것 (vāhana)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생쥐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쉬지 않고 활동하며 모든 것을 갉아먹는,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우리의 모든 선한 노력과 공덕의 창고를 갉아먹는 파괴적인 힘입니다. 가네샤가 이처럼 작지만 강력한 생쥐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지혜란 바로 이처럼 끊임없이 날뛰는 욕망과 산만한 생각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임을 보여줍니다. 가장 거대한 지혜가 가장 작은 욕망을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의 내면에는 진정한 평화와 힘이 깃들게 됩니다.


이처럼 가네샤의 모든 형상은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 즉 신적인 지혜와 인간적인 삶의 모든 측면이 조화롭게 통합된 존재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경전과도 같습니다. 그는 모든 시작을 축복하고 이끄는 신이자, 모든 지혜의 원천이며, 우리 삶의 길 위에 놓인 모든 내면적, 외면적 장애물들을 넘어서도록 돕는 가장 친근하고도 자비로운 안내자입니다.










1-12.5. 헌신과 용기의 화신, 하누만



힌두교의 장엄한 신들의 세계 속에는, 인간의 마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숭고한 덕성들을 하나의 인격 안에 완벽하게 구현해 낸 존재들이 있습니다. 만약 라마가 이상적인 다르마 (Dharma)의 화신이라면, 그리고 크리슈나가 신성한 사랑의 유희 (Līlā) 그 자체라면, 그 길을 따르는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도 눈부신 헌신의 정점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대해, 힌두교의 모든 신자들은 남녀노소와 종파를 가리지 않고 한목소리로 하나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바로 바람의 아들이자, 원숭이들의 영웅이며, 위대한 신 라마의 가장 충실한 종, 하누만 (Hanumān)입니다. 그는 트리무르티와 같은 우주적 주신은 아니지만, 아마도 힌두교의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신뢰받으며,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는 신일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박티 (Bhakti)’, 즉 신을 향한 헌신적 사랑이 무엇이며, 그 사랑이 한 존재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서사시입니다. 하누만의 삶은 자신의 힘과 지혜,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오직 주군을 위한 봉사 (sevā) 속에 남김없이 불태운, 가장 완벽한 카르마 요기 (Karma Yogi)의 초상입니다.


하누만의 탄생 신화는 그 자체로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힘이 하나로 어우러진 경이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는 바람의 신 바유 (Vāyu)의 영적인 아들이자, 원숭이 종족인 바나라 (Vānara)의 여인 안자나 (Anjanā)의 아들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키우거나 줄일 수 있고, 산을 통째로 들어 올리며, 구름 위를 걷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엄청난 신통력, 즉 싯디 (siddhi)를 부여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떠오르는 붉은 해를 잘 익은 망고인 줄 알고 한입에 삼켜버리려다 신들의 왕 인드라의 금강저에 맞아 턱 (hanu)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누만’, 즉 ‘턱을 가진 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위대한 힘은 결코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모든 힘과 능력은 오직 하나의 목적, 즉 그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선택한 라마를 섬기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하누만의 위대함은 『라마야나』라는 장대한 드라마의 무대 위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악마 왕 라바나에게 아내 시타를 납치당하고 절망에 빠진 라마가 남쪽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하누만은 원숭이 왕국의 충직한 신하로서 처음 그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라마를 처음 본 순간, 그가 바로 자신이 평생을 바쳐 섬겨야 할 지고한 주님임을 직감하고, 그의 발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맹세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샤 박티 (dāsya-bhakti)’, 즉 주인을 향한 하인의 헌신적인 사랑의 시작입니다. 라마를 향한 그의 첫 번째 위대한 봉사는, 누구도 건널 수 없다고 여겨졌던 거대한 남쪽 바다를 건너 랑카 섬에 잠입하여 시타의 생사를 확인하는 임무였습니다. 다른 모든 원숭이 영웅들이 망설이고 두려워할 때, 하누만은 오직 라마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몸을 산처럼 거대하게 키웁니다. 그는 거대한 산 위에 발을 딛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 바다 속에 숨어 있던 악마들의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랑카의 해안에 도달합니다. 이 바다를 뛰어넘는 행위는 단순한 신체적 능력을 넘어, 주군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어떻게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마저도 극복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랑카에 잠입한 하누만은 작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라바나의 화려하지만 사악한 궁전 구석구석을 수색합니다. 마침내 그는 아쇼카 숲 속에서, 라바나의 끈질긴 유혹과 협박 속에서도 오직 라마만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 시타를 발견합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타에게 접근하여, 라마가 자신을 보냈다는 증표로 그의 반지를 건네며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이 장면에서 하누만은 단순히 용맹한 전사가 아니라, 절망에 빠진 영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자 (使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시타로부터 그녀의 머리 장신구를 증표로 받아든 뒤, 그냥 조용히 떠나는 대신 라바나에게 라마의 힘을 경고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일부러 소란을 피워 라바나의 군대에게 붙잡히고, 그의 앞에 끌려갑니다. 라바나가 그의 꼬리에 불을 붙여 조롱하고 내쫓으려 하자, 하누만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꿉니다. 그는 불타는 꼬리를 휘두르며 랑카의 모든 궁전과 건물 위를 날아다니며, 악마의 도시 전체를 거대한 불바다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그의 지혜와 용기가 어떻게 적의 공격마저도 자신의 무기로 전환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통쾌한 일화입니다.


하누만의 헌신이 그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랑카와의 치열한 전투 중에 찾아옵니다. 라마의 동생 락슈마나가 라바나의 아들 인드라지트가 쏜 치명적인 무기에 맞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오직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신비로운 약초 산지바니 (sanjīvanī)만이 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누만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한번 하늘로 솟구쳐 인도 대륙을 가로질러 히말라야로 날아갑니다. 그러나 약초들이 빛을 발하는 산에 도착했지만, 수많은 약초들 중에서 어떤 것이 산지바니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락슈마나의 목숨이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 하누만은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다시 거대하게 키워, 그 약초 산 전체를 통째로 뽑아 들어 손에 들고 전장으로 날아옵니다. 이 경이로운 광경은 힌두 신화 전체를 통틀어, 헌신적인 사랑이 가진 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하누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나 임무의 세부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주군의 고통을 덜어드리는 것이었으며,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산을 통째로 옮기는 것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행위마저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의 힘은 그의 근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라마를 향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에서 나옵니다.


라마가 마침내 라바나를 물리치고 승리하여 아요디아로 돌아와 왕이 된 뒤에도, 하누만의 헌신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높은 지위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라마의 발치에 앉아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시타가 그의 헌신에 감동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을 때, 하누만은 그 진주알들을 하나씩 이빨로 부수어 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시타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라마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저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온 존재는 오직 라마를 향한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시타가 하누만에게 어떻게 하면 라마를 그토록 기쁘게 할 수 있는지 묻자, 하누만은 자신의 가슴을 손톱으로 찢어 열어 보였고, 그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라마와 시타의 형상이 영원히 새겨져 있었음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누만은 ‘나’라는 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그 빈자리를 오직 신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운, 가장 완벽한 박티의 화신입니다. 그는 신통한 힘을 가졌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결코 자랑하지 않았으며, 오직 영원한 종으로서 주군을 섬기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치란지비 (Chiranjīvī)’, 즉 불멸의 존재 중 하나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서 라마의 이름이 불리는 곳을 지키고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모든 헌신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가장 자비롭고도 강력한 수호신으로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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