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때 세계가 정해진 규칙 속에서 움직인다고 믿었다. 뉴턴(Isaac Newton)이 말한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시계로 보았다. 시계는 태엽을 감아 놓으면 정확하게 돌아가고, 그 안의 바늘은 언제나 정해진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인다. 고전역학의 눈으로 본 세계는 정밀하고 안정적이었다. 모든 물체는 정확한 위치에 있고, 그 속도와 방향을 계산하면 미래의 궤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因果律, causality)에 따라 움직였고, 이 모든 움직임은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안에서 인간이 할 일은 오직 ‘관찰(觀察)’하고 ‘측정(測定)’하며 ‘예측(豫測)’하는 것이었다. 세계는 그 자체로 완성된 실체였고, 인간은 그것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 질서의 균열을 알리는 하나의 낯선 이론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이다. 양자역학은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단지 물리학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뉴턴의 눈으로 본 우주가 하나의 완성된 기계라면, 양자역학의 눈으로 본 우주는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 혹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집합이다. 여기서는 ‘존재’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그 무엇도 관측되기 전까지는 오직 ‘가능성의 중첩(重疊, superposition)’ 상태로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중 슬릿 실험이다. 전자를 하나씩 발사했는데도, 전자들은 스스로 간섭무늬를 만들어냈다. 이 현상은 입자(粒子, particle)가 동시에 파동(波動, wave)의 성질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고전역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중성이다. 우리는 전자를 던졌는데, 그것은 어디를 지나왔는지도 모른 채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고, 마치 파도처럼 자신과 부딪히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묻는다. 전자는 도대체 무엇인가. 고정된 ‘점’인가, 흘러가는 ‘선’인가. 그 대답은 양자역학이 알려준다. “둘 다이고, 동시에 둘 다 아니다.”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측 이전에는 가능성의 흐름 안에 있으며, 오직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에만 하나의 현실로 응결된다.
그렇기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말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는 단순한 측정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면, 그 운동량(속도와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고, 반대로 운동량을 정확히 알면 위치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세계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존재는 고정된 좌표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떨림과 불확실성의 장 안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충격이 있다. 그것은 ‘관측자 효과(observer effect)’다. 양자 상태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여러 상태의 중첩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슈뢰딩거(Schrödinger)의 고양이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 이 사고실험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1935년에 제안한 것으로, 양자역학의 이상한 성질을 일상적 차원에서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자 속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방사성 원소, 방사선을 감지하면 독가스를 방출하는 장치가 함께 들어 있다. 방사성 원소는 일정 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이 50%인데, 이 붕괴 여부에 따라 장치가 작동해 고양이가 죽게 되거나, 반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고양이는 살아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실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상자를 열어 고양이를 직접 관측하기 전까지는, 고양이는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동시에 중첩(重疊, superposition)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측하는 순간, 고양이의 상태는 그 중 하나로 ‘붕괴’되고, 우리는 그제야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게 된다. 이처럼 관측 이전의 세계는 확정된 하나가 아니라, 가능성들이 공존하는 열린 상태에 머물러 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 불가능이 바로 양자역학의 현실이다. 고양이의 운명은 우리가 상자를 열고 ‘관측’하는 그 순간에 결정된다. 그렇다면 물음이 생긴다. 세계는 관측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관측을 통해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양자역학은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말한다.
“네가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느냐가, 그 세계를 만든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은 단지 물리 법칙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관(存在觀)’의 충돌이며, ‘세계에 대한 태도’의 차이다. 고전역학은 실재 (reality)가 관측자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양자역학은 실재란 언제나 ‘관계적(relational)’이며 ‘현상적(phenomenal)’이라고 말한다. 즉, 존재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관계 속에서, 관측과 반응 속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더 이상 밖에서 세계를 관찰하는 이가 아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함께 만드는 존재’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은 철학자가 되어 이렇게 속삭인다. “존재는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응답하는 진동이다. 그것은 닫힌 실체가 아니라, 열림의 과정이다.”
이 모든 변화는 과학의 언어를 빌려 인간의 사유에 말을 걸고 있다. “세계는 원래부터 불확실했다. 확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 있었다. 그리고 너는 그 안에 있었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열려 있는 세계 속에서 너만의 울림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것은 단지 과학의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질문이며, 삶의 윤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야말로 깨달아야 한다. 세계는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양자역학이 남긴, 가장 철학적인 진실이다.
양자역학은 과학의 언어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존재에 대해 다시 묻게 만든다. 세계가 확정된 실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중첩이라면, 존재란 본래부터 닫힌 것이 아니라 열린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때 우리는 한 물리학자의 질문을 철학자의 질문으로 옮겨야 한다.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그 존재의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참여하고 있는가?
루마니아의 철학자 루치안 블라가(Lucian Blaga)는 인간을 ‘열려 있는 존재 (ființă deschisă)’라고 말했다. 그는 존재를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떨리고 흔들리는 감응적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단지 세계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다. 인간은 세계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본질적으로 초월해가려는 존재이다.
블라가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신비(mister)를 지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는 이를 ‘부정 인식’(minus-cunoaștere)라 불렀다. 즉,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세계가 자기 앞에서 스스로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인식의 방식이다. 블라가의 철학은 양자역학의 태도와 닮아 있다. 양자역학은 존재를 파괴하지 않고 응시하며, 그 가능성 위에 조용히 관측을 얹는다. 그리고 그 순간, 세계는 하나의 파동으로부터 하나의 현실로 수렴된다.
여기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유로 나아가 보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 : 나?)’라고 불렀다. 이는 단순히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며,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항상 현존재의 물음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말했다.
“존재는 존재자(Seiendes)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이해 속에서 열린다.”
즉, 존재란 우리 앞에 어떤 실체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물을 수 있는 방식으로만 열린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와 근본적으로 통한다.
세계는 인간의 응시와 관측 없이는 어떤 하나로도 굳어지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도, 블라가에게도,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 안에서만 열린다. 하이데거는 또 다른 말로 이 관계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다.”
즉, 인간은 바깥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놓여 있고, 그 세계와 함께 떨리고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떨림이 바로 ‘존재의 진리’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의 철학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서양이 ‘존재’를 묻는다면, 불교는 ‘무(無)’ 혹은 ‘공(空, śūnyatā)’을 묻는다. 고대 불교의 중심 사상 중 하나인 ‘공’은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란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조건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 사상은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라는 개념으로 더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것은 인연과 조건에 따라 생겨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 말은 마치 관측자 없이는 상태가 정해지지 않는 양자 세계와도 같다. 불교에서의 존재는 항상 ‘울림’으로 존재한다. 실체가 아니라 울림, 즉 관계 속 떨림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공이다. 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음으로써 모든 울림이 가능해지는 열린 상태다.
이 세 철학 사상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으로 말한다.
존재란 닫힌 것이 아니라, 열린 것이며, 실체가 아니라, 관계이며, 고정된 점이 아니라, 떨리는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인간이 그것을 바라볼 때, 그것을 이해하려 할 때, 그것을 살아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를 설명하고 지배하려 했다. 고전역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였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다시 겸손을 가르친다. 세계는 스스로 닫히지 않으며, 인간이 손을 댈 때에만 열릴 수 있다. 블라가처럼 우리는 이제 “무지의 경외”를 회복해야 하며, 하이데거처럼 “존재의 물음”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불교처럼 “비워져 있기에 공명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모든 사유의 바탕에는 한 가지 공통된 진실이 있다.
존재는 ‘내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세계는 항상 ‘나와 함께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이야말로 진짜 실재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현실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불확실해졌다는 이상한 감각 속에 살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멈추게 된다. 이것이 정말 실제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한 세계를 내가 해석하고 있는 것뿐인가. 스마트폰의 화면은 너무도 매끄럽고, 가상현실의 몰입감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우리는 이미 어느 순간,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양자역학은 여기에 불을 던진다. 그것은 말한다.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측하는 자의 눈에 따라 확정된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우리가 지금 보는 이 세계는 과연 실재(實在, reality)인가? 아니면 하나의 정교한 시뮬레이션인가?”
이 질문은 더 이상 공상과학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가장 첨예한 접점에서 다시 묻는 근본적 물음이 된다. 철학자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은 이와 관련된 고전적인 사고실험을 던졌다. 바로 ‘통 속의 뇌(Brain in a Vat)’이다. 퍼트남은 이렇게 묻는다. 만약 한 인간의 뇌가 액체가 든 통에 담겨, 슈퍼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보자. 이 컴퓨터는 그 뇌에 현실과 동일한 감각 자극을 전달하고 있다. 그 뇌는 자신의 손을 움직이고, 바람을 느끼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가상이며, 그 자신이 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사고실험은 단지 허구가 아니다. 양자역학의 관측자 중심적 세계관과 결합되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혹시 그런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퍼트남의 문제제기는 결국 이렇게 요약된다.
“현실이란, 내가 그것을 믿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영화 매트릭스도 이런 사유에서 탄생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비슷한 물음을 던졌던 또 다른 인물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그는 시간과 인식의 문제를 철저하게 지속(durée,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풀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분절하여 사고하지만, 실제 세계는 그런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생성되는 흐름의 운동 안에서만 성립한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고정된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운동의 리듬 속에 있다.”
이 말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파동함수의 확률 흐름과 묘하게 닮아 있다. 존재는 하나의 고정된 점이 아니라, 잠재성(potentiality)이 진화하는 흐름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보는 자의 리듬’에 따라 구성된다. 베르그송은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 다르다고 했고, 그 틈 속에서 세계는 항상 ‘지각(知覺)’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롭게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관측에 의해 현실이 결정된다는 양자 세계관의 철학적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철학자 니콜라스 오레스메(Nicholas Oresme)를 잠시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이미 14세기 중세 후기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모든 하늘과 땅이 함께 돌고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각의 상대성과 세계 해석의 문제를 일찍이 제기한 인물이었다. 관측의 조건이 변하면,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이는 곧 현실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상대적 해석의 틀 속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시사한다. 양자역학에서 관측자 없는 실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이미 중세 철학자의 물음 속에서 미리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고개를 들고, 20세기 후기의 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세계를 하나의 ‘공동 생성의 공간’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더 이상 닫힌 구체가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이며, 모든 존재는 그 공간의 일부로서 서로를 향해 열려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보는 세계가 마치 거대한 네트워크처럼, 관계성과 상호적 열림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낭시에게 있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co-existence)’이다. 이는 곧 시뮬레이션이라는 관념이 단지 외부에서 주어진 허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구성되는 살아 있는 장(場)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사유를 종합하여 묻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는 설계된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다시 생성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현실이 시뮬레이션인지 아닌지를 넘어서, ‘나는 나의 인식을 얼마나 자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윤리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진짜’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진짜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진짜는 그것을 보는 나의 의식과 태도, 그리고 감각의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양자역학은 그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으며, 철학자들은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천천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이르른다.
진짜란, 실체가 아니라 인식의 진실성이다. 현실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어내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내가 관측할 때, 내가 질문할 때, 내가 책임질 때에만, 진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