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듯 쓰고, 쓰듯 달린다.

by 플레이런너


마라톤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문화일보가 주최한 통일마라톤 대회에서 첫 풀코스를 완주했다.

구파발에서 출발해서 임진각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좌회전도, 우회전도 없이 오직 직진뿐이었다. 달리며 ‘통일의 길이 이렇게 길고 지루한 것일까?’ 생각했다. 완주 후 주최 측에서 대회 후기를 받는다고 하여 ‘신이 내린 보약-마라톤’ 제목으로 글을 보냈다. 얼마 후, 은상과 함께 3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는 내게 글쓰기의 동기를 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글에는 ‘군대에서 이천 원과 요통을 맞바꾼 순간’, ‘막걸리 한 병이 그렇게 달았던 이유’, ‘신혼 첫날밤 허리 통증 때문에 아내에게 마사지를 받아야 했던 짠한 기억’ 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 요통이 점차 사라지고, 다시 온몸으로 땅을 힘차게 디딜 수 있게 되었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 후기의 핵심이었다.


통일 마라톤 이후 다음 카페 런너스클럽에 가입했다. 토요일날 달린다고 해서 ‘토달’, 반포에서 달리는 ‘반달’, 청계천에서 화요일에 뛰는 ‘청화주’ 등 다양한 달리기 모임에 함께했다. 런너스클럽의 특징 중 하나는 훈련이 끝나면 당번제로 게시판에 후기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내용은 날씨, 참석자 이름, 달린 거리, 뒷풀이 등이 기본이었다. 그 덕분에 달린 뒤 일지처럼 간단히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온 나의 글쓰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달리기와 글쓰기는 닮은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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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꾸준함과 반복이다.

브런치에서 어느 작가분이 ‘매일 글을 쓰는 분이 작가’라는 글을 보았다. 글쓰기에 있어 꾸준함이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강조한 것이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풀코스는 어느 날 갑자기 완주할 수 없다. ‘매일 조금씩 뛰는 사람이 런너’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기는 반복 속에서 체력을 키워진다. 연습 없이 마라톤을 완주할 수는 없듯, 글 역시 꾸준히 써야 비로소 완성된다.

둘째는 지구력이다.

풀코스를 완주하려면 적어도 한 달에 200-300km 정도 연습을 해야 한다. 특히 대회 중 가장 힘든 ‘마의 30km 구간’을 넘기기 위해 장거리 연습이 필수다. 글쓰기도 지구력과의 싸움이다. 처음엔 술술 써지지만 중간쯤 오면 “이 글 대체 왜 쓰고 있지?”, “내가 뭘 이야기하려던 거였지?” 하면서 때때로 멘탈이 붕괴되기도 한다. 바로 그 지점이 글쓰기의 ‘30km 구간’이다. 초고를 쓰고 수십 번의 탈고 끝에야 글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셋째, 혼자 하는 일이다.

달리기는 상대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다. 핑겟거리가 없다. 글쓰기 역시 그렇다. 쓰겠다고 결심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끝까지 글을 쓰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독자 또는 타인은 글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만나는 존재다.


네 번째 ‘하이(High)’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런너스 하이(Runner's High)란 격렬한 운동을 지속했을 때 느껴지는 일시적인 행복감과 도취감이다. 아프던 다리도 괜찮고, 몸이 가벼워지며, 달리기가 저절로 되는 듯한 상태다.

글쓰기도 비슷하다.

고비를 넘기면 문장이 술술 풀리며 “그래, 이게 정말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다” 하는 순간이 온다. '런너스 하이(Runner's High)'와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가 만나는 지점이다.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집에 두고 온 맛난 한우 생각조차 잊게 된다.


다섯 번째 완주의 근육이다.

마라톤 기록이 좋든 나쁘든 완주의 환희는 모든 런너에게 같다.
3시간 30분에 뛰든 6시간이 걸리든, 완주한 사람은 이전과 달라진다. 그에게는 ‘완주의 근육’이 생긴다. 글도 그렇다. 브런치에서 조회수가 높든 낮든, 끝까지 써낸 사람에게는 다음 글로 이어지는 힘이 남는다. 달리기와 글쓰기 모두 완주의 근육을 키워주는 행위다.


결국 달리기와 글쓰기는 서로의 페이스메이커다. 달리기로 다져진 체력은 엉덩이로 쓰는 글쓰기를 지탱하고, 글쓰기로 다듬어진 사유는 지루한 달리기를 견디는 힘이 된다. 그렇게 쌓인 '완주의 근육'은 비단 주로(走路)와 원고지를 넘어, 삶의 모든 고비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가장 단단한 힘이 된다.


2023.03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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