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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큰대문집 오이지』 제2장
김치냉장고와 어머니

by 플레이런너

장독대와 광이 있던 자리에는 반듯하게 놓인 김치냉장고 두 대와 대형 냉장고 두 대가 자리 잡고 있다. 마당 한쪽, 벽을 따라 티브이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모던한 디자인의 테이블과 소파가 배치되어 있다.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이제는 현대적인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며느리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놓으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익숙한 듯 손을 놀린다. 한편, 혁진은 한 손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보며, 다른 손으로 허리를 긁적인다. 그는 아내를 돕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디에 뭘 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혁진: (냉장고 문을 살짝 열었다가) 반찬은 이 칸에 넣으면 되지요?

며느리: (슬쩍 쳐다보며) 그건 그냥 두세요. 여기가 김치, 여기는 반찬. 내가 할게요.

(혁진은 뚜껑을 덮고, 손끝으로 반찬통을 살짝 밀어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며, 어색하게 위치를 바꾼다. 결국 자리에 앉아 어깨를 으쓱한다. 조명이 점점 따뜻한 빛에서 차가운 색으로 바뀌며, 공간의 변화가 확연히 드러난다.)

혁진: (작게 중얼거리며) 반찬 하나 넣는 것도 공부네…

(며느리는 라벨지를 꺼내 하나씩 붙이며 냉장고 칸을 정리한다. “반찬”, “국”, “김치” 등 글씨가 정갈하게 보인다.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며느리: (작게, 스스로에게 말하듯) 라벨이… 경계를 만드는 거네요. 어머님.

어머니: (며느리 말을 흘려들으며 김치냉장고 문을 연다.) 봐라, 김치가 꽉 찼지 않았니? 냉장고가 있어서 세상 편하네.

며느리: (냉장고 문 닫으며) 어머니, 냉장고 너무 꽉 채우면 안 좋아요. 얘들도 숨을 쉬어야죠.

혁진: (웃으며) 엄마, 냉장고 터지겠어요. 우리 집이 식당이에요?

어머니: (침착하게) 너희들, 참 똑똑하구나. 이 음식들이 우리 건강을 지켜주는 거다

며느리: (한숨을 쉬며) 너무 많아요. 이렇게까지 많이 해야 해요?

어머니: (쯧쯧 혀를 차며) 아이고 요즘 사람들, 세상 편해졌는데 그거 좀 했다고 힘들다니, 그래 가지고 큰대문집 며느리라고 할 수 있겠니?

혁진:(며느리 감싸며) 시대가 변했어요. 이제는 우리 필요한 만큼만 해서 먹어요.

어머니 : (웃으며) 그래서 요즘 애들은 전통의 가치를 잘 몰라. 그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줄 알아?

며느리: (조심스럽게) 저희도 애도 키우고 살림도 해야죠.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어머니가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통을 꺼내 든다. 어머니는 멈춰서 며느리와 혁진을 번갈아 쳐다본다.)

어머니: 니들에게는 행복이 뭐니?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음식 나눠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 줄 니들이 아니?

며느리: 그 행복이 가끔 저한테는 짐처럼 느껴져요. 냉장고를 너무 믿으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 : 냉장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며느리 : 그게요… 남들이 우리 집 냉장고 보면 놀랄걸요. 통에 안 들어가서 봉지째 넣고,

너무 많아서 뭐가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들어요

어머니:(혀를 찬다) 결국 자백하네. “나 일 못하는 며느립니다” 하고

며느리 : 맞아요. 저는 잘 해내지 못해요. 그게 너무 괴로워요.

어머니: (낮고 단호하게) 오이지는 말이다. 이 집의 전통이자 역사요, 문화다.

혁진: (냉소적으로)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냥 오이지 같은데.

어머니 : 여기가 어딘 줄 알아? 큰대문집이야.

며느리 : 네, 큰대문집이죠.

어머니 : 그러니까 니가 큰대문집 며느리니까, 이 전통을 잇는 것도 네 몫이란 말이다.

며느리 : 근데 어머님, 그 큰대문집이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그러세요?

어머니: (웃으며, 하지만 단호하게) 강남? 웃기지 마. 이 동네가 훨씬 살기 좋을 거야. 그 자부심으로, 친척들 다 떠나도 난 지켰어.

(잠시 멈추고, 혁진과 며느리를 번갈아 보며)

두고 봐라. 동네가 좋아지면 우리 큰대문집 소문나서, (손을 펼치며 미소 지으며) 손님들이 문턱 닳게 찾아올 거다. 거기다 오 선생이 열심히 하고 있어

(김치통을 톡톡 치며) 그날 위해, 항상 준비돼 있어야지. 오이지처럼

(어머니가 오이지를 손질하며 마당 한쪽에서 옛 가족사진을 꺼내 닦고 있다. 사진 속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어린 시절의 혁진과 다른 가족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혁진과 며느리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을 건다.)


어머니: (한동안 말없이 사진을 닦는다. 조용히 사진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든다.)

혁진: 엄마, 요즘은 이렇게 음식을 한가득 하지 않아요. 다들 딱 자기 먹을 만큼만 해요.

어머니: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정이 없지. 큰대문집에서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기본이야. 그게 예의다. 우리 집 문화다.

혁진: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거 부담스러워해요. 그리고 동네 이름도 다 다르게 말하는 거 아세요?

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혁진: 사람들이 마장동이라고 잘 안 해요. 요즘 사람들은 우리 동네 이름을 ‘킹텐타운’이라 부르더라고요.

며느리: (웃으며) 아하~ 왕십리요?

어머니 : 마장이 아니고 왕십리라고? 말도 안 돼, 마장을 모를 리가 있어? 내가 이 동네에서 얼마나 살아왔는데...

혁진: 요즘은 아파트 이름도 다 바꿔요. ‘마장 아주’였던 게 이제 ‘왕십리 아주’라니까요.

어머니: (한숨을 쉬며) 이름만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나?

혁진 : 거기다 여긴… 팔지도 못해요. 대출을 받지도 못하고. 180명이 공유한 땅이라니 이게 무슨 내 땅이에요, 엄마. 이건 그냥 서로 묶인 거잖아요. 골치 아픈 공유지로!

어머니 : 그것도 곧 해결될 거다. (잠시 멈추며, 냉장고 문을 닫는 듯 손짓한다.) 엄마가 열심히 하고 있어. 반대로 생각해 봐라. 땅이 묶였으니, 지켜지는 거야. 자식들 이름으로 돼 있어도 아무도 함부로 못 팔지. 나는…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 그래서 이 집도 지켰다.

혁진: 엄마, 땅이 묶이면 삶도 묶이는 거예요.

어머니: 마음은 묶이지 않지. 나는 그 마음을 지킨 거야

어머니 : 니 엄마 성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아니?

혁진 : 글쎄…

어머니 : 난… 니 아버지한테만 기대지 않으려고 했어. 내 힘으로 벌어보니까, 목소리가 생기더라. 돈이 있으면 사람도 모이고… 친척들도, 신기하게 더 다가오더라. (며느리를 바라보며)그러니까 너도 남편한테만 기대지 말고, 네 힘으로 꼭 벌어. 그게… 여자의 숨통이야.

혁진 : 우리에게 나눌 돈이 어디 있어요? 윤석 엄마, 나 몰래 숨겨둔 것 있어?

며느리 : (웃으면서) 오이지요.

혁진 : (아주 귀엽게) 음식 말고

어머니: 난 말이다… 지금도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마장동 땅, 몇 천 평 다 되찾는 게 꿈이다. 그걸 위해 지금도 돈 모으고 있어. (잠시 며느리를 본다) 너는, 그걸 힘들다 하겠지.

며느리: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어머님이 늘 말씀하시는 ‘큰대문집 며느리’ 그 말이… 저한테는 너무 무겁습니다.

어머니: 아범아, 니 처가 오늘 왜 저러냐?

혁진:(급히 웃으며) 엄마,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오해예요, 오해.

며느리: 오해 아니에요. 오늘만큼은 제 속마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이런 이벤트, 이런 준비들 저한텐 너무 벅차요. 몸도 마음도… 다요. 저는 어머님 비위를 다 맞출 수 없어요.

(혁진 아내를 마당 반대쪽으로 이끌고 간다.)


혁진 : 오늘 당신 평소와 달리 왜 이렇게 세게 나와, 나 지금 몹시 긴장하고 있어

(혁진 방에서 가발을 들고 나올 때 윤석도 아빠를 따라 나온다. 마당 가운데에서 가수처럼 폼을 잡는다.)

혁진:(매우 느끼하게 연기한다) 내가 우리 가족만을 위한 콘서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티켓료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와 응원입니다. 큰대문집 콘서트! 첫 곡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혁진 두 손을 모으면서 무릎 끊는다.)

윤석 : 아빠!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 (방으로 피해 들어가며 혁진의 톤으로 흉내 내어 노래한다.)

이 노래는 소음이라네. 난 숙제나 해야겠네. 그래도 오이지는 참 맛있다네!

(혁진이 노래하는 동안 어머니와 며느리는 외면하며 딴청을 하다가 간간이 혁진 노래하는 모습을 눈으로 슬쩍 훔친다. 두 사람 반응 보고 혁진 씁쓸하게 오이지 씹는다.)

며느리 : 위로랍시고 그런 이상한 노래 부르지 마. 오늘은 할 말 좀 해야겠어. 그래야 속이 풀릴 것 같아. 제발, 아무 편도 들지 마! 부탁이야.

어머니 : 난 어멈이 늘 이뻐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생각하니?

며느리 : 친정이 바로 코 앞인데 맘 편히 다닌 적도 거의 없어요

어머니: 나도 안다. 근데 오늘 니 태도가 참 다르구나? 이 시어미한테 지금 따지는 게냐?

며느리 : 어머님, 저 이 전통 감당 못해요. 너무 벅차요.

(대문이 ‘삐그덕’ 열리며 설렁탕 할머니가 양은 쟁반에 설렁탕 세 그릇을 들고 큰대문집 마당으로 들어온다. 설렁탕 할머니 앞치마에 국물 자국이 묻어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설렁탕 향이 큰대문집 마당에 퍼진다. )


설렁탕할머니: (놀라며) 아휴, 이게 다 뭐유! 오늘은 또 뭘 벌리셨슈?

오이질 담그고 계시네?

어머니: (잠시 일손을 멈추고) 아범아 설렁탕 받아라! 오이지는 여기까지 하고 설렁탕이나 한 그릇씩 먹자꾸나. 다 먹고 고들빼기나 손질해야겠다. 어떠냐?

(혁진과 며느리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쩔 줄 몰라한다.)

설렁탕할머니: 큰대문집 오이지는 동네 명물이지!

어머니: (웃으며) 명물이라기보단, 그냥 내가 지키고 싶어서 하는 거지. 요즘 동네 분위기는 어떻수?

설렁탕할머니:(조심스럽게) 우리 식당 손님들이 재개발 얘기 많이 하더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어머니: (심드렁하게) 기대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지. 이 동네는 그냥 이대로 두는 게 제일 좋아.

설렁탕할머니: (고개를 갸웃하며) 근데, 이 동네가 몇 년 전만 해도 진짜 활기 넘쳤는데. 아, 마트 같은 거 없을 때 시장이나 여기 가게들 사람들이 좀 많았수? 요즘은 다 비고 돈 되는 축산가게만 들어오네. 아휴 냄새 나니 장사도 안돼. 너무 썰렁해요. 여긴 너무 많이 달라졌어. 아주머니도 느끼시지?

어머니: (한숨 쉬며) 나도 느껴. 그래도 이 집만큼은 지키고 싶어. 젊은 애들이 떠나고 조용해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설렁탕할머니: (진지하게) 전통도 지키면서 발전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개발 얘기 들었지? 오 선생이 서류 챙긴다던데

(잠깐 정적. 어머니가 젖은 손으로 오래된 가족사진을 닦다 멈춘다.)

어머니: 바람이 부네.

설렁탕할머니: 우리가 이 동네서 장사한 지도 몇십 년짼데… 근데 점점 더 낙후되는 것 같아? 설렁탕 먹으러 오면 동네 사람들 말하는 거 다 들리는데 다들 걱정하면서도 기대도 하더라고.

어머니: (조금 흔들리는 목소리로) 기대라… 그래도 이 집은 우리 가족 뿌리인데, 이게 사라지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설렁탕할머니 : 나도 여기서 나이 먹었는데, 새 건물 들어오면 손님은 늘겠지… 그래도 이 골목 향수가 사라질까 봐 무서워.

혁진: (설렁탕을 떠먹으며)와, 아주머니 설렁탕은 진짜 최고예요. 마장동 한우 써서 그런가? 국물하고 고기 맛이 아주 감칠 나요. 여전히 손님은 많으시죠?

설렁탕할머니 : 요즘 젊은이들 입맛에 맞추려고 육수는 그대로 두고 고명만 조금 바꿔봤어. 우리 아드님 입 맛에 맛나 보네.


(설렁탕할머니가 큰대문집을 나가려 하자, 며느리가 오이지가 든 통을 건넨다. 설렁탕할머니가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어머니가 급히 붙잡는다.)

어머니: 아주머니, 잠깐만! 그 개발 얘기, 어디서 들으셨수?

설렁탕할머니: (당황하며) 오 선생이 무슨 계약서를 들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혁진: (날카롭게) 계약서요?

설렁탕할머니: (머뭇거리며) 내가 잘못 들었나? 근데 이 동네 곧 바뀔 것 같던데? 이 동네는 내가 처음 차릴 때랑 동네가 똑같아요. 아, 이렇게 안 변하는 동네에 새로 바람 이 좀 불면 좋겠네.

어머니 : 난 그 바람 좀 꺼졌으면 좋겠네.

설렁탕 할머니: 맘은 아프겠지만 현실을 봐야 해요. 옛날처럼 정겹던 동네는 이제 없어.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남은 건 우리 같은 늙은이들 뿐이야. 재개발 안 하면 이 동네는 점점 더 쇠락할 거야.

어머니 : 재개발 말고는 없을까요?

설렁탕 할머니 : 나도 여기서 몇십 년 장사했지만, 요즘은 손님도 많이 줄었어. 재개발되면 가겟세도 오르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 많이 들어오면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오 선생한테 들었는데, 큰대문집 땅이 핵심이래. 아주머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설렁탕 할머니 혁진이 쪽으로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설렁탕 할머니 : 니 엄마처럼 고집 부리다간 다 떠날 거야. 니가 설득해 봐.

(설렁탕할머니 혁진에게 말하고 빠르게 나간다. 어머니는 김치통을 어루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 (김치통을 내려놓으며)

그래… 너희는 모를 거다. 냉장고 속에선 맛이 안 익더라. 사람 사이에서만 제대로 익는 거야

(침묵이 흐른다. 혁진과 며느리는 서로 눈치를 보며 조용히 김치통을 정리한다.)

혁진 : 그래서 전 엄마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어머니 : 그래, 너희가 내 마음을 알아줬다면 그걸로 됐다. 다만, 내가 없더라도 이 큰대문집의 정신만은 꼭 이어가 줬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가족을 둘러보고 미소를 지으며 김치통을 정리한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머니의 목소리 (내레이션):

오이지처럼, 이 집도 시간에 절여졌다. 짜고, 아리고—그래서 맛이 됐다. 그 맛이 우리를 잇는다. 말보다 오래 남는 마음, 그걸 사람들은 전통이라 부르더라.


냉장고 콤프레셔 소음이 점점 커지며,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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