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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큰대문집 오이지』
제3장 손님맞이, 오이지

by 플레이런너

무대 조명이 따뜻한 오후 빛을 띠며, 마당 전체를 비춘다. 마당 한가운데, 어머니가 오이지 통을 하나하나 닦으며 정리하고 있다. 뚜껑을 열어 살짝 눌러본다.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 스친다. 부엌 쪽에서 김치와 된장의 구수한 냄새가 풍긴다. 며느리는 음식을 준비하다 쟁반을 들고 마당으로 나온다.

혁진은 마당 가장자리에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지만 정작 하는 일은 없다.

(바쁜 척하지만 손끝은 맴돌 뿐이다.)


며느리: (혁진을 바라보며) 여보, 뭐 해요?"

혁진: (대충 둘러댄다) 그냥 좀 치우고 있었어.

(그의 손은 정리하는 것 없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돈다.)

어머니 : (오이지를 살펴보며) 이 마당에서 오이지 담글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땐 오이지 한 통이 마을 사람들의 인사였지. 요즘엔 그런 인사, 나눌 일이 있을까?

며느리: (궁금한 듯) 어머님, 예전에 담글 때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뭐세요?

어머니: (미소 지으며) 이 마당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늘 함께 오이지를 담그곤 했다.

며느리: (흥미롭게) 동네 사람들이요?

어머니: 그럼. 예전엔 돌아가면서 담갔어. 오늘은 큰대문 집, 내일은 옆집, 이렇게 돌면서 같이 했지. 오이지를 절이는 동안 수다도 떨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어놀고. 그러다 보면 하루 금방 갔지.

며느리: (웃으며) 그땐 어머님도 수다 많이 떠셨어요?

어머니: (장난스럽게) 동네 사정 들으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많이 나누었지. 근데 이 오이지 비법은 절대 안 알려줬다. 우리 집 오이지 맛있다고 뭘 넣냐고 물어도 그냥 ‘정성’이라고만 했지. 똑같이 담가도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지. 사람처럼


며느리: (장난스럽게) 그게 비법이 있는 거예요? 그럼 저한텐 알려주실 거죠?

어머니: (웃으며) 그럼, 넌 가족이지. 비법, 네가 이어가야 하지 않겠니?

며느리: (궁금한 표정으로) 전 그게 다 손맛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고추씬까요? 다음엔 제가 친구들 불러서 같이 담가봐야겠네요. 그 맛이 나는지..

어머니: (흐뭇한 미소) 그래, 그러면 이 마당도 다시 시끌벅적해지겠지. 근데 요즘은 그런 인사 나눌 일, 있긴 하니?

며느리: 윤석아빠가 일요일 날 산에 갈 때 꼭 오이지 챙겨가요. 선배 준다고 따로따로 싸가기도 하고요. 직접 만든 거 주면 더 감동이래요.

어머니: (놀란 듯) 그래? 네가 그걸 챙긴다고? 기특하구나. 어멈아.

며느리: 저도 어머님처럼 이 오이지로 누군가의 마음을 절이고 싶네요.

어머니: (웃으며) 삼촌처럼 오이지 좋아해서 찾아올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 그래도 기대해 보자꾸나.

며느리: (웃으며) 그 기대, 저도 살짝 얹을게요.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고) 맞아, 다들 바쁘지. 그래도 네 말대로 작은 음식 하나로도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 오이지도 아직 쓸모가 있겠구나.

며느리: (웃으며) 어머님, 오이지는 언제나 쓸모가 있죠. 최소한 저 한 텐요.

어머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참 고맙다

(무대는 살짝 어두워진다.)


어머니: (항아리 통을 닦으며) 어멈아, 음식은 준비 다 됐니?

며느리 : 수구레 무침하고, 물쑥나물 했어요. 봄 냄새나는 전통 메뉴죠.

어머니 : 시장 두 군데는 언제 다녀온 거냐? 수고했다.

며느리 : 경동시장도, 우시장도 가까워서 좋아요. 전 시집와서 이런 거 처음 먹어봤어요. 봄 되면 이제 물쑥나물을 저절로 찾게 되는데 점점 귀해지네요.

어머니 : 그래. 시장이 가까워서 좋구나. 수구레는 빨갛게 양념해서 숯불에 구워야 제맛이다. 이 집 식구들은 그걸 가장 좋아하지.

며느리: 숯불에 구울 때 다들 신나는 표정 보면 흐뭇하죠. 힘들긴 하지만. 그런데 오이지까지 하면, 하루가 모자라요.

어머니: 삼촌이 온다는데 그깟 힘 아끼면 못 쓰지. 삼촌은 오이지 없으면 밥도 못 먹는다.

혁진 : (빈정대며) 엄마, 삼촌도 직접 좀 담그라 하세요. 저만 고생이에요.

어머니: (웃으며) 혁진아, 너도 나이 들면 삼촌처럼 오이지 없이는 못 살게 될 거다.

(외삼촌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장한다. 피곤한 모습을 짓고 있다.)

외삼촌: (한숨을 쉬며) 누님, 오이지 가지러 왔어요. 이번엔 조금만 나눠주세요.

어머니: (놀라며) 조금? 그게 무슨 말이야? 오이지 없으면 네가 밥을 어떻게 먹니?

외삼촌: (웃으며) 그건 맞죠. 솔직히 누님 음식 맛은 정말 최고거든. 총각 때 여친 데리고 여기 자주 왔잖아요?

혁진: (흥미롭게) 여자친구랑요?

외삼촌: (웃으며) 그래, 이 오이지가 다리를 놔줬다니까. 그 당시 네 엄마가 짜장면을 시켜줬는데, 반찬으로 내온 이 오이지 맛을 내 여자친구가 정말 좋아했어.

어머니: (뿌듯하게) 그 여자친구가 바로 지금 외숙모이다. 내가 "이런 남자랑 결혼하면 잘 산다"라고 했던 거 기억나니?

외삼촌: (웃으며) 맞아요. 누님 덕분에 연애도 결혼도 성공했죠.


(큰대문집 부엌, 마당에도 따뜻한 색깔의 야외등이 켜져 있다. 부엌의 불빛으로 밤이 깊어감을 알 수 있다. 외삼촌이 조용히 항아리 통을 들여다본다. 바람이 문틈을 스치며 흔들린다.)

외삼촌: (손으로 오이지를 집어 올리며) 누님, 이 냄새 그대로네요. 어릴 적 그 짭조름하고, 한여름이면 노랗게 절여진 맛, (한입 베어 물고) 이 절임 맛이 어릴 적 그대로예요.

어머니: (작게 웃으며) 그걸 아는구나. 넌 늘 오이지 담글 때 옆에서 서성이더니. (잠시 멈춰 오이지를 바라보며) 저기 봐라. 벽에 금이 갔다. 세월이 가면 집도, 사람도 갈라지더라.

외삼촌: (오이지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근데 누님, 이거 그냥 오이지 아니잖아요. 누님 손에서, 이 집 부엌에서, 가족과 함께 만들어진 거잖아요. 이 집도 그렇죠. 여기서 지켜온 우리의 발자취가 그냥 벽돌 몇 장으로 사라질 수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어머니: (창밖을 바라보며, 손에 오이지를 쥐고) 바람이 거세게 부네... 이 집엔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나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게 무너지면, 우리도 무너지는 거지.

외삼촌 : 누님, 이 집은 벽돌이 아니라 우리의 숨결로 세워진 집이에요.


어머니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 온기를 잃지 않게 해야지.

외삼촌: (단단하게) 방법이야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누님이 뭘 지키고 싶은가예요. 집이란 게, 그냥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세월 그 자체라면... 재개발이든 뭐든, 그 시간을 어떻게 지킬지가 문제죠.

어머니: (잠시 항아리 통을 만지작거리며) 재개발도 오이지처럼, 새로운 맛을 낼 수 있을까?

외삼촌: (미소 지으며) 누님의 오이지 사랑이라면, 그 맛도 대단할 거예요. 누님 스타일로 재개발해보시면 어떨까요?

어머니: 너 어릴 때 오이지 처음 담갔던 날 생각나냐? 난 네가 금방 질릴 줄 알았어. 근데 끝까지 남아서 그 작은 오이지 하나하나를 다 챙겼지.

외삼촌: (웃으며) 누님이 그때 그랬잖아요. '제대로 하려면 정성을 들여야 한다'라고.

어머니: (끄덕이며) 맞아. 이 집도 마찬가지야. 재개발? 중요하긴 한데... (잠시 멈춰 외삼촌을 바라본다.)

그보다 먼저, 우리가 지켜온 이 흔적들,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

외삼촌: (고개를 저으며) 그게 핵심이죠, 누님.

어머니: (결연한 목소리로) 그래, 이 집에서 이어온 삶... 그걸 포기할 순 없어. 방법을 찾아야겠어.

외삼촌: (미소 지으며) 그래야죠. 오이지 담그듯, 천천히... 하지만 마음을 다해서.


'퍽'

(뚜껑 닫는 소리, 어머니는 조용히 항아리 통의 뚜껑을 닫는다.)

어머니 : 오이지 맛 좀 봐라?

외삼촌: (오이지를 씹으면서) 서울 최고 요릿집에 내놔도 통하겠어요. 공유지 분할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오 선생님이 잘 챙기고 계시죠?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며) 응, 모든 것을 오 선생에게 다 맡겼다. 분할에 필요한 서류랑 인감도. 그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맞지 않겠니? 오 선생이 오늘 서류 들고 온다고 했어

외삼촌: 인감까지요?

어머니: 그래. 근데 서류보다 마음이 더 복잡하다.

외삼촌: (이전과 달리 진지한 태도로) 분할이 되면 재개발 과정에서 이 큰대문집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어요. 상황이 완전히 뒤집힐 수도 있고요. 이제 애들도 다 컸으니까, 꼭 상의해서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어머니: 달라질 게 뭐 있냐? 뭐가 달라진다는 거야? 나는 평생 이 큰대문집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우리 위치가 바뀐다니?

혁진 : 엄마, 오이지만 잘 챙기면 우리 집 맛은 어디서든 낼 수 있어요.


(외삼촌이 항아리 통을 들어 피곤한 듯 바라본다. 어머니는 삼촌과 재개발 대화에서 어느새 열정적으로 오이지 이야기로 다시 대화를 옮겨가며 전개하고 있다.)

외삼촌: (힘겹게) 오이지는 좋은데… 진짜 가볍게 담글 방법이 없을까요?

어머니: (웃으며) 그건 안 돼! 오이지는 돌로 눌러야 제대로 익는다. 그게 전통이야.

혁진: (장난스럽게) 삼촌, 오이지 통 수거해 가시는 건 어때요? 새 동네로 이사 가면 저 혼자 옮기기 귀찮을 거 같아서요.

외삼촌: (웃으며) 이사? 그럼 짜장면 내가 쏜다. 오이지랑 같이 먹자꾸나.

혁진 : 근데 이 마당 없어지면 좀 허전할 거 같아요

어머니: (뿌듯하게) 그게 바로 우리 집의 맛이다. (웃으며) 어멈이 수구레 볶음과 물쑥나물 준비했다. 아범아, 어서 들어가자. 좀 있으면 오 선생님도 올 거다. 아까 나한테 한 이야기, 오 선생에게도 해보자꾸나.

외삼촌: 누나, 나 촬영 있어서 바로 가야 해요. 아무 걱정 마시고 애들을 믿으세요. 다른 누이들에겐 내가

왔다고 말하지 마요. (나가며) 누님, 이 집은 벽돌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온 흔적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걸 잊지 마세요.

외삼촌은 나서며 어머니를 안는다. 말은 없지만, 오래된 온기가 서로를 감싼다

어머니: (웃으며) 그래, 오이지 떨어지기 전에 꼭 와라.


(자동차 소리가 시끄럽다. 큰대문집 앞에서 ‘끼익’ 하고 정지하는 듯하다. 잠시 후 오 선생이 마당에 뛰어 들어온다. 나가려던 외삼촌 오 선생 쳐다보며 멈춘다.)

오 선생: 사모님, 공유지 분할 서류는 잘 준비되고 있습니다만… 재개발 계획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될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추진위원회 회의가 있으니 준비하셔야겠어요.

어머니: (당황하며) 그렇게 빨리? 그럼 이 집은…?

(오 선생 급히 떠난다. 외삼촌도 따라 나간다. 모든 식구들이 바쁘게 따라 나가고, 큰대문집 마당이 텅 빈다. 잠시 후 어머니만 마당에 들어온다. 어머니가 항아리 통을 닦으며 말한다.)


어머니: 이 오이지에 담긴 건 기다림이란다. 한 철 잘 눌러야 마음이 익지. 우리도 그렇게 이어질 거다.

(오이지 냄새가 천천히 객석으로 번지고, 조명이 함께 서서히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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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