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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큰대문집 오이지』 제4장 큰대문집과 어머니,

제5장 가족의 오이지

by 플레이런너

제4장 큰대문집과 어머니

무대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며, 늦은 오후의 봄 햇살이 마당을 비춘다. 어머니는 마당 한가운데 앉아, 오이지 항아리 옆의 돌을 하나씩 천천히 닦고 있다. 축축한 헝겊이 돌 위를 스칠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난다. 햇살에 반사된 물기가 반짝인다. 혁진은 옆에서 쭈그려 앉아 빈 항아리를 옮기며 먼지를 털고, 며느리는 삐걱거리는 뚜껑을 맞춰보며 자리를 정돈한다. 셋 다 말이 없다.
마당에는 정리되지 않은 돌과 오이지 통이 흩어져 있고, 공기가 어딘가 무겁다. 어머니는 손을 멈추고 멀리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그때, 대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들린다. 차분하면서도 무겁게, 규칙적인 걸음소리.

대문이 덜컥 열리며, 오 선생이 등장한다.

그는 노란 비닐 서류 봉투와 검은색 노트를 들고 있다.


오 선생: (정중하게) 안녕하세요?

(어머니는 그를 바라보며,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오이지 돌을 살짝 움켜쥔다.)

어머니: (문 앞으로 다가가며) 아이고, 오 선생님! 어서 오세요. 보내드린 갈비랑 오이지는 입에 맞으셨어요?

오 선생: 오이지는... 정말 감동이었어요.

어머니: 맛있게 드셨다니 제가 더 고맙죠. 근데 공유지 분할은 잘 되고 있나요?

오 선생 :(허리를 숙이며) 이번 일 절대 헛수고 안 되게 할 겁니다. 이 동네의 뿌리 같은 분들이잖아요. 사모님 같은 분들, 그런 분들이 자존심 지킬 수 있게 제가 꼭 만들어야죠.

어머니 :(살짝 마음을 열며) 고마워요, 오 선생. 저 평생 여길 지키며 살았어요. 쉽게 놓을 수는 없지요.

오 선생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제가 더 신경 쓰는 겁니다. 사모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이 동네가 버틴 거잖아요. 해낼 겁니다. 큰 대문집이... 이 동네 희망이 될 수 있게.
어머니 : 아이구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오 선생: (노란 서류 봉투 꺼내며) 다 됐습니다. 마지막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어머니: (미소 지으며) 드디어 끝나는 건가요?

오 선생 : (고개를 끄덕이며) 네, 이제 막바지입니다. 이 동네가 곧 확 바뀔 겁니다.

혁진: (호기심 가득) 선생님, 바뀐다는 게 구체적으로 뭐예요?

오 선생: 그동안은 180명 지분이 다 묶여있어서 아무것도 못했잖아. 근데 이번에 나눠 놓으면 팔 수도 있고, 담보도 돼, 그럼 돈이 도는 거지.

혁진: 귀에 쏙 들어오네요. 역시 전문가 셔.

오 선생: 이제 다 왔어요. 여기, 아파트 들어서면 완전 달라질 겁니다. 사모님 상상해 보세요. 낙후된 이 동네가 진짜 천지개벽하는 거죠

어머니 : 근데 왜 사람들은 땅만 생기면 꼭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죠?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오 선생 : 서울은 다닥다닥 붙어살잖아요. 결국 아파트가 제일 좋은 거예요. 땅 가진 사람도 좋고, 짓는 쪽도 남고, 사는 사람은 새집 들어가서 좋고요. 요즘은 말이죠, 아파트만 올리면 바로 팔려요. 무서울 정도로.

어머니 : 난 아파트에는 관심 없어요. 분할만 잘 되면 돼요.

오 선생 : 그래도 땅값 오르면 나쁠 게 뭐 있나요? 이거 나누면요, 값이 바로 뛰어요. 요즘 재개발 얘기만 돌아도 땅이 들썩인다니까요. 인허가 나오면? 그땐 그냥 하늘로 치솟아요. 세월이 돈이에요, 사모님. 조금만 버티면… 이 동네 진짜 뒤집힙니다.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며) 땅값이 그렇게나 많이 올라요? 오 선생님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오 선생: 그런데 지금까지 동의를 안 해준 박 씨가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그와의 합의 때문에 사장님의 인감증명서가 필요합니다. 도장은 제가 챙겨놨잖아요. 지금은 인감증명서만 있으면 됩니다. 그거 하나만 있으면 오늘 안에 정리됩니다

어머니: 알겠어요. 같이 가요.


(어머니와 오 선생이 나간다. 혁진, 며느리에게 다가간다.)

혁진: 이번엔 잘 됐으면 좋겠어...

며느리: 공유지 문제, 오래된 숙제잖아요. 다 같이 힘 모으면 잘 풀릴 거예요.

(잠시 후, 어머니가 돌아온다.)

어머니: 오 선생 덕분에 일이 술술 풀리네.

혁진 : (조심스럽게, 어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우리 그냥 조금만 생각해 봐요. 이 동네, 요즘 어떤지… 다 아시잖아요. 빈집 늘어나고, 상점들도 문 닫고, 예전 같지 않잖아요.

어머니 (단호하게) 잠깐 어려운 거다. 다 지나간다.

혁진 : (살짝 애써 웃으며)근데… 그 잠깐이, 너무 길어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요. 우리만 남아서 뭐 하겠어요… 이제 정말 한계예요. 어머니, 지금까지 공유지 분할에 돈은 얼마나 들어갔어요?

어머니: 한 오억쯤? 그래도 이거 잘 되면 우리 동네가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거야. 중심엔 우리 큰대문집이 있고

혁진: (화가 나지만 나름 진정시키면서) 큰대문집, 큰대문집 하시는데, 우리한테 이 한옥이 중요하긴 한 건가요? 힘든 거 모르세요?

(어머니와 혁진의 대사에서 어머니는 시종 차분하다.)

어머니: (차분하게) 엄청 중요하지, 이 마당이 있었으니까 너희가 살아온 거야. 여기서 자라면서 자부심도 가지고.

혁진 : 요즘은 그런 문화 안 좋아해요.

어머니: (웃으면서) 사람 사는 건 결국 사람끼리잖니. 우리 같은 단독주택은 옆집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지내는 거야. 아파트 가면 행복할까? 여기엔 우리가 쌓아온 시간이 담겨 있어. 그걸 버리면, 윤석이한테 뭐가 남을까?

며느리: (조심스럽게) 어머니, 저도 마당에서 오이지 담그면서 정 많이 들었어요. 근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윤석이 학원이라도 제대로 보내려면 이 동네 떠나야 해요. 여기선 애들 키우기 너무 힘들어요. 저도…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어요

혁진: (화난 목소리로) 언제까지 이 한옥에만 얽매여 살아야 하냐고요!

어머니: (타이르는 태도로) 벗어나고 싶다니? 그럼 네 할아버지, 아버지와 내가 우리 터를 지키려고 했던 건 헛수고였다는 거냐?

윤석: (조용히 끼어들며) 할머니...나도 알아요. 이 집이 우리 가족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근데 요즘은...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잖아요. 그냥 지키는 것보다,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그런 걸… 이제 진짜 생각해 봐야 될 때인 것 같아요.

어머니 : 오늘이 무슨 날이니? 날 잡았어? 아빠, 엄마, 거기다 아들까지 한 마디씩 다 하네

혁진: (신중한 목소리로) 솔직히, 이대로 버티는 거… 불가능해요. 요즘 동네 돌아다녀보세요. 1층은 고기 냄새에, 2층 3층은 미싱 소리 쩌렁쩌렁하고… 밤에도 불 꺼질 날이 없어요. 젊은 엄마들은 애들 숨 쉬기 힘들다고 전부 나가고 있어요. 이렇게 계속 버티면, 우리만 남아요. 진짜로.

어머니: (미간을 찌푸리며)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거다.

혁진: (단호하게) 아니에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요. 사람들은 이미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고 있어요. 그리고 여긴 점점 더 낙후되고 있어요. 지금 이대로 두면, 이 동네는 끝날 거예요.

어머니: (잠시 침묵하며) 그렇다고, 우리 살던 터전을 없애라는 거냐? 이 터가 사라지면 내가 뭘 붙잡고 살아야 하니?

혁진: (숨 고르며) 어머니, 이 터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절이 바뀌는 거예요. 겨울 지나면 새순이 나듯이, 우리 삶도 모양만 달라질 뿐이에요. 이제 그 변화를… 우리 손으로 시작할 때예요

어머니 : 내가 사십 년 이상 지켜왔다. 쉽게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며느리 : 그럼 어머님, 앞으로 몇 십 년 더 이렇게 사실 수 있다고 자신하실 수 있나요?

혁진 : 이건 그냥 경제적 선택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에요.

어머니: (한숨을 쉬며, 오이지 통을 바라본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 그게 맞는 말일까?

혁진: (부드럽게) 나도 이곳이 좋아요. 하지만 세월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겠죠. 아파트가 들어서면 마당은 사라지고, 이런 손맛 나는 음식도 점점 안 먹게 되겠죠. 이제는 우리도 그 흐름을 받아들여야 할 때예요.

어머니 :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혁진: (착잡한 표정으로) 옆 동네 재개발 구역에 화재가 났어요. 낡은 건물에서 불이 나서 사람들이 다 뛰쳐나오고 난리라고 하네요…

어머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고, 큰일 날 뻔했네. 다친 사람은 없고?

혁진: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요. 근데… 그 소식을 들으니, 왠지 우리 한옥도 저렇게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머니: (정적. 어머니의 손에서 오이지 돌이 떨어진다. 딱— 소리.)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우리 한옥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아.

혁진 : (조심스럽게) 저도 우리 터가 무너지길 바라는 거 아니에요. 그냥 두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마을의 변화가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어머니: (고개를 저으며) 다 새로 짓는 세상이라지만, 우리 한옥은 그럼 어디로 가야 하니?

아파트 올린다고 다 밀어버리면, 우리는 어디 가서 살아야 하니?

(어머니는 혁진과 며느리 눈치를 살핀다.)

혁진: (조심스럽게) 솔직히 말해서, 요즘 낡은 한옥에서 사는 거 많이 힘드시잖아. 천장에서 물도 새고,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하수도까지 자꾸 막히고... 이 한옥도 오래돼서 여기저기 낡아가고 있어요.


(어머니는 말없이 식탁 위에 놓인 컵을 바라본다. 손으로 조용히 컵을 감싸 쥐었다가, 이내 힘없이 손을 놓는다.)

어머니: (작은 목소리로) 난 그래도 괜찮아. 다들 참… 변한 세상에 맞춰 사는 법만 말하는구나.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근데… 난 잘 모르겠다. 그렇게 바꾸는 게, 맞는 건지.

혁진 : 대문부터 보세요. 어머니, 저 대문 소리 좀 들어봐요. 열 때마다 ‘끼익—’ 하고 비명 지르잖아요. 제발… 예도 이제 숨 좀 쉬게 해 줘요.

며느리: (조심스러우나 단호하게) 어머님, 요즘 부동산에서 전화가 자주 와요. 재개발된다고 발길이 끊이질 않대요. 우리 쪽도 눈독 들이는 사람이 있다던데... 어머님, 이 기회 그냥 두실 거예요?

어머니 : 부동산이 그냥 하는 소리지...싸게 먹으려고

혁진 : 길 건너 시장 쪽을 보세요. 얼마나 변하고 있어요.

어머니 : 내 생각엔, 돈 문제로 서로 갈등이 생길 게 분명할 거야.

혁진 : 그 정도 갈등은 무시해야죠

어머니 : 사람관계에서 돈만큼 예민한 건 없다.

혁진: (큰 소리로, 그러나 울컥하며) 오이지 담글 때 그러셨잖아요. 소금 비율 조금만 틀려도 무르고 맛 다 버린다고.. 지금 하는 사업도 그래요 사람들 마음 놓치면 다 헛 거 돼요. 사람들 마음 맞추는 게 그 소금이에요. 그게 빠지면 아무리 좋은 재료도 다 상해요.

어머니: (단호하게) 미래? 평생을 함께해 온 이웃 어른들까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어!
혁진: (분노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 그게 뭐가 중요해요? 어르신들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 땅에 집중하자고요!

어머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기 건물에서 세 나오는 어르신들한테는, 지금 사는 데가 최고인 거야.

혁진: (점점 더 화가 나며) 동네 사람들 다 떠나고, 빈집만 늘어나는데, 옛날 생각 붙잡고 버틴다고 뭐가 달라져요? 귀가 멍멍해요. 냄새도 역하고… 밤엔 고기 비린내까지 올라와요. 숨이 막힌다니까요.

어머니: (단호하게) 과장이 너무 심한데! 지금껏 밥 해 먹고도 잘 살았잖아! 낡은 한옥 고쳐서 살면 될 것을, 왜 굳이 재개발에 목을 매는 거냐! 이 터에는 우리 가족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데, 그걸 돈 몇 푼에 팔아넘기겠다는 거냐!

(혁진은 한참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결국 폭발하듯 소리친다.)

혁진 : 어머니는 대체 뭘 지키고 싶은 거예요?! 이 집이에요? 아니면 가족이에요?!
(혁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친다.)

어머니 : (혁진을 놀라서 쳐다본다) 혁-진-아!

혁진 : 우린 지금 무너지고 있다고요. 그런데 어머니는 아직도 집! 집! 집! 이 집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러면 어머니 혼자 남아서 지키세요! 난 더 이상 어머니의 고집 때문에 내 가족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요!

(혁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차갑게 덧붙인다.)

어머니 : 네가 어릴 때부터 이 마당에서 뛰어놀았어. 우리 터가 있었기에 우리가 버틸 수 있었고, 네가 이렇게 자란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버리고 가라고? 난 그렇게 못 해. 이 골목에서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혁진 : (신경질적으로) 내 마음도 엄마와 정말 똑같아!

어머니: 여기 사람들은 다 내 식구나 마찬가지야. 시장에서 얼굴 보고, 마당에서 밥 같이 나눠 먹던 사람들이잖니. 내가 이 자릴 떠나면… 나도 그냥 없어지는 거야. 이 동네는 내 품이었고, 내 쉼터였고...평생 기대고 살아온 곳이야.

혁진 : 시선을 이젠 우리 내부로 돌려야 할 때에요.

어머니: 아범이야말로 내 자부심이었는데...오늘은 그 자부심이 나를 무너뜨리는구나

혁진 : 어머니는 아들에게 오이지만 남길 게예요? 나는… 가족이 먼저라고 믿었는데, 어머니한텐 아닌가 보네요.

어머니 : 아범도 돈 때문에 그러니? 그런 거니?

혁진: (신경질적으로) 제발 현실을 보세요! 엄마와는 말이 전혀 안 통해. (대문을 확 열고 나간다)

어머니: (혁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범은 내게 남편이자, 아들이자 친구였는데...어쩌면 야속하게도 내 맘을 몰라주는구나.

혁진:(다시 들어온다) 어머니, 속이 너무 답답해요. 그냥… 한 잔이라도 마셔야 숨 좀 쉴 것 같아요.

어머니 : 술 먹으면 해결되니?

혁진 : 진짜...버티기가 힘들어요.

며느리: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어머님,

어머니 : (며느리를 바라보고) 그래

(며느리는 테이블 위에 낡은 가족사진 한 장을 꺼내 놓는다.)

며느리: 이 사진… 아버님 건강하실 때 찍은 거죠. 그때 어머님 표정, 진짜 환했어요. 지금도 이렇게만 웃으시면 좋을 텐데.

(어머니는 사진을 보고, 손끝으로 프레임을 쓸어본다. 말이 없다.)

며느리: 저도 알아요. 이 집, 이 마당...손때 하나하나가 다 어머님 세월이잖아요. 이것들이 다 사라질까 두려우시죠?
(어머니가 움찔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며느리는 한 걸음 다가서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며느리: 근데 아버님이 이렇게 버티는 걸 원하셨을까 싶어요.

혁진: (자신 있게 말하는 아내를 놀라며 쳐다본다.)

며느리: (조용히) 이렇게 힘들게 사시는 걸 절대 원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이젠 좀 내려놓으셔도 돼요. 저희가 있잖아요. 어머님이 그동안 지켜온 거, 우리가 이어갈게요.

(어머니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오이지를 다독이며 작게 중얼거린다.)

어머니 : 일을 내가… 계속 잘할 수 있을까?

며느리: (미소를 지으며) 어머닌 평생 잘해오셨어요. 이제 우리 차례예요.

(어머니는 차곡차곡 오이지를 항아리에 담고, 혁진은 생각에 잠긴 듯 주방을 바라본다.)

혁진: 말 나온 김에 등기소 가서 등기나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어머니 : 확인해 볼 필요 없다. 그 양반이 얼마나 일 처리를 잘했을까? 신경 안 써도 된다.

(혁진 급하게 나간다. 어머니 오이지 돌을 애완견 만지듯이 소중하게 닦고 있다.)

어머니: (땀을 닦으며) 아휴, 이 돌들... 어멈아, 빨리 와서 손 좀 봐라. 이거 오늘 다 닦아서 쌓아야지.

며느리: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 이 돌들 다 언제 닦아요? 매번 이렇게 쌓아놓기만 하고.

어머니: (단호하게) 오이지는 이런 돌 없으면 제대로 못 담근다. 우리 오이지가 왜 그렇게 맛있겠니? 정성 덕분이지.


(이때 윤석 방에서 나온다.)

윤석: 할머니, 저는 여기서 사는 게 좋아요. 친구들도 다 여기 있고… 천장에 핀 곰팡이도, 방 안을 누비는 바퀴벌레도, 마당에서 뛰어노는 쥐랑 고양이 야옹거리는 소리도 이젠 익숙해서 다 친구 같아요. 근데 우리가 아파트에 산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설레기도 해요.

(어머니 윤석 말에 빤히 쳐다보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이때 혁진 숨차게 뛰어 들어온다.)

혁진: (마당에서 서류 들고뛰어 들어와 바닥에 던짐) 엄마, 오이지고 뭐고 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어머니: (의아한 표정으로) 뭐가 또 문제냐?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혁진: (날카롭게) 이거 우리 등기예요. 정임순이라는 사람 아세요?

어머니 : 그게 누구냐?

혁진 : 아버지 지분이 이 사람에게 넘어갔어요.

어머니: (놀라며) 우리 땅이 넘어가?

며느리: (경악하며) 어-머-니

어머니: (혼란스러워하며) 오 선생이 믿으라고 해서...

혁진: (격앙된 목소리로) 그걸 믿으셨다고요? 이게 다 우리 땅이라고요! (서류를 흔들며) 이거 뭐예요? 등기가 넘어갔어요. 어머니가 직접 사인했어요? (울먹이며) 우리 땅이 팔렸어요!

어머니: (놀라며) 그 자가 우리 땅 분할 마무리하려면 필요하다 길래 해준 거지.

혁진: (격앙된 목소리로) 이건 분할이 아니에요! 이건 매매 계약이라고요. 땅이 팔렸다고요!

어머니: (잠시 멍해 있다가) 팔리다니?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혁진: (등기를 보여주며) 우리 지분이 정임순이라는 사람에게 넘어갔어요!

(순간, 어머니와 며느리는 얼어붙는다. 침묵이 흐른다.)

어머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설마... 오 선생이?

며느리: 뭐라고요? 무슨 말이에요?

(어머니가 급히 서류를 확인한다. 며느리는 놀라며 혁진과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본다.)

어머니 : 난 봐도 전부 한자라 모르겠다. 어쩌니?

혁진: 오 선생을 뭘 믿고 도장을 찍으신 거예요? (격렬하게) 어머니가 평생 지켜온 우리 터가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고요! (비난하며) 이게 문제라니까요. 아무것도 모른 채 중요한 결정을 남한테 맡겨버리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결정적인 순간엔 가족과 상의라도 했어야죠!

어머니: 넌 그걸 왜 나한테 따지듯 묻니! 오 선생이 찍으라고 해서 찍은 거지.

(혁진과 어머니의 대립이 극에 달한다. 며느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혁진: (격렬히) 어머니가 지켰다는 우리 땅이 남의 땅이 됐다니까요! 어머니가 그렇게 아끼던 역사, 전통, 문화 다 물거품이 됐다고요! (서류를 바닥에 던지며) 끝났어요!


어머니: (담담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네가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니? 내가 여기 붙어서 얼마나 버텼는지, 너도 알잖아. 다 가족 잘 되라고 한 일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잘못이라니?

며느리: (눈물을 글썽이며) 제발 그만하세요!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니잖아요.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죠.

혁진: (억지로 태연한 척하면서) 지난번에 오 선생이랑 동사무소에 가셨잖아요. 그때 매매용으로 인감을 발급하셨죠?

어머니: 난 내용은 몰랐어. 그냥 신분증 주고 기다리라고 해서 의자에 앉아 있었지.

혁진: 그거다! 빨리 전화해 봐요.

(어머니가 전화기를 들어 오 선생에게 전화한다. 무대가 분할되어 오 선생과 어머니의 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어머니 뒤에 혁진과 며느리가 있다)

어머니: (격분하며) 오 선생! 이게 무슨 일이에요? 우리 땅이 팔렸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오 선생: (침착하게) 사모님, 저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분노하며)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요? 저한테 상의도 없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다니,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오 선생: (한숨을 쉬며) 사모님, 저도 이 일 맡은 지 벌써 삼 년이에요. 그동안 벽도 많았죠. 주민들은 서로 의견 안 맞고, 서류는 꼬이고, 도와줘야 할 사람들은 다 손 놓고 있고...솔직히, 이렇게 가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어머니: (격앙된 목소리로) 그래서 우리 땅을 팔았다는 말입니까?

오 선생: 사모님께서 주신 돈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습니다. 분할을 진행하려면 초기 자금이 많이 필요했어요.

어머니 : 그래서 내가 필요할 때마다 드려잖아요?

오 선생 : 사모님께서 찔끔찔끔 나눠서 주신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유지의 일부를 먼저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고, 이후 주민들로부터 조성된 돈으로 정산하려 했습니다.

어머니: (분노하며) 몇 천만 원이 잔돈이에요? 몇 천이 세 번 모이면 억이예요! 그 돈이 몇 번이나 갔는지 아세요?

오 선생: 사모님, 그렇게 푼돈을 찔끔찔끔 받아서는 안 됩니다. 목돈이 들어가야 해결돼요.

어머니: (단호하게) 그럼 그 돈은 다 어디에 썼습니까?

오 선생: (강조하며) 난 철저히 일을 위해 썼어요. 모두 측량과 등기 정리에 사용됐습니다.

어머니: 그렇다 해도, 제게 말은 했어야죠! 제가 알았다면, 어떻게든 마련했을 겁니다!.

오 선생: 솔직히, 저도 사모님께 숨기고 싶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빠른 결정이 필요했어요. 처음엔 저도 일이 빨리 끝날 거라 믿었어요. 주민들을 설득하면 다들 조금씩 힘을 보태 줄 거라고요. 하지만 현실은 제 기대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어머니 : 어떻게요?

오선생 : 다들 돈 없다, 바쁘다, 나중에 하자… 그 소리만 했어요. 결국 아무도 안 움직이더라고요. 시간만 자꾸 흘러가고, 상황은 더 꼬이고...나라도 밀어붙이지 않으면 영영 못 끝낼 것 같았어요. 근데…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죠.

어머니: (비꼬듯이) 일은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말은 그럴듯하네요

오 선생: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게 다 땅주인들 위해서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로) 그 두꺼운 서류 더미, 내 이름 한 줄 찾기도 힘든 거 알면서...그걸 틈타서 우리 걸 넘겼다는 거야? 그럼 우린 이제 어디에 가서 다시 뿌리를 내리니…

오 선생: (담담하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새 주인도 이해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저 이곳이, 더는 아주머님 것이 아니라는 점만... 받아들여 주시면 됩니다.

어머니: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 땅을 이렇게 훔쳐 가는군요. 사기라고요, 사기!

오 선생: (반박하며) 사기라니요? 뭔 섭섭한 말씀을…

어머니: (절규하듯)그래서 큰대문 집이 사라진다고? 지금까지 지켜 온 이 한옥이… 이렇게 순식간에 넘어가는 건가

(어머니 오이지 통을 움켜쥐고 흔든다, 무릎을 꿇고 땅을 친다. 어머니 대사의 감정폭이 매우 요동친다.)

오 선생: 저는 단지 사모님의 부동산을 융통한 것뿐입니다.

어머니: (어이없어하며, 대사를 끊어 읽는다) 내 걸, 내 허락도 없이 건드려? 시아버지 손길 남은 건데… 이걸 이렇게 날려? 내가… 이다음에 무슨 낯으로 살라고!

오 선생 : 강하신 분이시니까 이겨내고 잘 사실 거예요. 삼 년 동안 수고한 대가는 나도 있어야죠

어머니: (눈물로 호소하며) 당신은 저에게 꿈을 심어줬어요. 이 터를 지키고, 가족을 위한 기회를 만들겠다고 했던 그 약속은 요? 그 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꿈 때문에 내가 여태껏 살아왔어요.

오 선생: (잠시 침묵 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저도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어머니 : 어떤 문제요?

오 선생 : 사모님뿐만 아니라, 이 동네 주민들 모두 기대와 불안을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한쪽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어머니: (냉소적으로) 그래서 그 희생이 저였던 겁니까?

오 선생: (기름끼 있는 말투로) 사모님, 제 사정이 여러 가지로 긴급했습니다. 사모님 생각보다 돈 나갈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고요. 거기다 딸의 결혼까지 겹쳐 자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사모님과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주는 겁니다.

어머니: (비웃으며) 되돌릴 수 없다? 최소한의 피해? 지금 그게 변명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선생님 말을 그대로 믿고 맡겼더니, 저를 이렇게 우습게 보셨군요.

오 선생 : 제가 사모님을 우습게 보다니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 : 고소? 소송? 그게 필요할까요? 선생님이 여기서 사과하고 원상 복구할 방법을 당장 제시하지 않으면, 저는 이 자리에서 바로 행동에 나설 겁니다. (어머니 통화하면서 각종 서류를 찾는 듯 분주하다) 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주 큰 착각입니다.

오 선생: (놀라며) 사모님, 진정하시고… 저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어머니: (싸늘하게)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 그 시간 동안 또 무슨 짓을 하실 생각이신지 궁금하네요. 꼭 기억하세요. 이건 오 선생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제 마지막 기회를 날리면, 어떻게 될지 직접 보시게 될 겁니다.

오 선생: (조금 전과는 반대되는 어투로) 제가 분할의 기초 작업은 다 끝냈습니다. 하지만 사모님이 저를 이렇게 몰아붙여서 얻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분할을 제대로 마무리할 열쇠는 아직 제 손에 있습니다.


(오 선생이 전화를 툭 끊는다. 어머니는 깊이 한숨을 쉬며 오이지 통을 바라본다. 충격에 빠져 마당에 주저앉는다. 조명이 어머니를 집중적으로 비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다. 어머니는 오이지 통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머니 마당 구석구석을 바라본다. 아주 아주 천천히 돌면서 물건들을 매만진다. 조명이 점차 어두워진다. 무대 위에는 오이지 통과 어머니만이 남아 있다. 어머니가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어머니의 눈물이 흐른다. 한 줄기 조명이 어머니만 비춘다.)

어머니: (사진 앨범에서 4층 건물을 지었던 사진을 보면서) 막내 혁진이 품고 있을 때였지… 돈이 모자라서 업자한테까지 속았는데도 끝내 올렸어. 근데 그게 뭐였을까…

(어머니가 인생이란 노래를 반주 없이 절규하듯 부른다. 조명은 어머니를 집중적으로 비춘다.)

어머니: (노래하며)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생이란 알 수가 없네 험한 길도 가게 되더라 좋은 길은 보이질 않고 비가 올 땐 비를 맞고 눈이 올 땐 눈도 맞았네 살아 갈수록 눈물이 살아 갈수록 외로움이 웃어도 가슴이 아프다 검은 머리만 하얘지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연한데 왜 눈물이 날까 세상을 보며 느낀 게 많아 지친 세상에 사람들 보며 욕심을 버린 후 알았네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어머니가 오이를 손에 들고 잠시 바라본다. 오래된 기억을 씹듯, 천천히 한입 베어문다.) 부엌 틈에서 이를 지켜보던 혁진과 며느리, 윤석이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본다. 며느리와 윤석 눈물 흘린다. 조명이 서서히 내린다.)

제5장 가족의 오이지

무대 조명이 천천히 밝아진다. 가을 저녁, 붉은 노을이 마당을 감싼다. 큰대문집 마당. 커다란 느티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마당 한가운데, 빈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고, 작은 오이지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마당 한쪽에는 어머니가 생전에 사용하던 김치냉장고와 오이지를 담그던 도구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었지만, 손길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다. 며느리는 조심스럽게 오이를 집어 들고, 칼끝으로 껍질을 살짝 긁어낸다. 소리가 선명하다.
혁진은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이 한 개를 손에 쥔다. 윤석은 마당 바닥에 주저앉아 오이를 하나씩 정리하며 손끝으로 만지작거린다.

(잠시 정적. 저녁 바람이 살짝 불어온다.)

윤석:(작은 목소리로) 내가… 할머니처럼 잘할 수 있을까?

며느리 : 그럼 잘하고 말고!

윤석: (오이를 만지며) 아빠, 할머니가 오이지 담글 때 꼭 물기를 완전히 빼야 맛이 산다고 하셨잖아. 이렇게 하는 거 맞지?

혁진: (윤석의 손을 보며) 맞아. 그게 할머니가 늘 중요하다고 하셨던 거야. 물기가 조금이라도 남으면 맛이 안 난다고 하셨지. (잠시 멈칫하며) 근데 너, 언제 이렇게 잘 배웠냐?

윤석: 꼬들꼬들해야 진짜 맛있는 거잖아. 근데...이상해. 소리도 냄새도 그대로인데, 할머니 없으니까.

며느리: (윤석의 손에서 오이를 받아 담으며) 윤석아,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할 줄 아는 거 보면 엄청 뿌듯해하셨을 거야. "우리 윤석이, 내가 없어도 잘하네!" 하셨을 거다.

혁진: (작게 웃으며) 그리고 덧붙이셨겠지. "정성만 있으면 다 돼." (조용히 한숨을 쉰다) 그게 할머니가 우리한테 남기신 마음이지.

며느리: (생각에 잠긴 듯) 맞아요. 어머니는 말보다 손으로 가르치셨어요. 정성, 인내, 그리고 나눔… 그 세 가지로 세상을 버티셨죠.

윤석: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나...매년 이걸 하려고요. 그 맛을, 그 마음을 잇고 싶어요.

혁진: (놀라며) 진짜? 쉽지 않을 텐데?

며느리: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 윤석이, 할머니 닮아서 대단한데? 이제 아빠가 윤석이에게 배우겠어요. (혁진을 흘끗 보며)

윤석 : 할머니는 오이지 담그는 걸 사랑이라고 하셨어요. 가족을 향한 마음이 천천히 배어드는 일이라고. 기다림도, 손맛도, 다 그 안에 있었죠. 그래서 나도 매년 해요. 그 시간만큼은… 할머니가 옆에 있는 것 같거든요.

혁진: (웃으며) 내가 윤석한테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진짜 엄마가 보면 놀라셨겠네.

윤석: (장난스럽게) 그럼 저는 오이지 감독! 엄마는 주연, 아빠는 조연

혁진 : 아빠가 또 조연이야?

며느리 : (조용히 오이를 담으며) 솔직히 전… 어머님과 마음이 완전히 맞진 못했어요. 근데 이렇게 손을 대다 보니 조금은 알겠어요. 음식은 번잡한 요리가 아니라, 시간을 스며들게 하고, 사람을 잇는 거더군요.

윤석 : (웃으며) 할머니가 하시던 그 손맛… 나도 한번 내 손으로 살려보고 싶어.

혁진 : 좋아. 이제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큰 대문집을 이어가자.

(잠시 정적, 모두 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며느리 : 그때 어머님 심정은 어땠을까?

혁진 : 겉으론 강했지만, 속으론 무너졌을 거야. 그 일 나고 병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잖아. 그래도 결국 땅을 되찾았으니...다행이지.

(모두 웃으며 오이지를 담근다. 세 사람의 웃음이 잔잔히 번진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한쪽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무대 위에 흐른다.)


어머니의 목소리 (내레이션):

한 그릇 오이지에 담긴 건, 오래 기다린 정성과, 다정한 눈빛이란다.

큰대문집도 그래. 웃음이 스며 있었고, 사람이 오갔고…

따뜻한 마당이 늘 우리를 안아줬지. 이제는 집도 변하고, 마을도 달라지겠지만

그때 그 마음만은 꼭 지켜가렴. 그게, 내가 너희에게 남기는 진짜 유산이란다.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무대 위에는 작은 오이지 항아리 하나만 남는다. 은은한 조명이 항아리를 비춘다. 막이 내린다.)


2025.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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