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희곡 『큰대문집 오이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 어머니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 삶의 전반에 흐르는 주류는 ‘큰대문집’과 ‘음식’이라는 문화였다.
특히 그 음식 중에는 ‘오이지’가 있다.
그리움에 ‘오이지’를 수필로 썼다. 나아가 지인들과 함께 쓴 수필집 “오이지”를 출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주 짧은 낭독극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낭독극을 온전한 희곡으로 새로 빚는 실험에 뛰어들었다.
꼬박 십 여개월 정도 걸렸다. 이제 이 토대 위에서 ‘나가자 디디에’ 시리즈의 5장 구성을 함께 펼쳐 보려 한다.
희곡 『큰대문집 오이지』
■로그라인: 음식은 그리움이다.
■등장인물:
어머니 : 큰대문집의 큰 며느리, 70대 초반
혁진(革進) : 40대 초반, 큰대문집 아들, 자영업자
며느리 : 혁진의 아내, 주부, 같은 동네 마장동 토박이
윤석 : 혁진의 아들, 10대 초반
삼촌 : 어머니의 남동생, 50대 후반, 혁진의 외삼촌,
오선생 : 60대 중후반, 공유지분할 컨설턴트, 재건축 컨설턴트
설렁탕 할머니 : 큰대문집 건너편에서 설렁탕 가게를 수십 년 운영, 마장동 토박이, 지역주민
■ 『큰대문집 오이지』
목차
제1장 오이지 만드는 날
제2장 김치냉장고와 어머니
제3장 오이지가 맺어준 인연
제4장 큰대문집과 어머니
제5장 씹을수록 그리운 맛!
제1장 오이지 만드는 날
큰대문집의 마당. 붉은 벽돌담과 정갈한 기와지붕이 보인다. 마당 한쪽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가 단정히 놓여 있고, 커다란 양은대야와 오이지를 절일 돌, 소쿠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부엌 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물이 끓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봄기운이 완연한 아침. 머리 위로 참새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가볍게 대문을 스친다.
어머니는 마당에 서서 오이를 하나씩 들어 올린다.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며 탱탱한 감촉을 확인한다. 살짝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인다.
(덜컥!)
대문이 열리고 혁진이가 무거운 오이 자루를 어깨에 얹고 쩔쩔매며 들어온다. 자루가 흔들릴 때마다 안의 오이들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혁진: (숨을 헐떡이며) 엄마, 이거 오이죠? 경동시장 창고까지 다 털어 오셨나 봐요?
어머니: (침착하게) 남양주 배양리까지 가서 골라온 거다. 그쪽 오이가 탱탱하고 맛있어. 힘 좀 써라. 운동할 겸.
(큰대문집 마당에는 오이가 가득하고, 혁진과 며느리는 분주히 오이를 씻는다. 어머니는 마당 한가운데 편안히 앉아 지시한다.)
혁진 : 운동은 헬스장에서 하지, 왜 항상 집에서 시키시냐고요.(자루를 내려놓으며)
어우, 팔뚝이 지금 절여지는 중이에요!
어머니: 입은 참 잘 놀지. 오이 씻어. 상처 나면 안 된다. 알겠지?
혁진: 어차피 소금물에 담글 거잖아요. 대충 하면 안 돼요?
어머니: (고개를 저으며) 오이지는 1년 내내 먹는 거야. 대충 하면 무르거나 상해서 버린다. 아삭함은 생명이야.
혁진 : (가볍게 웃으며) 그렇게 깊은 뜻이 있어요?
(넓은 마루에 커다란 오이지 통이 놓여 있다. 어머니, 며느리, 혁진이가 함께 오이를 담그고 있다.)
어머니: (손을 허리에 올리고 당당하게) 자, 오늘은 우리 큰대문집 오이지 담그는 날! 정신 바짝 차려. 안 그러면 소금물 돼!
(조명이 어머니에게 집중된다. 오이지를 접시에 하나씩 올리며 말한다.)
어머니 : (오이를 들며) 자, 먹어봐라… 그냥 반찬이 아니야. 이건… 내가 절인 시간들이지.
(항아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마치 시간을 닦듯 두 손으로 식탁을 아주 아주 천천히 문지른다.)
혁진 : (어머니가 건네는 오이지를 요란하게 씹는다)와, 씹는 맛 예술인데요.
어머니 : (칼질하며, 살짝 멈칫) 봄에 절여서 잘 덮어주고, 그 위에 돌 올리고… 절여지는 시간을 진득이 기다려주면 노~랗게 변해서 기가 막힌 맛이 나오지. 그게 오이지의 비법이다.
며느리 : 숨죽여 기다린 시간이 깊은 맛을 내는 거군요?
어머니 : 나도 그랬어. 큰대문집 와서 눈치 보고, 눌려 살았지. 애 키우고 밥 하고, 곪지 않게 버텼다.
(어머니, 칼로 오이지 속을 슬쩍 드러내며 )
혁진 : (씹으며)와~ 아주 아삭하고 시원한데요?
어머니 : (오이 하나를 자르며) 봐라, 속이 이렇게 촉촉해야 한다. 공기도 빠지고, 수분도 고르게. 이래야 꼬들꼬들하지. 사람도 그래.
혁진 : 허, 오이지로 사람 마음도 읽어요? 그럼 엄마, 제 속은 어때요?
어머니 :네 속은 이젠 엄만 몰라. 부부끼리 서로 더 잘 알겠지.
혁진 : (살짝 진지해지며)점을 그렇게 보셔도 아들의 속은 모르는 거군요
(잠시 정적, 어머니가 다시 오이지를 건넨다.)
어머니 : 말 안 해도, 이걸로 전하고 싶었어. 아버지한테도, 너희한테도. 이건 내 이름 없는 편지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뭘 견뎠는지. 어떤 맛으로 남고 싶었는지.
며느리 : (오이 받아 들며, 살짝 눈시울 붉히지만 웃는다) 어머님… 이런 뜻이었어요?
어머니 : 어서 먹어봐라. 지금이 딱 맛있을 때야. 조금 지나면 질겨지고, 오래 두면 물러지지. 인생도 그래.
(조명 천천히 어머니에서 식탁 위 오이지로 이동한다. 며느리가 책 한 권을 꺼낸다.)
며느리 : 어머니, 이 책 좀 보세요. 설렁탕 할머니가 주셨어요. 예전 마장동에선 오이지로 냉국도 해 먹었대요. 우리도 해볼까요?
어머니: 냉국? 오이지는 그냥 먹는 게 제일인데...
며느리: 여름에 수분 보충에도 좋다네요. 함께 만들면서 동네 얘기도 나누고요.
어머니: (잠시 웃는다) 대학 나온 며느리답네. 그래, 해보자.
(이때 윤석이 방에서 나온다)
무대가 어두워졌다가 푸른빛으로 물든다. 물결무늬가 서서히 퍼지고, 한쪽 벽면엔 ‘우미네 계곡’이란 네온사인이 희미하게 점등된다. 조명 아래, 바위 위로 물방울이 반짝이고 계곡물 소리가 들려온다.
양쪽으로 크고 작은 돌들이 계단처럼 층을 이루고 있다. 무대 중앙, 얕은 계곡물 위에 돗자리가 깔려 있고, 어머니가 앉아 있다. 어머니의 곁에는 크기가 다른 아이스박스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며느리는 아이스박스를 오가며 분주히 음식을 준비한다. 혁진과 윤석은 계곡 아래쪽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찾느라 분주하다. 혁진은 커다란 돌을 들고 옮기다가 균형을 잃고 휘청인다. (위태롭게 중심을 잡으며, 돌을 내려놓는다.) 윤석은 그런 아빠를 따라다니며 연신 웃는다.
윤석: 아빠, 넘어질 것 같아! 도와줄까?
혁진: (헛웃음 지으며) 네 운동 신경 반만 닮았음 좋겠네!
(윤석은 신이 나서 돌 위를 뛰어다닌다. 계곡물은 시원하게 흐르고, 가족들의 움직임 속에서 여름날의 생동감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오이지 돌을 관객석 쪽으로 가리키며 관객과 소통한다.)
어머니: (관객을 향해) 저기 돌 좀 보세요. 저 돌처럼 판판하고 묵직한 게 진짜 좋은 오이지 돌이랍니다.
어머니 오이지 찬가를 노래한다. 어느샌가 가족도 같이 합창한다.
“이 돌은 나의 별 저 돌은 너의 별 별빛에 잠기어 노랗게 익는 오이지 이 돌은 나의 별 저 돌은 너의 별 꼬들꼬들 해질 때까지
보름 지나 숙성되면 뽀얀 물 우러나 꺼내 먹는 오이지 맛 잊을 수가 없어요 이 돌은 나의 별 저 돌은 너의 별 별빛에 잠기어 노랗게 익는 오이지”
혁진: (관객을 가리키며) 윤석아, 저 돌 어때?
윤석: 음. 메주 같아요.
며느리: 예리하네!
혁진: 그럼, 저 돌은?
윤석: (웃으며) 아빠 출근 모습! 할머니, 저 돌 쓰면 오이지에서 술 냄새날 것 같아요? (코를 막는다.)
어머니: (웃으며) 윤석이는 커서 뭘 해도 잘할 거다. 돌 보는 눈이 남달라.
혁진: (관객을 가리키며) 윤석아, 저 돌?
윤석: 완벽! (관객 한 명을 가리키며) 오! 나의 별!
(혁진은 관객석 쪽으로 내려가 돌을 나르는 시늉을 하고, 윤석도 옆에서 돌 던지기 놀이를 한다.)
(무대 전환: 계곡에서 한 바퀴 돌면 다시 마당으로 바뀐다. 대문 옆 선반에 돌들이 정리되어 있다. 어머니는 돌들을 애지중지하며 먼지를 털어낸다.)
어머니 : (관객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돌을 가슴에 대듯, 독백처럼):이 돌… 배양리 기찻길에서 주운 거란다. 니 아버지, 퇴직하고 농사짓겠다고 매일 새벽, 마장동에서 버스를 탔지. 밭에서 일하다가도…
기차 소리만 나면 가슴이 쿵쿵 뛰곤 했어.
(돌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돌은 눌려야 단단해지고, 오래간다.
오이지도 그렇다.
소금물에 잠기면 처음엔 짜고 아프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이 맛이 된다.
(잠시 침묵 후)
내 청춘도 그랬다.
이 돌처럼… 눌린 채로, 익어온 거란다.
(미소 지으며)
모두 여기 온 걸 환영한다.
새로운 집에서… 우리, 다시 잘 익어보자꾸나.
혁진 : 얘들도 오랜만에 제 집 찾은 거네요. 이사 온 돌들이라니!
어머니 : (몇 개의 돌을 가리키며) 이 애들은 손길이 필요해. 마당으로 옮겨 물과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야 해. 그런 다음 이틀은 말려야 제대로 된 오이지 돌이 된 단다.
혁진: 엄마는 오이지에 진심이지만, 저는 그냥… 엄마가 좋아하니까 하는 거예요.
어머니: 과정 하나하나가 다 맛을 좌우하는 거야. 빨래도 덜 말리면 냄새나잖니?
며느리: 오이지 물은 다 되었어요. 데쳐야죠?
어머니: 그렇지. 어멈이 잘 아는구나!
혁진: 오이를 데친다고요? 왜요?
어머니: 뜨거운 물에 넣었다 얼른 건지는 거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딱 5초만 세면 돼. 이렇게 해야 오이지가 1년 내내 꼬들꼬들 맛있거든.
며느리: 윤석 아빠도 그 맛에 반했죠.
혁진: (끙끙대며 돌과 물 양동이를 나르며) 엄마, 보약 좀 해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어머니: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니 처한테나 해달라 해라. 오이지 뜨지 않게 잘 눌러. 안 그러면 곰팡이 핀다.
혁진: (한숨을 쉬며) 이 돌들은 왜 해가 갈수록 더 무거워지는 거야?
돌 나르는 게 제일 귀찮고 힘들어요. 보약은 꼭 먹어야겠어요.
어머니: (웃으며 작게, 천천히) 오이지가 참 잘 익었네… 그래, 우리도 그렇게 익어온 거다. 참았고, 눌렀고, 그 사이에 정이 들었지. 오이지처럼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가족이 함께 웃으며 일하는 장면으로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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