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방송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 <영재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미술, 음악, 수학, 바둑 등 대한민국 곳곳에 숨어있는 영재들을 찾고 그 영재성을 더 키울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3~4살에 1,2차 방정식을 푼 수학 영재, 청각 장애 부모(부모 양육 태도 검사에서 영재발굴단 최초로 100점을 받음) 밑에서 자란 과학 영재, 아픈 엄마를 위해 연주했지만 끝내 엄마와 영원한 이별을 한 피아노 영재들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기특하고 멋져서 웃기도 하고 슬픈 사연에 방송을 보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영재'는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희귀한 아이고 '영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일도 흔치 않지만, 최근 딸아이 친구들의 학부모 모임 등에서 그 단어를 종종 듣게 됐다.
교육청 영재 교육원을 준비하는 아이도 있고 대학교 부설 영재교육원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도 있으며, 교육청 입학시험을 통과하여 교육을 듣는 아이도 있다. 학부모들은 일찌감치 아이의 영재성을 발굴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었다.
딸아이와 친구인 A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흥미를 보였고 우주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부모는 아이의 성향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우주 과학 관련 책과 다큐멘터리 등을 보여주며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넓혀주었다. A는 현재 교육청 영재교육원 수업을 듣고 있고 A의 엄마는 아이의 탐구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다양한 교육 기회를 찾아주고 있으며 앞으로의 진로도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딸아이와 A는 5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 아이와 딸아이를 비교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와 딸아이는 A를 질투나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아이의 노력과 성장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고 있다. 분명 그 아이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멋진 과학자로 자랄 것이다.
또한 학부모, 동네 이웃, 나이 차이를 넘어 친구가 된 A 엄마의 노력과 열정을 칭찬하고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이 아님을 알기에, A엄마의 지난한 정성과 수고로움을 알기에 한편으로 나 자신도 아이의 교육에 소홀한 부분이 없는지 살펴보게 됐다.
혹시 아이의 영재성을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평범한 나의 교육관으로 비범한 아이의 재능이 묻히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아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아이의 남다른 재능은 뭘까? 딸아이도 특출 나게 잘하는 뭔가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나 또한 11살 딸아이의 영재성을 찾아야 한다는 소명이 생겼다.
(에피소드)
5살 때 마트 문화센터 '지구 만들기' 수업을 들으러 가서 A를 만났다.
문화센터 선생님 :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밟고 있는 땅 속을 계속 파 들어가면 뭐가 나올까요?
A : 맨틀! 핵이요!
딸 : 개미요?
# 2
아이의 영재성을 발굴하기 위해 며칠간 아이를 관찰했다. 학교에서 가져오는 단원 평가 결과지나 수행 평가 시험지 등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국어>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 적어서 틀린 문제가 많다. 여러 유형을 풀어보면 금세 좋아질 것이지만 아직은 문제집을 풀며 '문제' 푸는 요령을 익히는 시간보다 다양한 책에 빠지는 즐거운 시간을 주고 싶다.
국어 영재 아니다.
<수학>
개념은 이해하고 있지만 단순한 계산 실수가 잦다. 기본, 심화 정도는 즐겁게 풀지만 최상위 문제는 어려워한다. 하지만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책상에 앉아 매일 문제집 2~3장씩 풀고 답을 확인하는 학습 습관이 자리 잡았다. 그 성실함을 믿는다.
수학 영재 아니다.
<피아노>
3년째 즐겁게 배우고 있다. 연주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오면 될 때까지 수십 번 연습한다. 노력하면 된다는 걸 피아노 연습으로 체득했다.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음악 자체를 즐긴다. 그걸로 충분하다.
피아노 영재 아니다.
11살이 되도록 발견하지 못한 영재성을 지금 두 눈 부릅뜨고 찾는다고 찾아질 리 없다.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내 아이가 가진 장점을 보지 않고, 없는 영재성을 찾으려 하다니 못난 엄마가 따로 없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칭찬하시는 부분은 딸아이의 '성실함'이다. 그 성실함은 아이가 앞으로 꿈꾸며 성장하는 길에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것임은 분명하다.
아이의 재능은 부모가 억지로 찾을 것이 아니라 아이가 생활 속에서 갖가지 경험을 통해, 학교에서 여러 가지 수업을 들으며 스스로 찾아갈 것이다. 나는 다양한 기회를 주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조용한 관찰자로 남으면 되지 않을까?
지각하기 싫어서 일찌감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는 아이, 모든 수업이 즐겁다며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 일요일 밤이면 반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아이, 친구들을 웃기는 게 신난다는 아이, 긍정적인 기운으로 주변 분위기를 밝게 하는 아이.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영재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찾다니, 나야말로 최고의 영재발굴단이다.
서랍 정리 중 작년 사회, 국어 교과서를 발견
나도 딸아이처럼 낙서에 영재성을 발휘해 본다.
감쪽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