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빨강 머리 앤>

by 바람



어린 시절 만화 영화로 만났던 <빨강 머리 앤>의 장르는 내게 판타지였다. 초록색 지붕의 2층집 앞 벚나무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나무 아래 깔려있는 잔디밭에서 앤은 맨발로 뛰어다녔다. 집 가까이에는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에는 우거진 하얀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80년대 한창 개발 중이던 서울의 한 동네에서 그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작은 텔레비전으로 앤과 만났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세상에서 내가 사는 동네가 곧 세상의 전부였다. 작은 1층집이나 2층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은 좁았지만 아이들은 거기서 뛰어놀았다.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 서기 전에 넓디넓은 공터에서 남자아이들은 축구나 오징어 게임, 구슬치기 등을 했고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가사의 노래를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불렀다. 그저 검정 고무줄을 뛰어놀 때 부르는 주제가 정도로 생각했다.


내 어린 기억 속에 오후 5~6시가 되면 동네 곳곳에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그 순간 모든 아이들은 일제히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국기 하강식에 참여해야 했다. 세상이 잠시 멈추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가 이 이야기를 동네 엄마들한테 한 적이 있다. 다들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다른 동네는 그 의식을 하지 않은 건지, 내 기억은 나를 별세계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고 동년배의 엄마들과도 기억을 공유할 수 없었다.


이런 현실과 다른 <빨강 머리 앤>의 세상은 그저 상상 속의 세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톡파원 25시'가 없던 그 시절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캐나다'라는 국가는 알고 있었지만 그 나라가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지 몰랐고 만화 속의 세계가 재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면 캐나다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톡파원이 되어 빨강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생가를 찾아가 소설 <빨강 머리 앤>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담은 소설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줄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며 그곳으로 가는 방법,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숙소, 그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영상으로 보여줬을 테고, 나는 그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고 나의 버킷리스트 하나(프린스 에드워드 마을 방문)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정말 있어요! 2022년 8월 8일 톡파원 25시-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서 '빨강머리 앤' 흔적 찾기 편이 방송되었네요!!



서울의 어느 회색빛 동네에서 살던 조용한 소녀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떤 말이든 재미있게 표현하는 수다스러운 소녀 앤 셜리에게 빠져버렸다. 고아원에서 데려와 불쌍할 것 같았지만 앤은 특유의 상상력으로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힘든 상황에서도 낭만과 희망을 놓지 않아 결국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다. 앤은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하루를 맞이하고. 세상과 자연,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위안을 받는다. 그런 앤의 밝고 긍정적인 기운이 무뚝뚝한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림 찻 잔에 담긴 따스한 차와 달그락 거리는 예쁜 그릇들, 들꽃으로 장식한 식탁 위 꽃병, 갓 구운 빵을 포함한 맛깔스러운 서양 음식들도 그 당시 가난했던 우리 집 현실 밥상과는 다른 비현실적인 그림이었다.


어렸을 때 살고 싶은 집을 그리라고 하면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그렸는데 그게 바로 앤의 초록색 지붕집과 참 닮았다. 지천에 나무들이 둘러싸여 있고 넓은 잔디밭에는 이름 모를 색색의 들꽃이 피어있고, 차마 꺾기에 미안한 그 예쁜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소꿉놀이하는 상상. 다이애나처럼 영원한 우정을 약속한 친구와 잔디밭에 누워 바람이 만들어 주는 나뭇잎의 속삭임을 느끼고,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보이는 구름과 하늘을 함께 바라보는 그 상상. 그 당시 소녀인 내게는 <은하철도 999>보다 더한 판타지였다.




그렇게 꿈같았던 이야기를 최근 책으로 읽으면서 나의 시선은 앤이 아닌 마릴라에게 다가가 있었다. 농장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입양하려 했지만 주변의 실수로 앤을 잘못 데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려보낼 기회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신의 남매는 여러 집을 전전해오며 고생했을 앤을 고아원이나 다른 집의 식모로 보내지 않고 키우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이 책에서는 그런 마릴라의 마음을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지만 행동과 말투가 차가울 뿐이지 가슴 깊은 곳에 따뜻함과 유머가 있는 마릴라의 결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초록 지붕집은 이웃집들과는 거리를 둔 위치에 지어져 있다. 그토록 소통이 쉽지 않은 남매가 일면식도 없는 수다스러운 아이를 받아들이고 함께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도 이번에 읽으면서 다시 보였다. 아이를 한 번도 키워보지 않은 나이 든 그들이 나중에는 앤이 없던 시절을 생각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앤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릴 때는 앤과 다이애나와의 우정, 앤의 공부에 대한 꿈, 길버트와의 애증 등이 중심으로 보였던 것과 사뭇 다르게 마릴라가 엄마가 되어가는 성장이야기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내가 어렸을 때 본 마릴라 아주머니는 무뚝뚝하고 차가우며 엄격했다. 소중한 브로치를 앤이 가져갔다고 오해해서 앤을 다락방에 가두었고, 앤이 그토록 원하는 볼록 소매 원피스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헤아려보니 마릴라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원칙을 지켰고, 아이가 혀영심이 생기지 않도록 검소하게 키웠다.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음을 받아들여 의논할 일이 생기면 이웃에게 찾아가 솔직히 의견을 구했고 앤이 예절 바르고 꿈이 있는 아이로 자라도록 학교 교육도 열심히 받도록 했다. 브로치를 찾았을 때는 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따뜻한 말이나 표정으로 정답게 표현하지 않았을 뿐, 읽는 구절마다 앤을 사랑하는 마릴라의 다정한 마음이 읽힌다. 수다스러운 앤의 이야기도 들어주면서 적절히 가족의 구성원으로 해야 할 일도 시키고 공부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앤의 포옹과 가벼운 입맞춤에 내색하지 않을 뿐 행복해하는 마릴라의 은근하고 소중한 사랑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런 마릴라가 있었기에 앤은 밝고 씩씩하게 자라고 실컷 공부할 수 있었다. 앤의 행복한 소녀 시절을 함께 해준 마릴라 아주머니, 묵묵히 항상 앤의 편이 되어준 매슈 아저씨가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따뜻한 며칠이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림 하나하나를 아껴 보고 앤의 이야기에 한 줄 한 줄 소중하게 기울였다. 만화 영화 <빨강 머리 앤>과 함께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했다.



앞으로 내가 힘들 때마다 앤과 마릴라가 나를 응원해 줄 것이라 생각하니 든든했다.


앤은 수다스럽지만 긍정적인 기운으로.

마릴라는 단호하지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다시 만나 반가웠어.

고마워.

앤(e)!

마릴라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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