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한테 다가가려 해도
벽이 느껴져."
나만 알고 있을 거라는, 혹은 남이 몰랐으면 하는 '나'를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듣게 될 때가 있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뜨끔하면서도 나를 지켜봐 주고 나를 알아봐 주고 있다는 것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인다.
동네에서 알고 지낸 지 5년도 더 된 언니에게 듣고 말았다. 나는 보통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편이고, 누구든지 나를 알고 싶다면 그저 며칠만 지켜보고 대화하면 파악될 정도로 쉬운 사람이다. 예측이 가능하고 단순하며 규칙대로 행동하고 속을 다 보여주는 뻔한 사람이다. 무슨 꿍꿍이를 꾸며내거나 뒤에서 딴짓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을 속이거나, 겉 다르고 속 다르게 말한다면 누구에게든 탄로 날 게 뻔하다. 아니 탄로 나기 전에, 그런 내 모습이 싫어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다. 그걸 알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거나 뻔한 거짓말을 한다든가, 나 자신을 속이는 경우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쉬운 사람이라고 누구든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빤히 보이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나의 무의식은 벽을 쌓았다. 뻔한 나를, 단순한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최소한의 방어벽을 만들었다. 내가 의식하고 쌓은 게 아니니, 아마도 나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이 쌓았을 것이라고 '의식하는 나'는 생각한다.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때 만나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했지만 참 든든하고 다정한 친구였다. 서툴고 어색한 대학 생활, 동아리, 엠티, 연애, 졸업, 구직 활동, 직장 생활, 첫 월급, 이직 등 20대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그 친구와 대화로 나누었고, 무슨 일이든 서로의 편에서 응원하고 지지했다. 한 번도 싸워본 적 없고, 한 번도 미워해 본 적 없고 한 번도 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 서로에게 참 잘 맞는 친구였다.
그렇지만 어떤 사건도 없이 어느 날부터 그 친구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의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나의 잘못이 무엇일까를 수백 번도 더 생각했다. 태어난 아기로 밤낮이 바뀌고 갑자기 엄마가 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라 예전처럼 그 친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었던 것 말고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친구가 전화만 받아준다면, 내 메시지를 읽어만 준다면, 다시 전처럼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내 잘못이 있든 없든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에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 간의 노력에도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는 차디찬 '1' 표시와 그녀의 웃음 가득한 프로필 사진을 보고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애써 나의 20대 추억들을 꺼내지 않았다. 모든 순간에 함께했던 친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추억을 잠가 놓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진심 어린 인사말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을 뿐 여전히 난 그 친구를 기다린다.
아내로, 엄마로 살고 있는 40대의 가정주부에게 '우정'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런 대화를 누군가와 나누어 볼 기회조차 없었다. 부모님의 건강을 살피고 자녀의 생활과 교육도 신경 쓰고 노후 준비도 해야 하는 이 시기에 '우정'이야기라니, 철없고 한심한 아줌마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5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엄마들과 교류가 생겼다. 나도 모르게 혹시나 그들과 친구가 되어 내가 그들을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 하며 겁을 냈나 보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에게 곁을 내주지 않고 쌓아놓은 벽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나와 결이 너무 닮은, 친하다고 생각했던 언니에게 유리벽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과거 친구와의 상처가 내 트라우마였을까? 우정이 깊어질까 두렵고 사람이 좋아질까 봐 겁나 쌓아놓은 나의 벽을 그 언니는 알고 있었다.
벽이 느껴진다는 언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십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연락을 거부하는 내 친구 이야기가 전부였다. 누군가가 알아봐 준다면 그 벽이 허물어질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견고하게 쌓아놓은 그 벽 때문인지 난 우정을 나눌 방법을 잊어버렸다.
언니는 벽 없이 나와 가까워 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렵게 얘기를 꺼낸 것 같았다. 나를 지키기 위한 벽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게 안타까웠지만 난 이제 그 벽을 허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언니와 어떻게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지, 어떻게 언니와 더 친밀해 수 있을지, 내 우정의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은 언니에게 어떤 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상처를 받게 될까 두려워하는 무의식의 나를 벽 바깥으로 내몰 수는 없다.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언니는 내 곁에서 멀어질까? 언니와 멀어져 상처받더라도 난 언니를 좋아할 텐데. 그건 달라지진 않을 텐데.
이런 내 마음이
투명하게 다 보인다면,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나를
이해해 줄래?"
(그림: 존 앳킨슨 그림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