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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괞찬아'도 괜찮아

공부와 너를 같은 취급해서 미안해

by 바람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딸에게 연산 문제집을 매일 한 장씩 풀게 했다. 꾸준히 학습하다 보면 기초적인 셈이 익숙해지고 쉬워질 줄 알았는데 4학년이 된 딸은 꾸준하게 실수를 한다. 덧셈이나 뺄셈 곱셈 나눗셈 흔히 말하는 사칙연산에서 틀린다.


그 틀림을 꼬투리 삼아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아이 전체를 꼼꼼하지 못하고 정리가 안되고 마무리가 안 되는 아이로 만들어버린다. 지금의 작은 실수가 나중에 무슨 엄청난 큰일로 돌아올 것처럼 아이에게 겁을 준다. 나의 말은 배우고 있는 아이를, 실수할 수 있는 아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영어 단어 쓰는 숙제를 할 때는 철자를 하나 빠뜨리든지 없는 철자를 집어넣기도 한다. delicious는 delious, shy는 shey가 되어 있다. 보고 쓰는 것도 못하냐며 나는 이미 아이에게 구박을 하고 있고, 아이를 쓴 것도 확인하지 않은 괘씸한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는 실수할 수 있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려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 완전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음이 너무나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의 작은 실수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문제 삼았다. 마음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40대의 나도 누군가에게 서운한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데 늘 곁에 있는 엄마가 쉼 없이 아이에게 실수하지 말라고 틀리지 말라고 재촉하며 아이를 다그치는데 아이의 마음은 괜찮을까?


이렇게 옆에서 도와주는 게 '너를 위한 거'라고 말한다. 너를 위한다니 그 너란 누구일까? 지금 내 눈앞에 빛나고 있는 밝은 11살의 너일까. 억지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취직한 20대의 너일까? 내가 바라는 건, 실수해도 웃고 다시 즐겁게 책을 꺼내 들 너일까? 엄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공부해야 하는 너일까?


분명한 건 지금 행복한 아이가 나중에도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세상을 탐구하는 아이, 실수하고 틀려도 웃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이, 친구들과 놀고 부대끼는 것이 즐거운 아이, 활기찬 미래를 꿈꾸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ㄱㄴㄷ을 배우던 아이가 한국사 책 을 읽고, abc를 말하던 아이가 영어로 쓰인 <인어공주>를 읽고, 123을 쓰던 아이가 분수를 더하고 빼고 있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아이를 격려해주지 못할 망정 그것밖에 못하냐며 더 잘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배움을 즐기고 새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이던 아이, 작은 성공에도 황홀하게 행복해하던 아이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아야겠다. 그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남기고 매일 확인하면서 내 마음을 다잡아 봐야겠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점수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이다.



이렇게 글을 쓴 날 오후

'걱정됐지만 친구가 도와줘서 괞찬았다.'라고 쓰인 아이의 일기장을 봤다. 무엇이 걱정되었는지, 도와준 친구는 누군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궁금했어야 했는데, '괞찬았다' 라는 오자와 수정해 주신 선생님의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버럭 화낼 뻔했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스린다.


그래, 틀릴 수 있어. 모를 수 있어.



'괞찬아'도 괜찮아.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걸까?





* 아이의 사진이나 글은 본인에게 직접 허락을 받고 게시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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