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는 발소리를 감추고 온다
박순동
지금 새봄이 봄비의 손을 잡고 와
대지를 촉촉이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수줍게 살며시 내리는 봄비는
먼 길을 걸어온 길손이
잠든 생명들이 놀랄까 봐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것만 같습니다.
살포시 내리는 봄비는 봄이 오는 소리 대신
봄이 스며드는 빛깔로 가득합니다.
메마른 가지와 잠든 흙 위로
가느다란 물빛이 수채화처럼 번지며
겨울의 긴 그림자를 천천히 지워 갑니다.
봄비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얼어 있던 시간들을 살살 녹여냅니다.
젖은 흙냄새가 피어오르면
보이지 않던 뿌리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작은 기척을 시작합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양지바른 언덕 위에는 어김없이 봄빛이 내려앉겠지요.
빈 가지 끝마다 연두색 설렘이 맺히고,
연초록 잎들이 햇살 앞에
부끄러운 듯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도
긴 겨울 끝 언 땅을 살며시 밀고 나와
작고 여린 몸짓으로
가장 고운 빛깔을 가만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끝내 잃지 않았던 온기가
이제는 꽃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날 차례입니다.
봄비는 축복처럼 내립니다.
잠든 땅에게는 따뜻한 약속이고,
씨앗에게는 작은 용기이며,
사람의 마음에게는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조용한 허락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 내리는 이 봄비는
우리의 가장 메마른 곳부터 살며시 적시며
귓가에 속삭입니다.
봄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26. 3. 2. 순동. 봄비가 살며시 내리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