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깨어나는데, 그대라는 봄은 어찌 이리 더딘가요
만물은 깨어나는데, 그대라는 봄은 어찌 이리 더딘가요
박순동
흙의 문이 열리는 서곡
딱딱하게 굳어있던 대지의 등허리가 스스로를 비틀어 길을 내는 시간, 경칩입니다.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는 이미 수만 개의 심장이 일제히 박동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차가운 얼음장 밑을 숨죽여 흐르던 물줄기가 제법 목소리를 높여 낮은 여울을 연주하고, 그 명랑한 울림에 놀란 개구리들이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동그란 눈을 뜨는 정경을 상상합니다. 세상은 이제 긴 침묵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저마다의 빛깔과 숨소리로 존재를 증명하겠노라 선언하는 찬란한 소요 속에 있습니다.
담장 너머 목련은 솜털 가득한 꽃망울을 부풀려 하얀 불꽃을 터뜨릴 채비를 마쳤고, 발밑의 이름 없는 풀꽃들은 연둣빛 수줍은 얼굴로 봄의 첫인사를 건넵니다. 만물이 이토록 정직하게 계절의 약속을 지키며 깨어나고 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나의 시간만은 여전히 한겨울 어느 기슭에 닻을 내린 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동토(凍土)
창밖의 풍경은 날마다 농익은 채도를 더해가지만, 내 그리움의 지도는 여전히 무채색의 풍경 속에 갇혀 있습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훈풍이 뺨을 간지럽히고 세상이 온통 꽃대궐로 변해갈 때에도, 가슴 깊은 곳에 단단히 박힌 고드름은 좀체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봄이 왔으니 이제는 웃어도 좋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햇살 아래 서보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 방 한 칸은 여전히 문고리가 얼어붙어 열리지 않습니다. 그 어두운 방 안에는 깊은 겨울잠에 든 당신의 기억이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봄은 단순히 기온의 숫자가 오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의 당신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일이며,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의 대화에 다시금 더운 피가 도는 일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찬연한 경칩의 아침에도, 나는 홀로 마음의 동토를 서성이며 당신이라는 파란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립니다. 이 딱딱한 슬픔의 껍질은 언제쯤 당신의 기척에 의해 무너져 내릴 수 있을까요.
깨어나지 않는 그대라는 계절
당신은 나의 경칩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혹시 아직도 망각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깨어나는 것이 두려워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나뭇잎이 움트고 새싹이 돋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땅속 생명들이 깨어난 것은 그들을 부르는 따스한 햇볕과 대지의 낮은 울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매일 아침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내 마음의 온도를 높여둡니다. 간절한 그리움의 무게가 지표면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되어, 잠든 당신의 창가에 가닿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당신이라는 계절은 유독 길고도 무겁습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이 계절에, 어찌하여 당신의 소식만은 이토록 고요에 잠겨 있나요. 내 안의 당신이 경칩의 생명들처럼 활기차게 뛰어오르는 상상을 합니다. 억눌려 있던 생명력이 분출되듯, 당신의 목소리와 눈빛이 내 삶의 전 영역으로 눈부시게 퍼져 나가는 그 순간을 꿈결처럼 기다립니다.
언제나 오려나, 내 안의 진정한 봄
봄은 밖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것일까요. 아무리 세상이 꽃물결로 넘실거려도 내가 꽃을 바라볼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겨울의 연장일 뿐입니다. 내 마음의 경칩은 내가 당신을 완전히 놓아주거나, 혹은 당신이 다시 돌아와 내 가슴의 빗장을 두드려 줄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따라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못해 아릿한 통증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기로 합니다. 대지의 순리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혹독한 겨울도 결국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내 마음의 긴 추위도 결국 당신이라는 경칩을 맞이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아지랑이가 속삭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곧 깨어날 것이라고. 그 가느다란 속삭임에 기대어 오늘을 견딥니다. 당신이 깨어나는 그날, 나는 비로소 가장 따뜻한 봄의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26.3.5. 경칩에 순동이 편지를 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