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시집 한 권

동묘 헌책방에서 추억을 담다

by 박순동


낡은 시집 한 권

박순동


헌책방 모퉁이, 쌓인 책들의 틈새에서

빛바랜 시집 한 권이 나를 부른다.

기우뚱 기댄 채로, 말없이.

잿빛 표지 위로 스며든 세월 속에서도

희미해진 시인의 이름보다 먼저

누군가 그은 한 줄의 밑줄이

내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조심스레 펼친 책갈피마다

먼지가 아닌 그리움이 사르르 피어오르고

붉은 볼펜 자국을 따라

그 사람의 하루가 나직이 흘러든다.

79페이지, 메마른 네잎클로버 한 장

누군가의 소원을 품은 채

숨죽이며 웅크려 있다.

말라붙은 잎맥 하나하나가

그날의 간절함을 속삭인다.

뒷장 귀퉁이 접힌 자국

혹시 그이에게는

마지막 밤의 표지였을까.

반으로 접힌 천 원짜리 지폐

그 시절의 비밀이

아직도 온기를 머금고 있다.

햇살 아래 잊혔던 계절이

내 손끝에 닿아 다시 생생해진다.

"나를 품었던 이의 봄날이

너의 오늘과 맞닿아 있구나.“

책은 내게 속삭였다.

한참을 그 시집을 덮지 못했다.

어떤 손길이, 어떤 눈물이

이 한 권 속에 스며있었을까.

나는 책과 마주 앉아 들었다.

자신은 기억의 등대이며

사라지지 않는 심장박동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값 삼천 원.

하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인생이

고스란히 내 품으로 흘러들어왔다.

어느 누구의 봄이었던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봄이 되어

가슴 한편에 조용히 뿌리내린다.


250525 순장. 일요일 동묘 헌책방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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