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바람이 불어서 몸이 자꾸 뒤로 밀려났어. 이끼로 덮인 넓은 벌판을 지나고 초록 잔디가 쫙 깔린 곳에 닿았단다. 나란히 줄을 맞춰 지어진 삼각형 지붕 위에는 초록 잔디가 덮어져 있었어. 가문비나무 숲을 사이에 두고 십자가가 우뚝 선 교회가 보였어. 흰 벽에 빨간 지붕으로 색을 입힌 교회가 그림엽서 같았단다. 교회 앞에는 하얀 십자가 묘석이 초록 잔디 위에 줄을 맞춰 꽂혀있었어.
“할머니를 뵙기 전에 우리 아빠한테 인사드리고 가자.”
나는 말없이 티나 뒤를 따랐지.
“열두 번째 십자가 묘석에 우리 아버지가······.”
티나는 하얀 십자가 앞에 담자리 꽃을 놓고 고개를 숙였어.
“여기 한국에서 온 친구랍니다. 함께 인사드려요.”
두 손을 모은 나도 고개를 숙였지.
“······.”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티나가 내 마음을 아는지 십자가에 놓여 있는 꽃을 가리키며 말했단다.
“누군가, 내가 올 때마다 저렇게 꽃을 두고 간단다.”
십자가에는 꽃이 걸쳐져 있었어.
“예쁘다, 꽃 이름은 뭐지?”
“디기탈리스야, 여우 장갑이라고도 하지.”
긴 종 모양의 진분홍색 통꽃인데 꽃 안에는 보라색 점이 박혔고, 하얀 털이 나 있었어.
“여우가 꽃 안에 손을 넣으면 어떨까?”
“허허.”
나는 그냥 웃어주었어.
“가자,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거야.”
티나가 앞장서 걸었지. 할머니 댁은 납작한 돌과 나무 그리고, 잔디로 지붕을 올린 세모 집이었어. 초록 잔디 속에 반쯤은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어. 자작나무로 된 현관 위로 반달로 된 조그마한 창문이 앙증스러웠어.
“카트린 할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부채꼴처럼 넓어지면서 깊었어.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까지 나무로 만들어져 흙냄새와 함께 나무 냄새가 확 풍겨왔지.
나무 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일어나 티나를 끌어안고, 이쪽저쪽 뺨을 비볐어. 한가운데 자리 잡은 탁자 위에 베리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었지.
할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단다.
“길산! 반가워, 얘기 많이 들었어.”
“처음 뵙겠습니다.”
방안의 격자 창문 앞에는 나무 책상이 놓여있고, 양옆으로 침대가 마주 보고 있었어.
“편하게 앉아.”
양털로 짠 침대보 위에 나를 앉힌 카트린 할머니가 특별한 것이라면서 내왔어.
“빙하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야.”
“와, 할머니 최고!”
티나가 할머니를 끌어안았어.
“감초 아이스크림이야, 감초는 피로를 없애고, 소화가 잘되도록 도와준단다. 우유를 듬뿍 넣어서 쫀득쫀득하고 부드럽지, 길산을 위해 준비했단다.”
“야, 맛있겠다.”
티나가 손뼉을 치면서 숟가락을 들었어.
“요쿨살론에서 가져온 깨끗한 눈 얼음을 거품기로 힘차게 저어 만든 거란다.”
야생 베리까지 넣은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기는 했지만, 어릴 적 먹은 한약 냄새와 함께 씁쓰레한 맛이 거슬렸어. 하지만, 난 꾹 참고 먹었지.
“그래, 트롤 브로에게 구슬을 뺏겼다고?”
할머니는 우리가 온 이유를 다 알고 있었어.
“브로도 할아버지 때부터 구슬을 찾아다녔다고 했어요.”
할머니가 크게 숨을 쉬었어. 걱정이 있거나 힘이 들 때 내쉬는 한숨이었지.
“무엇이든 마음대로 변하게 하고, 섬도 옮길 수 있는 강한 힘은 가졌지만,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재주는 없나 봐요.”
“세상 어디에도 그런 건 없어.”
카트린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티나를 바라보며 말했어.
“트롤이 자꾸 너희 집을 기웃거리는 건 다 속셈이 있기 때문이야,”
“엄마도 내게 늘 조심하라고 해요, 하지만······.”
“우리 퍼핀은 오는 것을 내치지 않고, 가는 것을 붙잡지 않는 법이지.”
카트린 할머니는 티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어.
“티나! 너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처음 들을 거다.”
할머니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지.
동이 트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컴컴한 때였대. 일찍 일어난 티나 아버지가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있었단다. 낯선 퍼핀 한 쌍이 두리번거리면서 티나 아버지에게 다가왔단다.
“나는 스코틀랜드 칸나 섬에서 왔어요. 풍경도 좋고 먹거리도 많아 여기 살려고 왔습니다.”
낯선 퍼핀 부부는 티나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였다고 했어.
“머물 곳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보금자리를 텃세요. ”
“아내가 임신 중이라 절벽 가장자리는 피했으면 합니다.”
“그럼, 내가 좋은 곳을 안내해 드리지요.”
티나 아버지는 가파르지 않은 언덕배기에 물고기 사냥이 쉬운 곳을 찾아주었대.
“고맙습니다. 낯선 곳이었는데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안합니다. 내 이름은 그림손입니다.”
그리하여 그림손과 티나 아버지는 금방 친해졌다고 했어.
그림손은 참 부지런했단다. 티나 아버지가 일어나기도 전에 정어리를 20마리씩 잡아서 매일 티나 집에 가져다주었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단다. 좋은 친구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까지 하면서 말이야. 친절하고 정이 많은 티나 아버지는 그림손과 형제처럼 지냈단다. 늘 갓밝이면 그림손은 고기를 잡아, 티나집 마당에 펼쳐놓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단다.
“그림손! 차라도 한잔하세요.”
티나 엄마가 이슬차를 내놓아도 언제 사라졌는지 빠르게 사라졌단다.
“아내가 임신 중이니 빨리 가서 도와주려나 봐.”
“그래도, 저렇게 생선만 잡아주고 그냥 가다니.”
그날도 해가 뜨기 전에 가려는 그림손을 티나 아버지가 불렀대.
“무엇이 그리 급한가? 칸나 섬은 어떤 곳이야? 이야기 좀 하게.”
티나 아버지가 그림손의 손을 잡고 말했대.
“여기만큼 아름다운 곳이네, 하지만······.”
“고향을 떠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안 하나?”
“자네같이 좋은 친구를 만났는데, 무얼 바라겠나.”
“함께 식사도 하면 좋을 텐데, 왜 부리나케 집으로 가는가?”
그림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단다.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기도 하고, 또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막 솟아오르는 금빛 해를 보고는 얼굴을 가리며 돌아가더래.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세.”
그날 저녁, 깜깜한 바다를 바라보며 티나 아버지와 그림손이 앉았단다.
“사실은 내가 찾는 게 있네.”
“무언가?”
“바이킹 시대부터 내려오던 구슬인데.”
“구슬이라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주문이 새겨진 구슬이야.”
“주문이 새겨진 구슬?”
“우리 아버지가 병이 깊은데, 그 구슬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대.”
“자네는 부지런하고 효심까지 깊은 친구로군. 그런데 말이야. 그런 구슬은 없어.”
티나 아버지도 할아버지 때부터 듣긴 했지만, 영원히 사는 구슬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고 말했단다.
“대륙 사이에 있는 협곡에 구슬이 있다고 듣긴 들었어. 하지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라 나는 흘려들었다네.”
“대륙 사이에 있는 협곡에 있다고?”
그림손은 티나 아버지한테 바싹 다가와 자세를 고쳐 앉았단다.
“함께 가보자.”
“그래, 날씨가 좋은 날 한번 가보자고.”
티나 아버지는 별생각 없이 약속하게 되었대. 그날부터 그림손은 티나 아버지를 닦달하기 시작했단다. 꼭두새벽에 와서는 예전처럼 생선은 잡지 않고 빨리 구슬을 찾으러 가자고 졸랐대.
“날씨가 좋아야 갈 수 있어, 위험한 곳이니 장비도 준비해야 하고.”
“걱정하지 마, 날짜만 잡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림손은 힘이 세고 영리해서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낼 것 같았지만, 티나 아버지는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단다. 왜냐하면, 퍼핀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를 지키며 사는데, 갈수록 그림손은 퍼핀의 성향과 달리 집착이 심했단다.
“가는 길은 험하대, 고래와 상어도 많아 위험하다고 했어.”
“아무튼 가자고, 가!”
“협곡에 있다고 했지만, 꼭 찾는다는 보장은 없어.”
만나면 보채고, 으름장까지 놓는 바람에 어느 맑은 날, 협곡을 향했단다.
“네 아버지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간 거란다.”
빌딩처럼 솟아있는 바위기둥의 쪼개진 틈 사이에 층층 계단까지는 함께 갔더래.
“그런데 이상했대. 협곡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퍼핀 그림손은 사라지고 괴물 트롤로 변했단다.
사마귀가 있는 코에 붉어진 눈 그리고, 뒤틀린 입으로 변한 트롤을 본 순간, 네 아버지는 너무 놀라고 속은 것이 분해서 소리쳤단다. 그림손도 눈을 부릅뜨고 앵무 조개가 든 서랍을 찾았지만, 구슬을 꺼내지 못하자, 고함을 치기 시작했대. 그러다가 협곡을 들이받아 유라시아 지각판으로 밀려가 버렸단다.
티나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절벽 가까이 올라와 집으로 돌아왔지만, 배신을 당한 마음에 음식도 먹지 못하고,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림손이 실종되자, 부인이 매일 찾아와 티나 엄마에게 해코지했단다. 그때마다 차를 내어서 달래고 어루만져 주었더니 잠잠해졌지. 그런데, 또 손님이 오니 심술이 난 모양이야.”
할머니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잔 받침에 찻잔을 딸깍 내려놓곤 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잃은 나는 구슬에 관한 이야기를 네 아빠에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어. 그 후, 티나 엄마에게는 구슬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말했어.
“브로 엄마는 황금 사과를 너무 먹어 아기가 되었대요. 그래서 구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늙지 않고 젊게 살겠다고? 욕심이 지나친 거야.”
“카트린 할머니, 아기가 된 어른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나요?”
“그러려면 파랑 구슬이 아니라 뜸부기 깃털이 필요하단다. 파랑 구슬은 힘이 부족한 우리 퍼핀한테나 필요하지, 지금쯤 파랑 구슬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거야. 분명 다시 찾아올 거야.”
카트린 할머니는 일어서서 격자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어.
“봐라. 브로가 오고 있지?”
“안녕하세요?”
“티나를 폭포 속에 던지고, 구슬까지 빼앗곤 또 어떤 패악질 하려고 왔니?”
“에이! 할머니도, 잘 아시면서.”
브로는 티나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플랑이 아니었으면 난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죽을 뻔했어.”
티나가 두 팔을 깍지 낀 채, 브로 앞에 다가가 따졌지.
“트롤한테는 소용없는 구슬인 걸 이제 알았구나.”
“파랑 구슬만 있으면 엄마를 되돌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 그 순간은 삼각형 모서리가 닳아버려서 잘못도 느낄 수 없었어. 아기가 된 우리 엄마를 빨리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
“넌 네 엄마만 생각해?”
“아기가 된 엄마를 먹여주고 씻겨주는 게 너무 힘들어, 구슬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지. 그래서······.”
“그런데?”
“아니었어, 파랑 구슬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다시 가져왔어?”
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지.
“분명히 그 구슬은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들었거든. 우리 아버지도 구슬을 찾으려다 실종됐잖아.”
“우리 아버진 돌아가셨다고!”
티나답지 않게 소리치는 모습이 낯설었어. 티나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쪼르륵 흘러내려 뺨을 적셨어.
“아기가 된 엄마가 울고 보채는 걸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는 없었어. 구슬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만 했어. 너무 힘들단 말이야, 엉엉!”
“너도 딱하긴 하다. 아버지는 행방도 모르고, 엄마는 아기가 되어 네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다 자업자득이지.”
“할머니,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를 되돌리는 방법이 없을까요?”
“쯧쯧!”
할머니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입맛을 다시곤 생각에 잠긴 듯했어.
“부탁이에요, 엄마만 되돌릴 수 있다면 마음속의 삼각형 다 부숴 버릴 거예요.”
브로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어.
“구슬이나 내놔.”
티나가 손을 내밀었지만, 브로는 구슬은 내놓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있었어.
“제발, 부탁이에요, 할머니!”
“구슬도 필요한 곳에 써야지, 욕심만 부리다가 다 헛것이 된 거야.”
“할머니, 제발! 엄마를 되돌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힘자랑을 하면서 섬을 옮겨놓지 않을 거고요. 뿌리째 나무를 뽑아 남을 위협하지도 않고, 농장에 있는 우유를 시어 버리게 하는 장난도 하지 않을게요.”
할머니는 말없이 일어나 브로에게도 감초 아이스크림을 내주었어. 브로는 얌전하게 두 손으로 받아서 먹지는 않고 바라만 보았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지만, 못 먹겠어요. 맛있는 것도 당기지 않아요.”
조그맣게 숨을 내쉰 할머니가 물끄러미 브로를 보았어.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니?”
“네, 뭐든 하겠어요. 할머니!”
그때, 티나가 나섰단다.
“할머니, 브로를 믿을 수 없어요.”
할머니도 속을 것 같아서 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말렸지. 그러나, 할머니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브로에게 말했어.
“꼭 비가 온 후에 가야 한다, 스포가포스에서 무지개가 피거든 비프로스트 다리를 건너야 해. 건너면 바로 큰 나무가 있는데, 황금 항아리가 그 꼭대기에 있단다. 황금 항아리 안에 든 뜸부기 깃털을 가져와야 하는데, 갈 수 있겠니?”
“뜸부기 깃털요?”
브로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어.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는 너무 가벼워 우리같이 무거운 트롤은 건널 수 없다고 들었어요.”
“왜, 너희들은 마음대로 몸을 바꾸는 재주를 가졌잖아.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네가 힘들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 브로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어. 브로가 그렇게 힘없는 모습은 처음 보았지. 말없이 돌아가는 브로의 뒷모습이 안돼 보였단다.
“할머니, 아이스크림이 하나도 녹지 않고, 그대로 있어요.”
“또 마술을 부렸구나.”
“흐흐, 이런 마술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해.”
나는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신기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어.
“할머니! 아이스크림 안에 파랑 구슬이 들어있어요.”
그날 밤은 할머니 집에서 자기로 했지. 침대는 포근하고 따뜻했지만,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어. 내 마음은 무지개 색깔처럼 빨갛다가 파랑이 되고, 노랗다가 주황이 되고, 초록 초록하다가 보라가 되었지. 브로는 미웠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기가 된 브로 엄마가 가여웠어. 또, 브로도 참 안 됐다는 생각이 피었다 지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