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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식 Oct 09. 2023

칼 가는 남자

 우연히 마주친 아기 얼굴이 인상적이다. 첫돌을 지낸 듯한 아기는 마치 사슴 눈처럼 큰 눈이 유독 맑고 예뻤다. 앙증맞은 작은 손에 장난감을 쥔 채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절로 마음이 평화로웠다. 곁엔 어머니인 젊은 여성이 이런 아기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기 모습을 새삼 떠올리노라니 갑자기 젊은 날 세 딸들을 키울 때가 생각난다. 미처 육아에 대한 상식이라든가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채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첫아이를 낳자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반듯한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이런 신념으로 딸아이들을 키워서인지 세 딸 모두 가슴이 따뜻하고 직장에서도 신뢰받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세 딸 뿐만 아니라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탄생할 땐 누구나 하늘마음인 동심童心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가정환경 및 사회 규범, 정서 등에 의하여 선천적인 기질도 차츰 후천적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무한한 잠재력과 미래지향적인 희망과 꿈을 펼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이들이 어린이요. 청년이다. 그런데 요즘 사회를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사건들을 대하노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창 미래를 향해 꿈과 희망을 펼칠 앞날이 창창한 청년들 아닌가. 이들이 서현역을 비롯, 성남 분당 차량돌진과 칼부림으로 무고한 사상자를 냈다. 어디 이뿐인가. 학교로 스승님을 찾아가 칼로 찔러 중태에 빠트린 젊은이도 있다.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선 흉기를 소지한 20대 젊은이가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에선 곳곳에서 칼침으로 사람을 해할 거라는 예고 글이 수 십 건 게재돼 국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미국에선 걸핏하면 총기 난동 사건이 벌어지곤 한다. 그 뉴스를 접할 땐 솔직히 남의 나라 일이라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정작 우리나라에서 칼을 든 젊은이가 ‘묻지마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외국 총기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이젠 이런 흉기에 의한 무차별 살생 사건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꼴이랄까. 이 사건 이후 집밖이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에 동네 호숫가도 마음 놓고 산책할 수조차 없다. 어린 날엔 대낮에도 공동묘지 앞을 지나칠 때면 귀신이 나올까봐 오금이 저렸다. 이젠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다. 


 우리네 삶 속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게 칼이다. 하지만 이 물건은 자칫 잘못 다루면 사람 목숨을 해치는 흉기로 둔갑하기도 한다. 요즘 사회를 살얼음판으로 만드는 칼부림 사건이 아니어도 재산을 노리고 부모 가슴에 칼끝을 들이대는 일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변해도 너무 참담하게 변하고 있는 이 세태가 참으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박물관에서 보아온 석기시대 돌 조각이 뇌리를 스친다. 그것을 볼 때마다 의문이 일곤 했었다. 많은 유물 중에 석기 시대 돌조각에서 연상되는 칼의 기원 때문이다. 칼은 그 생명 궤적이 태초에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엇비슷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삶속에서 칼은 없어선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주부들이 부엌에서 요리할 때 칼이 없으면 식재료들을 자르고, 다지고, 깎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밖에도 칼의 쓰임새는 다양하잖은가. 호텔이나 일류 식당 주방장 음식 솜씨를 자랑케 하는 게 칼이기도 하다. 이런 칼이련만 그다지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막상 우리 곁에서 이 칼이 사라진다면 암담할 듯하다. 당장 아침 식사 준비를 제대로 못할 것 아닌가. 

이렇듯 많은 효용성을 지닌 칼이 우리네 삶을 위협하는 도구로 변질 됐다. 칼을 논하노라니 문득 우리 선조들이 생각난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다. 또한 예의염치 지키는 일을 철칙으로 여겼던 조상들이다. 어려운 이웃 고통을 가슴으로 공감하며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을 중시해왔다.


 그래 옛 여인들은 장도를 가슴에 품고, 남정네는 허리춤에 찼다. 이 때 장도는 정신세계를 환히 비춰주는 치레 도구였다. 요즘 세태는 어떤가. 자신 삶이 불행하다고 타인 행복을 부러워한 나머지 무작위로 사람 생명을 해치는 세태 아닌가. 인터넷에 칼로 사람 찌르겠다는 장소까지 과감하게 명기 하는 것 역시 그렇다. 

이참에 외람된 말 한마디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나이 15세가 되면 관례를 올릴 때 여자든 남자든 장도를 건넸다. 여인네에겐 자신의 정조와 절개를 굳게 세워 지키는 상징물로 삼게 했다. 남정네들에겐 의리, 충정을 갈고닦는 인격수양을 위한 대상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은 예로부터 귀한 생명을 해치는 흉기가 아니다. 자신을 지키는 방어용이었던 점을 깊이 인식, 더 이상 타인을 공격하는 칼날을 시퍼렇게 갈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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