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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샘 Aug 08. 2021

성냥팔이 소녀가 행복하려면

 영하 10℃ 밑으로 내려간 차가운 날이었다. 핸드폰이 ‘붕’하고 울었다. 재난문자 일터였다. 오늘 만해도 몇 개를 받은 건지, 동파도 주의하고 건강도 조심하고, 우리나라는 내 걱정에 바쁘게 핸드폰을 흔들었다. 정작 나에게 날도 추운데 어서 집에 들어오라고 전화해 줄 가족은 모두 비행기를 타고 떠났는데 말이다. 가능한 높은 곳에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날아간 하늘을 보고 싶었다. 오늘의 하늘을 카메라에 꼭 담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의 여운을 트리로 남겨 둔 남산타워에서 아이를 보았다. 많이 잡아도 고등학생 같은 아이가 목에 스케치북을 걸고 있었다. <사진 한 장, 2000원> 내 눈을 찌른 것이 아이의 빨간 손인지, 빨간 손에 들려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인지, 목에 건 스케치북인지 알 수 없었다. 셋 모두였을지도 모르겠다. 

 날은 쩍 하고 갈라질 듯 차가웠고 아이는 돈을 벌기에 어렸다. 어떤 이가 아이를 불렀다. “사진!”이라고. 아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뛰었다. 바람이 아이의 어깨와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목도리가 떨어졌다. 털실로 목도리를 짠 사람의 솜씨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목도리를 주워 드는 짧은 순간에도 차가운 날씨를 막아서기에 충분히 도톰하지도 촘촘하지도 않은 낡은 목도리가 아팠다. 아이가 다시 달려와 목도리를 받아 들었다. 목도리를 잡는 아이의 손이 얼음장이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이 목도리, 엄마 유품이거든요.”

 아이는 많이 아픈 이야기를 웃으며 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를 유심히 쳐다봤다. 돌아서는 아이를 향해 카메라를 잡은 것은 충동적이었다. 차가운 손에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사서 쥐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얼마나 생활이 어려운지 물어봐 줘야 할 것 같은 어른으로서 의무가 말로 나오는 대신 손으로 카메라를 잡았다. 찰칵, 찰칵 소리를 들었는지 아이가 달리면서 고개만 돌렸다. 하지만 그뿐, 사진이 찍힌 걸 알았을 텐데도 아이는 아까 “사진!”이라고 불렀던 사람을 향해 갔다.

 아내가 이혼을 고민해봐 달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던 날, 난 그렇게 비겁했다. 가족을 배웅하러 공항에 가지도 못 했고, 가지 말라고 잡지도 못 했다. 설사 낯익은 사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린아이의 추운 날 하루조차 녹여주지도 못 했다. 못 한 것이 많이 더 움츠러드는 하루였다.     

 아이를 다시 본 것은 사진학과 면접장에서였다. 

 “사진을 찍으면서 행복한 순간이 있었나요?”

 항상 하는 질문이었다. 그때 스케치북을 꺼내 보여주는 학생이 있었다.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멋져요.><눈 오는 날, 남산에서> 각기 다른 필적 사이로 스케치북을 목에 건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의 차가운 온도가, 엄마 유품이라던 목도리가 빠르게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졌던 날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전 아빠가 생일 선물로 주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주말이면 팔각정에서 사진을 찍어요. 한 장에 2000원씩 받고요. 그리고 제게 사진을 찍으신 분들에게 이렇게 응원을 받아요.”

 “돈은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요?”

 뾰족한 질문이 나왔다. 자칫 어두운 사연이 서로에게 상처를 낼지 몰랐다.

 “엄마는 병실에 누워서도 말을 많이 하셨어요. 우도의 하얀 해변 이야기, 너무 덥고 힘들어서 안 걷겠다고 울던 저를 달래며 했던 싱가포르 여행 이야기. 엄마는 잊어버릴까 봐 겁내는 사람 같기도 했고 기억으로 병원 생활을 위로하는 중인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야기 속 추억들이 엄마를 행복하게 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카메라도 사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그래서 엄마 대신 많이 보고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려고요. 아빠에게 이야기하면 도와주시겠지만 제 힘으로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엄마가 장한 딸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면접이 끝나고 교수실로 돌아왔다. 카메라를 찾아 사진을 돌려보았다. 그날 이후에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아서 사진은 금방 찾았다. 단단히 목도리를 두르고 달려가는 아이가 웃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를 도와주지 못한 어른의 도리를 자책하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카메라의 사진을 조급하게 넘겨보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끝까지 보고도 찾지 못해서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안 구석진 곳에서 먼지가 푹푹 쌓여가던 파일을 찾아낸 것은 한 시간 정도 마우스를 잡은 손에서 진땀을 흘린 후였다. 못 찾을 까 봐 정말 무서웠다. 

 처음에는 그냥 많지 않은가, 싶었는데 찾아지지 않자 점점 자신이 없었다. 한 장도 없으면 어떻게 하지? 가족들이 나만 남겨두고 떠난 이유가 이렇게 정당한 것이었다니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드디어 찾아낸 사진 한 장, 삼사 년 전이었다. 낙조가 예쁘기로 이름 난 갯벌이었다. 사진은 기다림으로 완성된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려는데 둘째가 칭얼거렸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는 말이 거의 입을 탈출해 나올 뻔했다. 아이를 달래주려고 찍은 사진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던 아내의 화사한 웃음과 v자를 습관처럼 들고 있는 첫째, 아직 울음 끝을 떨쳐내지 못한 둘째가 보였다. 그리고 낙조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머저리가 있었다.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 한 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아직도 엉덩이 무겁게 앉아 있는 거냐고, 어서 일어나 뛰어야 하지 않겠냐고. 이렇게 덜 떨어진 가족사진 한 장 남기고 끝낼 거냐고. 허겁지겁 달려 나간 밖의 날씨는 오래간만에 햇볕이 가득하니 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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