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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샘 May 31. 2020

배춧국

따뜻하게 녹아드는 겨울밤

 어릴 적, 우리 집은 참 높은 곳에 있었다. 어쩌다 친구라도 데리고 가는 날이면 아직도 멀었냐는 질문에 여러 번 대답해야 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장은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갈 때야 내려가는 길이라지만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필연적으로 오르막길이었다. 봉지봉지 들고 오르던 주부의 고됨이 얼마였을까?

 하루는 엄마가 커다란 배추를 이고 와서 부엌까지도 못 가고 마루 턱에 주저앉았다. 길에서 주웠단다. 길에서 주운 배추는 겉절이가 되고, 국이 되었다.


 남편은 농부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만났지만 본가는 여전히 산을 넘고 강  옆을 흘러 논밭을 한참이나 구경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다.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 어머니는 차 트렁크에 배추 한 통을 넣어주셨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기어이 트렁크에 배추를 넣어주시려고 옮기시는 어머니의 허리가 절로 휠만큼 묵직한 녀석이었다.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것은 어릴 적 엄마가 이고 온 배추 때문이었다. 길에 떨어진 배추 한 통을 기어이 오르고 올라 집까지 이고 왔던 엄마가, 그 배추로 차려 주었던 밥상의 기억이 트렁크에서 배추를 뺄 수 없게 했다.

밥 상 위에 얼마나 많은 면적을 그 배추가 차지했었는지 기억은 내게 설득조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남편과 나는 꽤 오랫동안 배추쌈을 먹어야 했다. 언감생심, 김치는 엄두가 안 났고 한 번은 국을 끓였는데 맛이 묘했다. 나중에야 된장 대신 청국장을 잘못 넣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김장을 하러 시골에 갈 때마다 김치와 함께 생 배추를 열 통정도 챙겨 온다. 한 통씩 신문으로 싸서 상자에 넣은 후 추운 베란다에 놓아둔다. 그러면 두 달 정도는 겉의 시든 잎 몇 장씩을 떼어내며 든든하게 밥상을 지켜준다.

 겨울에 씹는 도톰하고 아삭한 배추쌈도 귀하지만 유난히 추운 날이면 배춧국을 끓인다. 다시마와 말린 표고버섯을 넣고 끓인 물에 배추는 칼을 데지 않고 손으로 뚝뚝 끊어 물 양보다 넘치게 넣는다. 남편은 배추를 넣기 전에 된장 푼 것을 좋아했고 나는 배추가 익어가면 된장을 넣고 싶어 했다. 내 고집대로 하던 것, 이제는 맞은편에 앉아 먹는 사람이 흡족해하는 것이 더 좋은지 된장을 먼저 넣는 쪽으로 바뀌었다.

 넉넉하게 넣었던 배추는 열과 시간을 못 이기고 달고 시원한 물을 뱉어내고 숨도 죽인다. 대신 된장국물을 두둑하게 머금고 보글보글 끓어간다. 전기밥솥도 밥이 다 되었다고 칙폭거리고, 김치 냉장고에서 깍두기만 꺼내놓으면 된다.

 추운 겨울 저녁이-

국물 한 모금에 날숨 한 번을 쉬고,

두께만큼 양껏 뜨거운 국물을 머금은 배추 한 입에 호호거리며 깍두기를 찾는다.

단단하고 시원한 깍두기와 밥알을 함께 넘기며 숟가락이 다시 뜨끈한 국물을 퍼 올린다.


 건조하고 차가운 북쪽 나라에서 온 겨울은 배추 한 통에 기를 못 펴고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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