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이 아는 세상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강단 있게, 삶을 헤쳐가는 여성
이 글은 소설 <착한 척하지 마, 오삼남 1권 - 1부, 2부> 연재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전 연재를 먼저 읽고 오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하게 재구성된 허구이며,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막내야, 은제 올래?”
엄마의 전화 레퍼토리는 변함없다.
은제 올래? 언제 올 거냐는 말.
기다리고 있다는 뜻.
다른 말 하지 않아도,
그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일이 꽉 찼어, 시방 비가 온단디,
감자도 캐야 쓰고,
고추랑 오이도 따야 쓰고.”
삼남은 웃었다.
감자를 캐야 한다며 기다리는 사람.
고추를 따야 한다며 오라는 사람.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보고 싶단 말 대신, 감자를 들이밀었다.
“엄마는 나 일 시키려고 기다리는 사람 같네.”
“뭔 니가 일을 한다냐? 그것이 뭔 일이다냐?
와서 가져가라는 것이제.”
“이제 일 좀 그만해. 채소 안 먹어도 좋응께,
지난번처럼 또 쓰러지려고?
엄마가 오래오래 사는 게 채소보다 크은 선물이라고.”
“하이고. 내 새끼들한테 암것도 못 주믄
내일이라도 딱 죽어불어야제. 일도 못허고,
김치도 못 퍼주믄, 사는 맛이 없어 불제.”
10미터도 지팡이 없이 잘 못 걷는 엄마가
밭에서는 거의 날아다녔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땅을 일구며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무성한 고춧잎과 휘어진 오이덩굴에 자식이 온다는 기대와,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매일 쓰는 중이었다.
삼남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무엇으로 증명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단지 그 역할에 대한 의무감으로
살아있음을 확인받았던 나.
나의 선택이 아닌 환경이 주어지는 대로 순응하며
살아내고 있었던 나.
이제는 삼남 그 자체로 살아보고 싶었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내 선택을 스스로가 존중해 주는 삶.
그 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엄마가 남편을 여의고 오 남매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결정했던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36살의 예쁜 과부는 아이들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리고
시집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문방구를 정리하고, 방앗간을 정리하고,
시골집을 정리하고, 도시 텃밭을 일구던
김순례 여사의 때론 무모해 보이지만,
결국 탁월했던 강단이 나에게도 있을까?
엄마의 텃밭은 그녀가 선택한 것 중
가장 행복한 놀이터였다.
여름내 엄마의 땀방울로 태어난
옹골찬 채소들이 트렁크 한가득 실렸다.
한동안 시장을 보지 않아도 삼남의 집 밥상은 풍성할 것이다.
“엄마, 언능 타. 엄마 집으로 가면 되지?”
“내 오토바이 갖고 가야제. 너 언능 먼자 가그라.”
엄마는 스쿠터 타는 팔순 할매였다.
비록 네 발 달린 전동 스쿠터지만,
헬맷까지 쓰고, 삐에로 같이 불룩한 배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스쿠터 타는 도시 여성이었다.
- 도시 신여성도 순례처럼 스쿠터를 타진 않는다.
30년 전, 순례는 시골에서도 스쿠터를 탔다.
고향땅에서 갯벌을 메운 땅 몇 마지기를 받아는 놨는데
도저히 왕복할 수단이 없었다.
스쿠터 면허를 따,
혼자 논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이 놈이 내 발이고, 손이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무건 감자도 다 실어붕께.”
순례는 도시 농부가 된 후, 운전을 못 하는 게 그리 한이라고 했다.
한글을 읽지 못해 면허를 못 따니
수확물 나르는 게 일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던 순례는 어디서 봤는지
전동 네발 스쿠터를 사달라고 자식들을 졸랐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엄마 너무 위험해서 안 돼.”
오 남매는 한사코 스쿠터 구입을 말렸다.
“네발인디 뭐시가 넘어진다냐.
내가 알아서 할랑께, 언능 돈 걷어라.”
자신이 부은 희생만큼 순례의 요구는 당당했다.
쿠르릉 쿵쿵!
전동 스쿠터에 시동을 걸고,
순례 씨는 텃밭 사이로 난 도로를 미끄러져 나갔다.
삼남은 천천히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삼남이 아는 세상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강단 있게, 삶을 헤쳐가는 여성이었다.
‘엄마....’
그간 결단의 갈림길에서 미적거리며,
미루던 자신의 모습이 겹쳤다.
‘나, 이제 드디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스쿠터가 지나간 자리,
어제 내린 비에 부쩍 키가 큰 풀들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