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4화. 채워줘서 내가 비우고, 비우면 다시 채워주고

엄마 밥 같은 달이 항상 거기에 있었어요.

by 마음리본

이 글은 소설 <착한 척하지 마, 오삼남 1권 - 1부, 2부> 연재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전 연재를 먼저 읽고 오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하게 재구성된 허구이며,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 본 글에 나오는 책들은 이야기 구성을 위해 인용된 것으로, 글쓴이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 걷다> 그림책 카페.

허름한 주택을 개조한 이곳은

70년대 복고풍의 작은 서점 겸 카페이다.

그림책의 한 장면을 그려놓은 듯, 가게 앞은 하얀 벽과 노오란 아치형 문이 이색적이다.

밋밋했던 간판을 지중해식 파란 지붕으로 바꿨고,

지붕 한 편 잘 보이지도 않는 글씨로

'오늘, 걷다 그림책 카페'가 작게 적혀 있다.

오래된 가게들 사이, 전혀 다른 세계 같다.


이곳에선 1주일에 2번 그림책 북클럽이 열린다.

화요일은 학부모를 위한, 금요일은 교사를 위한 모임.

그 모임의 중심에 삼남이 있다.




- 삼남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어린 시절, 깡시골 서종의 작은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삼남은 갖가지 재미난 책들로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사서 선생님과 함께 도서관 문을 닫고, 집에 오곤 했다.

운동장에서 흠뻑 땀 흘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삼남은 그 공간이, 책들이 좋았다.

책의 세계는 삼남을

밝고 귀여운 소녀가 사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가난한 고아가 새로 입양된 캐나다의 한

초록 지붕 집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오래 읽지 않아 먼지가 수북한 책,

손때가 너무 묻어 책 귀퉁이가 찢어진 책

그 책들의 묵은 냄새가 좋았다.

그것은 소녀의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아이를 낳고, 삼남은 0세 아이가 볼 책부터

나이대별 그림책을 섭렵했다.

흑백밖에 구분 못하는 아기의 좌우양옆으로 그림책을 세워두고

고개만 돌리면 그림책을 보게 했다.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었다.

아기는 엄마가 하도 책을 읽어 그림만 봐도 책의 내용을 줄줄 외웠다.


"밤이 되었네. 봐요. 하늘이 깜깜해졌어요."

삼남이 첫 번째 장을 읽고,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아기가 읽는다.

"어, 지붕 위가 화안해지네. 야아! 달님이 떴어요."

<달님 안녕>_하야시 아키고_한림출판사

엄마가 읽어준 톤 그대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읽는 아기.

삼남은 아기가 한글을 읽는 줄 알고, 천재가 아닌가 착각했다.


그런 삼남은 당연히 학급에서도 그림책 수업을 자주 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삼남의 마음도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서관 그림책 동아리를 통해

그림책과 함께 하는 삶에 가슴이 뛰었다.

그림책을 연구하고, 읽어주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삶.

그것이라면, 이후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삼남은 자신만의 또 다른 텃밭을 꾸렸다. -



8명. 북클럽 회원들이 둥글게 모였다.

카페는 주택을 개조한 만큼,

삼삼오오 모여 독서 모임을 하기에 방해받지 않도록,

몇 개의 작은 룸과 4~8명까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마음에 스미는 그림책 한 문장'

(그림책사랑교사모임, 케렌시아, 2024)

이라는 책을 함께 필사하고,

그중 원하는 그림책 한 권으로 함께 이야기 나누는 모임이다.

오늘은 <가시>(이승희 글그림, 고래뱃속)라는 책을 함께 읽는다.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를 손가락질하는 그림자들.

"가시나무 숲 속의 소녀에게

모양도 색깔도 냄새도 무게도 없는 것들이

소녀의 세상을 부순다."


소녀를 향한 말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니가 멘탈이 약해서 그래.'
'꿈은 좀 크게 가져야지.'
'넌 언제 저렇게 될래? 분발해.'

그 말들이 소녀의 가슴을 깊이 찌르고,

가시는 점점 자라나 소녀를 삼킨다.

하지만, 작가는 소녀의 가시덤불 안에도 꽃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진 본질, 고유한 강점,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 소녀를 지켜보는 소년의 따뜻한 시선과 지지를 통해

그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yes24 <가시> 그림책 상세이미지-


함께 그림책을 읽은 후,

한 명씩 돌아가며 나누는 대화.

한 엄마의 말이 삼남에게 꽂힌다.

"여기 나온 말, 제가 아이한테 한 말이에요.

저는 아이가 공부 안 하고, 게임하면 불안해져서

아이를 심하게 다그치게 돼요.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우리한텐 너밖에 없어.

그게 뭐가 힘들어. 다들 그렇게 살아.'

제 아이한테 날카롭고 깊은 상처를 내고 있었네요."

그녀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 후 삼남이 말한다.

"어머님만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그랬어요.

그리곤 한없이 자책했죠.

돌아보니, 제가 불안해서 그런 거였어요.

어린 시절, 잘해야만 사랑받는다는 그 결핍과 불안으로 내 아이를 다그쳤더라구요."

“맞아요. 저도 늘 열심히 살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게 박힌 가시가 또 다른 가시가 되어

내 아이를, 다른 사람을 찌르더라고요."


그날 모임에서는,

부모도 흔들릴 수 있다고,

그렇다고 나의 상처가 자식에게 가시가 되게 하진 말자고,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각자의 내면을 돌아보자고,

자신을 용납하고, 타인을 용납하자고.

다정한 다짐들을 서로 건넸다.




금요일, 치유와 돌봄의 교사 북클럽.

오늘은 오세나 작가의 <문득>(오세나 지음. 달그림)이라는 그림책으로 만난다.

<마음에 스미는 그림책 한 문장> 두 번째 챕터이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달이 엄마의 밥 같다.

흩어진 고소한 달.

곳곳에 마음을 나누고 있는 달.

밥그릇이 차올라 둥글고 노란 보름달이 되는 과정을

작가는 아이디어 돋보이는 일러스트로 따뜻하게 그렸다.

그 보름달은 엄마였고, 이제 그 엄마는 볼 수 없다.

그리운 엄마를 생각하며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제야 알았어요.
채워 줘서 내가 비우고
비우면 다시 채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은 여러모로 삼남의 엄마를 떠올린다.

삼남의 영혼이 고갈되었을 때 채워줬던

엄마의 밥, 텃밭, 눈빛...

그 사랑으로 채워져 다시 비울 수 있었던 시간들.

-교보문고 <문득> 그림책 소개 상세이미지 중-



읽기와 필사 후 함께 나누는 시간.

한 교사의 고백.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요.
수업도, 학부모도, 교무실도…
숨이 막혀요. 제가 뭘 잘못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바닥난 것 같아요.”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깊게 끄덕인다.

옆 자리에 앉은 교사가 위로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매일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나중에 알았어요. 내가 아픈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이라는 걸요.”

"맞아요. 너무 비워주기만 했나 봐요.

우리 자신을 채울 생각을 하질 않았어요."

"채워야 내어 줄 수 있고, 내어 주면 다시 채워야 해요."

삼남은 모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질문한다.

"그럼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 '나'를 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그날 모임은,

각자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충전되는지,

'나'로 존재하는지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내느라 반짝이는 눈빛들.

이미 생각만으로 반쯤 채워진 듯한 충만한 미소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 시간 속에서

삼남 자신이야말로 채워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절망을,

누군가의 어제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돌아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문득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삼남, 이제 진짜 '너'로 걷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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