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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진,『복지의 원리』

왜 국가는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가

by 하하

교과서적이다. 복지의 원리를 사안별로 해부하는 책. 복지국가는 결국 완전고용을 추구한다. 인간적인 노동을 지향할지언정 탈노동을 지향하진 않는다. 노동력의 탈상품화는 복지국가와 엇물린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기본소득을 상당히 신랄히 비판하는데, 그 부분이 재밌다. 물론 '쓸모'는 없기에 기록하진 않았다.





20세기 복지국가의 탄생


최초로 사회보험 도입한 비스마르크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의료보험, 산재보험, 공적연금 등 사회보험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그 이전에도 국가가 복지제공자 역할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구빈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에 의해 아동, 노인, 장애인 같은 극빈자에게 구빈원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보험 도입을 복지국가의 탄생 기점으로 보는 이유는 구빈법처럼 사후적인 가난 구제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가 다뤄야 할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는 무엇인가. 전근대적인 농촌사회에서는 실업, 정년, 은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는 신체가 건강하고 근로의욕이 충만해도 경기순환에 따라 실업이 발생하고, 자신이 속한 기업과 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직장을 잃었다. 아프거나 나이가 들면 공장을 떠나야 하고, 그러면 삶이 막막해진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하자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을 국가의 품 안으로 포섭하기 위한 '당근'으로서 사회보험을 설계했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삶을 보호해줄테니, 체제를 바꾼다고 공산혁명이다 뭐다 하지 말라는 의미다.

주요 사회복지 정책의 입안과 시행이 노동과 좌파정당에 의해서만 주도된 건 아니다. 영국은 노동당 이전에 자유당이, 독일은 전후 기독민주당이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복지정책은 다수의 유권자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부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정치가들은 좌우 및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복지정책의 입안과 시행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 개입이 필요한 이유

** 사회보험 = 공적연금 + 의료보험 + 고용보험 + 산재보험

사회보험의 태동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친 공산주의 운동 때문이지만, 공적 사회보장 시스템의 지속은 그 자체의 합리성 때문이다. 사회보장 영역은 개인보다 국가 개입이 합리적이며, '보이지 않는 손'보다 '보이는 손'이 필요하다.

사회보장제도는 기본적으로 '수평적 재분배', '세대 내 수명에 따른 재분배'의 목적으로 설계됐다.

국가는 '장수의 위험'을 관리하는 데 효과적이다. 사회보장 유무에 따라 장수는 축복 혹은 재앙이다. 개인은 '과연 내가 몇 살까지 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공동체 수준에서 통계적으로 평균수명은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노후자금을 보험료 형식으로 모아둔 후 단명자의 자산을 장수자에게, 건강한 자의 자산을 환자에게 이전한다. 따라서 공적연금 체제에서 개인은 장수의 위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국가는 저축액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차원에서 당뇨병부터 암까지 발병률을 비교적 정확히 예측해 필요한 만큼 보험료 형식으로 돈을 거두어들인 후, 누굴지는 모르지만 병에 걸린 환자의 치료비용으로 쓰면 된다.






복지국가의 철학과 정책


존 롤스 '무지의 장막'

무지의 장막이란, 이기적인 개인들은 다음 세상에 어떤 재능과 결함을 가지고 태어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개인들이 계층, 재능, 성별, 처지 등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자 다른 정의관을 갖게 된다. 무지의 장막을 통해서 총 두 가지의 원칙이 도출된다.

첫째, 자유의 원칙(자본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모든 시민권적 자유를 누구나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로운 발전이 보장돼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최대한의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열린 사회를 만드는 데 합의할 것이다.

둘째, 차등의 원칙(복지국가)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여 이룬 유무형의 사회적 부가 불운한 최소수혜자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차등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 차등의 원칙은 위험에 대한 사회보장을 의미한다. 장애, 한부모가정, 지방 출신, 파산, 실업 등에 대한 사회망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은 보험을 들여놓는 마음으로, 자유의 원칙에 따라 이룩한 사회적 부의 상당부분을 차등의 원칙에 따라 처지가 어려워진 사람에게 배분해주자고 합의할 것이다.

결국 복지국가는 '시장에 대항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장과 함께하는 정치'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가져다 주는 높은 생산력과 부는 복지국가의 물적토대가 되어 위험에 빠진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사회보장을 제공한다. 반대로 복지국가의 사회보장은 자유경제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복지국가의 목표는 '완전고용'

현실세계에서 복지국가는 인간다운 노동을 지향할지언정 탈노동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선진 복지국가일수록 노동과 생산활동을 장려하고 완전고용을 촉구한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위험에 빠졌을 때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을 1차 목표로 하되, 되도록 빨리 노동시장에 복귀하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다.

복지국가가 노동의 탈상품화만을 목표로 한다면 사회의 생산력은 감소하고, 그러면 역설적으로 탈상품화에 쓸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복지국가는 쇠락한다. 분배를 위한 물질적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따라서 소득보장정책은 두 가지 방향을 지닌다. 근로연령대인구 소득보장정책(실업급여)은 조건부이며 단기적이다. 근로 능력이 있으니 기한 내에 노동시장에 복귀하라는 뜻이다. 직업훈련을 받거나 구직활동을 한다는 조건으로 실업급여 지급되고, 그 기간도 최대 270일으로 정해져 있다. 반면 노인, 아동, 장애인처럼 근로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소득보장을 위한 근로조건이나 급여기한에도 제한이 없다. 연금이나 장애수당은 사망 시까지 나온다.

나아가, 근로자의 직업능력을 키워 실업을 예방하고 실업자를 노동시장에 복귀시키기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고안됐다. 국가가 직업훈련을 시켜주고 취업을 알선해주며,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고용을 촉진하고, 디딤돌 일자리를 직접 창출하기도 한다. 고용노동부의 취업성공패키지가 대표적이다.


재원에 따른 사회복지정책 구분

[사회보험료] 4대보험(연금, 의료, 고용, 산재)

사회보험료가 재원인 소득보장정책은 대부분 소득비례형이다. 즉 내는 만큼 보상이 온다. 더 내면 더 받는다. 사회보험료도 세금이지만 중산층의 순응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다.
보험제도의 특성상 수직적 재분배보다는 수평적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즉 고소득계층에서 저소득계층으로 재분배가 발생하기보다는, 자동차보험처럼 위험에 빠진 사람에게 소득이 이전된다.

[일반재정] 취약계층 복지(기초연금, 의료급여 등)

형편이 어려워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를 완화하기 위해, 일반재정에서 '짝꿍'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는 기초연금이, 건강보험의 사각지대는 의료급여가, 그리고 실업보험의 사각지대에는 실업부조(국민취업지원제도)가 메운다.
따라서 사회보험보다 수직적 재분배, 즉 고소득자로부터 저소득자에게로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크다.






한국은 '작은 복지의 나라'


2021년 기준 한국의 공공사회지출은 GDP 대비 14.4%로 OECD 평균 23.0%의 60% 수준이다. 한국은 '작은' 복지국가다. 사회서비스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의 수준이 높지 못하며, 소득대체율이 다른 유럽의 복지국가보다 낮거나 급여상한마저 낮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주도 수출지향 산업화

한국은 서구 복지국가와 달리 국가주도 산업화를 이뤘다.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은 국내 시장을 보호하며 산업을 키우는 '수입대체 산업화' 대신 독특하게도 '수출지향 산업화'를 택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산업화 초기, 풍부한 '저임금 노동'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지탱했다. 국가는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인상 억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따라서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기현상을 보였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이 국가주도로 실현된 셈이다.

노동비용을 낮추기 위해 임금인상과 복지를 억제하며 '저부담 조세체계'가 자리잡았다. 노동비용 상승을 불러오는 각종 사회보장제도는 미뤄둔 대신, 소득세 등 세금을 낮춰 가처분소득은 최대한 높여주고 근로와 투자를 장려했다.

이른바 '레이건 없는 레이거노믹스' 시대다. 서구에서는 불경기에 감세를 통해 경기를 진작하는 정책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등장했고, 1970년대는 불경기에 세금을 올리는 케인스주의의 시대였다(이걸 이어받은 게 소주성). 그런데 박정희는 레이건보다 10년 앞서 감세정책을 단행한 셈이다.


기업별 노조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낮지만,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수출대기업과 공공부문은 거의 조직화돼있다. 2019년 기준으로 300인 이상 대기업은 노조조직율이 88.7%이고 공공부문 조직율은 70.5%이다.

그러나 한국은 기업별로 단체협상이 이뤄진다. 따라서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노동시장의 문제, 연대임금제, 빈곤 등 사회적 이슈를 노사 협상테이블에 올리지 못한다. 임금인상이나 복지확충 같은 기업 내부 이슈가 노조 단체협상의 단골 주제다.

반면 유럽의 노동 운동은 전국 혹은 산업별 노동운동 형태를 띤다. 노사 간 단체협상은 전국 혹은 산업별 수준에서 이뤄진다.

한국에선 노조가 조직돼 있고 지불능력이 있는 대규모 사업장의 임금과 복지는 지속적으로 향상되었지만, 노조가 조직되지 못하고 고용주의 지불능력도 떨어지는 중소기업은 임금과 복지 수준이 정체한다. 또한 공공부문과 대기업의 조직화된 노동자군은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난 공공복지 확대에는 소극적이다. 고용도 안정돼 있고, 임금도 높으며, 기업복지로 자녀 학자금까지 회사에서 지원해준다고 하니 실업급여를 높일 이유도, 반값등록금을 요구할 이유도 없다.


소선거구제와 대통령제

소선거구제는 조그만 지역구에서 1등 당선자를 국회로 보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지역개발 현안이나 지역구 서비스 확충과 관련한 선거 공약이 득표에 유리하다. 공공복지의 의제화와 입법화는 뒤쳐지고, 지역 현안이 더 관심이다. 반면 비례대표제는 정당지지율이 중요하다. 정당은 전국을 상대로 지지를 동원해야 한다. 복지 같은 공공정책이 주요 선거공약이 될 확률이 크다.

대통령제에서는 증세에 민감하다. 대통령은 온전히 그 정치적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비례대표를 채택한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지지가 철회된 만큼 의석을 잃기 때문에 비인기 정책에 대해 대통령제 국가만큼 민감하지 않다. 비난을 나눠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10%의 지지를 잃으면 그만큼의 의석이 준다. 전부를 잃는 게 아니다. 1등이 모든 걸 가져가는 승자독식 구조에서만큼 납세에 민감한 중산층 유권자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국민연금


국민연금은 1988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1995년에는 농어촌 거주자, 1999년에는 도시지역 자영자에게 적용돼 전국민연금 시대를 열었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제도는 급여 방식은 확정급여, 재정 방식은 부과방식, 관리 방식은 공적관리를 택하고 있다.


확정급여 vs 확정기여

확정급여란 먼저 소득대체율을 확정한 후, 이에 의거해 보험료율을 정하는 방식이다. 국민 개개인 입장에서는 미래에 받는 연금액이 예측 가능하고 사망 시까지 받을 수 있는 확정급여 방식의 공적연금이 노후소득 안정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그러나 고령화시대에 국가는 재정파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보험료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기업은 고용비용이 증가하기에 고용을 줄일 것이고, 근로자도 가처분소득이 줄어들어 소비가 위축된다. 그러면 국가는 보험료 부과대상의 소득 자체가 줄어들어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스웨덴은 공적연금 보험료율이 소득의 18.5%, 독일은 22%를 넘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 두고, 대신 자동안정화 장치를 도입했다.

반면 확정기여는 미리 얼마를 줄지 약속하지 않는다. 미리 확정된 건 보험료율 또는 보험료액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납부 기간 동안 이자가 얼마 붙어서 내 연금자산이 얼마가 됐는지가 중요하다. 한국의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에 이에 해당한다.

복지국가의 대명사 스웨덴은 1999년부터 확정기여 방식을 채택해 수명증가에 따른 추가적 부담을 국가가 아닌 개인이 떠안게 했다. 각자가 낸 보험료와 그 이자로 형성된 자산만 노후세대를 위해 쓰는 것인데, 그 이상은 근로세대에게 부담이라고 본 것이다. 그로 인해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으면 의료, 요양 등 사회보장비용을 근로세대로부터 염출하지 못하고 공공서비스의 양과 질이 저하된다.


부과 vs 적립

적립은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걷어 기금을 조성해놓고 수급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반면 부과는 그해에 필요한 연금지출을 그해 보험료로 부과해 충당하는 방식이다. 보험료 부과대상은 근로자들이고, 연금 수급자는 노인이므로 세대 간 소득이전을 전제로 한다.

국민연금 적립금이 금방 고갈되는 이유는 '저부담-고급여 체계' 때문이다. 지출에 비해 수입이 너무 적다. 우리나라는 국민연금에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어 고소득자의 소득대체율은 낮고, 저소득자의 소득대체율은 높다. 그런데 저소득자든 고소득자든 모두 국민연금 수익비가 1이 넘는다.

생산인구의 감소와 노령인구의 증가도 하나의 원인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에 저출생이 겹쳐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한다. 수명이 길어져 생기는 재정문제는 수급개시연령을 뒤로 미루는 식으로 대처하고, 생산인구 감소는 이민자를 받아 들이고 과감한 출산장려정책을 통해 문제를 완화해야 한다.

투표권을 가진 현세대 가입자들은 저부담-고급여 체계의 수혜자들이다. 후세대를 대표할 사람은 청와대와 국회에 없다. 지금부터라도 재정 안정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스웨덴은 소득의 18.5%, 독일은 22% 수준에서 보험료율을 법으로 동결하고, 연금액을 자동삭감하는 고육지책을 택했다. 대신 인생 이모작이 가능하게 노인 일자리를 늘리고 정년을 연장하는 정책을 병행한다. 그리고 부족해지는 노후소득을 개인연금 등 적립 방식의 사적연금으로 보완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퇴직연금이 있다.


크레딧

스웨덴을 비롯한 많은 선진 복지국가들이 출산크레딧 제도를 운영한다. 우리나라도 아이 숫자에 따라 최소 6개월에서 최대 50개월까지 연금료를 납부한 것으로 카운트해주는 출산 크레딧을 제공한다. 군복무자에게는 6개월짜리 군복무크레딧을 제공한다.

문제는 한국 정부는 크레딧을 부여하면서 해당자의 보험료를 납부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웨덴, 영국, 독일 등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크레딧 부여와 동시에 그만큼의 보험료를 현 정부가 수혜자 이름으로 현금 납부해준다. 그래야만 후세대 부담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크레딧만 부여하는 것은, 선심은 현 정부가 쓰고 뒷감당은 후세대 정부가 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고령화로 인한 추가 비용, 저부담-고급여로 발생하는 적자보전 비용, 유족연금과 사망일시금 비용, 각종 크레딧으로 인해 늘어난 추가 비용을 모두 미래 세대가 떠안아야 한다.





노동시장정책


노동력이라는 상품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다만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규제와 보호를 받는 특수한 상품이다. 본래 마르스크가 상정한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자본가는 필요에 따라 고용/해고를 할 수 있는 시장이지만 이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아동 노동 보호다. 19세기 초 산업화 시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린아이의 노동은 일상적이다. 감필드라는 굴뚝 청소부는 고아원에 사는 올리버를 견습생으로 데려가려 하는데, 몸이 작아 굴뚝 깊숙이 들어가서 청소를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교도 못 가고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저임금에 혹사당하는 아동 문제는 자유 시장에 맡겨둘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공장법 제정을 통해 18세 미만 연소자의 노동시간이 하루 12시간을 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연소자가 일하는 작업장 주변의 증기기관에는 보호 펜스를 설치하는 등 산업안전에 관한 규정도 생겼다.

산업재해 보호도 생겨났다. 고장 난 상품은 버리면 되지만,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쓸모 없어졌다고 버릴 수 없다. 노동력은 본인과 가족의 생계수단이다. 산재는 일시적인 노동력 상실에 머물지 않는다. 평생 노동시장에서 퇴출될 위험도 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산재보험을 도입해 산재보상의 고용주 책임을 명확히 하고, 산재보험의 보험료를 고용주가 전액 부담하게 했다. 산재가 발생하면 노동자는 기존 소득에 비례해 보상을 받으며 의료 및 재활 치료를 받는다.


소극적 &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실업은 개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해고 등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발생한다. 조선업 구조조정 사례에서 보듯, 경기순환과 산업 부침 때문에 특정 산업에 집중되기도 한다. 1997년 IMF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로 대량실업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실업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회적 위험이다.

더군다나 보험은 위험을 '분담'하는 제도인데, 실업의 위험은 같은 회사, 동종 산업, 국내 경기의 부침에 따라 '같이' 움직인다. 이런 경우 보험회사는 선뜻 실업보험 상품을 내놓지 못한다. IMF 때처럼 실업의 위험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보험회사는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실업보험을 도입해 사회적 위험에 노출된 근로자들을 소득상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나 4대보험 중 가장 늦게 도입된 게 바로 실업보험이다. 실업급여가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여주기 때문에 노동력 구매자인 자본가들이 반발했던 것이다. 노동자가 실업 중인데도 생계가 막막하지 않다면, 다소 배짱을 부리며 보다 만족할 만한 일자리를 찾아 탐색에 탐색을 더할 것이다. 실업보상은 노동력을 사고파는 데 엄청난 간섭 요인이 되는 셈이다.

실업자에게 실업급여만 주는 게 아니라 노동력의 상향이동을 도모해야 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OECD에서 권고하는 노동시장정책의 표준이 됐다. 장기실업자, 이민노동자, 경력단절여성, 청년 등의 직업능력을 배양해 취업가능성을 높이고, 실업자를 노동시장에 복귀시키고자 해야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듯, 산업화 시기에는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노동보호가 작동하지 않는 노동시장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 교육공무원법 등이 적용되는 안정적인 공공부문 노동시장도 존재했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노동3권이 보장되고 근로기준법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고용보험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점차 양분되기 시작했다. 1차 노동시장은 고용안정성, 높은 인금, 우수한 근로조건을 보장받는 시장이다. 공공부문과 대기업이 해당한다. 반면 2차 노동시장은 불안한 고용관계, 낮은 임금에 시달리며 사회적 보호로부터 배제된 시장이다. 중소규모 사업장과 자영업자들이 해당한다.

어느 나라나 노동시장 내 분절이 존재한다. 노동력의 상품가치에 따라서만, 즉 직무능력에 따라서만 채용 여부, 임금, 근로조건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규모, 정규직/비정규직, 남녀, 내국인/외국인, 나이 등에 따라 동일한 직무능력을 갖고 있어도 임금, 근로조건, 복지혜택 등이 달라진다. 4차산업혁명이 진행되며 고학력 전문인력과 단순노무인력의 임금격차는 더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다.

이동성이 낮은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나쁜 일자리로 간주된다. 노동시장 내 양극화가 진행돼도 평생교육, 직업훈련, 직업경험 등을 통해 2차 노동시장에서 1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면 노동시장은 건강하다. 그런데 1차와 2차 사이에 이동이 원활하지 않다면, 즉 노동시장의 이중화가 진행된다면 노동시장의 분절 이상으로 사회문제가 야기된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그런 양상을 보인다. 한국은 비정규직이 3년이 경과해도 22.4%만 정규직이 된다. 한 번 비정규직이면 영원히 비정규직인 셈이다.


노동 시장이 가야할 길

노동력의 가치대로 보상받도록 호봉급을 직무급/성과급으로 바꿔야 한다. 어떤 노동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 얼마나 오래 재직했느냐가 보상을 결정한다면 근로자 스스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직무역량을 높일 유인이 없다. 보상체제를 바꿔야 노동자가 직무역량을 높일 유인을 찾고 상향이동을 도모하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직무능력 향상을 위해선 학교에서 직업세계로의 이동뿐만 아니라, 재직 중 교육과 훈련의 병행을 도와야 한다. 더불어 근로능력이 남아 있는 경우 점진적 은퇴가 가능하도록 고용-은퇴로의 이동을 관리해야 한다. 강한 연공급제하에서 고령자의 고용연장을 위해서는 임금피크제를 확대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또 점진적 근무시간 단축, 고령자 활용 보조직무 개발과 보조금 지급을 고려해볼 수 있다.

직무가치에 따라 보상이 이뤄지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도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시간제라고 해서 임금 단가가 떨어질 이유도 없다. 시간제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킨다. 탄력적인 근무는 일-가정 양립을 돕고, 일-훈련/교육을 병행할 수 있게 한다. 한국에서는 시간제가 기피 대상이지만, 노동운동의 역사가 깊은 유럽에서는 시간제가 일반적인 노동 형태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결국 핵심은 노동자의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높여 일-가정 그리고 일-학습의 양립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근무시간 감소에 비례해 임금은 깎이지만, 사용자의 필요가 아니라 노동자의 욕구에 따라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노동의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니라, 생활패턴과 기술변화가 야기하는 노동시장의 수요 변화에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


적극적 육아지원정책

육아수당은 가정 내 자녀양육에 대한 지원을 통해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는 논쟁적이다. 육아수당이 여성들의 가정 내 육아를 유인하고 기존의 가족 내 노동분업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대안으로는 공보육이 있다. 여성이 일하러 나가고, 아이는 보육시설에서 돌봐주는 방식이다. 여성의 가정 내 양육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여성의 직장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구문제의 위기>를 출간한 스웨덴 뮈르달 부부는 출산과 양육을 개별 가정의 책임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이 출산은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생산인력을 공급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외부경제(external economies)를 낳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성이 육아로 일을 그만둬선 안 된다고 봤다. 생산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공동체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더 많은 여성 노동력의 노동시장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결과는 탈가족화다. 육아와 노인부양 등을 사회화하여 가정 내 여성의 돌봄을 줄이는 경향이다. 보살핌을 받는 자(아동, 노인)의 입장에서 탈가족화는 가족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린 노인은 이제 요양원에서,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보살펴 준다.


미국식 자유주의 경로

미국은 가족정책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다. 법정 육아휴직제도 자체가 없다. 공보육 제도 또한 없다. 아동수당도 없다. 물론 연방정부 차원의 제도는 있지만, 유럽 복지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일-가정 양립을 돕는 사회정책은 부재하다. 그런데도 출산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남미 출신의 이민자, 즉 히스패닉의 높은 출산율이 전체 출산율을 끌어올린다. 2020년 백인 여성의 출산율은 1.55인 반면, 히스패닉의 출산율은 1.88이다. 남미 출신 이민자의 비중이 커질수록 출산율은 오르는 구조다.

둘째, 개별 고용관계에 근거한 유연한 노동시장이 발달했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성과와 보상에 기반한 개별협상을 통해 임금과 근로조건이 결정된다. 임신, 출산, 양육을 고려해 근무시간과 임금이 개별적으로 협상되고 결정된다. 재택 등 근무형태도 비교적 자유롭다. 노동시장이 자유로운 만큼, 휴직이 아닌 퇴직을 하더라도 재취업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중화된 노동시장이 아니어서, 경력단절 여성이라고 비정규직에만 맴돌지 않는다.

결국 미국의 일-가정 양립과 출산율 유지는 사회정책보다는 노동시간의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근로자에게 시간통제권이 있는 경우, 교육훈련과 육아의 사유가 발생하면 근로자는 전일제 근무에서 시간제 근무로의 변경을 고용주에게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의 저출생 정책

한국은 그간 저출산 대책으로 공보육에만 의존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0세아와 1세아 영아의 취원율은 OECD 국가 중 최고이고, 3세아 취원율도 94.1%로 북유럽 수준이다. 반면 소득보장에 매우 인색하다. 고용보험 모성보호사업이 있긴 하나 고용보험 사각지대가 넓어 수급권을 가진 사람이 제한적이다. 게다가 수급권이 있어도 육아 휴직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용한다고 해도 직장 복귀를 서두른다. 소득 상실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사회정책 차원에서 출산율을 끌어올리려면 공보육만으로는 안 된다. 공보육과 소득보장의 쌍두마차를 가동해야 한다. 아이를 낳게 되면 일을 그만둬야 해 실업자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되고, 아이를 키우느라 전에 없던 가계지출이 추가로 발생한다. 금전적으로 이중고다. 윤석열 정부에서 부모급여제도가 도입됐다. 고용보험에 가입돼있지 않아도 누구나 지급받기에 소득보장 수준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도하다가 중단된, 소위 정규직 시간제의 확대 등 노동시간의 유연성 제고를 위한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가족정책의 강화와 함께 직장 내 육아에 대한 포용적인 분위기, 남성의 가사분담이 당연시되는 문화, 남녀 간의 법정혼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결합 형태를 인정하는 법제도, 그리고 주거비와 교육비의 안정 등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매년 저출산 대책에 수십조 원씩 쏟아붓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2021년 한해 '저출산.고령화 기본계획' 기준 예산 43조 중에 출산.난임 지원과 양육과 보육 및 가족정책 지출 등 저출산에 직접 관련된 예산은 13조 9614원으로 32.5%만을 차지한다. 아동에 대한 투자, 여성의 경제활동을 돕는 정책 비용은 투자한 만큼 회수가 가능하다. 이 비용을 아끼면 당장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생산인구 감소도 막을 수 없다.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 구조의 핵심 고리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사회적 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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