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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정치의 발견』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 싶다면

by 하하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앞으로는 정치인들은 왜 저렇게 싸우기만 할까, 투덜대지 않기. 나 대신 싸우라고 뽑은 사람들이다. 정치는 시민들이 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절반의 진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우리에겐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한 정치체제다. 갈등은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갈등을 사회화해야 한다. 갈등이란 지역, 종교, 소득, 직업, 성, 고용형태 등 우리가 서로를 정의하는 사회적 차이를 뜻한다.

'갈등의 사회화'란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를 개별 사업장 혹은 노동시장 문제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구조나 경제체제의 운영을 둘러싼 갈등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달하는 것은 정치의 기능이다. 그리고 현대 정치의 핵심 기구는 정당이다. 갈등이 공적 영역에서 정당에 의해 조직되면 갈등의 규모는 커지지만 갈등의 수는 줄어든다. 민주정치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정당을 통해 갈등의 수를 줄이되 갈등 규모는 '사회화'해서, 가장 바람직한 공익이 무엇인지 정당들이 서로 달리 대표하게 하고, 그렇게 형성된 공익적 대안이 선거에서 경합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와 '정치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가 다르다면? 특정 인종이 사회적 차별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집단적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배제돼 있다면?

갈등의 범위가 기업과 시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되기를 원하는 건 약자들이다. 반면 상층계급은 갈등의 민영화, 사사화를 선호한다. 그들이 노사 자율주의나 규제 철폐를 외치는 이유다. 사적 영역에선 강자가 승리하는 반면 공적 영역에선 약자들이 자기방어를 위해 세력을 규합한다.

-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민주주의는 그 말이 시민권을 갖는 과정에서부터 노동운동과 보통 사람들의 언어였다. 현대 민주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사회 하층의 배제에 반대하는 정치 언어이자,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정치적으로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정체였다. 투표할 권리를 갖지 못했던 노동자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의 성과와 함께, 진보적인 세력이 대중정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발명해 기존 체제에 도전했던 게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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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서다. 다시 말해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뒤이은 세계대전의 비극적 경험을 거치고 나서야 "좌파는 혁명을 포기하고 우파는 착취를 포기하는 길"을 받아들였고, 그 위에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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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럽과 같이 '자유주의적 전환'을 내용으로 하는 정치 변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근대 이전의 구체제가 제국주의에 의해 해체됐기 때문이다. 입헌주의와 보통선거권 그리고 정당의 출현 역시 해방 이후 미국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별다른 사회갈등이나 정치투쟁을 동반하지 않고 위로부터 하사하듯 실현되었다. 분명 제도로는 민주주의인데 그 안에 아무런 사회적 내용도, 정치적 갈등과 폭력의 흔적도 각인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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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상황 전개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 불릴 만한 현상이다. 바람직한 정치적 가치들이 모두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유주의적 요소도, 공동체주의적 요소도, 사회주의의 요소도 쉽게 민주적인 것으로 이해됐다. 좋은 것은 다 민주주의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과도한 단일 척도로 기능함에 따라 문제는 '민주주의의 후퇴냐 진전이냐'로 단순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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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직접민주주의 정치는, "노예와 여성에게 생산과 재생산을 전담시킨 남성 시민 집단의 여가"에 기초했다. 그것도 아주 작고 동질적인 통치 단위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이었다. (...) 대규모의 영토 국가, 대규모의 시민, 사회적 기능의 분화와 전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시민의 직접 통치 내지 집회 민주주의, 광장 민주주의를 대안 말하는 건 비현실적인 동시에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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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도 대규모의 사회 구성원에게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부여한다. 계급, 성, 출생, 신분의 차이와 상관없이 시민권을 부여한 체제는 현대 민주주의밖에 없다. 정치권력의 교체가, 폭력을 동반한 정변의 형태를 띠지 않고 정당 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서 실현된 것 역시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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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투표율이 낮은 것의 책임을 시민의 무지, 무관심, 무기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공동체 내의 좀 더 부유한 계층이 보여 주는 매우 전형적인 행태이다. 이는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늘 하층 계급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던 논리다. "시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이 만들어진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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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잘 활용하는 정치체제는 무엇인가. 시민이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당 대안이 있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자신의 정당 대안을 갖는 시민만이 주권자로서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권력은 유권자들이 만들어내는 결정의 중요성에 달려 있지, 그들이 행하는 결정의 수에 달린 게 아니다.(...) 문제는 깨어나지 못한 시민이 아니라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치 세력에 있다.





정치는 중요하다

집권하는 민주주의여야 한다. 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으로는 불평등하다 해도 정치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시민권의 기초 위에 서있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민주주의는 시민 스스로 만든 법과 제도에 시민 스스로 복종하는 체제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져도 시민이 입법자가 아니라면 그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러려면 시민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도, 호남도, 비정규직도, 여성도.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약자 집단도 무시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온정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 시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커진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집권할 수 없다면, 문제의 해결을 지배 세력의 각성과 온정주의에서 구하게 되는 종속적 심리가 계속된다. 약자 문제 해결은 정부로부터의 온정적 시혜가 아니라 민주정치가 책임성을 발휘해야 할 과업이자 시민의 정당한 권리로 인정돼야 한다.

흑인 대통령의 출현이 뿌리 깊은 인종적 차별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흑인들의 시민적 자존감을 이보다 더 획기적으로 높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있어, 비정규직 노동자에 기반을 둔 정당 내지 후보가 당선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 없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한다. 대신 그들은 정치와 정당, 정치가를 욕하고 비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위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정치, 정당, 정치가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나 대책 없는 야유가 사실은 민주주의를 향한 공격일 때가 많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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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치주의는 왜 문제인가. 앞서 지적했듯 내심 민주주의를 싫어한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한다. 대신 반정치주의를 동원한다. 정당에 가입하고 투표에 참여하는 일을 무가치한 일로 치부하고,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면 정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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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 또한 다르지 않은데, 이들에 의해 기술되는 현실의 민주정치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당리당략을 둘러싼 싸움" 이상이 아니고, 정확히 그 지점에서 모든 분석은 멈춘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전제하는 정치란 갈등적이지도 않고 정략도 계산도 작용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유기체주의 혹은 전체주의적 정치관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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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1980년대 민주화를 가져다준 힘은 운동에서 왔다. 학생운동이 앞장섰고 노동운동 등 각종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분출된 힘은 대단했다. 하지만 운동의 힘을 더는 기대하기 힘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라면, 이제 그 과업은 자기희생적인 운동을 통해서가 아닌, 정치가 좋아지는 것을 통해 실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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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는 건 유권자가 가진 한 표가 중요하게 고려될 때 가능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투표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강자 집단의 표도, 다수 집단을 이루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표도 모두 1인 1표라는 평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 (...) 이념적, 계층적 대표의 범위가 충분히 넓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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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된다. 이때 그 사회의 민주적 성취는 노동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의 이익과 열정이 기업 운영과 노사관계, 정당 체제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느냐에 달렸다. 어느 사회든 보수 집권 기간이 길기 마련이고 사용자 측의 영향력이 더 크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치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노동의 시민권이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의 형태로 조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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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 불평등과 빈곤 문제, 다양한 사회 해체 양상으로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때문이라는 대답은 공허하다. 그건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진보 정당 있는 민주주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더 깊고 더 넓게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

정치는 윤리적 딜레마를 수반한다. 정치는 한편으로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 그것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복종과 의무를 부과해야 하기에, 필연적으로 강제력에 기초한다. 권력의 본질은 조직적 물리력이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악마적 수단'을 동원하는 셈이다.

베버에 따르면 국가란 폭력을 독점하는 존재다. "특정의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이자 "폭력/강권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국가를 둘러싼 권력 투쟁을 그 핵심으로 하는 정치 세계에서 의도의 선함에만 의존하는 '신념 윤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과에 대한 신중한 판단을 중시하는 '책임 윤리'가 매우 중요하다.

정치가는 '악마의 수단'을 손에 쥐어야 하는 바, 그의 정치행위가 갖는 윤리성을 도덕적 삶에서 찾을 수 없다. 정치는 선악의 기준과 다른 별도의 차원을 갖는데, 그것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의 과업을 잘 해냄으로써 선한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적 조건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 또 정치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이 더 넓고 풍부한 세계다. 같은 진보파라고 해서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잘못을 덮어 두어서도 안 되며, 반대로 보수파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배울 점이 있으면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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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그간 우리 사회의 진보파는 운동론으로 이야기되는 '저항의 정치학'에는 익숙한 반면 '통치의 정치학'을 익히는 문제는 의식적으로 회피해 왔다. 체제와 정부, 정당을 비판하는 일을 넘어 스스로 체제와 조직의 운여자가 되고 통치자가 되어 성과를 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는 일과 그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잘 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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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을 기점으로 진보적인 정당들도 의석을 갖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뒤 진보 정당들은 정파 갈등 때문에 끊임없이 분열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 절정이었다. 통합진보당은 같은 해 4월 총선에서 13석의 의석을 얻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지만, 곧바로 내부 갈등에 휩싸여 다시 분열했는데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거의 재난에 가까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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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중요한 건 지도자의 역할이다. 제도와 절차, 법규와 같은 형식적 규율만으로는 좋은 조직, 좋은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없다. 정당 정치에서 문제의 핵심은 '리더십 있는 정당 민주주의'가 작동하느냐다. 현재는 정당을 어떻게 잘 운영할지, 규율과 리더십의 역할을 어떻게 잘 제도화할지, 이견을 조정하고 당내 다원주의를 어떻게 뿌리내리게 할 지와 같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업'을 위한 집합적 에너지를 모으려는 노력보다, 왜 내 생각대로 안 되냐고 서로 화만 내고 그 탓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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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에게 신념 윤리는 좋은 정치의 출발점이다. 신념에 기초를 둔 소명 의식 내지 대의에 대한 헌신이 없는 정치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점, 신념 윤리와 별도로 책임 윤리가 필요함을 말했다. 여기서 책임 윤리는 신념 윤리의 연장선일 수 없다. 초심, 진심, 진정성만으로 정치에서 가능성을 개척하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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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늘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존재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의 윤리적 기준은 신념 윤리가 아니라 책임 윤리라고 말하고, 신념의 토대 없이 정치적 유능함만을 추구하는 정치가라면 그런 '도덕적 비애감'이 있을 수 없다. (...) 정치란 위험한 분이야고 잘못된 결정이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자각이 더해지면, 누구든 타인의 의견 내지는 이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





혁명, 운동, 정치

진보파들은 '운동'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듯한 강박관념으로 정치를 했다. 이들이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인 담론 안에서 자족하는 현상은 흔하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적 소극성을 강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곤 한다는 거다. 타협해서는 안 된다며 독자성을 고수하는 건 주변적 지위를 고착시키곤 한다. 진보 세력이 방치한 공간은 적극적 정치 참여를 주장한 극우의 차지가 된다.

반민주적 좌파 내지는 혁명적 좌파와의 싸움이 더 힘들다. 반민주적 좌파는 기존의 정치체제, 현존하는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개혁이나 정치 참여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때, 즉 기존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할 때뿐이다. 반면 민주적 좌파는 노동자나 서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며, 정치 참여와 개혁, 타협을 모색한다.

진보 정당이 해야 할 역할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해 서민 대중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 이른바 '정치의 방법'에 대한 문제다.

진보적인 것은 선한 의도와 목적을 지향하지만, 정치적인 것에는 인간이 갖고 있는 악의 요소, 어두운 측면이 함께 있다. '진정성으로 정치하라'는 윤리적 태도는 진보 운동에 일생을 바친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말라며 이견을 억압하기도 한다. 자신은 권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강변하거나 권력에 물들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는 '아름다운 진보'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

정치에 존재하는 '권력'을 이해하고 그것의 긍정성을 선용하며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 권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도당이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정치 전략은 없다. 그들은 현실의 민주정치가 가져다준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정부에 참여할 기회는 거부되었고, 다른 정파와의 협력도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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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를 경제 혹은 물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2차적 혹은 종속적 현상으로 보게 만들기 쉬우며, 궁극적으로는 '정치의 종식'을 지향하는 이론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와 유사한 '경제 중심주의'의 특징을 갖는다. 어떤 경우든 지나친 경제 중심주의는 곤란하다. 경제는 인간 공동체에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하위 체제로 이해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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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혹은 혁명의 방법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 혁명론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 사고를 강화하기 쉽고, 실제 혁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반정치적인 사고 경향 때문에 혁명 이후를 전체주의로 이끌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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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없는 세상? 그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고결한 종교를 앞세운 교황의 지배, 인종적 순수성에 의존했던 나치즘의 지배, 역사의 발전 법칙을 알고 있다는 공산당의 지배가 가져온 재난적 결과를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복수의 정치적 비전들이 존재하고 경합하는 조건 위에서만 성장한다. 하나의 진정한 민주주의, 하나의 진정한 정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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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유지를 바라는 보수는 현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만 현실의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 세력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믿게 해야 하는 '확신의 딜레마'에 놓인다. '이념'은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합리적 기제 중 하나다. 이념이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이념을 만든다. 따라서 뭐가 진보냐 하는 이념성 그 자체로 문제에 접근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실천 가능한지, 성과를 낼 수 있는지의 기준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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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 정치에서 정당은 곧 국가의 통치권을 두고 경합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적 표현과 같은 것이다. 응당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완화시키는 설득력 있는 이념이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리더십의 발전 및 조직적 권위의 확립, 규율의 체계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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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원리로 조직된 시장 메커니즘이 생산적 자원의 분배와 할당을 지배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화의 가장 강력한 기제는 민주주의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조직된 민주주의 정부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 갈등을 만들어내는 여러 집단들의 이익과 열정을 경쟁적으로 동원해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당 정치의 민주적 효과가 작용하지 않는 한, 가본주의 시장의 분배 구조에서 소외돼 있는 약자들의 요구가 정부의 정책 결정에 반영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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