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세상물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막스 베버 대신 맥도날드를 논하는 식. 거추장스러운 이론에 얽매이지 않아 좋다. 내용은 물론이고 문체도 맛깔나다.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일까,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일까." 작가는 일상적 소재들을 비스듬히 바라본다. 나는 이런 비뚤어진 시선들이 재밌다.
군중 = 개인의 특성을 먹어치우는 괴물
군중 속의 개인과 단독의 개인은 완전히 다른 특성을 띤다. 군중은 개인을 동질적인 떼로 변형시킨다. 평소엔 서로 아는 척 하지 않을 모범생부터 불량 청소년까지 뒤섞인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은 전부 한 방향으로 정렬돼, 일시적이면서도 강력한 하나의 집합적 영혼이 구성된다. 군중은 정서를 공유하고 행동도 통일한다. 군중은 놀라운 힘으로 서로 간 차이를 무력화한다. 개인의 생활 방식, 직업, 성격, 지적 수준과 상관없이 공동의 영혼을 지닌다.
군중의 변덕성
군중은 변덕스럽다. 군중은 쉽게 열광하고 쉽게 화낸다. 쉽게 호감의 감정을 느끼고, 그 호감에 몇 가지 장치만 더해지면 무조건적인 숭배로 변한다. 하지만 숭배의 대상이 조금이라도 기대에서 벗어나면 호감은 반감으로, 숭배는 증오로 바뀐다. 세상에 널린 '빠'와 그들을 까는 '까'는 동일한 군중이다. '빠'와 '까'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군중의 단순성
군중은 단순하다. 단언에 쉽게 물든다. 아무리 비이성적인 단언이라도 반복되면, 군중의 의식은 전염된다. 르 봉의 눈에 '군중'은 존경할 이유가 없는 저급한 집단이다. 르 봉의 애독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기 목적을 위해 군중을 동원할 방법을 <군중심리>에서 찾았다. 히틀러는 르 봉의 군중 비난을 잘 기억했고, 유대인이 아리안족의 순수성을 해치는 악이라고 단언했으며, 이 단언을 온갖 수단을 통해 반복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군중은 곧 계획자의 알리바이
히틀러는 단언-반복-전염을 통해 파시즘에 열광하는 군중을 만들었다. 그들에 의해 조종된 군중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군중을 비난하느라 군중을 기획하고 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비판자는 그들의 또 다른 노리개로 전락하는 셈이다. 군중을 기획하는 사람들은 알리바이로 군중을 내세운다. 그들에게 군중은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막는 총알받이에 가깝다. (-> 극우에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공중은 자신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세력이지만, 군중은 자신들의 악행을 숨길 수 있는 희생양이다.
군중 vs 공중
타르드는 군중이 서로 시사적인 이슈에 대한 공동의 관심으로 연결되고 그로 인해 여론이 형성될 때 공중으로 변화함을 발견했다. 공중은 물리적 광장에 모이지 않는다. 서로 흩어져있지만, 군중보다 정신적 밀도가 짙다. 열광하는 떼거리 군중에 불과했던 소녀 팬들도, 그들이 최애 그룹이 음반심의의 희생자가 되어 시사성의 대상이 되는 순간, 심의의 부당성을 항변하는 공중으로 변화한다. 마트에서 한정 세일 쇠고기를 사겠다고 새치기하던 아줌마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이 시사성으로 등장하면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인터넷에서 토론하는 공중으로 변화한다.
여론 = 의견의 집합체
여론은 특별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의 집합체다. 여론은 민주주의의 결과물이다. 여론은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한 의견이 아니다.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다. 여론은 독재자의 총칼보다 힘이 셀 수 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출현 과정에서 부르주아 봉건장이 수행한 반봉건적이고도 혁명적인 역할은, 밀실에서 만들어진 권력자 개인의 뜻보다 개인들의 의견이 모인 공개된 여론의 힘이 더 강함을 입증했다.
여론의 중요성
피가 원활하게 순환될 때 건강이 유지되듯,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의견의 교환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여론은 자유로운 토론을 먹고 자란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있을 때, 의견은 사회 구석까지 뻗어 있는 모세혈관을 따라 흐를 수 있고, 그렇게 구석구석 흘렀던 피가 다시 심장에 모일 때 여론은 성장한다.
여론의 방해물 '정치권력'
권력자는 자기의 생각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히틀러는 라디오 수신기를 독일의 전 가정에 보급했고,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연설을 했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곳에선 위대한 개인의 의견은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인 여론 따위는 없다. 독재자는 여론 수렴이 아니라 명령을, 토론보다는 연설을 즐긴다.
여론의 방해물 '언론권력'
언론권력의 최대 관심사는 여론 관리를 통한 이윤 창출이다. 이들은 자칭 오피니언 리더를 내세워 교묘히 여론을 관리한다. "대중매체에 의해 선구조화된 동시에 지배당하는 공론장은, 화제와 기고문을 통해 영향력을 쟁취하고 의사소통의 영향력을 조정하기 위해 싸우는 권력화한 투기장으로 성장했다." 여론 조작을 일삼는 이들은 홍보라는 중성적 단어를 택하지만, 홍보의 본질은 연출된 여론이다. 신장개업한 중국집이 홍보 전단지를 돌리듯, 본래 홍보는 사적 개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하지만 홍보의 주체가 국가이고, 그 대상이 국민일 경우엔 다르다. 국가의 여론 연출인 공익광고는 비상업적 광고가 아니라 여론 조작의 세련된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위험하다.
언론 바깥의 공론장
촘스키 <여론조작>은 신문/텔레비전을 통한 구조변동의 한계를 지적한다. 신문의 타락을 언급하기에는, 애당초 신문은 교육받은 부르주아 성인 남성이 지배하는 공론장이었다. 텔레비전 또한 오피니언 리더가 자아도취 연설을 중계하는 미디어지, 여론을 위한 미디어가 아니었다. 텔레비전은 수신기이지 발신기가 아니다. 언론권력은 신문과 텔레비전이 매개하는 공론장을 파괴한다. 공론장은 언론권력의 파괴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생성된다.
근대화 = '표준화' = 효율성 + 예측가능성
햄버거 체인의 모든 것은 표준화돼있다. 점포 인테리어는 어느 지점도 표준에서 어긋나지 않게 통일돼 있고, 메뉴도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동일하며, 같은 가격에 같은 품질을 기대할 수 있다. 햄버거를 만드는 모든 요소들은 예측 가능하게 통제된다. 패티 굽는 시간, 햄버거 포장 방식은 사전에 엄격하게 계산된 방식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요리에 재능이 없어도 몇 시간 교육만 받고 나면 햄버거를 만들 수 있다. 심지어 종업원이 어떻게 손님을 접대할 것인지조차 예측 가능하다. 모든 종업원은 제복을 입으며, 화장/머리길이/장신구 등에 대한 지침을 준수한다. 맥도날드에는 베버가 합리화의 핵심이라 지적한 표준화를 통한 효율성 높이기와 예측가능성이 들어 있다. 이는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 확실성을 보장한다. "뉴욕의 에그 맥머핀은 실제로 시카고나 로스앤젤레스의 에그 맥머핀과 똑같다. 마찬가지로 다음 주나 내년에 먹을 에그 맥머핀은 오늘 먹은 에그 맥머핀과 같을 것이다. 사람들은 맥도날드라면 의외의 제품을 제공받을 일이 없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편안함을 느낀다"
사회 전반의 맥도날드화
맥도날드화는 교육, 노동, 의료, 여행, 여가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준다. 체인망으로 짝짓기하면서 맥도날드화한 성형외과는 어느 지점에서 쌍커풀 수술을 받아도 동일한 수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 유통의 선진화를 내세운 마트는 전국을 체인망으로 만들고, 동일한 마트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든 똑같다.
종업원과 고객 관계 변화
맥도날드화된 커피집이 등장하며 동네 다방은 사라진다. 단골 밥집이라는 개념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패스트푸드점의 또 다른 비인간적 측면은 사람들 간의 접촉을 최소화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종업원과 고객의 관계는 기껏해야 스쳐 지나가는 정도에 머문다. 고객이 식당의 종업원이나 동네 밥집 사장을 잘 알던 시절은 지나갔다."
합리화의 끝에 등장한 비합리적 노동
세련된 국제 수준의 표준화된 간판과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포장까지 화려해졌지만,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의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의 합리화된 외양과는 달리, 그 체인망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고작해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합리성이 빚어낸 비합리성
어떤 프랜차이즈든 개개인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독립 가게를 운영하는 것보다 표준화된 프랜차이를 선택하는 건 더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어이 없는 풍경을 빚어낸다. 도시의 장소감은 사라진다. 프랜차이즈가 장악한 도시의 풍경은 서로가 서로를 복제한 듯 비슷하다. 어느 도시에서나 스타벅스 옆에는 커피빈이, 깁밥천국 곁에는 김가네김밥이,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나란히 영업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가맹점이 늘어선 풍경에서 삶의 다채로움이 빚어낸 지역 특색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과 유동만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쇠 감옥'에 갇힌다.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 이웃일 수 없다.
소비주의 = 우리는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비하도록 만들어진다.
쇼핑은 단순한 경제적 행위 이상이다. 소비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 듯 보여도 그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힘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남 따라 쇼핑 가기, 계획에도 없는 소비하기, 있어 보이려고 물건 사기 등등이 반복된다.
유한계급론 =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
'과시적 소비'란 유한계급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벌이는 과도한 사치다. 중세 귀족의 과시적 소비는 궁정 안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자본주의와 과시적 소비가 만나면 그 효과는 유한계급의 범위를 벗어난다. 상류계급이 강요하는 명성의 규준은 최하층까지 영향력을 확장한다. 각 계급은 자신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에서 유행하는 생활양식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양식으로 여긴다. 공항 면세점, 교외 명품 아웃렛은 늘 붐빈다.
명품 = 자본주의가 승자에게 선물하는 훈장
피라미드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흉내내는 속도보다, 저 높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유행의 스피드가 항상 더 빠르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흉내내기가 반복되면 저 높은 곳의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부자들이 사용하는 브랜드 상품을 '명품'이라 부른다.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셀레브리티 = 상류층 삶 전시하는 살아 있는 마네킹
부자들은 정치인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도, 이 부러움에 근거해 뇌를 장악한다. 그런데 사실 일반 시민은 상류층의 생활 양식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 이때 연예인은 상류층의 삶을 전시한다. 상류층의 '과시적 소비'는 대리인인 연예인을 통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유권자에서 소비자로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1표라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유권자는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축적된 부를 단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만, 소비자로 변화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로 분리된다.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은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바뀐다.
취미 = 직업 이외의 행동
취미는 본래 직업상의 활동이 아닌 인간의 활동이다. 여행 가이드에게 여행은 직업상의 업무이기에 취미가 아니지만, 은행원에게 여행은 직업과 관계없는 취미다. 노동이 생존의 필연성이라는 외부적 조건 때문에 강제된 행위라면, 취미에는 강제성이 없다. 취미는 직업적 의무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활동이기에 몰입과 열광을 만들어낸다.
취향 = 계급의 표식
취향이 기호의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지위를 담는 그릇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어떤 취향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경제적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표식이다. 주말에 골프 치러 필드로 간다는 건 운동을 좋아한다는 기호가 아니라 '돈 좀 벌었다'는 상징이다. 취향의 전쟁터에선 개인들의 기호가 경쟁하지 않는다. 경제적 지위와 학벌이 서로 싸운다. 취향은 개인 특성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적 요인에 의한 아비투스의 결과다.
취향의 유행
취미가 교양인의 표식이라고 믿었던 옛날, 미팅에 나온 남녀의 취미는 한결같이 '고전음악 감상'과 '독서'였다. 예전 사모님의 취미는 자수와 꽃꽃이였지만, 현대의 사모님들은 모두 미술에 조예가 깊다. 1970년대에 취미로 테니스를 치셨던 사장들이 골프로 갈아타자 전국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취향의 차별화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면 대학의 인문학은 외면받아도 CEO를 위한 인문학 강의는 유행하는 역설도 벌어진다. 논리적으로는 유행될 리 없는 취향조차도 유행의 소용돌이에 빨려들면 우후죽순처럼 자라거나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취향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
트렌디한 취향을 구입하면 취향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취향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고 싶은 사람은 내면에 대한 성찰보다 백화점 구경이 더 급하다. 백화점은 판매를 목적으로 잘 고안된 취향의 전시장이다. 백화점에 들러 대세인 취향을 확인하고, 그 취향을 구입해서 자신의 취미로 포장한다. 단 취향을 구매했다는 사실은 숨겨야 한다. 그 취향이 돈 주고 구매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꾼 내면의 흔적인 듯 연출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취미인간
본래 취미는 귀족적 활동이다.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특권 세력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취미인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디지털 시대의 취미인간은 오타쿠, 히키코모리 또는 폐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귀족적 풍모를 지닌 취미인간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들이 디지털 시대의 취미인간임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21세기의 취미인간이 20세기의 취미인간과 동일한 외양을 지니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어리석다.
수치심이란
수치심은 문명이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행동 양식에서 벗어났을 때 울리는 경고음이다. 우리는 매너와 예의범절이 권장하는 행동을 했을 때는 자부심을, 하지 않았거나 못했을 때는 창피함을 느끼도록 프로그램화된다. 수치심은 자기통제를 강화한다. 자기통제의 영구기관인 수치심을 배우는 학습 과정이 바로 '문명화'다.
예시 - 서양식 테이블 매너
누구나 서양식 테이블에 처음 앉게 됐을 때 당황스럽다.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이라는 이름의 곱게 접힌 천 조각,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좌우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 게다가 여러 명이 식사하는 자리라면 물이 담긴 컵이 좌우에 놓여 있는데 어느 물이 나를 위한 물인지 알 수 없어 수치스럽다.
예시 - 궁정예절과 문명화
궁정예절은 귀족들이 벌이는 신선놀음에 가까웠다. 궁정예절을 모른다면 궁정 안 사람들만 창피하지, 궁정 밖 사람들은 창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궁정예절이 18~19세기에 누구나 지켜야 하는 사회적 관습으로 확산되면서, 귀족적 행동에 불과했던 매너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매너를 지킬 때 자부심을, 지키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끼는 문명인에게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방법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소비자본주의와 수치심
소비자본주의는 수치심 자극이 그 어떤 판매 기법보다 효과적임을 알아챘다. 소비자본주의가 확산할수록 대중이 수치심을 느끼게끔 자극하는 영역이 넓어진다. 자연스러운 노화로 여겨지던 이마의 주름이 창피해진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으면 망신스럽다. 주름살과 뱃살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수치를 느끼라는 상업광고,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매너를 가르치는 언론, 선진국 타령을 하는 정치인까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시시콜콜 가르친다.
사소해지는 수치심의 영역
텔레비전 예절학교에 의해 수치심이 끝없이 속류화되면, 수치심의 영역은 점점 사소한 대상으로 축소된다. 우리가 '입 냄새'와 '떡진 머리'와 같은 사소한 수치심에 예민해져 있을 때, '공금횡령' '불법상속' '논문표절' '위장 전입'과 같은 짓을 한 후안무치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속류화된 수치를 가르친다.
역사 = 집합기억
어린아이는 '호국영령'을 만난 적이 없다. 어제 먹은 아이스크림의 감촉은 생생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조차 체험하지 못하는 경험으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기억해낼 재주는 없다. 역사라는 기억은 우리를 국민으로 만든다.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민족의 뿌리를 배웠다. 역사의 한 순간을 기억하는 기념일에 우리는 국가의 희로애락과 자신의 감정이 동조되는 경험도 했다. 국립묘지에서 참배할 땐 무명용사들을 생각하며 슬퍼했고, 겪지도 않은 전쟁이지만 6.25 노래를 부르면 복수심에 피가 끓었다. 광복절에는 나라의 일을 내 일처럼 기뻐했다.
역사 = 과거를 지배하는 장치
벤야민은 역사가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 또한 지배하게 하는 장치로 전락했음을 알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순진한 기대처럼 과거의 모든 기억이 집적되는 저장소가 아니다. '집합기억'은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의 총합일 수 없다. 역사라는 집합기억은 현재가 관장하는 선별의 문을 통과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역사 = 승자의 기록
역사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은 승자다. 패배자는 기록되지 않는다. 승리한 사람은 자신의 승리를 역사가 길이길이 기억하도록, 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탑을 세운다. 하지만 국가 기념일이 빈번해질수록, 승리자가 세운 기념탑이 높아질수록, 기념탑은 '망각'이라는 그림자를 길게 내리운다.
구원의 시선
경제성장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성장이 역사가 진보했다는 증거임을 내세워,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의 희생도, 법에 의한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도 외면한다. 우리는 기억되지 못한 사람들의 무덤가에 있다. 승리하지 못해 기록조차 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적의 수중으로부터 구해냈음을 기념하기 위해 불멸의 탑을 세운들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뒤늦게 영웅으로 추대된다고 그들은 구원되지 않는다.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은 그들을 영웅으로 추대하는 요란한 소동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대한 기억에 있다.
기념 vs 추념
기념일만 되면 애도 능력은 상실했지만, 프로그램화된 공식 역사의 명령에 반응하는 고위 인사들이 기념식 단상을 차지하고서 민족과 역사를 말한다. 영웅을 위한 기념식은 음악과 연설로 시끄럽지만, 애당초 영웅이 될 의도조차 없던 평범한 사람들과 대면하는 추념의 공간엔 팡파르도 없다. 단지 우리가 대면한 그 사람들의 목소리만 나지막이 들린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추념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사람과 마주한다. 기념식엔 승자의 목소리만 가득하지만, 추념에선 과거의 목소리가 망각을 뚫고 메아리친다. 구원의 가능성은 기념식이 아니라 애도에 있다.
세속화
본래 성과 속의 거리는 절대적으로 멀어야 한다. 성(聖)이 절대적으로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준으로 더는 작용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성과 속이 병렬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과정을 세속화라 한다. 세속화된 사회에선 '성(性)스러운 곳' 옆에 나란히 '성(聖)스러운 곳'이 있을 수도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세속적 성공이 종교적 구원 가능성을 밀어내지 않는다고 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성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세속화의 두 형태
세속화는 두 가지 형태로 극단화될 수 있다.
1. 덴마크, 스웨덴처럼 종교가 문화로 용해돼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종교의 전통이 관습으로 살아 있는 경우
2. 종교가 자본주의로 용해되는 경우
종교 = 문화, 전통
종교가 문화로 분해돼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나라, 그래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희한한 정도로 극단적인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나라인 덴마크와 스웨덴을 주커먼은 '신이 없는 나라'라 칭했다.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자가 아니어도 할례를 하듯, 유교 경전을 읽은 적도 없으면서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듯, 세속화의 끝자락에 서 있는 신 없는 나라에서 종교는 그저 전통이 된다. "모두가 함께 물려받은 사회적 유산에 기독교 문화가 포함돼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탄생, 견진, 성사, 결혼, 죽음 등 삶의 의미 있는 통과의례들을 이어주는 통로다."
종교 = 자본주의
종교는 사람들의 '걱정'을 건드리고, '걱정'을 대신해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실적 '걱정'은 많은 경우 자본주의 법칙에서 유래하는데, '걱정'의 원천인 자본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구원'을 약속한다. 종교에서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달렸다면, 종교가 된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돈에 의해 구원된다는 차이만 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종교가 된 자본주의에 의해 구원받으며, 돈이 없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종교가 된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는 자는 빚이 있는 자이고, 빚이 있는 자는 죄를 지은 자이기에 구원에서 멀어진다.
고통을 잠재우는 자본
자본주의는 우리를 신 없는 나라로 데려가지 않는다. 종교를 집어삼킨 자본주의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자본이라는 유일신이 지배하는 성전이다. 자본주의가 종교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신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자본주의의 승자에겐 종교의 전통적 기능이나 인격화된 신 없이도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가능하다. 삶의 고통은 자본의 힘으로 잠재울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자는 세속적 권력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위인전 대신 자기계발서
위인전에는 훌륭한 사람의 스토리가 담겨 있지만, 훌륭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과 동의어가 된 사회에서 위인전은 돈을 향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위인전을 아동문학으로 취급한다. 위인전을 읽고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돈의 힘을 알게 되면 위인전을 덮고 자기계발서를 편다.
자기계발서 장르규칙 (1)
사람은 두 종류로만 구분된다. 한편엔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다른 한편엔 실패한 사람이 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같은 전통적인 분류 대신 인간을 성패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자기계발서 장르규칙 (2)
성공과 실패를 사회학적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성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다. 성공한 사람에게 근면, 몰입, 인내 등의 단어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게으름, 산만함 등의 단어가 할당된다. 사회과학이 아프리카 저발전국에서 스티브 잡스가 등장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건 핑계다.
자기계발서의 역설
자기계발서들은 혁신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혁신의 원칙을 장르의 규칙이라는 관습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는 성공을 보장하는 책이 아니라, 심리적 위안을 선물하는 책이다. 역설적으로 자기계발서의 독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고도 성공한다. 현실 세계에서 성공은 '삶의 태도'보다는 '계급 법칙'을 따르기 때문. 성공하도록 예정된 사람과 실패하도록 예정된 사람이 현실에 가깝다.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일까,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일까.
복지국가 : 동정 vs 공감
동정은 따뜻하지만 위계적이다. 승자가 패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가깝다. 동정의 대상으로 절대 전락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반면 공감은 그 사람을 실패로 몰고 간 실업이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모두에 대한 보편적 위험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동정에선 이따금 불우이웃돕기 모급이나 자선바자회가 열리지만, 공감에선 복지제도가 자란다. 복지국가는 '성공한 소수의 사회'보다는 '성공한 사회'가 공공선에 가깝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개인적 성공은 승용차의 크기와 은행 잔고로 측정되지만, 사회의 성공은 제도화된 복지의 크기와 넓이로 결정된다.
건축물에서 집으로
맥락이 없다면 집 자체는 건조한 단어다. 바람과 비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주는 인공물에 불과하다. 도시는 지번이라는 추상적인 기호의 체계로 건축물이 얽힌 공간이다. 하지만 집과 집이 401호와 402호라는 기의 없는 기표의 체계가 아니라 '누구의 집'이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 순간 집은 단순 건축물에서 생명이 있는 사람의 터전이 된다. 건축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건축물을 집으로, 맥락을 변경시키는 과정을 '거주'라 한다.
집의 편안함
거주자가 텔레비전을 놓고 이부자리를 깔고 조석으로 음식을 하면, 도도한 듯 적응하라고 명령을 내리던 건축물에 거주자의 냄새가 밴다. 콘크리트 냄새 같은 건축물의 재료 냄새를 거주자의 살 냄새가 압도하기 시작하면, 742-1과 같은 지번은 고물상 강 씨네 집이나 슈퍼 최 씨네 집과 같은 구체물로 바뀐다.
집 vs 부동산
부동산은 인간이 주거 터전에 대해, 좋은 집에 대해, 뿌리 뽑힘의 야만에 대해 던졌던 모든 질문을 먹어 삼킨다. 집을 부동산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면 집은 터전이기를 그만 두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마저도 교환가치에 포섭된 존재로 전락시킨다. 부동산이라는 포장지를 쓴 아파트는 시가나 호가로 표현되는 교환가치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아파트에는 주거의 철학도, 좋은 삶을 담는 그릇인 좋은 집이 제공하는 편안함도 담기지 않는다.
자본과 부동산
인간은 정주를 꿈꾸지만, 자본은 정주를 업신여긴다. 자본은 '부동'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자본은 정주하고 싶은 사람의 꿈을 하찮게 여기며 유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자본이 이윤을 쫓아 이동할수록, 거주의 터전에선 막대한 규모로 난민이 만들어진다. 삶의 터전이 재개발 대상 지역에 포함되는 순간,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난민'의 처지가 돼 유랑한다. 부동산 세계의 한쪽 극에는 부동산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극에는 100%를 넘는 주택보급률에도 불구하고 오른 전셋값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이 공존한다.
'좋은 집'
'좋은 집'은 비쌀 필요는 없다. 주택의 가격은 교환가치를 포현하지만, '좋은 집'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안락함과 편안함, 사용가치를 묻는다. 좋은 집을 꿈꾸는 사람들은 시세 차익만을 생각하는 탐욕스런 사람보다는 선하다. 하지만 '좋은 집'에 대한 꿈은 부동산 세계의 극과 극 사이에 낀 중산층의 선한 꿈이다. 자가를 평생 갖지 못한 사람과 경제적 이유로 자신의 집을 떠나 돈벌이를 찾아 유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정주'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적 없는 이들이 부동산 재벌 못지않은 승리자로 보인다.
전체주의
전체주의는 평범한 개인에게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기를 요구하는 괴물이다. 전체주의는 집단화를 강요한다. 집단이라는 범주로 포섭되지 않는, 혹은 포섭되기를 거부한 개인은 위험한 존재다. 전체를 강조하기 위해, 전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별적인 것과 사소한 것을 동일시한다. 개인에 대한 주목은 전체주의의 고발에서 출발한다.
경제적 이기주의
IMF 이후 한국에선 국가가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오직 부만이 나를 보호한다는 교훈이 퍼졌다. 자본은 개인 옹호를 탈맥락화하여, 그것을 개인 간 자유로운 경쟁의 문제로 치환한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경제적 개인주의로 후퇴한다.
개체와 계통
개체(개인)는 계통(집단)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의 가능성은 사회의 가능성과 동일하다. 월급쟁이가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없는 가능성의 차단은 부가 세습되는 사회가 허용하는 가능성의 제한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개인 회사원의 불가능성 속에서 그가 속한 사회가 개인에게 허용하는 가능성의 진폭을 가늠할 수 있다. 개체와 계통의 조우 때문에 우리는 개인에 대한 관심을 모두 개인의 힘으로 알아서 하라는 주장으로 바꿀 수 없다.
개인을 파괴하는 것
1. 득세하는 국가주의
2. 탐욕을 선동하는 자본주의 논리
개인의 구원
개인 구원의 최종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책임을 개인을 둘러싼 사회에 물어야 한다. 개인에 대한 관심은 나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 반복되는 사회라는 커다란 단위에 대한 생각이다. 개인에 대한 관심을 나의 이익이라 착각하는 사람은 개인을 언급할수록 탐욕스러워지지만, 자기 속에서 사회를 생각하는 사람은 개인을 언급할수록 품이 넓어진다.
소속 집합체의 중요성
한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그래서 한 개인에게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뿐만 아니라 집합체를 지칭하는 어떤 일반명사가 따라다니는가에 따라,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인종, 국적 등 한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에 따라, 또 어느 집단이 그 사람에게 '우리'라는 호칭을 허용하는지에 따라 운명은 달라진다. 신중현이 영국인이었다면 폴 매카트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폴 매카트니가 한국인이었다면 신중현일 수밖에 없었을 테다.
패당
패거리(패당)는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무리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급조된, 그렇지만 이익이 보장된다면 매우 강한 연대감으로 뭉치는 무리다. 같은 대학 출신이면 형 동생이 되고 누나 오빠가 되며,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제님 자매님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 이유가 거룩한 믿음도 학문에 대한 열정도 아니라 이익 보장을 위한 멤버십임을 숨긴다.
패당의 조건
1. 패거리는 그 안에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는 사람을 엄격히 구분한다. 구성원이 늘어날수록 패거리끼리 나눠 갖는 이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2. 패거리는 다름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두려워한다. 패거리 내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은 개성이 아니라 동질성이다. 패거리 내에서 개성은 사치이자 위험 요소다. 패거리는 유니폼을 좋아한다.
이웃
이웃한 사람들끼리 만들어내는 무리인 이웃은 패당처럼 당장의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웃은 급조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패당과 달리 형성되면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웃의 조건
패당은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어도 형성되지만, 호혜적인 공동체인 이웃은 정주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대다수가 부동산 유목민인 한국에서 정주할 수 있음은 그 자체로 특권이다. 정주의 명령은 사람이 아닌 자본이 내린다. 부동산 가격을 통제할 만큼의 재산이 없다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허가받은 임시 거주지에 불과하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은 옆집 사람보다 부동산 가치의 동향이 더 궁금하다. 평소 이웃 같지 않던 사람들도 부동산 가격이라는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서로가 필요한 순간이 생긴다. 이렇게 무리 지은 사람들은 이웃보다는 부동산 가격을 사수하기 위한 패당에 가깝다.
아버지
부모라는 호칭을 공유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르다. 가부장제가 힘을 발휘하는 한 아버지는 기성의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에 가깝다. 아버지의 특성은 개인의 특질이라기보단 그가 살았던 시대의 특징에 가깝다. 그래서 아버지를 극복하는 문제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과 연결된다. 아버지 극복은 권위주의에 대한 극복이다.
어머니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보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운명처럼 짊어져야 했던 시대의 이야기다. 서술되고 있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강상중의 어머니일 뿐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모두의 어머니다.
성인 =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사람들은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회적 운명을 뒤집어쓴 채, 괴로워하고 신음하다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전 시대와 대결하는 방법을 깨달으며 성인이 된다. 그래서 성인이 됐을 때, 그 사람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성인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담는 그릇이다.
여전히 가족으로 기억되는 성인들
성인이 돼도 여전히 누구의 아들이나 딸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억세게도 운이 좋은 사람들은 누구의 아들이나 딸인데다가 누구의 손자, 손녀이기도 하다. 이재용이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없었어도 부를 획득할 수 있었고, 박근혜가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이 아니었어도 오늘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나의 부모는 나의 과거
나의 부모는 나의 과거다. 나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 나의 과거인 부모를 미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극복해야 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왜 당신은 이병철과 박정희가 아니었냐고 투정부리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이름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부모의 과거는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다. 부모의 과거가 담긴 상자가 열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부모의 유령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권위주의 국가와 섹스
권위주의 국가는 섹스를 쾌락이라는 욕망과 분리시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재생산이라는 틀 속에 가둔다. 어머니는 무성적 이미지다. 국가의 유지 관리를 위한 생식과 출산을 담당하고 미래의 국가 구성원이 될 자녀들을 자애로운 태도로 돌봐야 하는 어머니와 성욕은 양립될 수 없었다. 권위주의는 여성을 어머니로 칭송하는 방법을 통해 섹스를 도덕화한다.성은 생식의 목적에 봉사할 때만 도덕적이며, 생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은 비도덕적이다.
가족 = 가장 무성적인 공간
남성과 여성이 도덕적으로 섹스가 허용된 부부를 구성하였음에도, 남성이 아버지로 여성이 어머니로 소환되는 한 가족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성적인 공간이 된다. 부부의 침실에 더 이상 섹스는 없다. 섹스리스의 공간이 돼 버린 부부의 침실은 내밀한 공간이 아니라, 노크도 없이 누구나 들락거려도 괜찮은 방이다.
가족 바깥 = 섹스를 탐닉하는 세계
가족이 섹스리스한 공간이 될수록, 가족 외부의 공간은 섹스를 탐닉하는 어두운 밤의 세계가 된다. 낮의 세계는 포르노도 금지되고 간통도 형사처벌되는 엄격한 도덕이 지배하지만, 밤이 오면 도덕은 사라진다. 밤의 세계에서 섹스는 애정의 표현도 생식의 수단도 아닌 거래 대상이다. 오르가슴은 권력과 돈을 따라 움직인다. 밤의 세계에서 가족 호칭을 벗었던 사람은 새벽녘엔 다시 가족 호칭을 걸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부모 세대 vs 자녀 세대
부모들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쾌락이 억압되며 불안의 성장기를 거쳤다면, 그들의 자녀는 일상화된 욕망으로 인한 불안에 시달린다. 그들 부모에게 혼전 성 경험은 결혼을 보장하는 보험과도 같았지만, 그들의 자녀에게 섹스는 어떠한 관계의 안정성도 보장해 주지 않는 장치에 불과하다. 섹스를 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는 세대, 섹스가 곧 결혼 약속이 아닌 시대의 사람들에게 섹스는 일상적인 요소가 된 것만큼이나 관계의 지속성 불안을 유발하는 근심거리다. 성욕은 기본적으로 휘발적이다. 성욕과 연애 감정이 섹스라는 행위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조우하지만, 오르가슴의 순간은 불행히도 지속될 수 없다. 모든 폭발적인 것은 동시에 휘발적이다.
섹스란
어떤 사람에게 섹스는 여전히 말로 언급할 수 없고 승화되어야만 하는 비합리적인 충동의 영역이고, 누구에게 섹스는 권력을 확인하는 도구이고, 누구에게 섹스는 관계의 안정성조차 보장해 주지 않는 휘발성의 영역이다.
자살률과 '사회적 사실'
한 사회의 자살률이 변동한다는 건 집합적 힘이 개별 자살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살은 개인적인 현살이지만, 자살들의 관계인 자살률 앞에는 '사회적'이라는 형용사가 생략돼 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개인을 몰고 가는 외부의 힘을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이라 불렀다. 개별 자살의 동기를 찾기 위해선 유서를 살펴야 하지만, 자살과 자살의 관계가 빚어내는 집단적 경향을 찾으려면 '사회적 사실'을 끄집어내야 한다.
한국의 자살률
1987년 한국의 자살률은 19.67명이었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자살률은 극적 변동 없이 일정 수준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1997년 19.69명이던 자살률이 1998년 돌연 26.69명까지 치솟았다. 1997년 5.8퍼센트였던 경제성장률이 1998년 -5.7%로 추락했다. 만약 자살률이 마이너스 성장 때문이라면, 경제 성적표가 좋아지면 자살률이 낮아져야 한다. 하지만 1998년 이후 한번 높아진 자살률은 경제 성적표와 상관없이 고공 정체중이다.
한국의 '사회적 사실'
1990년대에 학습하고 IMF 관리체제를 통해 복습한 부자 되기에 대한 물신적 집착이 한국을 지배한다. 높은 경제성장률이 빈곤은 치료하지만, 아노미적 상황에서 자란 박탈감은 치료하지 못한다. 부자 되기에 대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좌절의 강도도 커진다. 돈 벌기가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사회, 이유는 모르는 채 경쟁해야 하는 사회, 승자는 있는데 명예는 처박힌 사회는 아노미를 앓는다. 아노미란 '한계를 모르는 열망이 목표를 잃은 경우'다.
한국의 현재
알코올 중독의 원인은 술 권하는 사회이며 자살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불행이다. 경제성장률의 상승이 삶의 만족감과 만나지 못한다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아노미의 조건이 된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만연한 병든 사회에서 아노미적 자살은 줄지 않는다. 자살률이 세계 1위에 도달해도 심각성을 따지지 않던 언론은 유명인이 자살하면 그때서야 '베르테르 효과'를 입증할 자살들을 찾아낸다고 요란을 떨고, 전문가에게 자살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살을 개인의 비극으로만 해석하면 해결은 요원하다.
<칸트의 교육학 강의>
칸트에게 계몽이란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칸트는 그 가능성을 배움에서 찾았다. 교육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자 선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과정이다. 배움에 관한 한 한국은 지표상으로는 부러워할 만한 나라다. 우리 학생들의 학업 능력은 OECD 국가최상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사람 중 읽고 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작 1.7%다. 대학 진학률은 어마어마하게 높다
더럽혀진 배움
성장이 성숙을 낳고 배움이 인격을 낳는 비율을 성숙률이라고 계산한다면, 한국은 OECD 최저일 테다. '유식'과 '교양'이, '성장'과 '성숙'이 결합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배움은 출세의 수단으로, 돈벌이를 위한 미래 투자로 더렵혀졌다. 부모는 배움을 통해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해 입신양명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며, 국가의 통치자는 배움을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한갓 도구" 정도로 생각한다.
'성장 물신성' 사회
진선미라는 단어로부터 성숙한 배움이 아니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수를 부르는 호칭만을 기억해내는 사회에서 철학자의 모습은 고리타분하다. 해밀턴은 시험점수, 경제성장률, 소득 등 양적 팽창에 대한 묻지마 숭배를 성장 물신성이라 불렀다. "경제성장이라는 관념은 이제 사람들을 홀리는 망상으로 둔갑해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를 조직하고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망상 체계로 진화했다."
성장 vs 성숙
양적 팽창에 불과한 '성장'이 '성숙'을 대체해 삶의 목표가 되는 사회에선, 배움조차 성숙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수단이다. 배움은 스펙의 도구로 전락했다. 모두가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도 승진을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지식사회의 외양은 갖췄어도 성숙이란 목표를 잃은 사회에선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
성장과 성숙이 불일치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위인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을 길러낸다. 배우지 못한 장발장은 촛대나 훔칠 뿐이지만, 배운 괴물들은 그 좋은 머리로 금융 사기를 치고, 주가를 조작하고, 분식회계라는 속임수를 쓴다. 횡령, 배임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무학이 아니다. 그 유탄을 맞은 개미투자자들이 자살을 해도 배운 괴물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다.
근대화 이전 vs 근대화 이후
근대화 이전엔 기술의 부족 때문에 위험했다. 강을 통제할 공학기술이 없어 홍수로 사람이 죽었고, 병균을 다스릴 의학 기술이 없어 호환마마가 무서웠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불안은 기술적 진보로 발생한다. 다이옥신과 전자파는 '부의 사회적 생산에 위험의 사회적 생산이 체계적으로 수반'되며 발생한다. 위험은 기술을 먹고 자란다.
저발달 사회 vs 고발달 사회
저발달 사회에는 원자력발전소도 없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로 인한 위험은 저발전국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소는 기술의 선진국에서나 나타나는 기술 합리화의 표상이다.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공통점은 회복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남긴, 과학 선진국에서 과학이 빚어낸 위험이라는 점이다.
일상화된 위험
실험실에서의 잘못된 계산은 전문가의 명성과 관료들의 정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만, 모든 걸 통제하고 계산한 결과가 틀렸음이 드러나는 순간 실험실 바깥 사람들은 명성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받는다. 방사능이 함유된 비를 맞고, 기준치 이하지만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과학자가 안전을 입증했다는 물을 마시는 일은 우리의 일상이다. 위험 앞에선 계급도 국경도 인종도 성별의 차이도 의미 없다. 위험이 벌어진 '그날 이후' 모든 인간은 위험에 동시 노출된다.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희한한 방식으로 근대화 끝자락에서 실현된다.
위험의 근본 원인
위험은 깊은 곳에서 자란다. 위험의 생산자는 정신줄을 놓은 관리자의 태만도, 설계상의 실수나 예측하지 못했던 돌발변수도 아니다. 위험은 우리를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에, 인간이 좀처럼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산업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제약의 체계"에 따라 돌진하는 근대화의 논리 속에 잉태된다. 위험을 생산하는 과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없다.
위험 인식을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
<위험사회>가 제시한 해법은 공포 조장이 아니라, 위험 인식을 방해하는 관료제를 교정하는 것이다. 때로는 위험의 생산자인 과학보다, 위험의 인식을 방해하는 관료제가 더 무섭다.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성이 화제가 됐을 때, 안전하다고 되풀이하는 관료를 향해 촛불시위라는 시민 참여형 직접민주주의가 등장했다.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메시지, 지역 개발 업적을 내세워 재선을 노리는 정치인, 위험 인식을 막기 위해 애쓰는 관료를 경계해야 한다.
죽음을 구경하다
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죽음을 보도한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에서 폭탄 테러의 희생자,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매일 죽음을 접한다. 뉴스가 보도하는 죽음은 일기예보만큼이나 일상화됐다. 죽음을 듣고도 마음속에서 동요가 일지 않는다. 평범한 죽음은 시청자의 눈을 끌지 못한다. 비극적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관음증적 응시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건 오늘의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이들이 촘촘하게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구경할 수 있다. 구경거리로 전락한 인간의 죽음은 산 자들이 거실에서 누리는 최대 사치다. 미디어를 통해 중계되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기에, 죽음의 축적을 보고도 무덤덤하다. 그게 관음증이다. 관음증적 응시는 응시의 대상과 자신과의 연루를 알지 못한다."
죽음의 각본
현대 사회의 모든 일들처럼 죽음의 순간조차 그 기능을 위해 특별히 전문화된 사람들의 손에 맡겨진다. "시신의 처리와 묘지 관리는 대부분 가족, 친지, 친구의 손을 떠나 돈 받고 일하는 전문인의 손에 맡겨져 있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장례식은 장의사가 각본을 쓰고, 유족들은 각본의 지문대로 따라 움직이는 연극과 다를 바 없다."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직 눈에 선한데도 그들에게 시신과 묘지는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
죽음의 불평등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질병은 인간 유한성의 증거이지만, 사회학적 대상으로서의 질병은 계급 유한성의 지표다. 죽음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죽음에 다가가는 방법은 당신이 어느 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죽음의 리얼리티는 철학적 죽음과는 달리 불평등의 법칙을 따른다. 더 많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이 벌수록 심장마비와 뇌졸중, 당뇨 그리고 각종 암으로 죽을 가능성이 적다. 만성질환을 일으키는 위험 요인은 저학력층에게 더 흔하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재촉하는 병을 예방할 수 있는 자원도 방법도 잘 모르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최대한 유예할 수 있는 온갖 정보와 유예를 돕는 전문가들에 둘러 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