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상.
딸아이를 학교 정문 앞에 내려주고
차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순간은 늘 따뜻했지만,
그날 아침은 달랐다.
담임선생님의 전화 한 통이
내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어머니,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분명 아침에 정문에서 배웅했는데,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딸아이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걸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문자에 답도 없었다.
근무시간이라 사무실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속이 타들어 갔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담임선생님께서 다시 전화를 주셨다.
“다행히 아이가 등교했어요. 여전히 이유는 말을 않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런 일들이 잦아졌다.
딸아이는 수업시간에 자리를 비우거나
학교생활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전화벨만 울려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머리가 하얘지며 속이 울렁였다.
부모로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다행히도,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은
누구보다 따뜻한 분이셨다.
매일 아침 교문까지 나와
딸아이의 등교를 직접 챙겨주시고,
아이의 상태를 세심하게 알려주셨다.
그분의 헌신 덕분에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딸아이가 이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난 건,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찬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사설 상담센터, 시에서 운영하는 상담기관,
여러 문을 두드려봤지만
딸아이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열심히 일하며 경제적 안정을 이루면,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남들처럼 뒤처지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오히려 딸아이의 내면을 읽지 못한
무지함으로 돌아왔다.
나는 눈물만 많은, 무기력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딸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차에 올랐다.
늘 그랬듯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딸아이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고 앞만 바라보았다.
그때, 딸아이가 조용히 입을 뗐다.
“엄마, 엄마가 걱정하는 것만큼은 아니야.
괜찮아. 조금 있다 제자리로 돌아올게.”
그 순간, 처음으로 드러난 딸의 진심이
내 마음을 스쳤다.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밑바닥까지 내려갈 것 같았던 나와 아이의 인생에
한 줄기 작은 빛이 비친 순간이었다.
큰아이가 다섯 살, 작은아이가 두 살이던 그때,
IMF로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나도, 아이들도 많은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남편은 현실을 도피한 채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그 공백은 아이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을까?
늘 바쁜 엄마 때문에 외로웠을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며 쌓인 외로움과 분노를 표출한 걸까?
가족여행 한 번 없이,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초조한 모습만 보여준 엄마.
아이들 마음속엔 진흙 같은 상처만
가득 쌓여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좀 더 좋은 우유를 먹이고,
조금은 괜찮은 학원에 보내고,
평범한 브랜드 옷과 신발을 사주고 싶었다.
경제적 안정이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아이들의 정서적 문제는 그다음이라 여겼다.
하지만 꽃인 줄 모르고,
정성 없이 그저 크기만 바랐다.
부모가 처음이라,
아이들이 금방 자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사춘기를 지나 부모가 되는 여정의
네 번째 장이다.
딸아이의 불안정한 학교생활과 그 속에서 흔들리는
부모의 마음을 담으려 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희망의 빛을 따라 조금씩 나아가는
우리 모녀의 발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