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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n 05. 2024

정리

"그렇게 좋아?"

큰애가 물었다. 내가 웃고 있었나?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분명 웃고 있지 않았는데. 딱히 좋아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책장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큰애가 그렇게 물어온 거였다.


"응 좋아."

진짜다. 좋다고 말하고 나니 진짜로 더 좋았다. 얼마만에 '내 것'인지. 만족스런 표정으로 한참을 더 그 앞에 서 있다가 내 할일을 하러 갔다.


그것은 '책장'이었다. 지난 일요일 밤, 6단 책장을 조립했다. 책장이나 수납함 정도야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골이 날 만큼 많이 조립해 보았는데, 그래도 키가 160센치도 안되는 내게 높이 173센치의 책장을 조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법이 어려웠다기보다는, 생각보다 높이가 높고 무거워서였다. 전동드라이버가 있었지만 너무 밤늦은 시간이라 육각렌치로 40여개의 나사를 일일이 돌려끼운 것도 한몫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시작한 책장조립은 1시 20분이 좀 넘어서 끝이 났다. 그리고 다음날 밤엔 흩어진 책을 정리했다.


6년 전, 둘째 출산을 앞두고 집을 정리하며 창고방에 있던 내 책은 모두 버렸다. 정말로 버리기 아까운 것들 몇 권은 남겨 두었지만, 4년 전 아이들과 집을 나오면서는 그조차도 다 내버렸다. 중고서점에 가져갈 힘도 없고 누구에게 나눠줄 여유도 없어서 그냥 업자를 불러다가 폐지값만 받고 팔았다. 못해도 200권은 되었을텐데, 그 값으로 받은 돈은 고작 8천 몇백원이었다.


서재가 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서재(書齋):서적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 해가 잘 들고 커다란 화분이 한두개쯤 있는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어른의 뒷모습. 아주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품어온 로망같은 거였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책읽는 어른도 글쓰는 어른도 없었고, 나는 어릴 적에도 크고 나서도 서재는 커녕 내 방 한 칸도 가져볼 수 없었다. 집은 터무니없이 작은 곳에서 조금씩 큰 곳으로 옮겨갔지만, 방은 늘 식구수에 비해 두세개는 모자랐다. 언니와 같이 쓰던 방 한구석에 어렵게 자리를 마련해 좋아하는 만화책과 잡지, 소설책을 모아두기도 했는데, 어느날 보면 싹 버려지고 없었다. 엄마의 기분이 특히나 좋지 않은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텅 비어버린 작은 공간을 애써 외면한 채, 뒤에서 들리는 '돈이 썩어빠져서 얄궂은 거나 사재끼는 가시나' 라는 말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제 공간이 없었기에 내 책들은 늘 짐이었다. 이고지고 살다가 결국엔 버려질 짐. 그래서 사지말고 빌려보자 마음먹었지만, 너무 갖고 싶은 책들은 어쩔 수 없었다. 읽고 난 책들은 여기저기 쌓였다. 티비에서 보면 구석구석 책이 쌓여있는 집이 멋있게도 보이던데 현실은 너저분할 따름이었다. 물려받은 아이들 책까지 누적되어 집은 치워도 치워도 지저분했다.


얼마 전, 음을 먹고 아이들이 아주 어릴때 보던 책들을 싹 정리했다.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있어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같이 일어나 책을 묶어 문밖에 내놓고 들어오는데, 아이들 책 옆에 기대어 쌓여있던 내 책들이 보란듯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물기없는 모래산이 쓸려 내려오는 것처럼 조용하고도 건조한 무너짐이었다. 어떻게 들어가 쌓였는지 모를 먼지들이 책 사이사이에서 빠져나와 폴폴 날아다녔다. 순간, 그 장면이 꼭 내 삶의 어떤 부분처럼 느껴졌다. 잠깐 사운드가 꺼진 채 그 부분만 페이드인 되는 듯 묘하게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아무곳에나 아무렇게나 쌓이는 나. 구석구석 먼지가 앉은 채 점점 잊혀지는 나. 너저분한 채로 겨우 살고 있는 나. 기대어 섰는 뭔가가 사라지면 소리도 없이 스르르 무너져 내릴 나. 남는 것이라곤 폴폴 날아올랐다가 곧 떨어질 먼지 몇 톨. 나도 저렇게 될까. 나는 대체 어느 구석에, 어떤 모습으로 쌓이고 있는걸까.


그 날 바로 책장을 주문했다. 저렴한 가격에 완제품을 집안까지 배송해주는 가구업체 물건도 많았지만, 굳이 다음날 바로 오는 조립식 책장을 주문했다. 굳이 그 밤중에, 굳이 손끝이 빨갛도록 힘주어 나사를 돌려가며 책장을 만들었다. 내 책장을.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을 모아 차례차례 꽂았다. 공간이 부족해 깨끗한 것들은 중고서점에 팔려고 따로 빼두었다. 꽂아두고 보니 초록색 책등이 특히 예뻐보여서, 유치하지만 색깔별로 모아 한번 더 정렬을 했다. '예쁘네... 좋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한참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난생 처음 나만의 책장. 가로 800, 세로 300, 높이 1750mm의 내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야말로 '내 공간'이었다.


일어나서 한 번, 지나가다 한 번, 청소하다 한 번, 잠들기 전 한 번, 수시로 멈춰서 책장을 쳐다보았다. 랜덤 뽑기처럼 아무 책이나 뽑아 아무 장이나 펼쳐들고 한 구절 읽어보기도 했다. 아마 그런 내 모습에 아이는 물었을 것이다.

"엄마, 그렇게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도 웃고 있었다는 걸 아이는 알까?


"응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예뻐."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아이는 며칠 전 모루철사를 꼬아 만든 노란 꽃화분 하나를 책장에 얹어주었다. 축하 선물이라고 했다. 작은애도 질세라 직접 만든 그림액자를 갖다주며 책장 생긴 걸 축하한다고 했다. 꼭 앞으로 번성하라는 개업선물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다가 아무데나 처박혀 죽고 싶진 않다. 꽂아놓으니 저렇게 예쁘고 다정한 것들이, 나를 울고 웃게 하고 버티게 해주었던 고맙고 귀한 것들이, 내 무관심 속에서 폐지처럼 버려지고 있었다는 것이 미안다. 내게도 분명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지만 차근히 챙겨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면이 하나쯤은...


잘 정돈된 책장을 보면서 이제는 나도 나를 찬찬히 챙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잘 정돈해 넣을 수 있는 작은 장 하나짜는 걸 이 생의 숙제로 여기고, 여기저기 흩어진 채 나뒹굴고 있는 나를 하나씩 모아한다.

before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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