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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17. 2024

매우 초록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다음번 겨울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자주 변화하는 초록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막 돋아나는 여린 연두도 좋고, 농익어 물드는 노랑이나 빨강도 좋지만, 그래도 오뉴월의 초록만큼은 못하다. 칠팔월의 초록은 너무 짙어서 좀 무섭고 지금이 가장 좋다. 지난 며칠의 사진첩에는 아이들 사진보다 초록 사진이 더 많았다. 아이들은 이제 좀 컸다고 사진찍는 나를 마구 노려보기도 하고 표정을 구기며 휙 뒤돌아서기도 한다. 그럴 땐 드러워라, 하고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근처의 초록을 찾아보는 것이 모두에게 여러모로 더 낫다. 그렇게 아낸 초록을 보고 있으면 눈이 환해진다. 마음도 좀 나아지고. 해마다 한번쯤은 나도 깨끗한 초록일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한없이 초록의 냄새를 풍기며, 나도 그 풍경의 일부인 것처럼. 사방이 초록인 곳에 잠깐이라도 머물며 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어쩌면 이건 내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본능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초록 가득한 오월에 낳아주었으니까. 초록의 한가운데 나를 떨궈주었으니까. 초록. 초록. 매우 초록. 이 글의 제목은 사실 화가이자 작가인 노석미님의  책 제목이다. 책의 앞날개 작가 소개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산이 보이는 정원이 딸린 작업실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고양이 씽싱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나는 게으르고 도시와 아파트의 편리함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고, 고양이고 텃밭이고 그림이고 글이고 아무것도 일궈낼 줄 모르지만. 그래도 한동안 그 문장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행간에 숨겨진 생활의 고단함은 애써 모른 척 한 채 읽고 또 읽고 상상하고 또 상상해 보았다. 불필요한 소음없이 초록으로만 가득한 풍경을. 그에 반에 나의 생활이란 너무 소란스럽다. 초록과는 거리가 멀다. 눈 뜨는 순간부터 너무 많은 것이 몰려든다. 하루도 쉬지않고 달려든다. 제대로 소화시킬 수 없어 매일매일 체할 것 같은 날들을, 가끔 눈에 걸리는 초록으로 위안삼으며 겨우 삼켜내고 있다. 그래서 더 고마운 초록. 뻐서 아까운 오월의 초록. 늘은 초록이 가득한 꿈을 꾸고 싶다. 나 속이 다 비치는 투명한 사람이 되어, 초록 속을 같이 일렁이는 꿈이면 더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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